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77)
되돌아오다
* * *
데일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있는 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심지어 모두 아는 얼굴이었다.
하시나. 하킴, 마일즈, 아바프, 검은 뱀 형제단, 마탑의 노예병, 이름도 모르는 용병, 도적, 라팽, 악마 숭배자.
모두 데일이 죽여 생기와 잔혼을 취한 이들.
그들은 넓은 평원에 멀뚱히 서서 데일을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데일은 혼란스러웠다.
어느새 주위에 있던 보육원의 아이들과 조부의 모습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내가 진짜로 꿈이라도 꾸는 건가?’
데일은 어디까지나 과거를 회상하는 것뿐이었다. 집중력을 발휘해, 기억을 되새김질하고, 곱씹는 과정.
편의상 꿈이라 불렀지만 꿈과는 거리가 있었다.
데일은 잠을 잘 수 조차 없는 몸이다.
‘그럼 이건 뭐지?’
문득 떠오른 건 얼마 전에 흡수한 가니아고스의 생기와 잔혼이다.
데일은 녀석의 생기를 흡수하며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껴, 중간에 그만두었다.
악마의 생기를 취한 부작용일까?
분명 영향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데일은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데일에게 죽은 이들은 멀뚱히 그런 데일을 바라보았다.
물러서거나, 겁을 먹거나, 원망하거나 저주의 말을 내뱉지도 않는다.
그저 죽은 사람답게, 시체처럼 무감정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데일의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너도 곧 이렇게 될 것이라고.
문득 방금 들었던 조부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뿌린 대로 되돌아온다.’
작게 한숨을 내쉰 데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건 별로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개짓거리하다가 죽은 귀신들이 제 잘못도 모르고 들러붙는군.’
데일은 주먹을 휘둘러, 가장 가까이에 있던 용병의 얼굴을 후려쳤다.
용병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데일은 꿈에서 깨어났다.
* * *
다시 일어났을 때는 시간이 훌쩍 지나간 상태였다.
마치 진짜 꿈이라도 꾼 듯이 말이다.
데일은 차분히 생각했다.
‘나한테 뭔가 변화가 있긴 한 모양인데.’
여태껏 이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데일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 본인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한 중요한 의식이다.
그 의식이 방해받다니.
데일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했던 분투들이, 오히려 데일이 점점 인간에게서 벗어나고 있게 만드는 게 아닌가.
‘음.’
본래라면 이런 상념 같은 건 그냥 털어냈겠지만, 이건 데일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데일은 쉽사리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래서 바깥에서 온갖 개고생을 다 했는데…… 잠깐. 데일 경.”
“…….”
“데일 경! 듣고 있어요?”
“음?”
식사 자리에서 멍하니 있는 데일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데일은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곱슬머리를 보자마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데일이 물었다.
“하켄? 성에는 언제 들어왔지?”
악마가 죽었으니 백작이 봉쇄를 풀고, 상단도 성안에 들어온 듯하다.
데일의 질문에 하켄이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경. 아까 인사도 했잖아요! 정말.”
옆에서 듣던 에스델이 핀잔을 줬다.
“하켄 얘기가 너무 재미없어서 그런 겁니다. 바깥에서 야영한 얘기를 무슨 영웅담이라도 되는 듯이 말합니까.”
그러고는 데일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오늘 좀 이상하네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하티도 데일의 옆구리를 뭉툭한 코로 툭 두드렸다.
괜찮냐고 묻는 듯했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다.”
“혹시 피로하신 건가요?”
“하하! 사제 양반! 데일 경이 피로라니. 무슨 이상한 얘기야!”
“그건 그렇지만…….”
데일은 걱정하는 에스델을 향해 손을 휘저어주었다.
“정말 별거 아니다. 걱정하지 마라.”
“데일 경이 그리 말하신다면…….”
뒷말을 흐린 에스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데일 경. 오늘 별일 없으면 같이 밖에 나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별일은 없다만 왜 그러지?”
“이래저래 성에 피해가 컸잖습니까? 희생당한 분들도 많고요. 그래서 힘들어하는 주민들이 많습니다. 만약 데일 경이 얼굴을 보여주시면, 그분들께 큰 힘이 될 거예요.”
에스델 다운 의견이었다.
데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부탁이었다.
에스델은 하켄에게도 함께 가지 않겠느냐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밖에서 야영한 하켄은 방에 눌러앉아 술이나 마시고 싶어 했다.
“내가 언제 영주성에서 공짜 술을 먹어 보겠어! 이건 절대 포기 못 해!”
하티 역시 별로 나돌아다니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결국, 페일과 에스델, 데일 셋이 영주성을 나서게 되었다.
