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27)
27화. 몰래 온 손님(1)
“엄청나게 발전했네.”
택시가 시내에 들어서자 차창을 내다보던 남자가 감탄했다.
“한국엔 오랜만에 오셨나 봐요?”
택시 기사가 룸미러로 남자를 힐끗거리며 물었다.
“21년 만이에요. 열일곱 살에 떠났으니 이젠 살던 시간보다 떠나 산 시간이 더 긴 셈이죠.”
한국 나이로 서른여덟.
세련된 옷차림과 헤어스타일, 말쑥한 얼굴은 30대 초반, 잘하면 20대 후반으로도 보였다.
남자의 대답으로 대충 나이를 계산한 택시 기사가 흠칫 놀라며 남자의 얼굴을 한 번 더 훑어봤다.
“얼마나 걸리죠?”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가 창밖 구경을 멈추고 몸을 돌려 기사에게 물었다.
“요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 받아 쭉 들어가면 돼요. 5분 안에는 도착할 겁니다.”
택시가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갔고, 잠시 후 남자와 여자가 호텔 앞에 내렸다.
***
“제임스 리입니다.”
“네, 예약 확인되셨습니다. 앞에 놓인 서류 작성 부탁드리겠습니다.”
호텔로 들어와 체크인하는 남자는 제임스 리였다.
영국 런던 쇼디치에서 다음 전시회를 준비하던 그는 세현예고에서 온 미술 전시회 심사에 응하면서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았다.
처음엔 관심 없던 귀찮은 일.
그러나 중요한 인물의 부탁이라 거절할 수 없어 성의 정도만 보이려 했다.
심사야 어려울 게 없었다. 눈에 차지 않으면 그랑프리를 뽑지 않아도 됐고 심사비용도 나쁘지 않은 액수였으니까. 그런데-.
‘승낙하길 잘했지.’
기대 없이 받은 우편물에 시선을 확 끄는 스케치가 있었다.
이후 전달된 중간 과정들은 점점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한수현이라고 했지. 그림은 잘 완성했을까.’
마지막으로 받은 채색 사진은 완성된 그림을 보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흥미로웠다.
결국 제임스 리는 그의 연인 준과 함께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오래 떠났던 조국을 이렇게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하면서.
“학교 측엔 따로 연락해보지 않아도 괜찮아?”
스위트룸 창밖으로 보이는 화려한 시티뷰를 감상하던 준이 제임스 리에게 물었다.
“뭐, 전시회 기간이나 장소는 알고 있으니 특별히 안내받을 건 없고. 깜짝 방문 쪽이 재밌을 것 같아서.”
제임스 리가 싱긋 웃었다.
“놀라긴 하겠지만, 학교 측도 최종작들을 우편으로 보내고 심사 결과를 기다리는 것보다, 현장에서 결과를 듣는 게 훨씬 빠르고 정확할 테니까 좋아하겠네.”
“그렇겠지. 혹시 몰라 계약서를 확인해 보니까 심사는 우편 혹은 방문을 통해 가능하단 조항이 있더라고. 물론 방문 심사는 기대하지 않았겠지만 말이야.”
“당연하지. 그 제임스 리가 고작 고등학생들의 미술 전시회 심사 때문에 한국까지 올 거라,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어쨌든 재밌겠지?”
“응. 나 엄청 기대 돼. 전시회도 전시회지만, 이게 얼마만의 여행이야? 나 한국은 처음 와봐.”
준이 해맑게 미소 지었다.
***
다음 날 아침, 세현예고.
주최 측과 학생들 모두 제임스 리의 방문은 짐작하지 못한 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각자 작품 위치 확인했지?”
“네!”
“오늘 오후 2시부터 손님들이 오실 테니까 점심시간 전까지는 준비가 끝나야 한다. 어제 조명 쪽 문제 있던 팀이 어디였지?”
“저희요!”
“그래, 김경민. 유성우, 박수진. 너희 쪽 복도는 한 번 더 점검할 거니까 기다리고, 박 선생님! 도록은 비치됐나요?”
“네, 입구 쪽 테이블에 쌓아뒀습니다!”
