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88
제88화
아침 일찍 협회로 향했다.
정확히는 협회가 준비해 준 최희석의 사무실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내 시선에 두 사람이 보인다.
사무실 주인과 한진환이다.
“아침 일찍 와 줘서 고맙네.”
“고맙기는요.”
최희석이 일어나서 나를 반긴다.
바로 어젯밤에 봤는데도 며칠 만에 만난 사람 같다.
좀 민망한걸?
나는 소파에 드러누운 한진환의 맞은편에 가 앉았다.
앉자마자 한진환이 본론을 물었다.
“그런데 우린 왜 부른 거요? 그것도 아침 일찍.”
“아….”
최희석이 대답하지 않고 나를 돌아본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냐는 시선이 담겨 있었다.
배려가 참 과한 사람이다.
물론 날 생각해 준 거였으니 싫지는 않았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도 나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나 오늘 밤부터 진행할 생각이었는데.”
“진행이야 전부 일임했으니 너 알아서 하고.”
“응?”
“두 사람을 부른 건 직접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야.”
“굳이? 정보 어젯밤에 따로 받았는데?”
한진환의 말이 맞았다.
대략적인 정보는 어젯밤 PDF 파일로 전달받았다.
파일에는 유혜주에 관한 정보와 전국 각지의 마약 유통 길드에 관한 정보들이 읽기 편하게 정리돼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밤새 대충 훑어봤다.
유혜주.
〈여성. 28살.〉
〈매직 아이템 제작 전문가〉
〈특이사항 – 강박증〉
대충 훑어본 나도 이 정도는 기억한다.
이번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한진환은 더 자세히 읽어 봤을 거다.
그러니 따로 브리핑을 진행할 필요는 없었다.
“말하고 싶은 건 총 세 가지.”
최희석이 손가락 세 개를 펼치며 말했다.
이러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가 하고 싶은 말은 PDF 파일에 없었던 것 같다.
대체 뭐길래?
펼친 세 개의 손가락 중 약지가 접혔다.
“첫째, ‘기버’의 ‘성준현’와 ‘다졸’의 ‘공우재’는 꼭 생포할 것.”
기버, 다졸.
둘 다 어젯밤 파일에서 본 기억이 있다.
기버는 부산에서 활동하는 마약 유통 길드.
다졸은 강원도에서 활동하는 불법 약물 제작 길드다.
한진환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잠깐만. 공우재는 그렇다 쳐도, 성준현은 왜?”
불법 약물을 직접 제작한다는 점에서 다졸이 더 나빠 보이지만 그렇지도 않다.
파일에 따르면 기버는 마약 유통 길드 중에서도 가장 질이 안 좋은 놈들이다.
마약만 유통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마약 중독자로 만들어서 팔아먹은 놈들이야.”
“나도 알아. 파일 정리를 내가 했는데 모르겠어?”
“그걸 알면서 꼭 생포하라고 해?”
한진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질이 좋지 않은 놈이라는 걸 알면서도 생포하라고 했다.
심지어 그 말을 하기 위해 직접 부르기까지 했다면….
“혹시 유혜주 때문입니까?”
“…아?”
“맞아. 현재 유혜주 동선이 확실치 않아. 기버에 갔거나 다졸에 갔을 확률이 높은 상황인데…. 물론 둘 다 아닐 수도 있어.”
“아하. 그래서 생포하라는 거였군….”
수긍이 갔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간 나를 쳐다봤다.
“머리 좋은데?”
죽여도 괜찮은 놈을 죽이지 말라고 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이유를 생각해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머리가 좋다는 칭찬을 받을 만한 일도 아니었다.
뭐, 칭찬은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거니까 받아들였지만.
최희석이 중지를 접었다.
“둘째, 필요하지 않은 살인은 굳이 저지르지 말 것.”
그 말을 하면서 최희석은 날 쳐다봤다.
날 보는 눈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방금 말한 건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다.
아마 이정근 때 “범죄자라면서요, 그냥 죽여 버리죠?”라고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이번에도 마약 유통 길드에 소속된 놈들을 모조리 죽일 거로 생각한 거겠지.
내가 무슨 대량 살인마 같은 거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내게 시선을 떼고 마지막 손가락을 접었다.
커다란 주먹이 쥐어진다.
“셋째, 둘이 싸우지 말 것.”
응? 되게 뜬금없네.
같은 편끼리 싸우긴 왜 싸워?
그리 생각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쳇….”
옆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진환이 아쉬운 감정을 담아서 혀를 찬 것이다.
“…….”
이 양반 보소.
나랑 싸울 생각이었나 보네?
[세계수 어린나무가 당황스러움을 내비칩니다.]그래, 새싹아.
너도 어처구니없지?
새싹이와 같은 마음으로 빤히 그를 쳐다봤다.
