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336
제337화
“…….”
서해의 한 무인도엔 수백이 넘는 인원이 두 집단으로 나뉘어 대치 중이었다.
그 중심에 푸른빛이 감도는 흑발의 사내가 팔짱을 낀 채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1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온통 잿빛인 서지혁이 양팔에 짐을 짊어지고 걸어 나왔다.
그가 앞에 다다르자 사내가 천천히 눈을 떴다.
“…난 네놈을 만나러 온 게 아니다. 천칭.”
“아, 아. 나도 알고 있으니 쏘아보지 마라. 분노.”
서지혁은 대답하며 폭신폭신한 의자를 내려놓았다.
이어 어깨에 짐짝처럼 짊어졌던 나태를 눕히고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분노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의자에 드러눕다시피 한 나태를 바라봤다.
“나태…. 그게 손님을 맞이하는 꼬락서니냐?”
“…….”
나태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입을 다문 채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분노가 팔짱을 풀고 오른손을 그녀에게로 내밀었다.
화르륵…!
분노의 오른손에서 푸른 불꽃이 일었다.
“…뭐 하는 짓이지? 천칭.”
분노는 나태에게서 시선을 돌려 서지혁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서지혁의 머리 위에 나타난 거대한 천칭을 올려다보았다.
서지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시간벌기.”
“시간…?”
“그녀는 잠꾸러기거든. 깨어나는데 시간이 좀 필요해.”
“후. 손님맞이가 영 엉망이로군.”
“손님이라…. 그쪽은 불청객에 더 가깝지 않나?”
“다행이지 않나.”
“……?”
스윽….
분노가 손을 내렸다.
손바닥 위에서 불타올랐던 푸른 불꽃이 사라졌다.
“객(客)으로 찾아왔으니 말이야.”
“…….”
“적(敵)으로 찾아왔으면 네놈은 감히 앞에 서 있지도 못했을 거다.”
“그럴 수도….”
서지혁은 웃으며 천칭을 없앴다.
서 있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답지 않게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마치 칠죄종의 분노와 싸운다고 해도 지금처럼 오롯이 서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분노가 아주 조금 서지혁에게 흥미를 느꼈을 때,
“…….”
느껴지는 시선에 눈을 내리깔았다.
나태가 어느새 눈을 뜨곤 분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깨어났으면 말을 해라, 나태.”
“…….”
나태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아주 살짝 돌려서 서지혁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보자마자 그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귀찮다는군.”
“큭…!”
분노가 어깨를 들썩였다.
입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했다.
웃음이 멈춘 것은 10초 정도 흐른 후였다.
“말하는 것도 귀찮아하다니…. 그런 별명이 붙은 것도 이해가 가는군.”
“동감하는 바다.”
서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입가엔 분노처럼 미소까지 지어져 있었다.
그동안 본인이 하고 싶었던 말을 타인이 해준 것이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런 서지혁을,
“…….”
나태는 빤히 쳐다봤다.
눈을 감는 행동조차 귀찮은지 눈꺼풀을 깜빡이지도 않았다.
서지혁은 어깨를 으쓱인 후 분노를 바라봤다.
“반대로 이쪽은 이해가 가지 않는군.”
“뭐가 말이냐?”
“네놈은 대체 왜 분노인 거냐?”
“…….”
분노는 조용히 나태를 바라봤다.
그리 마주 보기를 5초.
그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시간을 길게 빼앗을 생각은 없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듣겠다.”
“아마 우린 오늘 공멸(共滅)하게 될 거다.”
“뭐…?”
“느꼈겠지.”
분노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본 방향은 동쪽으로 육지가 있는 곳이었다.
나태와 서지혁도 그를 따라 동쪽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뇌제라는 별호가 과연 허울이 아니군….”
육지에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한진환을.
분노는 주먹을 천천히 쥐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온몸이 저리다.”
“뇌제….”
서지혁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분노가 그런 서지혁을 황당하게 바라봤다.
“재밌군. 나와 나태 앞에서 당당하던 네놈이 뇌제에겐 겁을 먹은 거냐?”
“…난 한국인이라서 말이야. 후배로서 저 괴물 선배가 저질러댄 미친 짓을 엄청나게 많이 봐왔거든.”
“크큭…! 학습된 공포라는 거냐?”
“그런 셈이다. 널 무시하는 게 아니니 오해하지 말라고.”
“좋아. 이해해주지.”
분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인이 그런 말을 했다면 이름 앞에 붙은 별호답게 분노했을지도 몰랐으나….
