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27)
127화. 자세(2)
그러나,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수현의 흥분은 처음보다 상당 부분 식어버렸다.
“그럼 이건 어때? 시험 기간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학생한테 도서관에서 누가 쓱- 부스터 음료를 건네는 거야. 그걸 마신 애가 눈이 번쩍 떠지면서 엄청난 속도로 공부를 하는 거지. 이른바 부스터 효과! 지친 수험생에게 활력을 주는 음료!”
“음. 내용만 들으면 나쁘지 않은데, 애니메이션으로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맞아. 실사에 애니메이션이 가미되는 영상이라면 모를까. 애니메이션만으론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없을 것 같아.”
“오오, 나도 뭐 하나 생각났어! 몸속으로의 여행. 어때?”
“몸속?”
“어릴 때 과학 잡지에 부록으로 붙은 만화에서 본 건데, 로켓이랑 사람이 아주 작게 축소돼서 몸 안으로 들어가서 인체의 신비를 경험하는 그런 내용이었거든?”
“와, 엄청 교육적인 만화였겠네.”
“그, 왜. 놀이공원 가면 물놀이 보트 같은 거 있잖아. 급류타기!”
“어, 알지.”
“먼저 누군가 음료수를 꿀꺽꿀꺽 마셔. 그러다가 카메라가 확 사람 입 속으로 줌인 되면 아까 말한 놀이공원 급류타기처럼 카메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음료수를 따라가는 거야. 그러면서 식도랑 위장들에 음료수가 닿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지.”
“……?”
“식도랑 위장에?”
“어. 부스터가 닿을 때마다 위장들이 차례로 막 놀라면서 찌릿찌릿 전기가 흐르고, 부르르 떨고, 팡팡 불꽃놀이도 터지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거야.”
“잠이 확 깬다, 몸이 깨어난다. 뭐, 그런 의미로?”
“좀 과하다.”
“그러게. 시각적인 재미는 줄 수 있겠다만 뭘 의미하는지 헷갈릴 것 같아. 게다가 위장은 징그러울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화면 가득 위장이 배경으로 보여야 한다는 말인데, 위장이 예쁘게 그려봐야 위장일 테니까.”
아이디어는 쉴 새 없이 튀어나왔는데 이거다 싶은 게 없었다.
그러니 시간만 자꾸 흘렀고, 애들도 점점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 말 대잔치라도 하는 듯 낄낄대며 실없이 웃어넘기는 것이었다.
“집중. 집중. 벌써 여섯 시야. 빨리 끝내자. 배고파진다고.”
“1차 콘티가 다음 주까지인 거잖아? 아직 일주일 남았으니까 내일 다시 생각해볼까?”
“안 돼. 내일은 또 내일 과제로 바쁠 건데 미뤘다가 금세 다음 주가 될걸? 어떻게서든 오늘 진도는 빼야지.”
“어우. 멍석 깔아주니까 오히려 생각이 안 나는 것 같은데.”
애들이 시무룩한 얼굴로 각자 생각에 잠겼다.
한계에 부딪히는 게 당연했다.
광고의 본질 연구나 시장조사 같은 것도 없이 의욕만 앞서 냅다 브레인스토밍을 한 셈이니.
‘이러다간 날 새겠는데.’
마찬가지로 광고 제작엔 문외한이지만 그나마 연륜이란 게 있는 수현이 조심스럽게 다른 의견을 냈다.
“근데 얘들아. 우리 작업하기 전에 하나 확인할 게 있는 것 같아.”
“뭔데?”
“말해봐, 수현.”
“너희 이번 광고 수업 말이야. 1등을 목표로 할 거야?”
“어?”
“1등?”
갑작스러운 질문에 애들이 눈을 끔뻑였다. 그러고 보니 수업이 끝나고 음료 광고를 어떻게 만들까만 생각했지, 제작의 목적에 대해서까진 깊은 얘기를 나누지 않았던 거다.
수현이 싱긋 웃으며 애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 목표에 따라 제작 방향이 달라질 것 같아서 그래. 예술성이나 독창성, 개성을 최우선으로 해서 대학생다운 광고 영상을 만드느냐, 정말 상업적으로 매력 있는 광고를 만드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일 테니까.”
한 번 더 풀어 말하자 그제야 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냥 과제로만 접근하면 개성을 충분히 살릴 수 있겠지만, TV 방영을 염두에 둔다면 상업성이니 뭐니 이거저거 고려할 게 많아지겠구나.”
“흠, 과제여도 광고 수업인 만큼 상업성을 완전히 무시할 순 없을 거야. 그래도 수용범위 자체가 달라질 테니 확 튀는 영상을 만들 거냐, 대중에게 초점을 맞출 거냐. 먼저 그걸 고민해야겠네. 좋은 지적이다.”
그렇게 잠시 미간을 좁히던 애들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입을 열어 의견을 모았다.
