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30)
30화. 최초의 그랑프리(2)
큰 키에 찰랑이는 단발머리를 한 남자와 멀리서 봐도 모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눈에 딱 들어오는 서양 여자.
학부모라 보기엔 너무 젊었고, 선생이나 관계자로 짐작하기엔 낯선 얼굴이었다.
어쨌거나 남자와 여자는 바쁘게 귓속말을 나누었는데, 그들을 향해 낯익은 인물이 다가가고 있었다.
“쟤가 여길 왜 왔어?”
수현의 말에 박선화와 차윤희의 눈동자가 함께 움직이더니 같은 자리에서 멈췄다.
“스티브잖아?”
“허. 쟤 뭐야, 진짜?”
못 올 자리는 아니었지만, 굳이 올 자리도 아니었다.
만약 친구인 수현과 박선화, 차윤희를 보려고 한 거라면 미리 연락하는 게 맞았고.
깜짝 방문이라고 하더라도 미성년자인 스티브는 경매에 참여할 수 없을 건데, 굳이 강당에 들어온 이유는 뭔지 모든 게 궁금하고 이상한 일이었다.
한편 1층 강당.
“세상에. 진짜 스티브잖아?”
모델처럼 화려한 외모를 한 서양 여성이 불쑥 얼굴을 내민 스티브를 발견하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준이 여긴 웬일이에요?”
스티브가 묻자 준이 어깨를 으쓱 올리며 답했다.
“여행도 할 겸 겸사겸사. 인사해. 여긴 내 남자친구, 제임스야.”
“아. 제임스. 안녕하세요. 전 스티브라고 해요.”
“준한테 몇 번 들은 기억이 있네. 뉴욕 화랑의 그 친구 맞지?”
제임스 리가 묻자 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임스 쪽으로 바짝 붙으며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앉아, 스티브. 일단 경매 구경부터 하고, 근황은 이따가 나누자.”
“좋아요.”
스티브가 씩 미소 짓고는 자리에 앉아 한창 열기를 띠는 경매에 집중했다.
“150, 150입니다. 더 있으신가요? 네, 160. 감사합니다. 170 있으실까요? 빨간 모자분, 어떠십니까? 네, 감사합니다. 낙찰입니다. 170에 낙찰됐습니다!”
이후 박선화의 그림을 포함한 100번까지 작품들이 무난한 경매를 이어갔다.
100만 원대 작품들이 계속해 쏟아져나왔고, 몇몇 작품은 500만 원까지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임팩트는 다소 떨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좀 전 김하영의 그림이 천만 원이란 어마어마한 낙찰가를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진짜 상류층 느낌이 물씬 나네요. 한국에도 이런 학교가 있다니.”
스티브가 작게 속삭이자 준이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맞아. 썩어빠진 것도 그 세계랑 똑같아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라니까?”
“썩어요? 여기가?”
“의도적인 밀어주기며, 돈으로 점수를 올리는 시스템이며, 볼수록 재밌는 학교더라고.”
“아.”
준의 말에 스티브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어딜 가나 있는 일이기도 했고, 수현과 박선화, 차윤희 등을 통해 세현예고의 분위기를 대충은 익혔던 통에 별 충격은 없었다.
“근데 왜 계속 구경하고 있어요?”
스티브가 묻자 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응. 우리가 사고 싶은 그림이 한 점 생겨서 그래.”
“사고 싶은 그림이요?”
“어. 계속 기다렸는데, 아직 안 나오네.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기대로 반짝이는 준의 얼굴을 보며 스티브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내가 보러 온 그림이랑 겹치는 건 아니겠지?’
확인할 새는 없었다.
최형욱 선생이 갑자기 강당 무대 쪽으로 가 경매를 잠시 멈추었고-.
“귀빈 여러분, 오랜 시간 진행되는 경매에 많이 힘이 드실 텐데요. 이제 몇 작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좀 더 빠르게 경매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경매사가 곧바로 경매 속도를 올리겠단 선언을 한 거다.
