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98
98
무역도시 발리체 (2)
* * *
발리체의 성문까지 도착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계 최대의 중계 도시 발리체.
발리체는 무역 왕국 바르다이의 수도이자 모든 물류의 중심에 위치하는 도시다.
당연히 각 지역에서 몰려드는 상인이며 여행객이 넘쳐났다.
그렇기 때문에 발리체의 검문소는 항상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엘런의 상행은 검문소의 긴 줄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고스 상단이라면 대륙에서도 알아주는 규모의 상단이었다.
그곳의 행수라면 이 정도 줄은 새치기할 만도 했다.
경비원들을 불러 약간의 소란만 일으키면 줄을 무시하고 먼저 통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괜한 소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대신에 시간은 넉넉하다며 조용히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신분패를 보여 주시겠습니까?”
잠시 후, 그들의 차례가 되었고 경비병이 다가왔다.
“수고가 많군. 여기 있네.”
“라고스 상단의 호버 님이시군요. 오랜만에 돌아오셨습니다.”
경비병은 호버와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아아, 요즘 이곳이 가장 잘 팔리는 물건이 있지 않은가? 그 물건이 대륙 전체에서 인기거든.”
호버도 그와 반갑게 인사했다.
“안 그래도 요즘 그 물건들 때문에 성 전체에 경비가 강화되어서 저희는 죽을 맛입니다. 잠시 짐을 검사해도 되겠습니까?”
“그것이 자네의 일인데 당연하지.”
“감사합니다.”
경비병은 정중하게 인사한 후 짐 마차를 검사했다.
그의 검사는 말이 검사였지 전반적으로 형식적이었다.
이곳은 하루에도 수많은 짐마차가 왔다 갔다 하는 곳이었다.
그 많은 마차를 일일이 검사하다가는 성문이 꽉 막힐 게 분명했다.
“벨라에서 오나 봅니다. 목재들이 많군요.”
“서부 대륙은 항상 목재가 부족하지 않은가.”
“하긴 그렇습니다.”
경비병이 다시 호버가 있는 마차로 돌아왔다.
이제는 인원 검사를 할 차례였다. 아무리 발리체라도 인원 검사는 철저히 했다.
높은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인 만큼 치안은 철저해야 했기 때문이다.
“동행하신 분들의 신분패를 볼 수 있겠습니까?”
엘런은 왕실에서 직접 제작해 준 가짜 신분증을 내밀었다.
그만큼 들킬 염려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경병이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면 귀찮아질 것이 분명했다.
“시간도 돈인 분인데 제가 이렇게 잡아 놓고 있을 수는 없죠. 발리체에서 좋은 거래하시기 바랍니다.”
철저하게 볼 것으로 예상했던 경비병은 곧바로 길을 터 주었다.
“고맙네, 자네도 수고하게.”
마차 창문을 닫은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이렇게 일개 경비병에게도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는 것도 장사 수완의 일부 아니겠습니까? 저들의 입은 누구보다 가볍거든요. 덕분에 저는 이렇게 쉽게 검문소를 통과하곤 합니다.”
“자네 덕분에 금방 들어올 수 있었네.”
그것은 진심이었다. 성문의 줄이 밀리는 이유는 대부분 이 신분 검사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경비병은 신분증을 슥 보고는 들여보내 주었다. 경비병들 사이에서 호버는 이미 친절한 상인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것이다.
“여기까지 태워 줘서 고맙네. 나는 이만 내려 보겠네.”
도시 초입에서부터 내린다는 엘런의 말에 호버는 아쉬워했다.
“벌써 가십니까? 아쉽습니다.”
“언젠가 다시 볼 날이 있겠지.”
“혹시 아직도 저 말을 팔 생각이 없습니까?”
호버가 못내 아쉬운 듯 엘런의 말을 쳐다보았다.
“안 판다고 하였네.”
“그렇습니까? 그것 역시 아쉽군요.”
곧 마차가 멈추고 엘런과 호버 모두 마차에서 내렸다.
