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aise a Skeleton RAW novel - Chapter (47)
거대마룡의 흔적 (1)
이튿날.
드워프 마을에서와 같은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됐다.
일상은 똑같았다.
노인을 통한 뼈다귀들과의 훈련, 마사지, 태청심법, 각종 스킬 연마.
약 8시간 정도 이루어지는 한 사이클의 훈련.
마을 엘프들은 내 기행에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여기 말씀하신 대로 채집한 양털 가져왔어요.”
“누에 뭉치입니다. 저 기구를 통해 실을 뽑아내면 돼요.”
“여기다 쌓아두면 되나요?”
“다만, 부디 착각하지 말아주세요……. 저희는 여왕께서 명하셨기에 하는 것뿐입니다.”
“맞아요, 절대 당신에게 호감이 있어서 하는 행동이 아니에요!”
간이로 설치된 기구 앞에.
방직, 그리고 아이템 제작을 위한 재료들을 차곡차곡 모아다 놓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느꼈다.
‘확실히 순수하네.’
드워프가 열정적이면서 화끈하였다면, 엘프들은 새하얀 도화지처럼 순수했다.
다그나르가 의장의 결정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면.
엘프들은 여왕의 결정에 토씨 하나 달지 않았다.
그저 마음으로 숭배하고 따르는 듯했다.
이는 사실 단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의장’과 ‘여왕’.
‘의장’은 그래도 지역 혹은 마을 평의회 대표들이 뭉쳐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연방제의 느낌이라면.
‘여왕’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나누는 군주제에서나 나오는 개념 아니던가.
뭐 어쨌든.
모든 엘프들이 세르핀의 명에 충실하다면, 편해지는 건 나다.
굳이 호감도에 신경 쓰지 않고 행동해도 되는 거니까.
“여기다 차곡차곡 쌓아주세요.”
나는 빙긋 웃으며, 재료를 수급했다.
“굳이 만들어서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뽑아내야 효과가 있거든요.”
암, 만들어 오면 큰일 나지.
뼈육이 ‘방직’ 숙련도 올려야 하는데.
뼈육이는 지금도 열심히 실을 뽑고 섬유를 짰다.
벌써 레벨2가 될 만큼, 밤낮 가리지 않고 일했다.
“자네…….”
옆에서 다그나르가 그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저 기구 사용법들은 언제 다 배운 겐가?”
“흠, 글쎄요? 저희 종족만의 공법이라 말하기가 쫌…….”
저번에 말했다시피.
어차피 기구 사용법은 몰라도 된다.
뼈육이가 그 근처에서 ‘스킬’만 사용하면 되는 거니까.
“그, 그러고 보니! 자네! 저번에 제련도 복잡한 과정 없이 해냈었지? 참, 이상하단 말이야. 혹시 자네 신족이라도 되는 겐가?”
“신족이요? 그런 종족도 있어요?”
“아니, 설마 그런 게 있겠나? 그냥 신기해서 해본 말일세.”
싱겁긴.
후웅!
나는 칼을 휘둘렀다.
오늘은 노인에게 가장 처음 배웠던 스킬, ‘참(斬)’을 연습하는 날.
이제는 점점 익숙해져 가는 나만의 결(決)을 따라, 허공을 마음껏 베었다.
“그나저나, 조사는 잘돼가고 있습니까?”
마룡의 봉인지 조사.
그게 다그나르의 일이었다.
이곳이 정확히 어디 쪽인지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봉인지의 방향을 예측하는 것.
의심받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마을에 고지(高地)로 올라가 탐색하는 것 뿐이기에.
누가 뭐라 하면, 고지대에 사는 염소 털을 채집하러 왔다 하면 되는 일이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금방 또 나가보겠네. 어젠 동쪽을 살폈으니, 오늘은 남쪽을 살피면 되겠군.”
“오, 그렇습니까? 파이팅입니다.”
“흐흐, 파이팅은 무슨! 자네 덕에 선조로부터 이어져왔던 우리의 숙명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열심히 해야지!”
좋다.
저 열정적인 모습.
다그나르는 선조의 유적을 찾을 수 있고.
나는 퀘스트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고.
