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21
제21화
백운천 길드는 월요일마다 주례 회의를 진행한다.
간부들이 한데 모여 저번 주 있었던 일을 보고하고 한 주간의 계획을 의논하는 것이다.
회의는 세상 모든 회의가 그렇듯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길드 마스터이자 ‘천공(天空)의 기사’라고 불리는 이태천은 따분함을 느끼며 원래라면 백도운이 앉아 있었을 자리를 바라봤다.
그 자리엔 해체업자 관리팀의 이성훈 대리가 대신 앉아 있었다.
이성훈은 ‘나는 어디? 여긴 누구?’라고 묻고 싶은 얼굴을 했다.
“헐, 대박.”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머리를 분홍색으로 염색한 단발머리 소녀 ‘이연지’를 바라봤다.
그녀는 16살의 나이로 대한민국 최연소 A급 헌터가 된 천재로, 작년 백운천을 스스로 찾아와 가입시켜 달라고 졸랐다.
당시 이태천은 “네가 여길 왜 와?”라고 물었고, 그녀는 “아저씨랑 도희 언니 팬이라서요”라고 맹랑하게 대답했다.
나는 아저씬데 왜 도희는 언니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차치했다.
“연지야. 아무리 회의 시간이 지루하다지만-”
“강남 성모 병원이 얼어붙었대요.”
이연지의 말에 회의 진행자인 안경 쓴 남성 한재임이 뉴스를 빠르게 검색해 홀로그램 화면을 띄웠다.
한가운데에 떠오른 화면엔 여성 기자가 주변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화면 아래에는 ‘일대 그룹 소속 헌터, 들어간 지 20분 지나’라는 자막이 떠 있었다.
“우 회장의 딸이 결국 폭주했군.”
“우담화 채집 가능한 사람 찾았다고 하지 않았나? 원정 어떻게 됐어?”
“어제 아침 출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런, 우담화 구해 와 봐야 이미 늦었군.”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이 한마디씩 떠드는 가운데, 이태천은 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화면 속 가면을 쓴 남성이 자꾸만 눈에 들어와서다.
그 남성은 한 여성에게 자기한테 맡기라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고는 혼자 건물로 들어갔다.
화면 아래엔 ‘일대 그룹 소속 헌터로 알려져… 그는 누구?’라는 자막이 떠 있었다.
“……도운이?”
이태천은 가면 쓴 남성의 뒷모습에서 연상된 친구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무리 가면을 썼다고 한들, 생선 꽁다리 같은 짧은 꽁지머리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꽁지머리를 한 친구를 보면서 그는 ‘정체를 숨길 생각이 있긴 한 거야?’라고 생각했다.
“저놈 왜 저기 있어?”
“누구요?”
“저 가면 쓴 놈. 저거 도운이잖아.”
“네? 무슨 말씀입니까?”
“휴가 갔다는 놈이 왜 저기 있어?”
“…….”
그 순간, 회의실이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딱 두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성훈은 멍한 얼굴에서 ‘야, 이거 큰일 났네?’라는 얼굴로 바뀐 채 딸꾹질까지 해 댔고, 이연지는 주변 사람들을 한심하게 바라본 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태천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길드원들을 천천히 바라보다가,
“태천아, 나랑 너는 멍청해. 알지?”
세상에 하나뿐인 친구의 말을 떠올렸다.
당시 이태천은 “왜 갑자기 시비야, 개새끼야”라고 대답해 친구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있던 한숨을 끌어올렸다.
“우린 머리 쓰지 말고 어림짐작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외워. 왠지 분위기가 엿 같다? 그럼 무조건 움직여.”
그 말을 듣고 이태천은 진심으로 백도운을 자신의 친구라고 생각했다.
‘이 멍청한 새끼가 대체 뭐라는 거야?’라고 생각했다는 소리다.
백도희가 말을 정정해 주지 않았다면 계속 그리 생각했을 거고, 백도운은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치다 화병이 들었을 거다.
그가 알기에 가장 똑똑한 사람인 백도희는 이렇게 말했다.
“현상을 보면 생각하고, 생각이 났으면 행동해라. 근데 오빠는 머리가 나쁘니까 생각하는 거 건너뛰고 행동부터 하라는 소리예요. 그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해도 가만히 있는 거보단 나을 테니까.”
그러므로 이태천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다.
“이성훈 대리.”
“네, 딸꾹! 네?”
“지금 백도운 팀장 어디에 있습니까?”
“…….”
이태천의 시선은 이성훈에게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말할 생각이 없음을 깨닫고, 곧바로 시선을 돌려 이연지를 바라봤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거나 손바닥을 휘젓기 시작했다.