“좋은 거래 하길 바라네.”
“감사합니다. 아!”
고개를 숙이던 호버는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자신의 품을 뒤졌다.
“쾬튼의 물건을 구한다고 하셨지요? 그럼 아마 이게 필요하실 겁니다.”
호버의 손에는 작은 패가 들려 있었다.
그 패에는 라고스 상단의 문양과 말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이걸 나에게 줘도 괜찮은가?”
과거 용병 생활을 해 봤던 엘런은 이 패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라고스 상단의 행수임을 뜻하는 패였다. 이 패는 신분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상행 중 예기치 못한 도움을 받았을 때 보증의 의미로 주는 것이기도 했다.
즉, 나중에 그 도움의 값을 치러 주겠다는 말이었다.
“덕분에 이곳까지 안심하고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법사님과 연을 맺고 싶다는 의미로 드리는 뇌물이기도 합니다.”
호버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무엇보다 그 패가 있어야 경매장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아직 킨버 상단은 발리체에 자리를 잡지 못해서 킨버 상단의 패는 통하지 않는 곳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엘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이 친절은 꼭 보답하겠네.”
“그럼 즐거운 여행이 되십시오.”
일단 받은 호의는 잊지 않는 것이 엘런의 원칙이었다. 그는 호버의 이름을 기억하기로 했다.
* * *
라고스 상행에서 나온 엘런은 발리체를 돌아보고 있었다.
전생에도 몇 번 온 적이 있던 도시였지만, 이곳은 올 때마다 새로웠다.
무역 왕국의 수도답게 대륙의 모든 인종을 다 볼 수 있었다.
하얀 피부에 털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는 사내, 까무잡잡한 피부에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여성 등.
낯선 피부색과 복식은 이 도시의 다양성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이곳은 정말 정신이 없구나.
원래부터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프로뱅이었지만, 발리체는 그 정도가 심했다.
‘아마 도시 전체가 이럴 겁니다.’
-그것 참 절망적인 소식이군.
엘런은 프로뱅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발리체 곳곳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가 그저 관광을 목적으로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른쪽 나무판자 위에도 있군.’
그의 갈색 눈은 금빛 안광을 띠고 있었다.
‘왼쪽 건물 모서리에도 3개가 있고.’
4서클의 마법 호크아이. 멀리 있는 것을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마법이었다.
‘이 일대에는 6개 정도가 있는 건가?’
엘런은 지금 발리체의 지하 세계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아르곤이라는 걸출한 정보기관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전 대륙의 정보를 주무를 수 있을 규모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해리 포드의 자세한 정보, 프로드 왕국 내의 대략적인 정보, 그리고 엘런이 특별히 지시한 곳의 정보가 다였다.
그리고 발리체는 그가 지시해 놓은 곳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이곳의 정보는 매우 부족한 상태였다.
방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일을 계획하는 엘런에게 그것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중 가장 큰 곳을 찾아야겠어.’
정보 길드는 자신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도시 곳곳에 남겨 놓는다.
그리고 표식을 남기는 유형을 세어 보면 이 일대의 정보 길드가 몇 개인지 알 수 있었다.
“표식이 가장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넓은 범위에 걸쳐 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가장 실력 있는 정보 길드를 찾는 방법입니다.”
언젠가 카빈이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라 엘런은 가장 적합한 정보 길드를 찾았다.
그는 그 표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발리체 시내를 누비고 있었다.
이미 지나쳤던 곳도 몇 번을 반복해서 지나치기도 했고, 중간중간 표식을 놓치기도 하여 길을 헤매기도 했다.
‘정말 복잡하게도 숨겨 놓았군.’
한참을 걸은 후에야 엘런은 허름한 건물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엘런은 조심스럽게 그 건물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기름칠이 전혀 되지 않았는지 쇠 긁히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건물 안에서는 케케묵은 냄새가 진동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보니 실내에는 먼지가 가득 차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가 보아도 오랫동안 관리를 전혀 하지 않은 건물 같았다.