육지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마나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직접 체감해보니 확신이 선다. 우리가 이 섬에서 싸움을 시작한다면 그 끝은 공멸일 거다. 저건, 불합리한 폭력 그 자체이니….”
“우리 모두… 뇌제한테 살해당할 거란 뜻이냐?”
“아니. 뇌제한테 당하는 건 나뿐이겠지.”
“……?”
“내가 네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테니까.”
“……!”
서지혁이 몸을 움츠렸다.
공격. 방어. 반격. 도망.
어떤 행동이든 바로 이어나가기 위해서였고, 분노에게서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온 기세가 그를 그리 행동하게 했다.
하지만 분노의 시선이 직접 닿은 나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랬듯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게 뭐지?”
“결과가 빤히 보이는데도 그 길을 가는 건 멍청하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
분노의 질문에 서지혁은 수긍했다.
그 결과가 자신들이 분노한테 살해당할 거라는 단정인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앞서 말했었지. 부하로 들어오란 소리라면 거절이다.”
“알고 있다. 그건 그냥 해본 소리였을 뿐.”
“그냥, 해본 소리…였다고?”
“알겠나? 나태.”
“……?”
“제안이란 것은….”
분노가 오른손을 뻗었다.
또 푸른 불꽃을 뿜어내려는 건가?
서지혁이 그리 생각하고 아까처럼 대응할 준비를 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분노는 검지를 펼쳐 모랫바닥을 가리켰다.
“이렇게, 당사자끼리 직접 마주하고 하는 거다. 귀찮다고 타인을 보내는 게 아니라.”
“……!”
나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노가 분노한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이유였다.
“…겨우.”
나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분노가 흡족한 듯 웃었다.
“그딴 이유로 한국까지 왔어?”
“안 되나?”
“귀찮잖아.”
“분노하려면 부지런해야 하지. 누구처럼 게으르면 분노하지도 못하거든.”
“…….”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귀찮지만 않았다면 한숨도 폭 내쉬었으리라.
눈을 다시 뜬 나태는 분노를 똑바로 응시했다.
“분노.”
“말해라. 나태.”
“우리와 동맹을 맺자.”
“후후후…!”
나태의 제안에 분노가 웃었다.
그에게서 또다시 기세가 뿜어져 나왔지만, 이번에 서지혁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나태와 분노의 동맹이.
***
“형님.”
“음?”
한동안 섬을 지켜보던 한진환이 최희석을 불렀다.
팔짱을 낀 채로 옆에 서 있던 최희석이 고개를 돌리자 그가 바로 질문했다.
“…분노 말이요. 나태와 싸우려고 온 거라고 하지 않았어?”
“그랬다만.”
“근데 싸울 분위기가 아닌데?”
“뭐?”
“그게 정말이에요? 그럴 리가 없는데…?”
뒤쪽에 떨어져 있던 배수현이 끼어들었다.
그녀가 입수한 정보로는 분노는 나태의 동맹 제안을 거절했고 이름에 걸맞게 분노하며 나태를 찾아온 것이었다.
한진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이 좋아 보이는데? 싸우는 게 아니라, 꼭 동맹을 맺으려는 것 같은…!”
그가 말끝을 흐렸다.
주변인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보는 순간,
쾅…!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그들은 전투태세를 갖췄다.
한진환이 아무 이유 없이 벼락을 떨어뜨릴 리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후우…. 여전히 마른하늘에 벼락 떨어뜨리는 거 잘하십니다? 한 선배.”
벼락이 떨어진 자리엔 거대한 천칭이 떠 있었다.
벼락을 담은 탓일까?
천칭은 아주 조금 기울어졌고, 그 아래에 서지혁과 최기정이 서 있었다.
“서지혁, 최기정….”
한진환이 둘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불린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자신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이거 영광입니다? 아직 우리 얼굴을 기억하시는군?”
“전명환…이었나. 너희 쫓아다니던 미역 머리 꼬마가 안 보이는군. 죽었냐?”
“말씀 함부로 하시네. 명환이 저 섬에 잘 있습니다.”
“왜 같이 안 왔어?”
“선배 무섭다고 안 온다네? 워낙 무서워했지 않습니까?”
“안타까운 일이지. 그때 버릇을 더 단단히 고쳐줬어야 했는데….”
“하하. 그런다고 고쳐질 버릇이 아니-”
쾅…!
최희석이 잡담을 끊어내고자 방패로 땅을 찍었다.