그는 웃는 낯으로 어깨를 으쓱이다가 최희석에게 말했다.
“형님 이야기는 다 끝난 거?”
“그렇다만.”
“그럼 이제 내가 얘기할 차례.”
“네 얘기?”
“어. 그러니 상관없는 사람은 이만 나가 줄래요?”
“…나 말하는 거냐?”
“협회 퀘스트에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사람. 여기에 형님 말고 또 있어?”
“너…. 후우. 여기 내 사무실인 거 알고 있는 거지?”
“역시 형님이야. 동생을 위해 사무실 빌려 준다고? 고마워. 크으. 내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남자!”
“…….”
아, 빡쳤다. 저건 빡친 거야.
최희석의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저건 누가 봐도 화난 사람의 그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진환은 빙긋 웃고 있었다.
이 둘 어떻게 사이가 좋은 거지?
“…도운, 잘 부탁하네.”
“아, 네.”
그리 말한 후 최희석은 자리를 피해 주었다.
사무실을 나가는 그의 어깨가 왠지 쓸쓸해 보였다.
나라도 잘해 줘야겠는걸….
탁.
문이 닫히자마자 한진환이 물었다.
“오늘부터 스케줄 어떻게 돼?”
“어제 말씀드린 대로 1시간의 자유 시간만 준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잘됐네. 원래는 밤에 출발할 생각이었거든? 근데 아침부터 만나게 됐으니…”
“그렇게 하시죠.”
“시원시원해서 좋네.”
빨리 끝내면 나도 좋다.
한진환은 마법 주머니에서 스마트패드를 꺼냈다.
검지로 몇 번 클릭하고는 내게 내민다.
“우선 가고 싶은 곳은 여기야. 거리로 보나 동선으로 보나 제격일 거 같아.”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강남역 뒤쪽 골목이다.
그의 말마따나 협회 건물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곳이었다.
차로 20분이면 도착할 거다.
참 간도 큰 놈들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라도 맹신하는 걸까.
개인적으로는 코인시던스 후 빌딩과도 멀지 않았다.
입주 청소하기 좋겠는걸?
“좋네요. 거기부터 하시죠.”
“그래. 여긴 너 혼자 해라.”
“네?”
“왜. 무리일 것 같아?”
그럴 리가.
혼자 상대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천칭 길드처럼 암살 같은 것에 특화된 길드라면 모를까.
마약같이 약이나 유통하는 놈들?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되물은 건 뜬금없이 혼자 하라고 말해서다.
내가 왜 그래야 해?
그런 생각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한진환은 내 생각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하지 마. 네 실력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
“아.”
“원래는 너랑 싸워서 확인하려고 했는데…. 형님이 하지 말라고 하니까.”
“의외네요?”
“뭐가?”
“그 말 안 들을 것 같았거든요.”
그리 말하자 한진환이 킥킥 웃었다.
내 말이 그렇게 웃겼나?
“그 형님이 덩치에 걸맞지 않게 속이 좀 좁거든. 토라져서 안 돼.”
“그것도 의외네요. 대인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잖아? 원래는 좀생이야.”
“헤, 그렇군요.”
이걸 지상욱이 들으면 실망하려나?
아니, 오히려 존경하는 사람의 의외인 면을 들었다고 좋아할지도.
한진환이 스마트패드를 거두며 물었다.
“파일… 두 번째 페이지 기억나?”
“기억합니다. 협회 퀘스트의 보상에 대해 쓰여 있었죠.”
“아, 그래. 특히 이 부분….”
〈한진환과 백도운은 이번 프로젝트에서 제거하는 길드들의 재산 소유권을 갖는다.〉
“이곳에서 나오는 거 너 다 가져.”
“오.”
두 사람이 소유권을 갖는다는 건, 나눠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렇게 양보해 준다면… 재산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 된다.
나쁘지 않긴 하다.
“조건이 있습니다.”
“또? 조건 거는 거 참 좋아하네.”
“그다음 길드는 당신 혼자 상대하십시오.”
한진환의 눈이 커졌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린 것이다.
이내 그는 씩 웃었다.
“그래. 내가 너 재미있는 놈일 줄 알았지.”
이건 칭찬이야, 욕이야?
***
사각형의 방은 완벽한 좌우대칭이었다.
책들이 잔뜩 꽂힌 두 개의 책장.
실험에 쓰일 셀 수 없이 많은 각종 도구.
도구들이 정돈된 네 개의 책상.
그것들은 판을 찍은 듯이 완전히 똑같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유일하게 하나인 것은 방 한가운데에 있는 사각형의 책상과 책상 정중앙에 서 있는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었다.
긴 더벅머리를 한 갈래로 대충 묶은 듯한 그녀는 보라색 액체가 끓고 있는 플라스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글부글, 푸쉭…!
