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76
076
테오도러스는 저 여인의 위명을 익히 알고 있었다. 금화만 쥐여준다면 황제도 죽일 수 있다는 암살자.
거리가 있어도 승산을 장담하기 어려운데, 코앞에 있다면 저항 자체가 무의미하다.
“최소한 운에 기대보기나 해. 기껏 기회라도 줬는데, 놓치면 아깝잖아.”
섣불리 행동할 수 없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마력을 움직였다간 곧장 몸이 조각날 거다.
큰 소리를 내려 목에 힘을 주는 순간, 즉각 칼날이 파고든다.
늙은 마법사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는데 그간 쌓아온 경험과 지식조차 무의미하고, 운에 기대어야 한다니.
테오도러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무력감에 휩싸였다.
반면에 일그러진 표정을 들여다보는 여인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완전히 가지고 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치렀던 대가가 얼마나 막심했던가. 비단 마탑 내에서의 투쟁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미치는 억압까지도.
“짝수에 걸겠다.”
히죽 웃은 라노가 주사위를 집어 들었다.
“반반이야.”
손을 말아쥔 그녀는 힘껏 주먹을 흔들다가, 책상 위로 튕겼다.
주사위가 제자리에서 팽이처럼 돌아간다. 점점 속도가 느려질수록, 테오도러스의 입이 바짝 말랐다.
간단한 주문을 쓴다면 원하는 숫자가 나올 수 있도록 조작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그녀 앞에선 무의미하다.
테오도러스는 목덜미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예기에 몸서리쳤다.
달그락.
6.
라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
주사위를 바라보던 테오도러스의 동공이 확장되었다가, 급격히 가라앉는다. 그는 가늘게 한숨을 흘렸다.
휘파람을 불자 모습을 감추고 있던 비수들이 그녀의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안도하는 테오도러스를 향해 라노가 읊조렸다.
“박쥐처럼 굴 거면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가, 아니면 우리한테 고개를 조아리던가. 확실하게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녀는 단검을 거머쥔 채로 덧붙였다.
“다음번엔 피차 얼굴 보는 일 없도록 하자고. 이 좆같은 탑은 계단도 많아서, 오르내리기 힘들어 죽겠으니까.”
문고리를 잡으려다 그녀는 문득 책상 위의 주사위를 가리켰다.
“아, 그건 잘 챙겨둬. 목숨을 건져준 행운의 주사위잖아?”
입술을 훑은 여인은 서슴없이 방문을 나섰다.
마탑의 복도를 거니는 이들은 하나같이 긴 망토를 걸친 반면, 가죽조끼에 바지를 입은 라노의 복장은 이질적이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는데, 태연히 지나가던 이에게서 버찌를 뺏어 먹기도 했다.
입을 우물거리던 라노는 반대편 문 앞에서 걸쇠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문고리에 대고 이리저리 맞춰보던 그녀는 입맛을 다셨다.
연신 달그락대는 소음만 울려대다가 안쪽에서 철커덕, 금속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슬그머니 안쪽으로 들어선 라노가 재차 걸쇠로 문고리를 돌리자, 꿈틀거린 문이 녹아내렸다.
그녀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흥. 아주 철두철미하네.’
말하는 거로만 봐선 당장에라도 팽할 것처럼 굴더니, 제법 보안이 삼엄한 곳에 보내놨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탑의 상층부에서 거닐던 라노는 순식간에 구금실에 도달했다.
‘그래도 내가 못 여는 문은 없지.’
과연 위쪽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리, 이곳엔 변화를 눈치채는 녀석들이 있었다.
발갛게 이글거리는 불꽃의 사슬이 허공에 드리워진다.
쩌엉!!
곧바로 문짝을 두들긴 주문이 사방에 흩어졌다. 철로 만들어진 문이 녹아내릴 정도로 강한 화력.
손을 거둔 마법사가 중얼거렸다.
“놓쳤어.”
“경보가 왜 안 울렸지?”
의문을 품는 마법사의 발치에서 그림자가 천천히 기어오른다.
“처음 보는 권능이다. 마력의 기척도 없고.”
최대한 불을 일으켜 그늘을 밝혔지만 드러난 곳에 아무것도 없었다.
구금실에 지글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진다.
“보이지 않는 놈이라.”
미간을 좁힌 마법사가 동료를 돌아봤다.
“사역마를 내보내. 구금실에 침입자가 있다고.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왔는진 모르겠지만, 수호정령이라면 볼 수 있―”
웬 그림자 같은 형체가 목에 침을 꽂아 넣고 있었다. 그는 말을 잇기도 전에 실 풀린 인형처럼 쓰러졌다.
“정령들은 반칙이지. 걔넨 디텍터 있잖아. 난 은신 원툴인데.”
