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680
◈ 680. [STAGE 40] 기간토마키아 (3)
이를 악문 애쉬는 흘러내리는 자신의 자아에…… 영혼에 불길을 놓았다.
화르륵-
부서지는 기억의 파편에 영적인 불꽃이 붙었다.
영혼이 붕괴하는 속도가 가일층 올랐다. 대신, 영적 번제(燔祭)의 대가로 육신을 움직일 힘을 얻었다.
“하아아…….”
쓰러질 것만 같던 온몸에, 회광반조처럼 힘이 실린다.
애쉬는 자신을 구성하는 기억의 가장 깊은 뿌리에까지 거리낌 없이 불을 놓았다.
무수한 세월, 무수한 회차 동안 쌓아 올린 추억들이, 인연들이 재가 되어 흩날린다.
무슨 상관인가.
추억 따위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이 까마득한 시간들이 모조리 불타서 열기와 돌풍으로 변해, 찰나의 동력으로 전환되어준다면. 감사히 그렇게 할 뿐.
“아아아아아-!”
짐승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애쉬는 다시금 악룡을 향해 달려들었다.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독을 장전해서, 놈의 빈틈에 쑤셔 넣는다.
쏟아지는 흑룡의 요격을 무의식 상태에서 피해내고 받아치며, 애쉬는 제 안의 뿌리들을 불살랐다.
– 네게만 무거운 짐을 맡겨서 미안하구나.
까마득한 어느 과거에.
피투성이가 된 채, 자신의 어깨를 꽉 쥐던 아버지와 형들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 우리가 너와 같은 길을 걸었음을, 잊지 말거라.
불태운다.
아버지와, 형들과 함께 한 공동전선의 날들이 불꽃에 엉겨 사라졌다.
– 전하의 아래에서 싸울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얼어붙은 대지 위에서.
최후의 전투를 앞두고 함께 싸워 온 영웅과 병사들이 환하게 웃으며 무기를 치켜들었다.
– 저희가 목숨으로 길을 열겠습니다. 대업을 성취하소서……!
불태운다.
어깨를 맞대고 지옥을 넘나들었던 동료들의 얼굴이 불길 아래로 검게 번져 흩어졌다.
– 괜찮아. 사랑스러운 나의 본헤이터.
어머니의 건조한 입술이 부드럽게 이마에 와 닿았다.
– 엄마는 언제나 네 옆에 있을 거야.
자상하게 미소하며 자신을 안아주던 어머니와의, 유년기의 추억도…….
불태운다.
“아아아아아……!”
애쉬의 눈가로 불꽃이 피눈물처럼 타고 흘러내렸다.
불태운다. 불태운다. 불태운다.
추억 따위 필요 없다. 어차피 스스로를 전부 내버린 지 오래다.
자신은 세이브 슬롯. 세기의 초점. 멸망을 죽일 단도와 독병. 구원을 대가로 바쳐질 은화. 사용되어 버려질 밧줄일 따름.
아깝지 않다. 슬프지 않다. 괴롭지 않다. 그런 사치스러운 감정은 이미 모두 죽은 지 오래니까.그
저 바치고, 불태우고, 그리고 그 끝에서,
이 세상을…….
– 아…….
그 순간, 눈앞의 장면이 바뀌었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의 정원 가운데에서.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은 채 오전의 햇살을 맞는, 열다섯 살의 세레나데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애쉬와 눈이 마주친 세레나데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숙였다.
커다란 은빛 눈 위로 기다란 속눈썹이 연푸른 그림자를 드리웠다.
“…….”
불꽃이,
멈췄다.
“……아.”
어찌 잊으랴.
영혼에 새겨진, 이날의 풍경을.
서로 이마를 맞댄 채 뺨을 붉히고 수줍게 웃던, 약혼의 서약을 나누던 소년과 소녀의 모습을.
“아…….”
괴수가 뿜어낸 흑염의 열기에 말라붙었던 애쉬의 눈가에 순간 핑글, 눈물이 고였다.
애쉬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들어, 이제는 닿을 수 없는 그날의 추억을 향해 손을 뻗었고…….
화르르륵!
그 추억 위로 불길이 쏟아졌다.
나이트 브링어가 쏟아낸 브레스가 무참하게 애쉬를 덮쳤다.
어느새 부활한 나이트 브링어의 다른 머리 여섯이 사방에서 애쉬를 덮쳤고, 애쉬는 그 공격들을 모두 피해냈으나 그 끝에 나이트 브링어의 가운데 머리가 뿜어낸 브레스는 피해내지 못했다.
직격당한 애쉬의 온몸이 불타올랐다. 애쉬의 손끝에 장전되어 있던 마지막 독 또한 깨끗하게 재가 되어 버렸다.
