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67)
숭배자
* * *
카엘름 백작은 눈썹이 조금 부리부리한 걸 제외하면, 아무런 특징도 없는 왜소한 노인이었다.
그런 백작이 데일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빼고 싶었지만, 데일은 꾹 참았다. 데일은 나이 지긋한 연장자에게 약하다.
“잘 와주었네! 잘 와주었어!”
데일이 물었다.
“……나를 아시오?”
“알다마다! 결투자 데일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겠나.”
“결투자?”
데일이 의아해하자 레베카가 귀띔해주었다.
“몰랐어요? 결투 이후에 데일 경께 새로 붙은 별명 중 하나예요.”
“몰랐는데……. 별명 중 하나라는 건 다른 별명도 있다는 것이오?”
“기사 살해자, 밤의 사도, 왕족의 수호자, 수상하게 잘 싸우는 언데드. 더 듣고 싶어요?”
“결투자가 그나마 낫군.”
데일은 이 별명들이 탐탁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기도 했다.
‘설마 여기까지 소문이 퍼졌을 줄이야.’
이는 데일이 잘 모르기 때문에 가진 의문이다.
이레네는 이제 제국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악마에 맞서는 인류의 상징과도 같았다.
대륙에 남아 있는 모든 도시와 국가에서 이레네를 주목한다.
이레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공주의 처벌을 두고 벌이는 두 기사 간의 결투는, 당연히 인기 있는 화젯거리다.
이곳까지 소문이 퍼진다 해서 이상할 게 없었다.
백작은 데일의 손을 놔주지 않으며 말했다.
“연약한 공주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결투에 임하다니. 나도 한때는 기사를 꿈꾸었던 몸이네. 비록 믿는 신앙은 다를지라도, 그대야말로 기사도를 따르는 진정한 기사일세!”
“……칭찬 고맙소.”
“음! 기사란 약자를 지켜야 하는 법이지. 알겠나? 약자를 지켜야 한다 이 말이네!”
구태여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는 의미는 무얼까.
데일이 시큰둥해하자, 백작은 떨리는 동공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겁에 질린 초식 동물 같은 모습이었다.
“이미 이야기는 들었을 거라 믿네. 지금 내 성에는 사악한 악마 숭배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지. 그들이 내 백성을. 조카 딸을 끔찍하게 죽였네!”
“유감이오.”
백작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들이 곧 나 역시 죽이러 올 걸세! 나는 확신할 수 있어. 반드시 죽이러 올 거라고! 하지만 나는 늙고, 약한 몸일세. 그러니 진정한 기사인 자네는 나를 지켜야 하지 않나. 응?”
이걸 위해서 처음부터 기사도니 뭐니 얘기를 했던 걸까.
불안 장애에 시달리는 듯한 백작의 행동에 데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백작을 섬기는 기사가 두엇 보였고, 병사 여럿과 심지어 이단 심문관도 한 명 보였다.
사람 하나를 호위하기 위한 것 치고는 충분하다 못해 과할 정도의 병력이다.
“내가 없어도 충분할 것 같소만.”
“무, 무슨 소리! 여기 있는 놈들은 다 형편없어. 이단 심문관들이란 것들도 목에 힘만 잔뜩 들어갔지, 실속이 없다고. 안 그랬다면 내 조카가 죽지도 않았겠지. 하다못해 내 앞에 숭배자 놈의 목을 가져왔거나!”
백작 본인은 데일에게만 속삭이듯이 말한다 생각했지만, 그 목소리 제법 컸다.
실내에 있는 모두가 언짢아했다.
특히, 데일보다 못한 취급을 받은 이단 심문관의 얼굴은 굴욕으로 일그러졌다.
반대로 말하면. 백작은 그런 걸 고려하지 못할 정도로 심적으로 몰려 있었다.
분위기가 미묘해지자 눈치만 살피던 레베카가 끼어들었다.
“흠흠. 아무래도 저를 잊고 계신 모양이네요.”
“으음? 아. 레베카 공…….”
백작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평의원이고 뭐고, 별로 관심 없다는 태도였다.
그런 반응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레베카는 인내심을 가지고 말했다.
“상황은 전해 들었어요. 말씀드리기 송구하지만, 데일 경은 이미 제 호위를 맡고 있답니다.”
“그, 그런.”
“하지만 안심하세요. 이 저택에서 함께 지낼 테니, 무슨 일이 있다면 함께 대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군…….”
백작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 레베카는 성벽 밖에서 기다리는 상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지만, 백작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자기 안위와 성안에 숨어 있는 악마 숭배자에게만 쏠려 있었다.
진전없는 얘기를 나눈 뒤.
데일과 레베카가 방을 빠져나왔다.
레베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태가 심각하네요.”
“원래 저런 사람이오?”
“원래도 유약하긴 했죠. 그래도 나름 현명하고, 주위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어요. 근데 지금은……. 맛이 완전히 가버렸네요.”
백작을 설득해 상단을 도시로 들여온다는 계획은 실패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악마 숭배자가 잡힐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까요?”
“아니면 악마 숭배자를 직접 잡는 방법도 있소.”
