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icked up a black panther and became a duchess RAW novel - chapter 44
오히려 대화를 이어 갈수록 단단한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고민을 해결하기 쉽지 않았다.
사업을 키워야겠다 마음먹었지만 뜻대로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이유는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평판의 문제.
에밀리나가 대리 판매를 맡겼던 이유가 무엇인가?
좁은 입지와 쓰레기 같은 평판 때문이었다.
제 이름으로 가게를 내는 순간 온갖 구설에 휘말릴 테니까.
하지만 당장 돈이 급하니 이를 감수하고 일을 벌이려 했다.
적어도 지금보단 벌이가 나을 거 같았다.
하지만 케이티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탓에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악의적인 말을 앞세워 모함당할 걸 염려한 탓이다.
실제로 초콜릿의 인기를 시샘한 경쟁 가게들이 불만을 품고 허위 사실을 퍼트렸으니.
자신과 관련된 추문이 합을 이루면 어떤 소문을 만들어 낼지 감도 잡히지 않을 일이었다.
본디 그런 소문은 선동하기도 쉬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클라인 남작가가 빚에 시달린다는 말이 돌 테니 아주 벌떼처럼 달려들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게 두 번째 이유였다.
돈 나올 구멍이 있는 채무자를 가만 내버려 둘 채권자는 없으니까.
하물며 돈방석에 앉을 수 있는 사업이라면 무조건 빼앗으려 들 터였다.
힘없는 귀족의 비애라고 할 수 있었다.
클라인 부부가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채권자 중 고리대금을 업으로 삼는 질 나쁜 귀족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도와줄 사람을 찾아보는 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동업자를 찾자는 소리였다.
가짜 신분을 만드는 건 금세 탄로 날 테니 말이다.
세 번째 이유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에밀리나는 타인을 신뢰하기 힘들었다.
언제 뒤통수칠지 모른다는 강박이 그녀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믿을 수 있는 동업자를 구하는 건 신중에 신중을 기하게 했다.
에밀리나가 금전으로 엮인 인간관계에 불신이 매우 깊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헤더 자작의 일도 그렇지만 전생의 영향도 있었다.
어렵게 모은 자금으로 동업을 준비하다 사기를 거하게 당했다는, 뻔하디뻔한 이야기였다.
함께 개발한 신메뉴를 빼돌려 독식하는 치졸함까지 당했다.
믿음과 신뢰에 대한 보답이 돈을 향한 갈망으로 빚어진 배신이었다.
돈이 대체 뭐길래 사람이 그리 추악해지는지.
에밀리나는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차라리 시비조차 걸지 못하게 압도적인 배경이라도 갖고 있으면 좋으련만.
그게 아니니 끝없는 고민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염두에 두는 이가 없지는 않다.
‘멀린.’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동업자라 할 수 있었다.
왕실을 거래처로 둔 만큼 인지도가 높았고 그에 비례해 가게 규모도 컸다.
어지간한 중범죄에 연루되지 않는 이상 뒷공작을 충분히 감당해 낼 터였다.
문제는 멀린을 믿고 맡길 수 있냐는 거지.
그간 교류한 시간이 있던 만큼 그럴 사람처럼 보이진 않지만 혹시 또 모를 일이었다.
새로운 계약 관계에서 과연 욕심부리지 않을지 앞일은 재단할 수 없었다.
전생에 뒤통수친 그들 역시 일을 치르기 전까진 그랬으므로.
에밀리나는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 답이 없어, 답이.”
에밀리나는 이 답답한 상황이 무척 짜증 났다.
동시에 현재의 무력함이 너무 괴로웠다.
그녀는 이 속앓이를 어딘가에 토로하고 싶었다.
해결을 구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저 이 고단함을 내뱉음으로, 위로받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로지가 떠올랐다.
전장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을 친우가 그리웠다.
제 고민을 들어주던 친구의 부재가 크게 다가왔다.
벌떡. 에밀리나는 생각에 그치지 않았다.
만날 수 없다면 편지를 쓰면 그만. 책상 앞에 앉아 편지지를 준비했다.
비록 일방적인 감정호소일 테지만 뭐 어떠랴.
일전 로지도 제게 한탄 담긴 서신을 보냈으니 샘샘이라고 할 수 있었다.
* * *
「……한 일이 있었어.
네 생각은 어때? 내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사실 나도 알아. 그 사람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걸.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고 입단속을 철저히 시킨다 한들 언젠가 제조법은 새어 나가겠지.
