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52
제52화
13. 폭풍전야 (4)
창백한 얼굴 위로 마나회로의 푸른빛이 비쳤다.
우두커니 선 채 바다사람을 수납한 관을 바라보았다. 좁은 공간 내 짐짝처럼 쌓여 있는 사람들을 보자니 절로 참담해졌다.
전부 해석할 수는 없었지만 수면과 동결의 회로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입구에 있는 허술한 술식과는 달랐다.
각 술식 간의 상성을 잘 이해하고 있는 자가 만든 아이템이다.
“30개가 조금 안 되나,”
아스트로나의 말에 따르면 당시 바다꽃에서 납치당한 아이들이 쉰 남짓이다. 장부를 분석한 결과, 그간 팔려나간 어린 바다사람들이 대략 열댓.
“조금 모자라긴 하지만 대강 맞아떨어집니다.”
천천히 선반 쪽으로 다가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관을 열었다. 무언지 모를 투명한 액체가 관 속에서 찰랑거렸다. 그 아래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소년이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수십 년 전 납치당한 소년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자라지 못했다.
“아테라의 전언에 대답한 게 용하네요.”
애써 의연한 표정으로 다가온 차태양이 관 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손끝에 묻은 투명한 액체를 냉큼 입안에 집어넣었다.
“차태양 헌터! 그게 뭔 줄 알고!”
“윽, 기분 나쁜 맛! 해독 스킬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바닷물인가 싶어서 먹어 본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점성 높은 액체가 차태양의 손에서 뚝뚝 떨어졌다. 끈적한 액체는 차태양이 손에 불을 일으켰는데도 마르지 않았다.
인벤토리에서 생수병을 꺼내 건넸다. 물을 부으니 순식간에 액체가 사라졌다.
“특수한 성분으로 만들어진 액체인 모양이네요.”
“포션 같은 걸까요?”
“디버프 포션과 비슷한 게 아닐까 싶은데……. 아이템 정보는 읽히지 않는군요.”
“진짜 죽은 건 아니겠죠?”
차태양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바다사람은 어마어마한 가격에 거래되었다. 값비싼 상품을 함부로 훼손할 리가 없다. 술식 걸린 관에 액체까지. 시체를 보관하는데 이렇게 공을 들일 리도 없고.
“일단은 관에 걸린 회로부터 건드려 보겠습니다.”
여기 있는 관 전부를 들키지 않고 옮기는 것은 A급인 차태양에게는, 아니 누구를 데려와도 무리인 일이다.
아이들을 깨워야 한다.
모노클, ‘열네 번째 밤을 위하여’를 착용했다. 뒤이어 평소와 달리 냉랭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꽂혔다.
[가호.]“예, 칼리아.”
[어서 나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하렴. 내가 널 도울 수 있게.]“칼리아,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희를 도와주세요.”
[너의 부탁 접수했다. 본분에 맞게 널 도우마. 너는 내 손이 되어 움직이렴.]여기부터 시작하라는 듯 회로 중앙이 빛났다.
죽은 듯 잠든 아이 위로 나아가야 할 길을 알리는 청보라색 빛이 그어졌다. 나는 거침없이 칼리아가 가리키는 곳으로 손을 뻗었다.
칼리아의 지시대로 회로를 끊고, 비틀었다. 마법처럼 내 손아래 동결의 식이 녹아 사라지고, 환영의 식이 흩어졌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제법 괜찮은 만듦새의 술식이었으나 이 세계에서 손에 꼽는 장인인 칼리아의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회로를 고친 뒤, 확실히 확인까지 받았다.
“그런데 왜, 왜 일어나질 않는 거지?”
분명 모든 것이 순조로웠는데 관 속에 잠든 소년은 처음 모습 그대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수면의 식도, 동결의 식도, 부동(不動)을 명령하는 순종의 식도 모두 완벽하게 차단했다. 그럼에도 나는 소년을 깨울 수 없었다.
‘설마 내 손재주가 여기서도 문제를 일으킨 건가?’