“이연지.”
“4일 전에 팀장님 길드 그만뒀어요. 그날 바로 사표 수리됐고.”
쾅!
이태천이 회의실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은 아니다.
책상이 부서지지 않은 것이 그 증거였다.
“도희 언니가 말하지 말랬어요.”
“도희가?”
“오빠가 먼저 혼내면 자기를 말릴 테니까요.”
“그래, 타당하군. 너흰?”
“…….”
“저런 이유도 없으면서 내게 말을 안 했다?”
이태천은 주변 사람들을 노려보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곧바로 회의실 문으로 걸어갔다.
“오늘 회의는 이만 끝내지.”
“네? 오늘 처리해야 할 건이 몇 건인데요. 마스터! 마스, 야! 이태천!”
“기다려 보십시오! 왜 그랬는지 설명할 테니-!”
길드원들이 다급하게 이태천을 불러 세웠으나 그는 안 들린다는 듯 회의실을 나갔다.
덩그러니 남은 길드원들은 어쩔 줄 몰라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때, 이연지가 가운데에 떠오른 화면을 바라보며 신기한 듯 말했다.
“어? 얼음 다 녹았네?”
화면 속엔 얼음 따윈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의 병원이 서 있었다.
***
세계수 소환 스킬을 쓰자 몸에서 모든 마나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그로 인한 마나 고갈로 현기증이 나 쓰러질 뻔했다.
우연후가 쓰러지지 않게 붙잡아 주었다.
“괜찮습니까?”
“아, 네. 고맙습니다, 마나 소모가 좀 심한 스킬이라서….”
“대체 무슨 스킬을 쓴 겁니까?”
“몸이… 몸이 편해졌어요!”
제 몸을 내려다보던 우채연이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날 바라봤다.
다행이다. 세계수를 소환한 게 도움이 된 듯하다.
세계수를 소환하면 일정 지역의 모든 부정 에너지를 무효로 하니 그녀의 폭주한 음기를 억누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 생각이 완벽하게 들어맞은 거다.
그녀의 몸속에서 소용돌이치던 부정 에너지조차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잠잠해졌다.
그런데… 세계수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돌아보며 계속 찾아보는데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거라곤 얼음이 말끔하게 사라진 병실뿐이었다.
“…….”
“…….”
그때, 우 씨 남매가 나를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니, 아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은 정확하게 내 정수리 쪽이다.
그 모습을 보고 세계수가 어디에 소환됐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 내 머리에 새싹 자라나 있습니까?”
“네. 그거, 음…. 그거 대체 뭡니까?”
“…….”
“귀, 귀엽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날 위로해 줄 생각인 듯 작은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위로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나보다 어린애를 마음 쓰게 했다는 점에서 더 비참했다.
정말이지, 가면을 쓰고 있던 게 천만다행이다.
가면을 쓰지 않고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채였다면….
이 창피함을 무슨 수로 헤쳐 나갈 수 있었을까.
“지온? 자네 웬 새싹을 머리에 달고 있나?”
기절했던 우찬성 회장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던진 질문은 그것이었다.
내 머리 위에 소환된 세계수가 그의 몸을 회복시켜 주었기 때문에 그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일어날 수 있었다.
쯧. 조금만 더 늦게 일어날 것이지.
세계수 소환의 발동 시간은 30초밖에 되지 않는다.
그가 몇 초만 더 늦게 깨어났더라면 머리 위에 세계수가 자라난 걸 보지 못했을 거다.
“…그냥 넘어가 주면 고맙겠습니다만.”
“은인의 부탁인데, 그렇게 하지.”
우 회장은 다리를 포개고 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은인’이라고 표현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지금 상황을 모두 파악한 듯했다.
깨어나자마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걸 보니, 과연 대기업 회장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정수리 쪽을 보고 있던 우채연이 말했다.
“어, 방금 새싹 사라졌어요!”
“원래 오래 유지하지 못하는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숙련도가 오르면 시간을 늘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30초가 최대 발동 시간이다.
그러자 그녀는 무척이나 아쉬운 얼굴을 했다.
“그래요? 아쉽다. 귀여웠는데….”
“…아, 맞다. 이런 바보 같으니.”
“……?”
“헌터 자격증 좀 주겠습니까? 이것 때문에 온 거였는데 까먹고 있었네요.”
“응? 우릴 구하려고 온 거 아니었나?”
“겸사겸사? 주목적은 자격증이었고요.”
“…….”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우 씨 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기분 좀 상했으려나? 싶어 쳐다보는데, 우 씨 부자가 갑자기 푸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이 양반들 갑자기 왜 웃어. 내 말이 그렇게 웃겼나?