그녀가 지켜보던 플라스크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소리와 함께 보라색 액체는 순식간에 빛깔을 잃는다.
색이 전부 사라져서는 투명한 액체만이 끓어올랐다.
“하아….”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쉰다.
검은 뿔테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툭 던지듯 내려놓는다.
액체를 끓어오르게 하던 푸른 불도 훅 꺼 버린다.
“역시 불순물이 너무 많아….”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그녀의 혼잣말을 파묻어 버렸다.
사각형의 나무문을 열고 들어온 건 정장을 입은 남자다.
소위 꽃미남이라고 불릴 정도로 말끔한 외모를 가진 남자는 문을 열자마자 말했다. 얼굴만큼이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유혜주 있어? 아, 있네.”
남자는 방 한가운데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유혜주라고 불린 여자.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앞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이미 곱슬한 더벅머리에 컬이 더 추가됐다.
“응? 뭐야. 또 실패했나 보지?”
“…….”
유혜주는 남자를 노려봤다.
“실패”라는 말을 노골적으로 담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뚜벅뚜벅 걸어가 연구실 가운데 준비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느긋한 모습으로 다리를 꼬고 앉고는 주변을 돌아봤다.
“여전히 갑갑한 장소야.”
“공우재…. 당신 여긴 왜 온 거야?”
검은 뿔테 안경을 다시 쓰며 묻는다.
질문이 던져졌지만, 공우재는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입을 꾹 다문 채로 주변만 돌아봤다.
그녀는 공우재를 쳐다보다가 이내 주먹으로 책상을 쿵 내리쳤다.
“빌어먹을! 앉으면 되잖아, 앉으면!”
그리 말하고 나서야 공우재는 유혜주를 쳐다봤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쉰 후 그에게로 걸어갔다.
정확히는 그가 앉은 소파 바로 맞은편이다.
노려보면서 쏘아붙이듯 말했다.
“개새끼. 나 강박증 있는 거 뻔히 알면서.”
공우재는 어깨를 으쓱이며 소파에 등을 기댄다.
그 모습은 유혜주가 한숨을 내쉬게 하기에 충분했다.
“용건이나 말하고 가. 나 바빠.”
“쉬어 가면서 하지 그래. 어차피 방금도 또 실패한 거 같은데.”
“또… 실패….”
유혜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꽉 쥔 주먹을 붉은 기가 사라져 하얗게 변했다.
“공우재.”
“응?”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자꾸 내 신경 건드리면 우리 계약 끝나는 거야.”
“저런. 그건 안 되지.”
안 된다는 말엔 당황스러움이 담겨 있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감정뿐이다.
계약 끝낼 거라는 말은 그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
공우재는 품에서 마법 주머니를 꺼냈다.
이어 마법 주머니 속에서 사각 유리병을 빼냈다.
유리병에는 보라색 가루가 담겨 있었다.
“네가 찾던 거.”
“뭐? 그 말은…!”
“그래.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도 100%짜리 바이올렛 파우더야.”
“드디어…!”
유혜주는 공우재를 향해 팔을 뻗었다.
마치 성물을 들어 올리는 성직자처럼 소중하게 유리병을 건네받았다.
그녀는 건네받자마자 유리병을 이리저리 살폈다.
소중한 물건을 대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당연했다.
그녀에게 유리병에 담긴 브이피는 소중한 물건이 아니다.
구하기 힘든 귀한 실험물이었을 뿐.
“굉장해…. 역시 당신이야. 기버를 거절하고 다졸에 오길 잘했다니깐?”
“기버는-”
우웅.
“…실례.”
공우재는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에선 그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가 떠올랐다.
“호오?”
“왜. 무슨 일 생겼어?”
“서울에서 브이피를 유통하던 놈들이 당했다는군.”
“아, 그래?”
그리 말하는 유혜주의 눈은 유리병에만 향했다.
시선은 전혀 그를 향하지 않았고, 목소리도 음의 높낮이가 단조로웠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무관심이었다.
공우재는 예의상의 질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난 이만 올라가 보도록 하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마음대로 하셔. 아. 맞다.”
“……?”
“오늘 이후로 몇 달 동안 내려오지 마. 방해받기 싫으니까.”
“글쎄? 확답은 못 해 주겠는걸.”
유혜주가 유리병에서 시선을 떼고 공우재를 올려다봤다.
책상을 쿵 내려칠 때의 날카로운 눈빛이 또다시 그를 향했다.
그는 피식 웃은 뒤 실험실을 빠져나갔다.
“아. 지금 내가 저놈 신경 쓸 때가 아니지…!”
그러고는 유혜주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줄곧 해 왔던 실험을 위해서 책상으로 달려갔다.
“이것만 있으면… 그걸 제거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