“지금도 빠른데 속도를 더 올린다구요?”
“어휴, 작품이 워낙 많기도 하잖아요.”
“그래도 뒤에 작품들도 신경 써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수군수군. 객석이 술렁였다.
앞선 경매도 속도가 느린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속도를 올린다면 112번부터 138번까지 남은 27점의 작품은 떨이 취급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
황당한 소리였지만 최형욱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생각에 이건 손님들과 학생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던 거다.
‘어차피 뒷번호는 가정형편이 평범하거나 어려운 애들로 꾸려놔서 경매가를 기대할 수도 없어. 질질 끌어봐야 애들도 창피할 거고, 손님들도 지친 기색이니 후딱후딱 치우는 게 낫겠지.’
벌써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10시 안에 모든 행사를 종료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무엇보다 한수현의 그림이 남아있는 게 신경 쓰였다. 낙찰가를 낮추려면 속도를 높이는 편이 여러모로 나았다.
최형욱이 한 번 더 눈짓하자 경매사가 빠르게 남은 경매를 지시했다.
이런 행동이 오히려 몇몇의 전의를 불태우는 계기가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채.
“작품 번호 118번입니다.”
잠시 후, 드디어 수현의 그림이 단상에 올랐다.
최형욱도 긴장한 듯 무대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작품은 [바다 없는 바다>, [바람의 목소리>, [빛의 계절>. 3개의 그림으로 된 연작인데요. 형평성을 위해 경매에는 [빛의 계절> 한점만 출품하기로 했습니다. 경매 시작가는 10만 원입니다. 자, 경매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르르.
최형욱의 예상과는 달리 패들을 든 손들이 올라왔다.
수현과 친분이 있거나 호기심을 가진 특정 인물뿐 아니라 전시회에서 수현의 그림을 눈여겨본 손님들도 제법 관심을 표했던 거다.
경매가는 쭉쭉 올라갔다.
오히려 앞서 땡처리한 작품들이 20-30만 원대에 낙찰된 까닭에 이런 반응은 더욱 극명하게 대비되며 모두를 주목하게 했다.
“아, 120, 120만 원입니다. 경매가 20만 원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140 있으신가요? 네, 감사합니다. 160, 180 가보겠습니다.”
경매사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최형욱 선생의 귀띔으로 경매의 하이라이트는 모두 끝난 거라 생각했는데, 뒤에서 대박의 기운이 느껴지는 작품이 나타난 거다.
‘올라가는 속도가 훨씬 빨라. 사람들이 흥분한 기분도 잘 느껴지고. 이거, 사고 한 번 제대로 치는 거 아니야?’
“자, 200만 원입니다. 다시 경매가 30만 원씩 올려보겠습니다. 230. 계신가요? 260 가보겠습니다. 290입니다!”
웅성웅성.
강당이 소란스러워졌다. 조금 전까지의 경매는 보여주기식이거나 관객 점수를 노린 이들이 주도한 게 대부분.
반면 수현의 그림은 작품에 대한 기대를 품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물론 한주대 미술사학과 교수이자 저명한 평론가인 최희준과 일선화랑 강유진 관장의 움직임에 반응하며 경매에 뛰어든 사람들, 경매의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휩쓸린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미리 약속하거나 이해관계로 얽힌 이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란 점만 보더라도 수현의 그림은 그 가치를 제대로 증명하고 있었다.
“600! 600입니다! 더 있으신가요?”
3시간이 훌쩍 넘은 경매로 피곤해진 건지, 흥분 때문인지 경매사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데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이번에도 우르르 패들을 들었다.
“재밌네. 확실히 재밌어.”
그리고, 그때까지 패들을 한 번도 들지 않고 상황을 관전하던 제임스 리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저 그림이 이렇게나 인기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준도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곧 한계일 거야.”
제임스 리가 말했다.
“암만 돈 있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라 해도 검증되지 않은 신인의 그림에 이 이상 투자하는 건 부담스러운 일일 테니까.”