하지만 신뢰를 시도하기가 무서워. 내 믿음을 배신할까 봐 걱정돼.
생각을 반복할 때마다 내가 겁쟁이가 된 것 같아.
아니, 겁쟁이가 맞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위험도 감수할 줄 알아야 하는데 말이야.
그런데 있잖아, 제일 짜증 나는 게 뭔 줄 알아?
내가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경위야.
이상한 소문으로 평판이 떨어지지만 않았어도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거란 원망이 들더라고.
정말 지긋지긋해. 아직도 나를 향해 수군거리는 이들이 많아.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마치 내 문제인 양, 마냥 떠들고 부풀려.
변덕을 부린 건 그놈들인데 왜 내가 이런 모욕에 시달려야 해?
그럴 때마다 내 안의 무언가가 들끓어.
소문을 사실로 만들고 싶을 지경이야.
너도 들어 본 적 있지? 고자 만드는 소문.
억울하지 않도록 실천해 보는 건 어떨까 싶네.
내 앞에서 헛소리하는 것들 빠짐없이 그곳을 까 주는 거지.
그렇게 꾸준히 하다 보면 더러워서라도 피하지 않겠어?
그런 미친 행동을 벌이기 전에 제발 나한테 관심 좀 꺼 줘야 할 텐데 말이야.
지치거든, 이젠…….」
에밀리나는 잠시 깃펜을 내려놓았다.
어느새 편지의 내용이 신세 한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여백을 보니 이러다 안부도 못 묻고 마무리할 기세였다.
그녀는 실소를 흘리곤 말머리를 돌렸다.
잘 지내는지, 밥은 잘 챙겨 먹는 건지, 다치진 않았는지. 형식적인 인사치레를 적어 갔다.
그리고 전쟁의 끝.
전장의 상황은 좀 어떠냐는 물음을 조심스럽게 남겼다.
길어지는 전쟁에 수도는 점차 활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린 승전 소식은 벌써 6개월 전의 일.
이후 전달되지 않는 상황에 국민들은 불안에 휩싸였다.
패배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리오네프를 잠식해 가고 있었다.
폭풍전야와도 같은 고요함이었다.
에밀리나는 이것이 종전을 앞둔 현상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감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대답할 수 있었다.
슬슬 원작이 시작될 시기이므로.
전쟁이 정확히 언제 끝나는진 모르지만 디트리오 공작이 승리를 거머쥐고 수도에 입성하는 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리라.
그전에 목숨을 보장받기 힘든 엑스트라 친구의 생존이 먼저였다.
‘로지가 내 충고를 잊지 않아야 할 텐데.’
전쟁터로 떠나는 로지에게 에밀리나는 말했었다.
가능하면 공작 곁에 꼭 붙어서 목숨을 부지하라고.
그녀 역시 로지의 소식을 받은 지 반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전사 소식은 없어 아직은 무사할 거로 생각하지만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가 제 충고를 기억하고 전투에 임하길 바랐다.
그렇게 에밀리나는 걱정 어린 당부를 마지막으로 편지를 마무리했다.
이번만큼은 답신을 바라는 추신을 덧붙이지 않았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편지나 제대로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에밀리나는 편지지를 봉투에 담으며 그의 무사 귀환을 염원했다.
“그나저나 원작의 시작이라…….”
에밀리나는 깔끔하게 밀봉된 편지를 심란이 내려보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키르젠 디트리오.
막상 그가 수도에 귀환한다 자각하니 복잡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더불어 불안한 예감도.
그를 차단하기 위해 세리카 체이스를 멀리했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단 생각이 들었다.
철저히 주인공 시야로부터 멀어져야 할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려면 앞으로 정신 바짝 차려야겠지.
키르, 그 아이처럼 언제 어떻게 엮이게 될지 모르니 말이다.
그리고 그건 실로 오래간만에 떠올린 이름이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이제는 흐릿하기만 한 소년의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그나마 잊기 힘든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라 어렴풋이 잔상이 그려졌다.
그 말쑥한 얼굴 위로 세월을 덧입히니 여인들깨나 울릴 만한 미청년의 모습이 상상됐다.
키도 그만큼 자랐을 건데…… 어쩜 이리 연락 하나 없는 건지.
키르를 상기할수록 섭섭한 마음이 불어났다.
이름은 왜 또 키르젠과 비슷해서는.
에밀리나는 괜한 불만을 터트리며 입술을 삐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