그야말로 상부상조(相扶相助).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 * *
“자네! 헥, 헥!”
다그나르가 다시 나타난 것은 채 3시간이 지나지 않은 후였다.
“빨리 오셨네요? 아직 해가 중천인데.”
나는 가볍게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훈련한 건 난데.
왜 더 힘들어 보이는 건 다그나르일까?
“자네 대박일세……! 대박……! 이리 와보게!”
근처로 다가온 다그나르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런 그의 눈빛에는 분명 흥분이 담겨 있었다.
“대박이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어! 아니, 가까운 것 정도가 아닐세.”
“음? 그럼요?”
나는 휘두르던 칼을 내려다 놨다.
“그냥 여기일세. 여기……!”
“네?”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고서에 나오는 마룡의 봉인지란 말일세! 푸른 계곡이 삼각형을 이루고 그루터기의 나이테가 한 방향을 바라보는 곳!”
“…….”
“허어, 세상에. 그래도 영웅의 유물이 묻힌 곳인데 이걸 이렇게 방치하다시피 해놓을 줄이야! 과연 엘프들은 조상을 선양하는 후손의 도리조차 없단 말인가?”
뭐라고?
그게 여기였다고?
몸에 살짝 소름이 돋으려고 할 찰나였다.
[띠링!] [스테이지 : 거대마룡의 흔적] [난이도 : 측정 불가] [두 종족의 숨겨진 역사가 담긴 유적을 발견하셨습니다.] [갈등 해결의 실마리가 될지도 모릅니다.] [주의! 주의! 주의!] [조심하세요.] [그곳 내부에는 존재의 마음을 지배하는 간악한 용, 거대마룡(巨大魔龍) 드루건의 흔적이 있습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친…….”
이윽고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침착해지려고 노력해 봤지만, 심장이 계속 뛰었다.
‘쉽게 가나 했더니.’
역시나 ‘측정 불가’ 난이도다.
태양이를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그 어떤 랭커의 입에서도 나온 적 없었던 그야말로 미친 난이도.
“자네, 왜 그러는가? 괜찮은가?”
“후우, 네, 괜찮습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솔직히 하나도 안 괜찮았지만, 다그나르에겐 굳이 말하지 않았다.
도움 될 게 없으니까.
“우선.”
“응?”
“내일까지 기다려보죠.”
지금은 다그나르보단.
노인이 필요했다.
* * *
다음 날.
“흐음.”
노인이 침음성을 냈다.
“거대마룡이라……. 이름 한번 거창하구나. 그래서, 바로 가려 하느냐?”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언제까지 이곳 던전에 갇혀 있을 순 없잖아요.”
“과연 내 제자. 깡 하나는 일품이로구나.”
“놀리지 마세요. 후달리니까.”
“끌끌.”
노인이 미소 지었다.
“진짜 대단해서 말하는 거다. 이곳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동네거든.”
“…….”
“저번에 봤던 그 의장이란 놈 있지 않으냐?”
“볼카누스요?”
“그래, 그놈. 그놈만 보더라도 거의 전성기의 나와 비슷할 정도인 세상인데. 거대마룡이라는 놈은 또 얼마나 끔찍하겠느냐.”
“…….”
노인이랑 비슷할 정도라?
사실 답이 안 나온다.
우리 세계에선 랭커가 최강인데.
노인은 그 랭커를 손가락 하나로 가지고 놀 수준이지 않던가.
“녀석아.”
“네, 어르신.”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봐온 이 ‘시스템’이라는 놈은 절대 답이 없는 상황을 내놓지 않아.”
“사실, 제가 걱정하는 건 하나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이엘프 퀸의 존재가 굉장히 작위적이라 느껴서요.”
무언가 어색한 느낌.
싸한 느낌.
“널 이곳으로 데려왔다던 숲 종족의 대가리 말이냐?”
“네, 그녀는 하필 의장에게 쫓겨나는 날 제 앞에 있었고. 또 자연스럽게 저를 이쪽으로 이끌었습니다.”
“…….”
“그 이후, 어떠한 언급도 제지도 가하지 않았어요. 마치 제가 이곳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듯이.”