어깨를 으쓱인 라노는 마법사들을 지나쳐, 철창 앞으로 향했다. 그녀는 앞에 쭈그려 앉아 인사를 건넸다.
“안녕? 카리나라고 했던가.”
미소짓는 라노를 향해 카리나가 물었다.
“저도 죽이러 온 건가요?”
“아, 쟤네? 죽인 거 아냐. 난 무조건 돈 받아야 죽여. 아마 계속 저렇게 누워있다간 입 돌아가겠지만, 그 전에 누가 알아서 깨워주지 않을까. 아님 말고.”
경박스러운 말투. 과장된 움직임.
무게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카리나는 뱀 앞에 선 쥐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난 말을 전하러 왔을 뿐이야. 나도 필요 이상으로 여길 들쑤시는 건 원치 않아.”
“이미 충분히 들쑤신 것 같은데요.”
입에서 버찌 씨를 뱉은 라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내가 들쑤시는 정도면, 몇 명 기절하는 정도론 끝나지 않았을걸. 한번 내기해볼래?”
“···아뇨.”
“마법사들은 왜 이렇게 내기를 싫어하는지 모르겠네. 내기도 안 해, 주사위 놀이도 꺼려, 카드도 안 치고. 너희는 뭔 낙으로 사는 거니? 이해를 못 하겠다. 난.”
목숨을 가지고 놀이쯤으로 치부하는 태도.
‘미친년.’
쾨흘링 분쟁에 유력 제후들이 끼어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설마 마탑 내부를 가볍게 휘저을 만한 괴물을 이렇게 보내올 줄은 몰랐다.
“너한테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 대답만 잘해주면, 아무 일 없을 거야.”
품에서 성냥을 꺼내든 라노는 태연히 파이프에 불을 붙이곤, 연기를 뱉었다.
대번에 얼굴을 구긴 카리나의 눈동자에 경멸 어린 빛이 맺혔다.
마주 보던 라노의 입꼬리가 꿈틀댔다.
‘생각보다 제법···.’
나쁘지 않은 기분인데.
까칠해 보이는 눈꼬리가 나름 취향이다.
당장에라도 험담을 퍼부을 듯한 표정이지만, 실력의 격차 때문에 애써 분을 억누르려 필사적인 모습이라니!
반응도 톡톡 튀는 게, 딱 봐도 놀려먹는 재미가 다분해 보인다.
여기가 마법사들의 탑이라는 게 애석할 따름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라노는 품에서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이거, 네가 쓴 거지?”
해골들과 시체가 일어선 광경을 묘사한 일지.
카리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 사령술사라는 녀석 말이야. 개인적으로 흥미가 있어서 그런데.”
카리나의 그림자 속에서 단검이 아른거렸다.
“어떤 녀석인지 좀 알려주라. 응?”
///
자꾸만 귀가 간질거린다.
‘어디서 누가 험담이라도 하나?’
아무래도 지난 행적을 돌아보면 자신을 곱씹을 만한 인간이 원체 널리지 않았나.
선착장에 제일 먼저 발을 디딘 이스라는 여지없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역시!! 기사라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무릇 바다는 뜨내기 해적이나 비겁한 약탈자 놈들 따위나 도망치는···】
파멸의 기사로 거듭나면서 뱃멀미는 덜해졌는데, 여전히 배가 요동치는 특유의 감각은 질색한다.
뒤이어 내린 쇠렌이 말했다.
“제길, 거의 몇 년 만에 돌아온 기분이구만. 이 고약한 동네 냄새가 그리울 줄이야.”
토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들이켰다.
“마찬가지입니다. 스칼바냐르는 아무래도 공기가 청정해서 그런지, 이런 도시 특유의 정감 넘치는 흥취가 살짝 부족하더군요.”
정작 뒤따르는 산시아는 묘한 표정이었다.
이 오줌 지린내 가득한 도로와 시궁창에서 풍기는 악취, 어디서 정감을 찾을 수 있다는 걸까.
“그래서. 토드. 이제 자네는 어쩔 작정인가.”
피에트의 물음에 토드는 주변을 돌아봤다.
“당분간은 판가우에 머무르면서, 연구나 좀 해야겠습니다.”
“연구를 한다면 공간이 필요할 텐데.”
“아무래도 작업장을 마련해야겠죠. 판가우 정도라면 거점을 세우기엔 적합해 보여서 말입니다.”
판가우는 온갖 음험한 자들의 온상이다. 혹자는 판가우를 가리켜 인간쓰레기들이나 모여드는 하수구라며 비아냥대지만, 토드 같은 사령술사가 자리를 펴기엔 이보다 안성맞춤인 곳이 없었다.