차태양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도닥였다.
“언니, 다시 해 봐요.”
“칼리아, 다시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잠깐.]다시금 회로에 손을 대려는데 칼리아가 나를 만류했다.
[얘, 너 마도공학이 A랭크랬지?]“네. 그렇습니다만.”
[난 네 눈을 빌려서 보고 있거든. 그래서 바로 눈치채지 못했어. 나도 한물갔군.]“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거 머리 아프네. 저거 관의 마나회로를 건드리는 것만으로는 풀리지 않을 수도 있겠어.]“예?”
칼리아가 한숨 섞인 어조로 설명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잠들어 있는 바다사람들에게 이중 구조로 술식이 걸려 있다. 관에 새겨진 회로는 보조일 뿐, 메인이 되는 것은 관 안에 담긴 액체란다.
관에 걸린 술식을 해제해도 저 액체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바다사람들은 일어나지 못한다.
[어떻게 열심히 해 보면 가능할 것 같긴 한데 두 시간은 걸릴 거다.]“그 정도 시간은 없습니다!”
[거기 너.]칼리아의 목소리가 조금 커지는 것 같더니 그의 부름에 차태양이 반응했다. 여태껏 나에게만 들리던 목소리가 차태양에게도 들리게 된 듯했다.
“어라, 누구세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차태양이라고 했지?]“네, 그런데 왜요?”
[너 혹시 연금술 계열 스킬 있니? 제약 스킬이라던가. 연구자의 자세, 한데 넣고 끓이기, 뒤집힌 진리. 뭐 이런 거 말이야. 낮은 등급이어도 좋아.]차태양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해독 스킬은 있는데요!”
덧붙였지만 그것으론 안 된다고 칼리아가 그의 말을 잘랐다.
[으으, 가호 네가 연금술사였다면 좋았을 텐데.]“그러게 말입니다.”
지잉- 곧 경매가 시작한다는 윤수호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 말은 곧 이곳에 주최 측의 사람이 찾아온다는 건데. 시간이 없었다.
시간은 촉박하고, 적합한 스킬도 없다. 한줄기 빛이던 칼리아도 무리라고 말한다. 여기까지 와서 이대로 돌아간다고? 그럴 순 없었다.
“제발, 제발. 무슨 수 없나?”
정화의 불꽃엔 타지 않으면서 물에 녹는 투명한 액체.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평소에 아이템에 관심을 좀 가질 걸……. 하긴 있는 것도 크라켄한테 다 던지고 왔는데.
‘크라켄?’
윤수호에게 두들겨 맞아 기절해 있던 크라켄에게 내가 뿌려 주고 왔던 아이템. 내가 왜 그걸 생각 못 했지?
“칼리아, 이것 좀 확인해 보세요!”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짙은 황금색 액체가 유리병 안에서 출렁였다.
[가호? 그건 뭐지?]“각성 포션입니다.”
[흐음, 처음 보는 물건인데. 그걸로 아이들을 깨워 보려고?]“예. 이것만으론 안 되겠지만요.”
각성 포션은 기절 상태인 사람에게 효능을 보이는 물건이다. 그리고 또 다른 효과가 있는데…….
“칼리아, 설원요정을 본 적 있으십니까?”
[설원요정?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구나.]“김 서방아,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역시나. 설원요정은 몹시 추운 지역에서만 출현하는 마수이다. 그리고 이 대륙에는 설원요정이 출몰할 만큼 낮은 기온의 지역이 없다.
나보다 훨씬 식견이 넓은 칼리아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알 순 없지. 아마 이 액체는 그의 사후 새롭게 교류를 하게 된 지역에서 가져왔으리라.
“저희 세계에서는 설원요정이 몸을 담근 샘에서 채취한 액체를 가공하여 마도구를 만듭니다. 샘물 자체는 아이템이 아니지만, 약간의 가공만 거치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어 찾는 곳이 많죠.”
[그 효능은?]무언가를 짐작했는지 칼리아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동결. 주로 보존식을 만들거나, 물건을 보관하는 마도구의 핵으로 사용합니다.”