도시는 부산스러웠다.
그간 악마 숭배자 탓에 숨을 죽이고 살던 주민들이다. 비로소 평화를 얻었다는 대한 기쁨 때문인지, 아니면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더욱 분주하게 구는 건지.
도시에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여러모로 활기가 넘쳤다. 유령 도시 같던 카엘름에서 비로소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거리를 걷자 사람들은 에스델을 알아보았다.
“아! 에스델 님!”
“에스델 님이다!”
“어제는 고마웠어요!”
에스델이 부지런히 사람들을 돕고 다닌 모양이다.
사람들은 에스델을 몹시 반가워하거나, 감사를 표하거나, 때로는 꽃이나 과일 따위의 선물을 주었다.
페일이 옆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옆에서 같이 도왔는데 말이죠.”
“세상이 그런 거지.”
에스델의 미모에 페일은 상대적으로 묻힌 듯하다. 에스델은 어디서도 밝게 빛나는 느낌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에스델을 보고 다가오던 사람들은 데일을 보았다.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머뭇거렸다. 아무도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익숙한 반응이다.
옆에서 쩔쩔매는 에스델의 등을 데일이 밀었다.
“가라. 나는 잠시 도시를 산책하겠다.”
“그…… 저. 아, 아닙니다. 다녀오세요.”
에스델과 함께 있어봤자 괜히 서로만 불편할 뿐이다.
데일은 에스델에게서 떨어져 홀로 거리를 걸었다.
대로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일부러 한적한 길로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데일은 불현듯. 한 가지를 깨달았다.
‘길 잃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당최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레네였으면 모를까, 처음 방문한 카엘름의 풍경은 낯설기만 했다.
‘하티라도 데려올걸.’
그 커다란 늑대가 있었다면 크릉, 낮게 울고는 돌아가는 길을 찾아주었을 텐데.
그렇게 데일이 멍하니 서서 곤란함을 겪던 그때였다.
누군가가 데일에게 조심히 말을 걸었다.
“저어…….”
고개를 돌리니 웬 중년 여성이 데일을 보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낯이 익은 여인이었다.
분명…….
“그때 그 기사님 맞으시죠? 감사합니다. 아버님을 지켜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여인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분명, 데일에게 웬 노인을 지켜달라던 여인이었다.
“보답을 해드리고 싶은데 가진 게 별로 없어서…….”
그 말대로 여인의 몰골은 꾀죄죄했다. 옷도 다 해졌고, 얼굴에는 삶의 피로가 녹아 있었다.
“신경 쓰지 마시오.”
데일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길이야 잃었지만, 일단 걸을 생각이었다.
계속 걷다 보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별은 둥그니까.’
그런 데일에게 여인이 마음을 굳게 먹고 말했다.
“저기!”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식사를 한 끼 대접해드릴까요? 아니, 대접하게 해주세요! 기사님이 오신다면 아버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의외의 제안에 데일은 잠시 고민했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까.’
데일은 여인을 따라 여인의 집으로 향했다.
가족이 대대로 살아온 듯한 낡은 2층 집이었다. 여인은 문을 열고 들어가며 멋쩍게 웃었다.
“손님 맞을 준비를 안 해놔서…… 누추한 곳이라 죄송해요. 아버님! 와서 보세요! 손님이 오셨어요!”
여인은 집 안으로 들어가며 가족을 불렀다.
데일도 방 안에 걸음을 들인 뒤, 습관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흔한 실내였다. 낡은 가구나 손때가 묻어 있는 벽.
빛의 신앙을 상징하는 상징물도 꽤 많았는데, 어째선지 그 상징물 위에는 담요가 덮여 있었다. 마치 일부러 가려놓은 듯한 모습이다.
데일이 기다리고 있자니 여인과 노인이 나왔다.
노인은 데일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상에! 기사님께서 우리 집에 진짜로 와주시다니! 저는 리델이라 합니다. 켄의 아들 리델.”
“데일이오.”
“정말 반갑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리델이 데일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러다 여인에게 말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아가. 어서 음식을 준비하자꾸나. 기사님께 식사라도 대접해야지!”
여인이 웃으며 답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리델은 데일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손수 식탁까지 안내해주었다.
조금 뒤.
여인이 음식을 내왔다. 감자를 넣어 끓인 수프에 통밀빵. 우유와 치즈.
백작이 연 연회에서 본 호화로운 음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데일은 오히려 이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데일은 투구를 벗어 옆으로 놔둔 뒤.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떠먹었다.
여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입에는 잘 맞으시나요?”
당연히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음식이란 게 맛만으로 먹는 건 아닌 법이다.
데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맛있소. 감사히 먹겠소.”