“이왕이면 일등 해야지.”
“내 생각도 그래. 그냥 찍찍 몇 장 그리고 마는 것도 아니고, 한 학기에 90장 이상 그림을 그려야 하는 과제인데, 결과가 좋아야지 않겠어?”
“TV에 송출되는 것도 영예지만 제작비도 나온다고 했잖아. 나, 그것도 엄청 기대되더라. 성인이 돼서 처음으로 일해서 번 돈! 캬, 느낌 있다. 느낌 있어.”
천 원짜리 복권 한 장을 손에 쥐고 일확천금의 꿈을 꾸는 소시민처럼 애들이 멍한 눈으로 입맛을 다셨다.
수현이 고개를 흔들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 냈던 아이디어를 재점검해보자. 앞으로 낼 아이디어들도 이 상업성이란 잣대를 고려해서 내는 게 좋겠고.”
“음. 몇 개 안 남겠는데?”
“하. 너무 과한 욕심은 부리지 않는 게 좋겠어. 그보단 심플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요즘 음료 광고 트렌드가 어떤지도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경쟁업체에서 나오는 이온음료 광고도 찾아보고.”
“해외 자료도 뒤져보자. 선배들한테 부탁하면 못 봤던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을 거야.”
그제야 슬슬 회의 방향이 제대로 잡혀갔다.
밑도 끝도 없는 아이디어를 던지던 애들이 조금 진정하며 저마다 기준을 잡아나가기 시작한 거다.
“와, 근데 나 더는 못 참아.”
“나도.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그러나 집중은 또 오래가지 못했다. 한창 식욕이 왕성한 애들이 배고픔을 호소하며 자리를 옮기자고 졸라댔다.
“그래. 밥 먹고 하자, 그럼.”
“나도 찬성.”
“으아. 일찍 먹자. 먹고 와도 7시가 넘겠어. 선배들이 왜 야작을 하나 했더니, 우리도 한 달이 못 가 그 꼴이 나는구나.”
“에헤이. 부정 타게 그런 소리 하지 마! 밥 먹고 돌아와서 딱 30분 만에 정리될 거니까.”
슬슬 해가 질 시간이었다. 먼저 벤치에서 일어난 수현이 가방을 챙겨 실기동에서 교문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을 향했고,
“어? 어엇!”
생각지도 못한 순간.
“저거 괜찮겠는데……?”
수현의 눈에 그야말로 기가 막힌 장면이 포착되었다.
***
그 주 일요일 저녁.
수현이 아뜰리에 책상과 이젤에 잔뜩 이런저런 그림을 올려두고 바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낮에는 전시회에 출품할 작품을 새로 그렸고, 저녁부턴 학교에 낼 과제를 이것저것 준비했는데 정신없이 그려대다 보니 혼자 어지른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작업대가 복잡해졌다.
“……여기까지만 그리고 좀 치울까.”
기지개를 켜던 수현이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저녁 8시.
어쩐지 배가 고프다 싶었는데 점심도 거르고 저녁 식사 시간도 훌쩍 지나 있었다.
“쌀이 없네.”
강유진 관장이 보내준 반찬은 냉장고에 아직 남아 있었는데, 밥이 없었다. 그렇다고 작업을 벌여두고 나가기도 난감해 고민하던 순간.
부르르. PCS폰이 진동했다.
“스티브?”
-어, 수현. 문 열어.
“무슨 문?”
-나 지금 너희 집 앞이야. 문 열어주라고.
바깥을 내다보니 대문 위로 스티브의 손이 팔랑거리는 게 보였다.
수현이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와, 어쩐 일이야?”
“주말이라 작업실에 사람들이 없더라고. 혼자 밥 먹기 싫어서 왔지. 보나마나 너도 제대로 안 챙겨 먹었을 것 같아서.”
“귀신이네. 안 그래도 허기지던 참이었어. 근데 우리 집에 밥 없어. 쌀을 산다는 걸 깜빡해서.”
“걱정마. 내가 김밥이랑 라면 사 왔어. 이거 끓여서 같이 먹자.”
“와. 최고다. 냉장고에 달걀은 있을 거야. 아! 치즈도 있다!”
스티브는 몇 번 드나들어 익숙해진 살림을 척척 꺼내더니 자연스럽게 냄비를 불에 올렸다.
“내가 할 테니까 넌 손이나 씻고 와. 와, 수현. 너 얼굴에도 물감이 종류별로 잔뜩 묻었어. 그림을 그린 거야, 그림이랑 싸운 거야?”
“진짜? 거울을 안 봐서 몰랐네.”
“세수는 한 거지?”
“그랬을걸?”
수현이 피식 웃으며 앞치마를 벗고 손을 깨끗이 닦고 나왔다.
그리고.
“뭐가 이렇게 많아?”
라면이 끓는 동안 심심했는지, 스티브가 수현의 작업대에 놓인 그림들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아, 그건 학교 과제야.”