“그러려나? 하긴 어떤 면에선 부자들이 더 깐깐하고 냉정하기도 하지.”
“그리고 저들은 이 그림이 어떻게 그려진 건지, 또 수현이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지는 모르잖아.”
“흐음. 그것도 그래.”
“어쨌든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아까 그 달리 짝퉁 그림 말곤 수현의 그림이 현재 최고가를 달리고 있어.”
제임스의 말대로 패들을 든 사람은 눈에 띄게 줄어갔다.
이제 남은 건 최희준 교수와 강유진 관장, 그리고 딱 보이기에도 돈이 많아 보이는 이름 모를 학부모 두 명 정도.
잠시 후, 경매가가 700만 원까지 오르자 최희준과 강유진만이 남게 됐다.
‘후. 출혈이 제법 되긴 하겠다만, 1,000만 원을 지르긴 해야겠어.’
강유진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패들을 만지작거렸다.
아직 제대로 된 전시 경험도 없는 신인.
아무리 미래가 기대된다고 해도 고등학생의 그림 한 장에 천만 원을 내놓는 건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공정한 출발선은 만들어줘야지. 김하영과 관객 점수를 동일하게 만들면 남는 건 심사위원 점수뿐일 테니까.’
강유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패들을 힘차게 들었다.
“네, 33번 빨간 원피스를 입으신 여성분.”
경매사가 지목하자 강유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만 원.”
쏴아아-.
그럴 리가 없는데, 강당 안에 세찬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객석이 일순 고요해졌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럼 이번 경매에 천만 원이 두 명이야?”
“엄청나네. 어휴, 무섭다. 무서워.”
“어쨌든 그럼 아까 김하영 그림이랑 한수현 그림이 결승에서 붙을 확률이 높은 거죠?”
“그러게요. 이젠 심사위원 점수로 결정되겠네.”
“누가 될 거 같아요?”
“박빙이겠어요. 수현이란 친구 그림은 뭔가 감성을 자극하는 게 있고, 하영이는 또 기교가 좋잖아요.”
“난 그래도 수현이 그림이 나아요. 내가 산다고 하면 수현이 그림을 살 것 같거든요.”
“어머,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그렇긴 하네. 그쪽이 좀 더 끌리긴 하죠?”
수군수군. 학부모들이 이 불꽃 튀는 경쟁의 끝이 어떻게 날지 입을 모으며 예측했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강유진 관장은 박선화 그림을 보러온 게 아니었어?’
최형욱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인상을 잔뜩 쓰고 있었다.
‘자기 딸 그림엔 별 관심도 없더니, 뜬금없이 왜 한수현이야?’
일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 건지 미치겠는 심정이지만 판을 엎을 수는 없는 노릇. 당장은 경매가 끝날 때까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최형욱이 어금니를 꽉 깨물 때-.
“와, 미쳤어. 너네 엄마 미쳤다.”
“어. 우리 엄마가 좀 쳐. 멋있지?”
“야, 한수현. 뭐야, 진짜? 네 그림도 천만 원이야.”
2층에 앉은 학생들도 휘둥그레진 눈으로 소란을 떨며 수현 곁으로 몰려들었다.
“허. 이게 무슨.”
정작 당사자인 수현은 그저 입을 떡 벌린 채 강당 무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도움을 주실 줄이야.’
아직 제대로 보여준 것도 없는데 무조건적인 헌신과 분에 넘치는 응원을 보내주다니.
수현은 강유진에게 새삼 감사하는 마음과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차례로 새겼다.
그렇게 수현의 경매가 무사히 마무리되는 줄 알았는데-.
“자, 그럼 천만 원, 천만 원에 낙찰인가요?”
경매사가 망치를 번쩍 드는 순간. 그를 붙잡는 목소리가 강당에 울려 퍼졌다.
“3만 달러.”
“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되묻는 경매사.
그를 보며 목소리의 주인공이 씨익 미소 지었다.
“3만 달러.”
여태 한 번도 패들을 들지 않았던 제임스 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