“좋습니다. 자, 그럼 각자 마지막 점검하고 점심시간 후 다시 모인다! 해산!”
“네!”
“네에!”
최형욱의 지도 아래 실기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야외스케치부터 몇 달간 준비한 전시. 이제 그 결실을 확인할 순간이니 다들 들뜨고 흥분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유독 그 분위기를 즐기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최형욱 선생이 지도한 김하영, 장민영, 이주호, 최주희 등이었다.
특히 김하영은 중심에 서서 전시회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하영아, 네 자리 진짜 최고다.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딱 눈에 들어오는 게 네 그림인데?”
“그러니까 능력 있는 쌤 반에 들어가는 게 이렇게 중요한 거야.”
“맞아. 우리 최형욱 쌤 애들은 다 1층 중앙로비에 전시되잖아. 여기가 최고 명당 아니야?”
“뭐, 쌤도 힘써주셨지만 그림이 엉망이면 이런 자리를 받을 수 있겠어? 우리 반 애들 실력이 원체 좋은 거지.”
“맞아. 그건 그래. 근데 하영이 그림 진짜 너무 좋다. 명화 같아. 완전.”
“어우야, 명화는 무슨 명화야. 그냥 열심히 그렸을 뿐인데.”
친한 애들과 일부러 큰소리를 내며 떠드는 김하영.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서로 칭찬하고 으스대는 꼴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으나, 그걸 욕하거나 무시하긴 어려웠다.
실제로 김하영을 비롯한 최형욱 선생의 반 애들 작품이 꽤 높은 완성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살바도르 달리 스타일을 재현한 김하영, 샤갈의 느낌을 풍기는 장민영, 인상파 화가들의 기법을 차용한 이주호, 몬드리안의 추상을 재해석한 최주희 그림은 확실히 평범한 고등학생 수준을 훌쩍 넘어서 있었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건 1층 중앙로비 가장 좋은 자리를 배정받은 김하영의 그림이었고.
“김하영 실력이 엄청 늘었는데?”
“그러게. 쟤가 유화를 했었나?”
“지난 학기만 해도 별로였어. 방학 동안 확 늘었나 보네.”
“근데 너무 달리 스타일을 가져다 쓴 거 아닌가? 저 그림,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이랑 너무 비슷하잖아.”
“음. 저 정도는 오마주라고 볼 수 있지 않아? 베끼거나 표절이라고 하기엔 너무 유명한 명작을 가져다 쓴 거니까.”
“그러게. 어쨌든 감각적이고 잘 그린 그림이긴 하다.”
애들은 놀란 얼굴로 실기동 1층 중앙복도에 걸린 김하영의 작품을 넘겨다보며 속닥거렸다.
달리의 화풍을 가져오긴 했으나 스케치는 새로운 것이었고, 모사한 실력도 수준급이라 평가가 엇갈렸다.
창의성이 떨어진다 해도 그림 자체의 퀄리티가 높으니 함부로 말하기 어려웠던 거다.
결국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애들은 김하영의 그림이 상당히 훌륭하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니 1층 중앙로비에 전시된 게 아닌가, 인정하기도 했고.
그렇게 오전은 김하영의 그림이 시선을 끌며 잠깐 화제에 올랐으나, 그건 애들이 아직 2층 복도 구석에 전시된 김윤수 선생 반 아이들의 그림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후 2시.
세현예고 가을 미술 전시회가 오픈되면서 결국 전시의 진짜 주인공이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어머. 축하한다. 그림 너무 좋은데?”
“와. 고생들 했네, 정말 멋지다.”
실기동 문이 열리기 전부터 줄지어 섰던 부지런한 관람객들 덕분에 미술과 실기동은 금세 북적였다.
특히 복잡한 건 입구에서 중앙로비까지였다. 전시 소개와 인사를 나누는 학부모와 선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던 거다.
먼저 관람을 시작한 손님들은 자연스럽게 걸음을 재촉하며 뒤에 도착한 이들과 거리를 벌렸고, 1층 복도 끝쯤 가자 관람 환경은 차츰 쾌적해졌다.
그러나-.
“뭐야? 왜 안 움직여?”