“아뇨아뇨. 굳이 그런 위험한 일은…… 잠깐. 데일 경은 그리할 생각이시군요?”
데일은 침묵으로 답했다.
레베카가 묘한 표정으로 데일을 봤다.
“대체 왜죠? 관련도 없는 공주 일에 나서는 것도 그렇고……. 역시 그런 건가요? 오지랖?”
“내게 이득이 있으니 하는 것뿐이오.”
“흐음.”
묘한 눈으로 데일을 보던 레베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거로 해두죠.”
그 뒤로도 둘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우선 이단 심문관을 찾아 라팽과 그가 사용하던 악마의 무기에 관해 이야기했다.
탈로스는 유물 대포의 잔해를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악마의 힘이 깃든 무기가 맞군요.”
“어쩌면 이곳에 숨어 있다던 악마 숭배자와도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이건 저희가 조사해 보겠습니다.”
“잠깐만요.”
레베카가 대포만 챙겨 돌아서려는 탈로스를 붙잡았다.
“악마 숭배자에 대한 정보를 저희한테도 좀 공유해주시지요. 그래야 저희가 더 조심하거나, 악마 숭배자를 운 좋게 발견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탈로스는 섬뜩한 시선으로 레베카와 데일을 노려보았다.
당최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지 모르는 시선이었다.
그러고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저희 일입니다. 두 분께서는 위험하게 돌아다니지 말고, 되도록 방 안에서만 지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견은 받지 않겠다는 듯.
탈로스는 그대로 떠나려 했다. 그런 탈로스의 등에 대고 데일이 물었다.
“가면.”
“……?”
“그 악마 숭배자가 흰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나?”
고개를 휙 돌린 탈로스는 안 그래도 희번득한 눈을 더 부릅떴다.
그는 의심을 담아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유물 대포 옆에 흰 가면이 떨어져 있더군.”
“그 가면은 지금 어딨습니까.”
“불길해서 부숴버렸다.”
사실은 라팽의 기억을 엿봐 얻은 정보지만, 데일은 뻔뻔하게 거짓말했다. 이 차가운 몸뚱이가 가진 무표정은 거짓말을 할 때 진가를 발휘했다.
탈로스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가지 충고해드리죠. 중요한 증거가 될 물건은 함부로 부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괜한 의심을 사고 싶지 않다면 말이죠.”
위협하듯이 말했지만, 이런 거에 움츠러들 데일이 아니다.
데일이 맞받아쳤다.
“나도 하나 충고하겠다. 악마 숭배자를 찾는 데 실패했으면, 깔끔히 인정하고 협조를 구해라. 고집스럽게 굴수록 피해만 커질 거다.”
이단 심문관이 이곳 카엘름 성으로 온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악마 숭배자의 근거지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이제는 방법을 바꿔야 한다.
데일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탈로스는 움찔했다. 그의 이마에 주름이 생겨났다.
때로는 그 어떤 욕설보다 진실을 찌르는 한마디가 더 아픈 법이다.
탈로스가 눈가를 파르르 떨며 말했다.
“마치 그쪽은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듯한 말투군요.”
“찾을 거다.”
의문이 아닌 확신.
그도 그럴 게, 데일은 이미 악마 숭배자가 어떤 악마를 섬기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완전히 확신하는 건 아니지만…….
‘어지간하면 내 예상이 맞을 거다.’
이미 능력을 아는 상대는 대처할 수 있다.
찾는 것도 훨씬 수월할 것이다.
퍼즐로 비유하면, 이미 가장자리가 채워져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해야 할까.
그런 사실을 모르는 탈로스는 데일이 허세를 부린다 생각했다.
“허. 이 일을 참 우습게 보는군요. 좋습니다. 어디 마음껏 찾아보십시오. 만약 당신이 저희보다 먼저 녀석들을 먼저 찾아낸다면, 그때는 저희가 아둔했다는 걸 인정하죠. 원한다면 고개라도 숙이겠습니다.”
탈로스는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리며 덧붙였다.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눈앞에 상대는 잘 모르는 모양이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는 것을.
* * *
본격적으로 성안을 돌아다니기에는 이미 시각이 늦었다.
최근 악마 숭배자가 활개 치고 난 후. 성안에는 통금령이 내려졌다.
해가 진 후 집 밖으로 나다니는 건 금지되었다.
설령 금지가 아니라 해도, 이런 분위기에서 나다닐 머저리는 없겠지만.
카엘름 백작은 성에 찾아와준 레베카와 데일, 사제들, 그리고 이단 심문관들을 위해 연회를 열었다.
정작 그 백작은 겁에 질려 참석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정말이지. 이런 상황에서도 연회라니. 귀족분들의 생각은 잘 이해가 안 갈 때가 많습니다.”
에스델은 떨떠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현악기와 피리를 연주하는 악공. 과하다 싶을 정도로 쌓여 있는 술과 음식.
그사이에서 웃고 떠드는 백작의 가신과 혈육들.
그녀가 보기에는 너무나 사치스러운 연회였다.
에스델은 이런 사치가 불편했다.