우채연 좀 봐.
당신들 왜 웃는 건지 영문을 몰라서 당황스러워하잖아.
“자네 뜻은 잘 알겠네. 하지만 이렇게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그래요. 우리 우 씨는 은혜를 꼭 갚아야 합니다.”
후….
이 부자 또 뭔가 오해를 한 거 같다.
사람의 좋은 점만 보는 건 좋은데,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저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거 아닙니다.”
그리 말했지만, 우 씨 부자는 내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둘은 그저 눈을 감고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여 보일 뿐이다.
아니,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너그러운 미소 짓지 말라고.
“아니라니까요?”
“그래, 그래. 알겠네.”
“아, 그런 거구나!”
“…….”
우 씨 부자의 오해를 풀지도 못했는데 침대의 우채연까지 끼어들었다.
그녀도 아버지와 오빠처럼 너그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날 바라봤다.
와, 이 사람들 대체 뭐지?
뭐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방법으로 사람 미치게 하네?
에이, 됐다.
나 좋게 봐주는데 뭐하러 오해를 풀려고 노력한단 말인가.
그냥 내버려 두자.
“…폭주만 막은 거니, 우담화나 빨리 먹이세요. 우 회장님은 빨리 자격증 주시고.”
빨리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
계속 같이 있다간 이들처럼 바보가 돼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내게 우 회장이 다가오더니 주머니에서 자격증을 꺼내 건넸다.
“여기 있네, 자네가 바라던 것.”
건네받은 자격증을 확인했다.
자격증에는 ‘금 지온’이라는 가명과 ‘A등급 헌터’라는 등급이 쓰여 있었다.
얼굴 칸에는 가면 쓴 내 사진 박혔는데, 그 위에 ‘헌터 협회’의 인증 마크가 찍혀져 있어 가면을 쓰고 있어도 상관이 없어 보였다.
일 처리가 확실한 게 마음에 든다. 이렇게까지 하면 가면을 쓰고 있더라도 사람들이 오해할 것 같지 않았다.
우 회장이 자격증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가 그럴 사람은 아닌 건 알지만, 그래도 일러두는 게 좋겠지.”
“……?”
“절대 선을 넘지 말게. 선 넘은 사람을 봐줄 생각은 없으니.”
위조 자격증으로 이상한 짓 할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헌터관리부’나 헌터 협회에 내 정체를 다 까발리겠다는 소리기도 했다.
내가 이것으로 하고 싶은 건 도희나 태천이 모르게 A등급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 정도였다.
그것도 불법이긴 했으나 우 회장이 말하는 선을 넘는 짓은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는데, 주머니에 있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꺼내서 확인하니 태천이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러고는 병실을 빠져나왔다.
우 씨 가족들이 기다리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자격증도 받았겠다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도운아. 어디야? 집에 없네?
집? 지금 우리 집에 있는 건가? 왜?
“잠깐 볼일 보러 나왔어. 왜?”
-저녁이나 같이 먹으려 했지.
“뜬금없이 웬 저녁? 아직 안 먹긴 했는데.”
-그렇겠지.
“응?”
-잘됐다고. 치킨 시켜 놓고 있을게.
“그래, 알았어. 금방 갈….”
이상하다.
아주, 굉장히, 이상하다.
태천이는 백운천이 A등급 길드가 된 이후 연락도 없이 집을 찾아온 적이 없다.
시간을 아껴 왔는데 허탕을 치게 될까 걱정해서다.
그런 녀석이 연락도 하지 않고 우리 집에?
“…태천아.”
-응?
“우리 친구지?”
-당연하지. 내가 내 얼굴보다 너랑 도희 얼굴을 먼저 외웠는데.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 줘. 오늘 월요일이잖아. 그럼 지금 주례 회의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야, 시간이 몇 시냐? 당연히 끝났지.
“당연히 안 끝날 시간이니까 물어본 거야.”
-…이래서 눈치 빠른 백도운은 싫다니까?
“……!”
뚝!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통화가 끊기고 화면에 뜬 새싹을 봐서 꾹 참았다.
큰일이다.
내가 길드를 그만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게 분명하다.
잠시 가만히 서서 어떡하면 지금 상황을 현명하게 타개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점점 커질 뿐 좋은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북한산 인수봉 게이트에 가서 왓쳐를 사냥하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결국 D-DAY가 올 거라면, 지금 이 순간, 최대한 행복한 자유를 누려야겠다.
나는, 백도운이니까.
***
백도희 한국 귀국까지 96시간 28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