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79)
79화. 오리지널러티
꼬르르르륵.
정신없이 빠져들어 움직이던 손이 조금씩 느려지는가 싶더니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
시계를 확인해보니 어느덧 4시.
점심시간이 지난 지도 한참이었다.
시험 종료 시각인 10시까지는 아직도 6시간.
뭘 좀 먹긴 해야 할 것 같았다.
달칵.
강유진 관장이 준비해준 도시락을 연 수현이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켰다.
‘엄청난 정성이네.’
한입 크기로 작게 만든 색색깔 주먹밥에 각기 다른 고명을 얹은 유부초밥, 거기에 화려한 색감의 과일까지. 정갈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이 아기자기하게 들어있었다.
‘그리면서 먹기도 편하겠다.’
허용된 사항이긴 해도 애매한 시간이라 밥 냄새를 풍기는 게 조금 꺼려지고 미안하다 싶었는데, 이런 음식이라면 괜찮겠다 싶었다.
사실 시험장 공기엔 각종 물감 냄새가 지독하게 녹아 오히려 도시락에 물감 냄새가 스며들 판이었고, 따라서 이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지만.
스륵.
젓가락으로 작은 주먹밥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수현이 다시 제 그림을 바라보았다.
‘밀도는 문제없이 쌓이고 있어. 시간 배분도 적당하고. 전부 완성하면 9시쯤 되려나.’
수현이 고른 그림 재료는 아크릴.
작년 세현예고 미술 전시회와 일선화랑에서 작업할 때 여러 번 써본 재료라 제법 손에 익었다.
수채화에도 꽤 자신 있어 수채화 물감과 붓, 기타 도구들도 따로 챙겨왔지만 선정된 주제를 보니 아크릴이 맞겠다 싶었고.
탄생과 죽음. 시작과 끝. 기쁨과 슬픔. 단절과 연결.
여러 감정을 담은 수현의 그림은 묵직하게 주제를 드러내며 구체화 되고 있었다.
특히 주제로 삼은 두 인물, 즉 나무와 낫을 상징하는 주인공이 손을 맞잡은 모습은 그림을 그린 당사자인 수현의 마음까지도 울컥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림이란 건 참 신기해.’
수현이 새삼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상자의 경험을 고려해 감상 포인트를 계산하고 노려 그려내는 이들도 있겠지만, 진짜 감동은 이렇듯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구도와 몸짓, 표정, 색감에서 만들어지는 법이다.
어쨌거나 다행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끌려가듯 그려낸 그림이 수현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이제 이걸 놓치지 말고 잘 마무리하는 게 관건이겠지.’
적당히 도시락을 비운 수현이 다시 그림에 시선을 옮기며 집중했다.
***
사각사각.
텅텅텅.
휙. 타닥. 쿵쿵.
시험장엔 몇 시간째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도구들이 내는 소음과 이따금 내뱉는 아이들의 한숨 소리 외엔 그야말로 적막의 연속이었다.
‘아주 죽을 맛이겠지?’
김민준은 이런 분위기가 썩 마음에 들었다.
‘시험이며 대회에서 가장 중요한 게 정신력이야. 리듬이 한번 틀어지면 만회하기가 어려운 법이지.’
시간이 흐를수록 울상을 지으며 그림을 망쳐가는 애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그걸 확인할 때마다 김민준은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
‘쟤도 탈락. 쟤도 탈락. 쟤는 아주 맛이 가 버렸네. 흐흥. 이대로면 2차도 문제는 없겠어.’
김민준이 이번엔 자기 그림을 내려다보며 객관적인 평가를 했다.
미리 준비한 그림이었다.
구상할 시간이 많았던 만큼 준비는 탄탄했고.
‘짜릿하네.’
남들보다 수십 걸음 앞선 경주니 너무 쉬웠다. 아등바등 버둥대는 애들이 딱하기도 하고, 한편 우월감이 느껴졌다.
쉬엄쉬엄 가도 일등은 따놓은 당상. 그저 유람하듯 천천히 자기 페이스를 조절하며 김민준은 대회를 즐기고 있었다.
나무와 낫.
어쩌면 평범한 주제.