“그것참 다행이네요……!”
셋은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눴다. 어느 평범한 소시민들이 할법한 그런 시시콜콜하고 특별할 것 없는 대화였다.
데일에게는 이 역시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떠들던 리델은 밤의 여신에 대해 물어오기도 했다.
“그…… 밤의 신도가 되려면 이레네로 가야 합니까?”
데일이 멈칫했다.
“개종할 생각이오?”
“예. 아무래도 이번 일은 어떤 운명이 아닐까 해서…….”
데일은 리델을 말릴 생각이었다. 세상이 변했다 하나, 여전히 밤의 신도들은 차별과 배척 속에 살아가고 있다.
굳이 그런 어려움을 감수하면서까지 밤의 여신을 믿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데일은 리델을 설득하기 위해 말을 고르다, 이내 그만두었다.
리델 나름대로 깊은 고민 끝에 각오를 가지고 내린 결정일 것이다. 데일이 왈가왈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데일이 말했다.
“카엘름에는 신전이 없으니, 나중에 기회가 될 때 이레네로 오시오. 에리얼 사제장이 반갑게 맞아줄 것이오. 하지만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소. 밤의 여신께서도 나이 든 신도가 무리한 여정에서 건강을 상하는 걸 원치는 않으시니 말이오.”
“아아. 조언, 감사히 새겨듣겠습니다.”
말하고 나서 데일은 생각했다.
‘이러고 보니 진짜 흑기사 같군.’
여신을 따르는 기사다운 일을 한 건 이번이 처음 아닐까.
어쨌거나 밤의 신도가 늘어나면 데일에게도 좋은 일이다.
데일에게 우호적인 세력이 조금이라도 커져야 유리하니 말이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데일은 떠날 준비를 했다.
리델은 좀 더 남아주길 원하는 눈치였지만 이제 슬슬 돌아갈 시간이다.
“그럼 이만 일어나보겠소.”
데일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미련이 남은 눈으로 보던 리델이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잠깐. 기다려 보시오!”
“음?”
“아버님. 왜 그러세요?”
“기다려봐!”
리델은 어디론가로 다급히 사라졌다, 품에 무언가를 들고 왔다.
연회색의 망토였다.
무슨 재질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투박하면서도 고풍스러움이 있었다.
리델이 데일에게 망토를 내밀었다.
“역사 속 훌륭한 기사들은 모두 망토를 둘렀다고 합니다. 기사님은 이걸 쓰십시오.”
데일은 망토를 보며 말했다.
“이건…… 꽤 비싸 보이는데.”
“우리 집안 남자들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입니다. 저는 아버지께 물려받았고, 아버지는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물건이죠. 이래 봬도 무두장이 가문이라 관리는 철저히 했습니다. 질이 떨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데일은 고개를 저으며 망토를 내밀었다.
“그런 귀한 물건을 받을 수 없소.”
“받아주십시오.”
“아들에게 물려줘야 할 가보이지 않소.”
리델은 서글픈 눈으로 말했다.
“제 아들과 손자는 모두 죽었습니다.”
“…….”
데일은 입을 다물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 집은 어딘가 쓸쓸한 기운이 있었으니까.
리델이 간절하게 말했다.
“제 아들과 손자를 대신해 이 망토를 둘러주시겠습니까? 두 녀석도 기사님이 입어주면 매우 기뻐할 겁니다.”
“……이걸 정말 내가 받아도 괜찮겠소?”
“부디!”
그렇게 말한 리델은 까치발을 들어, 데일에게 직접 망토를 둘러주었다.
그러고는 뒤로 물러나더니, 세상 다 가진 표정으로 환하게 물었다.
“정말.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어머나.”
데일은 리델과 여인의 미소를 보았다. 그들은 데일이 망토를 입어준 걸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며 무심코 생각했다.
‘돕길 잘했군.’
여인의 부탁을 받고 리델을 구한 건 어쩌면 단순히 ‘인간 흉내’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데일은 진심으로 자기가 한 행동에 보람을 느꼈다.
차갑게 식은 심장도 조금이나마 따뜻해진 느낌이다. 어디까지나 기분 탓이지만.
간밤의 꿈으로 어지럽던 머리도 진정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괜히 심란해했군.’
데일은 그리 생각하며 뿌듯하게 망토를 어루만졌다.
별거 아닌 망토라도 데일에게는 다른 보물 못지않은…….
‘음?’
데일은 망토를 어루만지다 묘한 힘이 전해져 오는 걸 느꼈다.
이 망토.
‘평범한 물건이 아니다.’
뿌린 대로 되돌아온다. 왠지 조부가 뱉은 말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