문을 닫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엘런은 제피로스를 불러냈다.
“제피, 이 근처에 공기의 흐름이 이상한 곳이 있어?”
“잠깐만.”
제피로스의 몸이 공기 중으로 스며들었다.
그가 건물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하자 엘런은 그 감각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휘이잉.
여기저기 쏘다니던 제피로스가 공기 흐름이 이상한 곳을 발견했다.
그곳은 건물 주방의 바닥이었다. 그리고 덤으로 이곳에 있는 쥐새끼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엘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고마워.”
제피로스는 엘런의 칭찬이 기뻤는지 한 바퀴 빙글 돌더니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탁.
엘런은 이상점이 발견된 바닥 바로 위에 섰다.
그러고는 두둑한 돈주머니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보여 주려는 듯 머리 높게 들어 올렸다.
몇 분간, 돈주머니를 흔들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냥 한 놈 잡아야 하나?’
엘런의 주변 온도가 2도가량 떨어졌다.
이시스의 힘을 사용하려고 준비했기 때문이다.
탕.
끼이익.
그때 갑자기 부엌 바닥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다행이야.’
지하 세계에서 유일하게 통용되는 것은 바로 돈과 힘이었다.
이렇게 금화 냄새를 풀풀 풍겼으나 아무 반응도 없자, 엘런은 두 번째 방법인 힘을 사용하려고 한 것이었다.
다행히 사태가 귀찮아지기 전에 첫 번째 방법이 통했다.
엘런은 그리 넓지 않은 틈으로 내려갔다. 옅은 램프가 일정하게 걸려 있어 흐릿하게나마 앞을 볼 수 있었다.
“제피, 한 번 더 부탁할게.”
휘이잉.
제피로스가 다시 바람으로 변했다.
그의 바람이 지하를 완전히 훑고 돌아오는 데까지는 몇 초면 충분했다.
‘역시 인원도 많고 아지트 규모도 꽤 커.’
엘런은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알고는 속으로 기뻐했다.
‘길드원들 실력도 높은 편이다. 특히 왼쪽 천장에 있는 녀석은 꽤 강한 녀석인데?’
그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소리였다.
명색이 발리체 최고의 정보 길드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마음먹고 몸을 숨기고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자신들의 아지트였다.
하지만 엘런은 그들의 위치를 전부 파악해 버렸다.
과거의 엘런이었으면 저렇게 마음먹고 숨은 녀석들을 정확한 위치까지 파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 간다.”
“고마워.”
그것은 바로 이 제피로스 덕분이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엘런을 죽일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다.
하지만 엘런은 굳이 알은체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자신에게 살기를 내뿜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낯선 이에게 경계심을 표하고 있을 뿐이었다.
싸워서 이기지 못할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자신이 불청객.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약 5분을 내려가자 좁은 통로가 끝나고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은밀하게 엘런을 쫓고 있었다.
‘저자인가?’
그곳에는 라이트 마법으로 빛을 내고 있는 등을 달아 놓은 낡은 책상이 있었다.
그리고 의자에는 푸른 머리에 얼굴 여기저기에 흉터가 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불청객이로군.”
“그대도 내 돈을 보고 문을 열어 준 것 아니오?”
“그건 부정할 수 없다.”
엘런은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우리는 돈만 충분하다면 누구의 의뢰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다만, 그 비용이 비싸다는 것이지.”
툭.
엘런은 입구에서 보여 주었던 돈주머니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 주머니는 입구가 약간 풀려 있었는데, 그 사이로 금빛이 반짝였다.
“내가 돈에는 걱정이 없는 편이오.”
“그렇다면 지금부터 고용주라고 불러드리지.”
충분한 돈이 있으니 고용주가 된다.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그리고 길드장의 말과 동시에 엘런을 지켜보고 있던 길드원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찜찜하게 하던 기운이 사라지자 엘런은 한결 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정보 길드 키파의 길드 마스터 알레그요. 고용주의 의뢰는 무엇이요?”
그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제부터는 진지하게 임하겠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