그러나 이 주제가 발표되자 참가자의 상당수가 동요했다.
바보 같고 멍청한 반응이었다.
투표라고 해도 랜덤 뽑기나 마찬가지인 방식.
어떤 주제가 나올지 완벽하게 예측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어떤 주제가 나오더라도 수긍하며 빨리 공략법을 찾는 게 맞았고.
하지만 대부분이 흔들렸다.
자신의 계산과 완전히 동떨어진 결과가 나오자 망치로 한 대 맞은 얼굴들이 됐다.
그렇게 정신적 타격을 주는 것.
그게 김민준이 노린 부분이었다.
‘괜찮은 작전이었어.’
김민준은 2주 전, 중앙예고 강성실 과장과 나누었던 이야길 잠시 떠올렸다.
투표를 조작할 순 없지만, 분위기를 유리하게 끌어갈 방법은 있다며 넌지시 일러준 작전.
그는 중앙예고 애들이 담합해 ‘나무’란 주제에 몰표를 던질 거란 소문을 흘릴 작정이라 말했다.
적당한 시기, 자신이 먼저 소문을 흘릴 거고, 시험 직전 애들 입에서 그 일이 다급하게 튀어나오게 만들 거라고.
그럼 시험 당일 ‘나무’에 표를 던지는 응시자는 한 명도 없을 거라면서.
물론 중앙예고 애들 역시 ‘나무’에 표를 던져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나무’가 최저 득표를 기록하며 주제에 선정될 테니까.
‘가짜 소문을 흘려 응시자들을 당황하게 하고, 그 상황을 이용해 진짜 목표를 챙긴다니. 하. 이게 진짜 먹히면 대박일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로 너무 쉽게 먹혔네?’
다시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었다.
더 대박인 건 ‘낫’이었다.
이거야말로 확률이 10%나 될까 싶은 작전이었다.
안 그래도 꺼려지는 오브제인 ‘낫’을 두고 슬쩍, 저게 나오면 망한다는 식으로 말을 몇 마디 흘리란 거였는데, 실제로 거기에 귀가 커진 상당수의 참가자가 ‘낫’이 최저 득표를 기록할 것을 경계하며 아낌없이 표를 던졌다.
그게 낫이 두 번째 주제로 선정된 배경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지.’
김민준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첫 번째 주제인 ‘나무’를 주제로 올리기 위해선 중앙예고 애들의 협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강 과장은 ‘나무’에 표를 던지지 않으면 ‘나무’가 주제로 나올 거란 내용을 비밀리에 대회 준비반에 공유한 바 있었다.
그러나 ‘낫’에 대한 작전은 김민준만 알고 있었다.
‘나무’에 비해 성공 확률이 낮기도 했고, 강 과장이 확실하게 미는 카드는 김민준 한 명이기 때문에 아는 이가 많아 좋을 게 없었던 거다.
‘어쨌든 운도, 이런 작전을 짜는 머리를 가진 것도 실력의 일부인 거니까.’
불타는 로마를 보며 영감을 떠올렸다는 폭군 네로처럼, 납득할 수 없는 투표 결과에 혼란스러워하며 페이스를 잃은 참가자들이 몰락하는 과정을 김민준을 뿌듯하게 감상했다.
그리고 공들여 미리 준비한 그림을 천천히 자신의 캔버스에 옮겨 갔다.
***
다시 저녁 9시.
“제출인가요?”
“네.”
“여기에 두고 가면 되나요?”
“이쪽에 차례로 내시고 자리는 조용히 정리해주세요. 아직 마치지 못한 참가자들이 있으니까요.”
웅성웅성.
체육관이 조금씩 소란스러워졌다.
미술을 좋아하고 빠져들어 작품을 연구해본 경험이 있다 해도 참가자 대부분이 아직은 고등학생.
보통은 입시 미술에 최적화되어 있고, 그건 4시간에서 5시간 안에 완성하는 그림에 익숙하단 말이기도 했다.
그러니 10시간짜리 대회는 무척이나 길고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체력적으로도 달리는 문제도 있었고.
