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111
◈ 111. [Side Story] 노병(老兵)
“쥬피터.”
내 목소리에 돌아본 쥬피터가 놀란 외눈을 끔뻑였다.
“아니, 전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보너스 주러 왔다.”
쥬피터에게 금화 주머니를 던져 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운수가 좀 좋았거든.”
주머니 내용물을 확인한 쥬피터가 휘파람을 불었다.
“일도 못 하고 쉬고 있는 늙은이에게 너무 인심이 후하신 것 아닙니까?”
“그동안 고생했는데, 이 정도야.”
“감사합니다, 전하. 대신 제가 한 잔 사도 되겠습니까?”
“좋지.”
거절하지 않고 나는 쥬피터의 옆자리에 앉았다. 쥬피터가 예의 악당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하의 잔에 술을 따를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새 컵에 위스키를 따라 내게 건네고.
쥬피터가 자신의 컵을 들어 올렸다. 나도 마주 컵을 들었다.
짠-
우리는 말없이 잔을 부딪치고 술을 삼켰다.
“……전하.”
조용히 잔을 비우기 다시 채우기를 한 차례.
쥬피터가 긴 한숨을 뱉었다.
“이 늙은이가 전하께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만, 그래도 이곳 전선의 방어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고 자부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부해도 좋아. 사실이니까.”
“그럼, 전하. 참으로 무례한 요청입니다만…… 이 늙은이의 넋두리를 좀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넋두리?”
쥬피터는 머쓱해하며 잔을 채웠다.
“스스로도 한탄스럽습니다만, 대체 어떻게 인생을 살아 온 건지, 이렇게 말년에 이르러서…… 술주정을 들어줄 지인이 주위에 한 명도 남지 않았습니다.”
“떠돌이 용병이라 그런가?”
“떠돌이, 그렇지요. 떠돌이…….”
쥬피터는 한동안 떠돌이라는 단어를 입에서 곱씹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편하게 해봐. 넋두리.”
“감사합니다, 전하.”
위스키를 한 모금 머금고 있다가 천천히 목 뒤로 넘긴 쥬피터가 입을 열었다.
“짐작하셨겠지만, 제 손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15년이 지났지만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습니다.”
쥬피터의 하나뿐인 눈이 아득한 빛을 띠었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난 순간을요…….”
***
15년 전.
에버블랙 제국 북부전선.
제국군 1군단 소속 마법병단. 2번대 숙영기지.
탁. 탁. 탁.
젖은 성냥에 불을 붙이려 애쓰던 쥬피터는 미간을 팍 구겼다.
벼락을 담은 듯 형형한 그녀의 두 눈에 선명한 짜증이 서렸다.
“아이, 더럽게 안 붙네.”
탁. 탁. 탁.
“에라이!”
결국 성냥을 바닥에 던져 버린 쥬피터는 짜증스레 손가락을 튕겼다.
콰르릉!
바로 옆의 말라붙은 나무에 벼락이 떨어졌고, 나무에 불이 붙었다.
“후우~…….”
쥬피터는 그 불에 담배를 붙였다.
“이러려고 마법 배웠지.”
만족스럽게 끽연하며 쥬피터가 연기를 내뿜는데,
“군영 내에서 마법 쓰지 말랬지, 쥬피터.”
옆에서 시비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상을 찌푸린 쥬피터가 옆을 돌아보자, 새카만 머리를 내려묶고 제복을 차려입은 중년 여성 장교가 뚜벅 뚜벅 걸어왔다.
제국 마법병단 1번대 대장. 레이나였다.
“세상 어느 미친 마법사가 담뱃불을 그딴 식으로 붙이냐?”
쥬피터는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리며 낄낄 웃었다.
“그야 바로 이 몸, 제국 마법병단 2번대 대장! 쥬피터 님이 이렇게 붙이시지.”
“지랄 났다, 아주…….”
구시렁대며 레이나가 손을 휘젓자, 돌풍이 몰아치며 나무에 붙은 불을 껐다.
“담배 남는 거 좀 줘 봐.”
쥬피터의 옆에 와서 선 레이나가 눈짓했다. 쥬피터는 기겁했다.
“야이, 내가 니 봉이냐? 뭔 허구한 날 얼굴 볼 때마다 담배 달래.”
“마지막으로 담배 보급이 온지 한 달이 지났어. 마법병단 통틀어서 양질의 담배를 가진 건 이제 너뿐이란 말이다.”
“겁나 아껴 피우니까 이만큼 남긴 거야. 아무튼 못 줘!”
쥬피터가 매몰차게 거절하자 레이나는 갑자기 두 손을 모으고 간드러진 목소리를 냈다.
“아~ 그러지 말고 하나만 주라아~”
“이런 썅…… 아이 아줌마! 나이 쳐먹고 그러지 좀 마세요.”
레이나의 저질 애교에 기겁한 쥬피터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건넸다.
“벼락불로 붙인 담배 맛이나 보든가.”
“그냥 새거 주면 안 되냐?”
“이거 돗대임. 더 없음.”