그러자마자 최기정이 마법 주문을 외웠으나 서지혁이 “그럴 필요 없다”라며 말렸다.
“헛소리나 하러 온 건 아닐 텐데. 서지혁.”
“…서운합니다? 예전엔 우리 예뻐하셨잖습니까. 최 선배.”
“감히… 선배라고 부르지 마라….”
까드득.
최희석이 사납게 이를 갈았다.
서지혁은 어깨를 한번 으쓱여 보이고는 말했다.
“뭐. 좋습니다. 나도 반갑게 잡담이나 나누려고 여기까지 굳이 온 건 아니니.”
“왜 온 거냐.”
“한 선배가 지켜봤으니 이미 알 것 같은데…. 방금 막 나태와 분노가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나태 왈. 시선 따가워서 못 자겠으니 다들 돌아가라네.”
“그럴 수는 없지.”
“…없다고 했습니까?”
“한꺼번에 칠죄종 두 명을 붙잡을 수 있는데. 얌전히 물러날 성싶으냐?”
“붙잡는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못할 것 같지 않군. 내 동료들이 나와 함께 있으니.”
최희석이 방패를 들지 않은 손을 펼쳤다.
그의 동료들이 각자 장비를 꼬나쥔 채로 서지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선들을 천천히 훑어본 그는 픽 웃었다.
“동료들은 무슨. 한 선배가 있으니 세게 나오시는 거겠지.”
“…….”
명백한 비웃음을 보고서도 그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서지혁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최희석의 동료들과 함께 있어 못할 것 같지 않다는 말에 거짓은 없었기 때문이다.
항상 앞에 서는 남자는 속과 겉이 같은 인간이었으므로.
“후…. 그래서? 한 선배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갑시다, 형님.”
“진환?”
최희석은 한진환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의 입에서 돌아가자는 말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서지혁만이 예상했다는 듯 흐흐 웃었다.
“잘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뇌제라고 해도 나태와 분노 둘을 상대하는 건 무리이니….”
“…착각하지 마라. 서지혁.”
“착각?”
“그래.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저 섬으로 날아가 분노든 나태든 죽여버릴 수 있으니까.”
“옛날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나이가 먹긴 했나 봅니다? 오랜만에 만났더니 허풍이 심해지셨네.”
“허풍이라고 생각하냐?”
“…그럼 해보시든가. 왜 안 하시는 겁니까?”
“검은 넥타이를 매기 싫어서.”
한진환이 나지막이 말했다.
검은 넥타이를 매기 싫다.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아들은 이들이 침을 삼켰다.
싸움이 일단 시작되고 나면 극소수만이 살아남게 될 터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형님. 수현이. 이곳에 있는 이들의 사진에 얼굴을 맞대러 가기 싫어서. 그래서 물러나는 거다.”
“…….”
“그러니까…. 저 섬, 아니. 한국에서 떠나도록 해.”
“…싫다면?”
“혼자, 오겠지…. 내가.”
한진환이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을 때였다.
끼이익, 철컹!
서지혁이 머리 위에 떠 있는 천칭을 보기 위해 고개를 쳐들었다.
천칭은 처음 번개를 담았던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진심…, 이시군그래.”
“농담인 줄 알았나?”
“…좋습니다.”
서지혁은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항복하겠다고 말하는 듯한 제스쳐를 보고 최기정은 마법 주문을 외웠다.
그의 특기인 순간이동 마법이다.
“천칭이 완전히 기울었으니 이번엔 얌전히 물러나 드리지. 하지만….”
“……?”
“다음엔 얌전히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라. 다음엔 나도 혼자 있지 않을 테니까.”
“…백도운, 을 말하는 겁니까?”
“잘 아네.”
“글쎄. 우리와 싸울 때 백도운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듯싶은데?”
“…그게 무슨 소리냐?”
한진환의 질문에 서지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궁금하면 백도운한테 물어보시든가. 내겐 말해줄 의리 같은 거 없으니까.”
그 말을 남기고 서지혁과 최기정은 사라졌다.
한진환은 배수현을 바라봤다.
아는 정보가 있는지 묻는 것이었는데, 당연히 그녀는 아무것도 몰랐으므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만 유추해볼 수는 있었다.
천칭 길드의 서지혁 하면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용으로 협의를 한 건 아닐까요?”
“설마. 백도운이 그런 협의 같은 걸 할 정도로 멍청할 리가….”
한진환은 말끝을 흐렸다.
확신할 수가 없는 탓이었다.
“…있나?”
백도운.
안타깝게도 그라면 능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