투명하고 점도가 있으며 물에 씻겨 내려가는 액체. 틀림없다. 설원요정의 샘물이다.
“이 액체, 불꽃에도 마르지 않았죠. 당연했습니다! 요정의 샘물로 만든 액체였으니까요.”
“그거랑 각성 포션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요?”
“설원요정이 주로 등장하는 59층에서 필수적인 아이템이 바로 이 각성 포션입니다.”
나도 이야기로만 들어 실제로 접한 적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간접 경험의 바다, 타워즈닷컴이 있지 않은가. 그동안 지속적으로 타워즈를 서치하며 정보를 긁어모은 게 여기서 도움이 될 줄이야.
헌터 커뮤니티의 증언에 따르면, 설원요정은 그 본신의 무력은 약하지만, 몸에서 떨어지는 가루 때문에 헌터들 사이에선 요주의 마수로 꼽힌다.
“그 가루에는 두 가지 효능이 있습니다. 하나가 방금 말씀드린 동결,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환영입니다. 수속성 필드에서 설원요정을 만나면…….”
“얼어 죽기 딱 좋겠네요!”
[동결에 환상이라. 합 자체도 좋은 것들이구나.]“그렇기에 ‘작은 불의 숨결’이라는 아이템을 가공해 만든 이 포션이 필요한 겁니다.”
설원요정의 천적인 불새에게서 채취한 작은 불의 숨결로 만든 포션. 더군다나 정신을 깨우는 효과까지 있다.
“이걸 이용해 관에 걸린 술식을 해주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가지고 있는 포션의 수량은 어떻게 되니?]납득한 듯 칼리아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 이것까지 두 병입니다.”
내 대답에 칼리아가 탄식을 숨기지 못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적은 양이었다. 여기에 있는 바다사람이 몇 명인데 두 병이라니.
“방법은 있는 겁니까?”
[물론이지! 내가 누군데!]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칼리아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크라켄을 떠올려서 다행이다. 마음속으로 크라켄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거기 얘, 해독 스킬이 있다고 했지? 등급은?]“A급이요.”
[좋네. 빈 병 가져다가 피 좀 뽑아 보렴.]“넌 누구길래 태양이한테 피를 뽑으라 말라야!”
칼리아의 정체를 모르는 도깨비가 펄펄 뛰었다. 그리고 보니 소개를 안 해 줬구나. 반면 차태양은 태연했다.
“소리야,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잖아.”
“그치만 태양아!”
“언니, 단검 같은 거 있으세요?”
보조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단검을 꺼내 차태양에게 건넸다. 도깨비가 내 쪽으로 통통 굴러와 칭얼거렸다. 차태양이 도깨비를 만류하며 손바닥을 베어 피를 냈다.
[꽉 채워야 한다.]“윽, 알겠어요.”
“이분이 누구신지는 나중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작은 병 가득히 피가 채워졌다. 통증에 콧등을 찌푸린 차태양이 피범벅이 된 손바닥 위에 포션을 뿌렸다. 서서히 상처가 아무는 것을 보고 나서야 도깨비가 조용해졌다.
[해독 스킬 보유자의 피에는 해독 성분이 소량 녹아 있어.]“그걸 이용하실 생각입니까?”
[그래. 저 아이의 피로 이 포션의 성분을 부풀릴 거야.]이어지는 지시에 따라 바닥에 회로를 그려 차태양의 피에서 해독 성분을 추출했다. 병 속의 피가 옅은 녹색 액체로 바뀌었다.
[이제 포션과 그 액체를 섞으렴.]“저 칼리아. 이걸 합친다 해도 양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어머, 그게 끝일 리가 없잖니.]“그렇다면…….”
이어 칼리아가 툭 내뱉은 말에 갑자기 두 어깨가 무거워졌다.
[지금부턴 네 차례란다 가호. 그 액체를 매개로 인챈트를 하렴. 특수효과를 뽑아내는 거야. 할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