결국 한계를 느낀 학생들 몇몇이 5시쯤부터 작품을 제출하고 시험장을 빠져나갔고, 8시부터는 뭉텅이로 작품을 마무리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조금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한 장의 그림, 하나의 작품에 오랜 시간을 투자한 경험이 없다 보니 시간을 오래 준다고 해도 딱히 더 그리고 만들지를 못하는 거다.
그렇게 9시가 되자 시험장에 남은 건 300명의 응시자 중 1/10에 해당하는 30명 정도였다.
거기에 김민준과 차윤희, 수현도 있었다.
그리고,
“제출하겠습니다.”
마침내 수현이 손을 들고 일어났다.
“……?”
순간 김민준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 빛났다.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참가자였다.
세현예고 신의 손이니, 제임스 리가 영국으로 불러들인 수재라느니, 소문이 무성하기도 했고, 강성실 미술과장이 이번 대회에서 가장 경계할 대상이라 일러주기도 했었고.
무엇보다 오늘 투표 결과로 애들이 당황할 때도 어쩐지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어 흥미가 동했다.
마침 뽑기로 걸린 자리가 그 한수현의 그림을 직관하기 딱 좋은 자리라 옳다구나 했는데, 일부러 그런 걸까?
한수현은 이젤을 많이 사용하지 않고 낮은 자세로 그림을 그렸다. 그 바람에 뭘 그리고 있는지 제대로 훔쳐보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티 나게 그림을 들여다봤다가는 감독관이나 다른 참가자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으니 조심스러웠고.
조금 참았다가 끝날 때쯤 확인해보면 되겠지,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마침 내 그림도 대충 완성됐으니까.’
고민할 시간을 번 김민준은 사실 30분 전쯤 그림을 모두 완성한 상태였다. 그게 잘 마르길 기다리던 중이었고, 이제 슬슬 제출해도 좋을 타이밍이긴 했다.
스르륵.
김민준이 수현의 뒷모습에 눈길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그림을 챙겨 들었다.
“저도 제출하겠습니다.”
성큼성큼.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체육관 단상 앞으로 나온 김민준. 길쭉한 테이블에 나눠 앉은 감독관들이 작품들을 꼼꼼히 확인하며 받고 있었다.
슬쩍 넘겨다보니 수현은 왼쪽 끝자리에서 그림을 제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뭘 그렸으려나.
그리고 김민준의 시선이 수현의 손에 들린 그림으로 천천히 옮겨간 순간.
“허.”
김민준은 낮은 탄식을 내뱉으며 돌처럼 굳어버렸다.
“와.”
다음 감탄사는 감독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어머나. 이러면 안 되는데. 너무 그림이 좋아서.”
“네? 아. 하하. 감사합니다.”
저도 모르게 사심을 드러낸 감독관에게 수현이 싱긋 웃어 보였다.
“학생. 잘 그리네. 정말. 아니, 이건 잘 그린다는 말로는 부족한데. 어휴. 그야말로 작품이네. 작품.”
어차피 시험은 끝물이었고, 감상을 한두 마디 전한다고 부정행위에 해당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수현의 앞에 선 감독관은 수현의 귀가 빨갛게 물들 정도로 유별나게 감탄을 쏟아냈다. 그리고,
“진짜네.”
“와. 고등학생 맞나.”
“하, 대회 수준이 정말 엄청나긴 하네요.”
수군수군.
또 다른 감독관들이 수현과 감독관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몰려들어 한마디씩 감상을 내뱉었다.
“잠깐. 잠깐만요.”
그리고 김민준은 저도 모르게 수현을 향해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 섞여 고개를 힘껏 내밀었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이게 정말 같은 시험장에서 나온 그림이라고?
고작 고등학생이, 아무 대비 없이 나온 주제에 당황하지 않고, 이렇게 훌륭한 완성도 높은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에 그런 그림이 실재했다.
김민준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혼란스러운 얼굴엔 차츰 절망감이 물들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김민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차분히 자리를 정돈한 수현이 친구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시험장을 빠져나간 후에도, 김민준은 한참이나 그대로 서 있었다.
무서운 상승세를 일으키며 달려오던 자신 앞에 처음으로 벽이 나타난 거다.
그리고 김민준은 그 거대한 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