정작 다른 사제들은 이런 자리가 익숙한 듯,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지만 말이다.
데일은 그런 에스델에게 술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안 마시나?”
“안 마셔요. 술은 사람의 정신을 흐리게 만드는 법이니까요.”
에스델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켄이 들었다면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 했겠군.’
지금쯤 하켄은 성 밖에서 야영하며 툴툴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하켄이 에스델을 봤다면 한소리 했을 거다.
둘은 연회의 구석에 서서 멍하니 다른 이들을 구경했다. 둘 다 다른 사람과 흥청망청 마시며 어울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둘에게 다가왔다. 강직하고 올곧은 인상의 청년이었다.
청년을 알아본 에스델이 반가운 얼굴을 했다.
“페일 형제님!”
“오랜만입니다 둘 다.”
예전.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사제의 주검을 교단에 전해주었을 때 마주쳤던 사제다.
그는 데일을 보며 꾸밈없는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건넸다.
“데일 경이 이곳에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급하게 달려왔습니다.”
“오랜만이다. 그 옷은?”
데일은 페일의 옷을 가리켰다.
새빨간 법복. 이단 심문관이라는 증거였다.
페일이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이단 심문관 수습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과분한 영광이죠.”
“그렇군.”
이 청년 사제는 충실히 출셋길을 걷고 있는 모양이다.
오랜만의 만남에 페일은 이러저러한 얘기를 했다.
가장 먼저 나온 말은 바로 데일의 결투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말 놀랐습니다. 데일 경은 크리스틴 경과의 결투에서 마리아가 준 반지를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반지를 부순 것에 대해서는 유감이다.”
페일은 손사래를 쳤다.
“아뇨. 책망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마리아도 옳은 일에 쓰였다고 좋아했을 겁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요.”
“걸리는 부분?”
“예. 신념의 반지 안에 깃든 건 저희 교단의 영웅입니다. 원래는 그분의 마음에 든 사람에게 잠시나마 강한 힘을 내려주는 유물이죠.”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크리스틴과의 싸움에서 데일은 자기에게 허용된 것보다 강한 힘을 발휘했다.
지금은 원래대로 되돌아갔지만.
페일이 잠시 말을 고르다,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데일 경은 그……. 다소 강압적인 방법으로 힘을 빼앗아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당연히 영웅은 저항했을 거고, 어떻게든 신성을 끌어내려 했을 겁니다.”
그리고 빛의 신성은 데일에게 상극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순간 데일 경은 말 그대로 녹아내렸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걸 몸으로 받아내, 자기 힘으로 삼았죠.”
에스델이 맞장구쳤다.
“저도 계속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얘기를 하려 했는데, 당최 데일 경이 듣지를 않더군요.”
페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보기에 데일 경께는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영혼의 특별함이라 해야 할까……. 그렇기에 다른 흑기사와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특별함이라.
짐작 가는 구석은 몇 개 있었다.
데일이 흑기사로서 최초로 교단의 본당에 발을 들였을 때.
빛의 여신이 그에게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아주 잠깐이지만 말이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이게 범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데일은 일단 밤의 여신을 따르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사도 하시나를 만났을 때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었다.
―세상에. 이런 영혼은 본 적이 없는데. 너. 대체 뭐야. 어떻게 이런 형태로…….
그렇게 중얼거린 하시나는 기쁜 얼굴을 하며, 데일을 죽여 악마에게 바친다는 얘기를 지껄였었다.
데일 자신에게 대단한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는 걸까?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류의 고민이다.
‘그런 것치고 성수에 닿으면 몸이 녹던데. 잘 모르겠군.’
이 차가운 몸뚱이에 들어서기 전 데일은 그저 조부와 대화하는 걸 좋아하고, 애 돌보기를 잘하는 평범한 청년일 뿐이었다.
특별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페일이 던져준 새로운 의문에 데일이 고심에 빠져들던 그때였다.
연회장의 문이 열리며, 쟁반을 든 하인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흥청망청 취한 사람들은 그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인들의 얼굴에 불길한 흰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하하! 내가 그때 그 자식 코를 납작하게……. 억!”
뚱뚱한 가신 중 하나가 그런 하인과 부딪혔다.
손에 든 와인이 쏟아지며 가신의 옷이 엉망이 되었다.
그는 곧장 걸걸한 욕설을 내뱉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눈 똑바로 안 뜨고 다녀?”
하지만 하인의 반응은 평온했다.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런. 옷이 엉망이 되었군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뭐?”
“당신에게는 붉은색이 더 잘 어울리거든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가신이 화를 내려던 그때.
한 줄기 바람이 가신을 훑고 지나갔다.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산뜻한 바람이었다. 가신의 기름진 머리카락이 한차례 나풀거렸다.
“어?”
다음 순간.
가신의 목에 붉은 실선이 생기더니, 머리가 뚝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피가 튀는 건 그다음이다.
피 분수가 튀며 하인이 쓴 하얀 가면이 붉게 물들었다. 가신의 옷 역시 새빨갛게 변했다.
하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거봐요. 제 말이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