거기서 돈 냄새를 맡았는지, 쇠렌이 헛기침했다.
“흠흠, 작업장을 차리겠다면 건물이 필요하겠구만. 사령술사 양반.”
돌연 수레에 싣고 있던 관이 거세게 요동쳤다.
“예. 아무래도 평범한 장소는 안될 것 같습니다. 제 특성상,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고, 은밀히 거동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군요.”
쇠렌이 히죽 웃었다.
“내가 그런 곳은 또 기가 막히게 잘 찾아내지. 원한다면 오늘 안에 바로 빈 건물을 매입할 수도 있을 거요.”
“자네한테 그럴 만한 수완이 있었나?”
“거, 영감. 속고만 살았나. 내가 장물아비 일 하면서 닿은 인맥이 있다고. 판가우에서 금화 한 닢이면 구할 수 있는 집은 쌔고 쌨어.”
손바닥을 비빈 그가 입맛을 다셨다.
“다만 집값이 싼 곳은 대체로 하자가 있기 마련인데. 괜찮겠소?”
“흠. 아무래도 시신을 안치해야 할 것 같은데, 습기가 심하거나. 온도가 지나치게 높은 곳은 지양했으면 합니다.”
문제 될 게 없다는 듯, 쇠렌이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런 건 문제도 아니오! 근데, 워낙 여기가 험한 동네다 보니까. 좀 안 좋은 소문이 도는 건물들이 있지.”
“가령 어떤 경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음··· 원래 여기가 허허벌판이었소. 그래서 밀수꾼들이나 해적들이 오가다가 반란을 일으킨 놈이나 배신자, 맘에 안 드는 놈 멱을 쳐서 오크통에 담근 다음, 버리고 가는 곳이었거든.”
치를 떤 쇠렌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가끔 집이나 공터에서 목 없는 귀신이나 꿈에 악령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오. 대개 값이 싼 곳은 그런 집들이야.”
그러자 토드가 활짝 웃었다.
“영가가 출몰한다고요? 오히려 좋습니다. 당장 안내해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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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하룻밤 여관에서 묵은 토드는 쇠렌을 통해 외진 골목에 있는 터를 안내받았다.
“여기서 넉 달 전에 귀머거리 발루크가 죽었다더군. 그 작자도 칼밥 좀 먹은 용병이었는데, 자기는 영혼이니 그런 걸 안 믿는다면서 호언장담을 했다고 들었소.”
가택 근처에 온 것만으로도 오싹한 기분이 드는지, 쇠렌은 자신의 팔을 훑었다.
“중개업자가 얼마를 부르던가요?”
“은화 스무 닢에 한 달. 어차피 그 이상은 못 버틸 테니, 단기 계약으로 하자더군.”
“흠··· 저는 이곳이 나름 마음에 드는데요.”
가택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주변에 인기척이 드문 변두리에 있는 탓인지, 이제 막 해가 저무는 참이었음에도 벌써 일대에 으슥한 기운이 감돌았다.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이런 곳에서 살려고 하진 않을 거요. 차라리 웃돈을 들여 빈민가 쪽에 사는 게 낫지.”
【하, 하! 하. 쇠렌. 아직도 자네는 사령술사가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이스라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일단 들어가 봅시다.”
그러자 질색한 쇠렌이 뒷걸음질 쳤다.
“나, 난 여기 있겠소.”
“어허, 쇠렌 씨. 엄연히 당신을 통해 중개업자와 대리 계약을 진행하는 게 아닙니까. 당신도 대리인이라면 엄연히 손님이 매물을 확인하는 과정까지 참관해야지요.”
“아니, 내가 대리인까지야···.”
쇠렌이 머뭇대자 토드가 넌지시 눈짓했다.
그러자 이스라가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쇠렌! 자네는 우리와 스칼바냐르까지 다녀온 일행이 아닌가! 하물며 악마가 있던 구렁텅이에서까지 살아 돌아온 사내가, 설마 귀신 따위의 허깨비가 무서워서 겁을 내는 건 아닐 테지!】
쇠렌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존나 무섭소. 그냥 난 돌아가고 싶소만.”
【하, 하! 하. 빨리 들어가고 싶다고!! 역시 그럴 줄 알았네!!】
“씨부랄. 이 미친 작자들 같으니.”
안간힘을 썼음에도 쇠렌의 발이 질질 끌려 들어갔다.
폐가의 전경을 훑어보던 산시아가 물었다.
“그런데 스승님. 거처의 상태가 엉망인데. 저희 만으론 저길 정리하기엔, 일손이 부족하지 않을까요?”
토드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산시아.”
그는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저 안에 우리를 위해 부역할 일꾼들이 얼마나 가득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