“이 할망구는 군생활 내내 돗대만 피우네, 무슨.”
결국 쥬피터와 레이나는 담배 한 개비를 번갈아 태웠다.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며 욕지거리를 주고받는 두 사람에게 오가는 병사들이 연신 경례를 해 보였다.
“충성!”
“충성!”
“어~ 충성.”
“충성충성~”
한껏 풀린 자세로 건달처럼 담배를 피워 대는 두 여자였지만, 그런 둘을 보는 병사들의 시선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
제국 마법병단의 두 에이스.
칼바람 레이나. 벼락불 쥬피터.
제국 마법병단이 제국군 내에서도 굴지의 입지를 가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이 투톱 덕이었다.
마법병단이 창설되고 지난 20년간, 두 마법사가 참여한 전투에서 제국군은 무패였으므로.
병사들의 인사 세례가 끝나고 주위가 한산해지자, 쥬피터가 레이나에게 말했다.
“우리 아그들의 존경 어린 인사를 받으니까 생각난 건데, 야. 다른 부대 대장들은 다 막 얼굴에 흉터 같은 거 존나 많잖아. 얼굴도 막 탔고.”
“응? 뭐…… 아무래도 다들 현장에서 칼부림 좀 하다가 승진한 분들이니까.”
“그런데 우리 마법사들은 다 흉터는커녕 얼굴도 햇볕에 안 타서 다 허옇게 떴단 말이지.”
쥬피터는 평생 군에서 복무했는데도 얼굴이 깨끗했다.
그런 쥬피터를 곁눈질한 레이나가 피식 웃었다.
“요즘 전쟁에서 마법사 역할이 그런걸. 사령부가 좌표 찍어 주면 폭격하고 끝이니.”
제국군 사령부에서는 마법사를 성능 좋은 대포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하는 일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담배를 질겅질겅 씹으며 쥬피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그래. 멀리서 안전하게 마법을 퍼붓는 게 우리 일이지. 인텔리하고, 젠틀하고. 나는 내 일 좋아해.”
“그런데 왜? 뭐 불만 있어?”
“아무래도 대장으로서 위엄은 좀 떨어지는 거 같단 말이지. 회의 소집될 때마다 다른 부대 대장들한테 은근히 무시당하는 거 같고.”
쥬피터는 자신의 왼쪽 눈 아래를 손가락으로 슥 훑었다.
“그래서 다음에는 문신이라도 그려 갈까 싶어.”
“지랄 났네, 진짜…… 야. 니가 회의에서 무시당하는 건 맨날 쳐 조니까 그런 거야.”
“아이 거, 한 번 존 거 같고 면박을 몇 번을 주냐. 싯팔.”
“그야 하필 니가 존 게 황제 폐하께서 직접 참관하신 회의였으니까! 이 폐급 새끼야!”
두 마법사가 다시 투닥거리기 시작하는데, 저쪽에서 부관이 총총 달려왔다.
“레이나 대장님! 쥬피터 대장님!”
“엉~ 듣고 있다. 뭔일이니?”
“사령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곳 기지 북쪽 산기슭에 카밀라 왕국군의 군사기지로 보이는 시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제국군 1군단은 현재 카밀라 왕국이라는 군소왕국을 침공하는 중이었다.
전쟁은 마무리 단계였으나 산발적 저항이 이어졌다.
마법병단은 곳곳에 흩어진 카밀라 왕국군 게릴라를 청소하는 너저분하고 지루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뭔 개미굴이냐고. 지워도 지워도 또 튀어나오네. 후아아암.”
늘어지게 하품하는 쥬피터에게 부관이 사령부 전보를 건넸다.
“내일 오전 05시에, 두 분이서 일제 타격하라는 지시입니다.”
“새벽에 작전 들어가는 거 참 좋아하셔, 우리 사령부…… 아무튼 알겠다고 전해. 까라면 까야지, 뭐.”
전보 종이를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은 쥬피터가 레이나를 향해 눈웃음을 쳤다.
“야, 레이나. 요번 전쟁 끝나면 둘이서 남부에 여행이나 갈까?”
레이나는 몸서리를 쳤다.
“쉰이 넘은 아줌마 둘이서 뭔 여행이야, 징그럽게.”
“뭐 어때서? 돈 많고 능력 있는 골드 미스 둘이서 멋있게 가는 거지. 혹시 알아? 젊고 쌔끈한 남자들 콱! 잡을 수 있을지.”
“하이고, 걔네도 눈이 있지…….”
“야. 이렇게 춥고 음습한 북부에서만 복무하니까 사고가 자꾸 부정적이 되는 거야. 그러지 말고 따땃-한 남부로 한 번만 놀러가 보자.”
쥬피터는 낄낄 웃었다.
“나는 퇴역하면 꼭 남부에서 살 거야. 수영장 물 찰랑찰랑 채운 리조트에 드러누워서 뜨신 햇볕 받으면서 말이야.”
“…….”
쥬피터의 허황된 노후계획을 들어주던 레이나도 이윽고 피식 웃었다.