짧은 브레스가 끝나고 나이트 브링어가 숨결을 거둬들이자, 애쉬는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흑룡의 피를 훔쳐 용이 되었기에, 그 숨결에도 흑염에도 내성이 있었으나, 직격이었다. 애쉬는 더 이상 싸우기는커녕 목숨도 곧 끊어질 듯했다.
‘아아.’
끊어지고 녹아내린 이성 속에서 애쉬는 느릿하게 사고했다.
끝이다.
이제는 더 이상, 이 승부를 이어갈 방법이 없다…….
《내게 줄 수 있는 유희는 여기까지인가?》
나이트 브링어가 조곤조곤 속삭였다.
《즐거웠지만, 막을 내려야 하는 입장에서는, 역시 앙코르 공연은 좀 지루해서.》
“…….”
《이만 끝내지. 플레이어. 이번에야말로-》
말을 채 맺지 못하고 나이트 브링어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음?》
숲 저편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앗-!
맨발이 가볍게 땅을 차는 소리가 울리더니, 조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기다란 흑발을 휘날리는, 붕대가 감긴 몸 위에 사슬 코트 갑옷을 차려입은, 호박색 용안의 소유자.
《……반룡?》
더스크 브링어였다.
나이트 브링어는 무어라 조롱을 던지려 했으나, 더스크 브링어는 상대와 대화를 나눌 여유도 없었다. 그녀는 허공에서 한껏 포효했다.
“아아아아아-!”
더스크 브링어 역시 자신의 모든 피와 영혼에 불을 놓았다.
그녀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온 노을빛 마력이 마구 증식하며 뻗어나가더니 이윽고 하나의 형상으로 합쳐졌다.
돋아난 뿔은 거대한 머리와 함께 위로 솟구쳤고, 끝없이 확장된 날개는 돌풍을 일으키며 좌우로 펼쳐졌다. 탑처럼 솟구친 두꺼운 꼬리가 채찍처럼 지면을 휩쓸었다.
거대해진 팔다리가 지면에 내려섬과 동시에, 마지막으로 마력으로 이뤄진 커다란 비늘들이 그 형상의 위에 덮였다.
용혈폭주, 그 최종 단계.
신화재현(神話再現).
마력을 실체화시켜, 일시적이나마 선조룡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변모시키는- 그녀가 보유한 최강의 자멸기.
《아아아아아-!》
자신과 이름이 같았던 위대한 선조의 모습.
거대한 적룡의 모습으로 현세에 강림을 끝마친 더스크 브링어가 온몸에서 불꽃을 흩뿌리며 흑룡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닐 텐데, 반룡-!》
이제 거의 입이 찢어질 듯 커다랗게 미소를 머금은 나이트 브링어가 그 공격을 받아냈다.
쿠우웅-!
산맥과 산맥이 서로 부딪히면 날 법한 소리가 지상에 울렸다.
거대한 두 용은 서로 충돌하는 것만으로도 경천동지(驚天動地)였다. 지표가 쩍 소리를 내며 계곡 아래까지 갈라졌고, 수천 그루 나무로 이뤄진 숲이 줄지어 쓰러졌다. 대기에 열풍이 휘몰아치고 장막 너머의 구름이 물결쳤다.
더스크 브링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육체의 크기가 불어났지만, 이미 북상하며 밤을 흡수한 나이트 브링어가 훨씬 더 거대했다.
더스크 브링어는 덩치 차이를 신경 쓰지 않고 필사적으로 흑룡에게 덤벼들었다. 그녀의 모든 동작을 뒤따라 눈부신 불꽃이 사방으로 폭죽처럼 터져나갔다.
쾅! 쾅! 콰과광……!
짧은 순간이나마 더스크 브링어는 나이트 브링어를 압도했다. 하지만 나이트 브링어는 진작 더스크 브링어의 약점을 눈치채고 있었다.
《피 냄새가 난다, 반룡. 네 선조가 물려준 위대한 피가 새어 나오는 냄새가…….》
어느새 나이트 브링어의 보조 머리 여섯 개가 더스크 브링어의 뒤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더스크 브링어는 포효하며 요격하려 했지만,
《등의 상처는 낫고 덤볐어야지.》
아물지 못한 상처가 너무 컸다.
여섯 개의 머리가 동시에 브레스를 토해냈고, 더스크 브링어의 등 위에 일시에 내리꽂혔다.
마력으로 이뤄진 비늘들이 겹겹이 벗겨지더니 이윽고 관통당했다.
적룡의 등 뒤에서 배 앞으로, 뭉쳐진 여섯 개의 브레스가 마치 기다란 창처럼 내리꽂혔다.
