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ached the ending with a death route character RAW novel - Chapter 68
제68화
만일 생각지 못한 설치물이나 나무, 바위 또는 동물이든 사람이든 있다면 당연히 이동하는 이가 위험해지고 죽을 수도 있다.
“끄응.”
실버훈이 신음 소리를 내며 날 바라보았다.
마음에 안 든다는 티가 팍팍 나고 있었다.
“꼭 떠나야겠나?”
“당장 가는 거 아닙니다.”
“그래도 조만간 가겠지. 체르니아 왕국의 왕이 곧 죽을 거라면서? 병으로 오늘내일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하지만 폐하께서 허락하셔야 합니다.”
“하시겠지. 들어 보니 안 해 줄 이유가 없던데?”
“그렇죠.”
“진짜 갈 거냐고.”
“가야죠. 저도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어떻게 뭉그적거리며 한탄만 하겠는가.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는 거고, 능동적으로 대처를 해야지.’
“남작님께서 잘 맡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사와 마법사들을 좀 데려가려고 합니다.”
윈터, 어텀, 섬머, 말콤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
이곳보다는 옮겨 갈 곳에서 할 일이 많으니 도와줄 이도 많이 필요하다.
실버훈 다음에는 지휘관들을 하나씩 만나며 대화했다.
내용은 사정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과 남을 사람은 남아서 잘해 달라는 거.
같이 갈 사람은 새로운 곳에서 잘해 보자는 거.
윈터, 어텀, 섬머는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영지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에 안도했다.
말콤은?
털썩.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영주님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아나이스 때문이지?”
“네.”
늙은 나이에 따라오겠다는 건 충성심이 아니라 외동딸 때문이었다.
이걸 탓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말콤도 딸을 향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말콤… 미안하다.”
10년만 젊었어도 데리고 갈 거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늙었다.
‘짐이지, 짐.’
늙은 노인에게 먼 여행은 그 자체가 수명을 단축시킨다.
게다가 새로운 곳에서 날 반길 리도 없다.
옮겨 갈 왕국이 내전 상태이니 언제든 전투를 해야 한다.
하여튼 별별 일들이 다 일어날 수 있었다.
“진정 안 됩니까? 딸아이가 제겐 유일한 자식이고 가족입니다. 아내도 없는데…….”
글썽글썽.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으으, 마음 약해지네.’
하지만 같이 갔다가 말콤이 죽으면 그땐 아나이스로부터 원망을 듣겠지.
왜 늙은 아버지를 끌고 와서 죽게 하냐고.
그냥 영지에 두었으면 주어진 여생을 다 살다가 갔을 텐데, 하면서 말이다.
포탈 마법진 설치도 하려고 하긴 하지만 괜히 말했다가 계속 기대할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미안하다. 가는 길도 순탄하다 할 수 없을뿐더러 체르니아 왕국에서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다.”
“전투요?”
“게오르 황자님을 체르니아 왕국의 왕으로 만들려고 하는 거니까.”
“그럼 아나이스도 위험할 수가…….”
“물론이다. 하지만 그녀를 떼어 놓고 가고 싶진 않은데?”
내 욕심일 수 있지만 곧 결혼할 테고, 신혼인데 벌써부터 떨어지라고?
“그대가 정 원한다면 옮겨 간 곳에서 자리를 좀 잡은 후에 부르겠다.”
“…네.”
푹 수그러지는 말콤의 고개.
미안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
날 따라 떠나는 걸 반기는 지휘관도 있었다.
몽크와 페온.
용병대장이었던 두 사람은 몇 달이나 쉬었더니 몸이 근질거린다며 오히려 반겼다.
또 바렛과 레이몬드도 반겼다.
둘은 포로였다가 내 편이 되었는데 그동안 은근히 눈치가 보였던 것 같다.
내 눈치가 아니라 옛 영지의 영지민들 말이다.
아주 가끔씩 뒤에 대고 배신자라고 속닥거리는 이들도 있었고.
사이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지휘관에겐 하지 않던 질문을 하게 되었다.
“사이나는 가는 게 좋아, 아니면 남고 싶어?”