“그래, 여행을 가든 은퇴 후에 리조트를 장만하든……. 어쨌든 죽기 전에 한 번은 남부에 놀러가자.”
그 이야기는 이곳 전선에서 남부까지의 거리만큼이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두 마법사는 은퇴와 노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을 더 그렇게 낄낄 웃었다.
***
다음날. 새벽 4시 30분.
사령부가 지시한 작전 지점을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던 쥬피터가 눈살을 찌푸렸다.
“야. 저거 군사기지 맞아?”
졸린 얼굴로 뜨거운 차를 삼키던 레이나가 응? 소리를 내며 그쪽을 보았다.
“왜. 군사기지 안 같아?”
“그냥 마을 같은데? 너한테는 어떻게 보이는데?”
망원경을 받아든 레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음…… 잘 모르겠네. 군사기지 치고는 대포나 병기가 안 보이긴 하는데.”
쥬피터는 부관에게 지시했다.
“사령부 연락해. 군사기지 맞는지 한 번 더 확인하라고.”
“옙.”
부관은 사령부로 파발을 달려 보냈다.
잠시 뒤 파발이 다시 돌아왔고, 말을 전해들은 부관이 보고했다.
“사령부 판단에 따르면 군사기지가 확실하다고 합니다.”
“…….”
“카밀라 놈들의 게릴라 전술은 악랄해서, 민간인으로 위장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 마을도 이미 게릴라들에게 점령된 상태라고 사령부는 판단했습니다.”
“그러냐…….”
품의 회중시계를 체크한 부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05시 정각까지 30초 전입니다. 작전 시작까지 카운트하겠습니다.”
“…….”
“30, 29, 28…….”
미간을 찌푸린 채 북쪽을 노려보던 쥬피터는 옆을 흘깃 보았다. 레이나는 이미 두 손에 마력을 그러모으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레이나가 흐릿하게 미소해 보였다.
“남부로 휴가 가자며?”
“…….”
“그럼 후딱 처리해야지, 2번대 대장?”
“작전 시작까지 10초 남았습니다! 10! 9! 8! 7!”
줄어드는 카운트를 가만히 듣다가, 5초 남은 시점에서 쥬피터는 두 손에 벼락을 모으기 시작했다.
파치치칙……!
사령부의 판단은 항상 정확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이 지난 평생 해 온 일이다.
명령을 받으면 수행한다. 그것이 군인이니까.
쿠르릉…….
하늘에 거대한 먹구름이 모여들었고,
“3! 2! 1!”
카운트가 끝났다.
쿠과과과광!
쥬피터가 불러낸 수십 줄기의 벼락이 적의 군사기지 위로 쏟아졌다.
샛노란 벼락에 휩쓸린 건물들이 무너지고, 불이 붙어 타올랐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었다.
뒤이어 레이나가 불러낸 거대한 토네이도가 남은 잔해 위에 작렬했다.
***
“작전 종료입니다. 두 분 대장님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군사기지의 완전한 파괴를 확인한 부관이 말했다.
“이제 중장기사단이 돌입해서 적의 기지를 정리하고 조사할 겁니다. 두 분은 기지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
자신이 불태운 적진을 가만히 노려보던 쥬피터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가 볼래.”
“뭐?”
“저기, 내가 직접 가 봐야겠어.”
기겁한 레이나가 말렸다.
“마법병단은 현장에 접근하는 거 금지야. 우리는 철저히 원거리 포격전 전문이라고. 알면서 왜 그래?”
“…….”
“괜히 갔다가 적의 잔당에게 기습이라도 당했다간, 우리 병단의 전투력이 급감…….”
“가 볼래.”
“야, 쥬피터!”
레이나가 잡아 말리려고 했지만 쥬피터는 막무가내였다. 이미 달려서 산기슭을 올라가고 있었다.
“야야, 저거 잡아.”
주변의 병사들을 돌아본 레이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잡아! 빨리!”
하지만, 누가 감히 마법사를 붙잡아 말린단 말인가.
막으려는 병사들을 거칠게 밀어내며 쥬피터는 기어코 적의 기지에 들어섰다.
시커멓게 탄 마을에는 잉걸불만이 남아 일렁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폐허였다.
쥬피터는 새까맣게 타 죽은 사람들의 시체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품에 무기는 없었다. 대신 인형을 안고 있었다.
“……어린애잖아.”
쥬피터의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쥬피터는 휘청거리며 폐허가 된 마을을 가로질렀다.
병사는커녕, 젊은 남자의 시체조차 드물었다.
등이 굽은 노인과 조그마한 어린아이들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민간인…… 민간인뿐이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에 대한 실감이 뒤늦게 척추를 타고 올라와 뒷목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이 미친 새끼들아! 여기에 무장한 병력 같은 건 아무도 없었어!”
뒤늦게 자신을 쫓아 마을 안으로 달려 들어오는 병사들을 향해 쥬피터가 울부짖었다.
“전부…… 전부 늙은이랑 어린애들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