《크하아악……!》
가까스로 고통을 견뎌낸 더스크 브링어는 상처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가려 했다. 그녀는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투웅-!
하지만 다음 순간, 나이트 브링어의 거대한 앞발이 더스크 브링어의 휘둘러지던 한쪽 주먹을 낚아채 움켜쥐었다.
《……!》
경악하는 더스크 브링어의 귓가에 대고 나이트 브링어가 조소했다.
《네가 다루기에는 과분한 힘이다, 반룡.》
그리고 그대로,
콰드드드득-!
더스크 브링어의 한쪽 팔을 반대 방향으로 뜯어 뽑아내어 버렸다.
《……!》
뽑혀 나간 한쪽 어깨에서 피 대신 눈부신 노을빛 마력을 뿜어내며, 소리 없는 비명을 토해내면서, 이를 악문 더스크 브링어는 제자리에서 몸을 회전하며 채찍처럼 꼬리를 후려치려 했다.
쿠웅-!
하지만, 어느새 몸을 일으킨 나이트 브링어가 뒷발로 가볍게 그 꼬리를 짓밟아 멈추었다.
《윽-?!》
그리고 잠시 움직임이 멈춘 더스크 브링어를, 나이트 브링어는 일곱 쌍의 [어둠의 마안]으로 지그시 응시했다.
열네 개의 눈동자가 일시에 어둠을 뿜어냈다.
나이트 브링어가 보유한 최강의 공격기, ‘벼려낸 밤’.
창세부터 쌓아 내려온 증오와 원한으로 밤을 벼려내어, 나이트 브링어는 숙적의 후예를 난도질했다.
콰직! 콰득! 푸확……!
무형의 어둠이 칼날처럼 날아들어 더스크 브링어의 온몸을 찢어발겼다.
《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온몸이 너덜너덜하게 뜯겨나가며 더스크 브링어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냈다.
전신이 박살 난 더스크 브링어의 온몸에서 노을빛 마력이 핏물처럼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런 더스크 브링어를 향해 나이트 브링어의 일곱 머리가 달려들었다.
악룡의 일곱 머리는 흉포하게 이빨을 놀려, 더스크 브링어의 마력으로 이뤄진 온몸을 게걸스레 씹어 삼켰다.
이제 더 이상 용의 형상을 유지하지도 못한 채, 뼈대만 남은 흉한 몰골이 되어 비틀거리던 더스크 브링어는 나이트 브링어 쪽으로 천천히 쓰러졌다.
쿵……!
힘 빠진 더스크 브링어의 몸이 나이트 브링어의 몸에 닿았다. 나이트 브링어는 상대를 끝장냈으리라 확신하고 그녀의 최후를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번뜩!
더스크 브링어의 힘 풀린 두 눈에 빛이 실렸다.
더 이상 용도 무엇도 아닌, 갈기갈기 뜯겨나간 무언가의 형상으로, 더스크 브링어는 있는 힘껏 나이트 브링어를 끌어안듯 붙들었다.
《뭐하는 거냐?》
정말로 의아해서 나이트 브링어가 물었고,
《……지금이야.》
더스크 브링어는 거칠게 포효했다.
《무명 언니-!》
《……?!》
기함한 나이트 브링어가 경악한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더스크 브링어와 마찬가지로, 텔레포트 게이트가 망가지기 직전 이곳에 도달해, 자신이 나서야 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쓰러져 있던 애쉬를 어느새 자신의 뒤쪽 안전한 공간으로 옮겨둔.
호수왕국의 폐위왕녀가, 어둠 속에서 검을 다잡았다.
“……네가 준 기회.”
투학-!
무명의 손안에 들린 낡아빠진 장검에서 무시무시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바람에 휘몰아치는 백발 사이로, 로브 후드 속에 감겨 있던 무명의 청록색 눈동자가 올곧게 뜨였다.
“결단코 헛되이 하지 않으마, 더스크 동생.”
빛살이 쏘아졌다.
검을 뒤로하고 마력을 뿜어내 미사일처럼 날아든 무명이 삽시간에 나이트 브링어의 목전에 도달했다.
나이트 브링어는 그런 무명을 영격하려 했으나, 더스크 브링어가 기어이 온몸으로 그 공격을 모두 받아내며 버텼다.
터져나간 더스크 브링어의 육체가 노을빛으로 폭죽처럼 산란했다.
그 불꽃 아래에서, 무명은 양손으로 철검을 움켜쥐고, 자신의 영혼에 남은 모든 빛을 그 칼날에 그러모아서-
번쩍-!
일생 가장 강력한 검격을, 악룡을 향해 베어냈다.
어둠으로 뒤덮인 세상에 일순간 눈이 멀 듯 강렬하고 거대한 빛기둥이 솟구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