“으윽. 숙제구나.”
“어. 개인전 그림은 이쪽이고.”
“학교 수업은 되게 기본적인 드로잉을 많이 하나 보네?”
“아무래도 1학년이니까. 근데 전공공통 수업은 좀 달라. 다른 과랑 융합된 내용이라 새로워.”
“그게 이거야?”
스티브가 이번엔 광고 콘티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 30초짜리 광고를 제작하는 건데 이온 음료를 소재로 짜고 있어.”
“이걸 촬영까지 하는 거고?”
“아니. 그릴 거야. 애니메이션으로.”
“와. 애니메이션? 그럼 장수가 엄청 많겠네?”
스티브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어. 그래서 조 작업으로 진행되더라고. 한 학기 동안 무조건 완성해야 하니까. 아, 일등 작품은 진짜 TV에 방영될 수 있을 거래. 그래서 다들 열심이야.”
그 사이, 라면이 끓었고, 수현과 스티브가 식탁에 음식을 차리며 다시 이야길 이어갔다.
“그런데, 도움이 돼?”
“무슨?”
“대학 과제 말이야.”
스티브가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대충 본 거긴 하지만, 저쪽 드로잉은 주제만 봐도 네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수업일 것 같고. 광고? 그런 수업은 네가 그리는 그림에 무슨 도움이 될까 싶어서 말이지. 시간만 뺏기고 오히려 작업에 방해되는 거 아니야?”
그 말에 수현이 싱긋 웃었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그런데 결국은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인 거라.”
“활용?”
후루룩. 스티브가 라면을 삼키며 물었다.
“그냥 교수님이 내주는 과제만 따라가면 내 작업 시간을 뺏기는 기분이 들 수도 있겠지만, 수업을 내 작업으로 끌어오는 방법도 있거든.”
수현이 싱긋 웃자 스티브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수업의 주도권을 네가 가져온다고?”
“어. 나도 처음엔 거기까지 생각 못 했는데, 광고 교수님이 해외 애니메이션 광고들을 보여주셨거든. 우리가 흔히 봤던 디즈니나 일본 애니메이션이랑 완전히 다른 표현기법을 썼더라고. 꼭 회화 작품 같은 것들도 있었어.”
“호오. 유럽 쪽 영상들을 보여주셨나 보구나?”
“맞아. 그걸 보니까 도전해 보고 싶단 생각이 들더라? 내가 그리는 방식을 살리면서 그걸 애니메이션이 만들 수도 있겠다 싶은 거야.”
“허, 네 작품이 애니메이션이 되는 걸 생각했다고? 그 퀄리티로 수백 장을 그리겠다는 거야?”
“뭐, 품이 들긴 하겠지. 근데, 시간에 맞추려고 엉성하게 하면 네 말대로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보단 움직이는 회화를 만들어보겠다는 목표를 세우면, 그 수업의 주도권은 내가 가지게 되는 거잖아. 그리고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면 방법은 찾아질 테니까.”
수현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일단 먹어.”
“어?”
“라면 다 불고 있잖아. 먹자.”
후루룩. 후루룩.
그렇게 몇 번 더 젓가락질을 하던 스티브가 갑자기 씹는 걸 멈추더니 수현을 바라보았다.
“뭐가 나은 건지 모르겠다.”
“무슨 소리야?”
“대학에 다니는 동안 쓸데없는 과제에 시간을 뺏기는 게 나은지, 쓸데없는 과제까지 전부 네 작업으로 만들어서 몸이 가루가 되게 시달리는 게 나은 건지 판단이 안 선다고.”
스티브는 진심으로 헷갈린다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너무 무리하지 마.”
“그래. 조별 과제라니까. 혼자 하는 것보단 한결 나을 거야.”
“대학에서 그거 한 과목만 듣는 건 아닐 거잖아. 보통 작가들은 개인전 준비만 해도 몸이 갈리기가 일쑨데.”
“어. 시간표대로 잘 움직이고 있어.”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자 스티브도 결국 피식 따라 웃었다.
“그래. 결과만 생각하면 그 광고, 완성되면 정말 멋지긴 하겠어. 대중에 다가서기에도 괜찮은 방법 같고.”
다시 뭔가 하려던 말을 꿀꺽 삼킨 스티브가 대신 남은 라면을 국물까지 모조리 들이켜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다시 가서 작업해야겠어.”
“지금?”
“어. 사실 오늘 그림이 좀 안 풀려서 종일 빈둥댔거든. 너랑 저녁 먹고 놀아달라고 조르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전시회도 곧인데, 내가 이러면 안 되겠지. 고마워, 수현. 엄청 자극이 됐어.”
“그래. 정말 전시회가 코앞이네. 힘내자.”
수현이 싱긋 웃으며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가 든든해졌으니 수현도 좀 더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