“흠, 네 녀석을 저기로 인도하고 있다 생각하는 모양이로구나.”
“예.”
의심됐다.
확증이 아닌, 심증.
굳이 타 종족인 다그나르까지 숲 지대로 들인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지금, 이 순간에도.’
세르핀은 나타나지 않았다.
망치 만드는 나를 멀리서 관음했던 것처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불안했다.
찝찝했다.
“제자야.”
“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어차피 답이 없는 문제 아니더냐?”
“그냥 확 들어가 버릴까요?”
“그래, 그리고 그 엘프 대가리가 의심되는 거면 시험해 보면 되는 거 아니냐.”
“시험요?”
“그래, 한번 대놓고 요란스럽게 가보거라.”
“아?”
나는 노인의 말을 즉시 이해했다.
어차피 퀘스트가 뜬 이상.
답은 하나.
거대마룡의 흔적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건 맞다.
다만, [나 대놓고 들어갑니다? 들어가요?] 하는 식으로 시끄럽게 움직여 세르핀의 의도를 떠보라는 것 같은데.
“잠깐만요. 근데, 만약 세르핀에게 그런 의도가 없었다면요?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거 아닐까요? 하이엘프 퀸급이 틀어막으면 퀘스트 자체가 차단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끌끌, 아닐 게다.”
노인이 혀를 차며 확신 가득한 표정으로 웃었다.
“네 녀석 말에 따르면, 그 엘프 대가리가 그때 봤던 의장급이랬지? 그렇다면 절대 그럴 수 없을 게다.”
“…….”
“지금 네 녀석이 하는 말도 다 듣고 있을 확률이 높지. 허허, 전성기의 내 능력이라면 누워서 떡 먹는 거보다 쉬운 일이거든.”
“…….”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을 들으니까, 괜히 더 말하기가 싫어졌다.
사실.
지금 내가 떠드는 것도.
충분히 요란스러웠다.
그래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내가 유적지로 향하는 걸 용납한다는 뜻.
나는 결정을 내렸다.
“다그나르 씨.”
“으, 응?”
옆에서 멀뚱멀뚱 듣고 있던 드워프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간, 자주 혼잣말하던 나였기에.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었다.
그냥 신비한 종족이라 생각하고 있겠지.
“그 마룡의 유적지란 곳 말입니다. 어디 있습니까? 바로 가보시죠.”
“저, 정말인가? 야밤에 몰래 가고 그런 거 아니었나? 들키면 어쩌려고!”
“아뇨,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원래 매는 먼저 맞는 게 낫다.
측정 불가 난이도?
두근, 두근.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기대감, 그리고 내 안에 죽어 있는 무언가를 일깨우는 감각.
그 뒤에서 노인이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네놈은 전사다. 천재고 범재고를 떠나서 세상과 싸울 줄 아는 놈. 끌끌, 그래. 그래서 내 제자인 게지.”
그리하여, 나는 걸었다.
다그나르가 안내하는 고지를 향해 움직였다.
“딱 보니 저 고지에 있는 구멍이로구나.”
노인이 내 옆에 섰다.
“이번 시련도 네게는 큰 기연이 되겠지. 난 걱정하지 않는다. 네놈은 하늘이 돕는 놈이니까.”
대략 폭 5m 정도의 구멍이 보였다.
어둡고 침침한 곳.
그 밑으로는 부식된 계단이 나 있었다.
저곳이 바로 유적지의 입구.
“무얼 망설이느냐? 결정했으면, 들어가거라. 제자야.”
“예, 그래야지요.”
나는 발을 놀렸다.
* * *
숲 지대 허공 위.
새하얀 피부의 하이엘프가 아래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이엘프 퀸, 세르핀.
숲의 일족의 여왕이자, 500년 전부터 모든 엘프의 숭배를 받는 자.
그녀의 밑으로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주동훈과 다그나르가 보였다.
“세외의 존재여. 마침내…… 움직이시는군요.”
그녀의 얼굴 근육이 떨렸다.
도무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
한 가지 확실한 건.
불쾌함은 없어 보였다.
“…….”
한참 동안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그녀의 신형이.
스읏!
신기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