계단을 올라 2층 복도에 들어선 관람객들은 갑자기 생긴 정체 구간에 당황한 얼굴이 됐다.
“무슨 일이에요?”
“그러게요. 왜 이렇게 앞으로 못 가지?”
고개를 쭉 빼며 앞을 내다보는 관람객들. 그러나 저만치 정체 구간에 선 구경꾼들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오 마이 갓.”
“세상에.”
“이게 진짜 고등학생 작품이 맞아요?”
수군수군. 한 작품을 둘러싼 이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층에서 본 작품들에도 과연 세현예고라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여기 말도 안 되는 괴물 같은 작품이 걸린 거다.
[바다 없는 바다>, [바람의 목소리>, [빛의 계절>.30호짜리 그림 세 장으로 이루어진 수현의 작품은 제법 예술에 조예가 깊다고 자부한 세현예고 학부모들 사이에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다.
“이건 정말 대단하네요.”
그리고, 한주대 미술사학과 교수이자 저명한 평론가인 최희준이 나서자 시선은 더욱 그림에 집중됐다.
“어머, 교수님.”
“언제 오셨어요?”
“세상에, 오랜만에 뵈어요.”
안면이 있는 학부모들의 인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최희준이 성큼 수현의 그림으로 가까이 다가서더니 고개를 저으며 감탄을 내뱉었다.
“이 아이가 그 친구군요. 과연.”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최희준. 학부모들의 고개가 일제히 기울어졌다.
“그 친구요?”
“한수현이 누군데요?”
“아, 한수현. 얘가 그 신의 손이라고 별명 붙은 그 친구 아니에요?”
그림 옆에 붙은 이름표를 보고 다시 수군거리는 학부모들.
최희준은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들더니 군중 사이를 후루룩 훑으며 누군가를 찾았고 이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역시, 관장님도 오셨네요.”
“네, 교수님. 안녕하세요?”
최희준과 인사를 나눈 건 일선화랑 강유진 관장이었다.
“세현예고 학생 중 한 명을 일선화랑에서 후원하기로 했다더니, 그게 이 친구군요? 역시 관장님 안목은 인정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하하. 칭찬으로 들을게요. 그나저나 어떠세요? 우리 수현이, 정말 대단하죠? 열일곱에 벌써 이 정도 실력이라니.”
뿌듯한 얼굴로 한수현의 그림을 자랑하는 강유진 관장.
그리고 수현의 그림에 호평을 늘어놓는 최희준의 말에 학부모들은 일순 조용해지며 귀를 기울였다.
그냥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그림.
그런데 최희준에 강유진까지 극찬하다니, 대체 어떤 친구인가 호기심이 잔뜩 발동한 얼굴들이었다.
“그러게요.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친구네요. 여튼 놀랍습니다. 아무리 세현예고라 해도, 입시 미술이 우선인 환경일 텐데, 이렇게 자유롭게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구현하다니요. 누가 이걸 고등학생의 그림이라고 보겠습니까. 깊이며 실력이며 모든 면이 놀라워요. 하, 어느 분께 지도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까?”
최희준의 감탄과 칭찬에 강유진이 어깨를 으쓱 올리며 답했다.
“놀랍게도 아직까진 특별한 스승이 없어요. 독학으로 깨우친 거라 할 수 있죠.”
“세상에.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러니 천재의 탄생이 아닐까요? 그러니 앞으로가 무척 중요할 테고요.”
고요하지만 단단한 강유진의 말투에 최희준이 흥분을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 귀한 보석을 오래 보려면 힘이 있는 수호자가 필요하겠어요.”
“맞아요. 일선화랑이 그 역할에 먼저 앞장선 거고요.”
분위기 좋은 담소가 이어질 때였다.
“아, 실례합니다.”
불쑥. 누군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관람에 불편을 호소하는 분들이 계셔서요. 여기 너무 사람들이 몰려있긴 하네요. 죄송하지만 조금씩 이동하시면서 관람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억지로 미소를 띠며 학부모들과 최희준, 강유진 관장을 설득하는 남자.
하필 한수현의 그림에 모두의 시선이 쏠린 게 몹시도 못마땅한 최형욱 선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