“전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무표정한 사이나.
감정 감추기 같은 특성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
“하지만 이번에 정착하게 된다면 움직이지 않고 꾸준히 있고 싶네요.”
“그래. 그렇게 되도록 하지.”
나도 또 옮기는 건 정말 싫으니까.
지휘관들까지 정리가 된 후에 레아, 아나이스, 이자벨을 만나 게오르를 따라 체르니아 왕국으로 옮길 계획을 털어놓았다.
세 사람은 벌써 알고 있었다는 듯 놀라지 않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너무 덤덤해서 내가 당황했다.
“왜 놀라지 않아?”
“영지까지 오는 동안에 황자님과 하시는 얘기를 들었으니까요.”
“어? 그래?”
실제로 수도에서 영지까지 오면서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인지 게오르는 자꾸만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때 체르니아 왕국에 가는 이야기도 몇 번이나 나왔다.
“흠흠, 영지를 떠나는 거, 레아는 아무렇지도 않아?”
“저도 불안하긴 해요. 새로운 곳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요. 하지만 영주님이 함께하시잖아요?”
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이런 건가?
“아버지 빚 때문에 영주님의 신붓감이 되어 처음 이곳에 왔을 때가 저에겐 바닥이었어요. 그 일을 겪고 나서인지 이젠 두려움은 거의 없어졌어요.”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이 말은 생략되어 있었지만 충분히 짐작이 되었다.
아나이스의 경우엔 괜찮냐는 질문에 왜 그런 걸 묻냐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가는 곳에는 저도 당연히 가야죠.”
당연히…….
고맙기도 하고,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본인의 의사를 더 알고 싶다고.
“전 당신의 아내이자 당신의 기사예요.”
기사.
왠지 아내라는 말보다 기사라는 말이 더 다가왔다.
“사랑과 충성을 바쳐야죠.”
오우~ 갑자기 부담감 100배!
두 사람의 대답과 이자벨은 좀 많이 달랐다.
“어쩔 수 없잖아요? 결혼식도 안 했는데 떨어질 수도 없고.”
“그, 그렇죠.”
“그런데요. 이 영지… 실버훈 남작님께 맡기시잖아요?”
“네?”
“그리고 자녀가 태어나면 그 자녀가 받을 거고요?”
“맞아요.”
“제가 낳은 아이도 자격이 있는 거죠? 레아 양이 낳은 아이에게 물려주실 건가요? 본처의 아들에게만 상속권이 있나요?”
“네, 네?”
자녀에게 줄 생각은 했지만 이것까지는 생각 안 했었다.
아직 애가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
“으음, 저는 되도록 공평하게…….”
“그러니까 본처의 아들이든, 후처의 아들이든 상속에 있어선 공평하다고요?”
“으음, 아무래도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내가 공평하게 해 주고 싶어도 이 세계의 관념이라는 게 있다.
본처의 자식, 장자, 아들.
뭐 이런 거 말이다. 여기서 나도 자유로울 순 없다.
마음이야 똑같이 해 주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내가 죽은 후에 분란의 소지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 있을 때도 말이 많을 테고.
무난한 건 그냥 남들처럼 하는 거다.
‘그런데 이런 민감한 걸 대놓고 물어보다니.’
정면 돌파, 뭐 이런 건가?
“하나만 약속해 줘요. 레아 양이 본처니까 그녀의 아들이 당신의 영지를 물려받는 건 인정하겠어요.”
“그런데요?”
“그 영지는 아마 여기가 아니라 우리가 가는 체르니아 왕국의 땅이겠죠?”
“아마도 그렇겠죠?”
이곳 영지가 작은 건 아니지만 게오르가 나에게 약속한 건 2인자였다.
왕국의 2인자가 아무려면 제국의 자작이 가지는 땅만큼도 못 가질까?
몇 배나 더 큰 걸 받을 건 분명했다.
물론 게오르가 왕이 되고, 내가 2인자가 되어야겠지만.
“그럼 여기 영지는 제 아들에게 주세요.”
“아직 아들이 생기지도 않았는데…….”
“생기면요.”
“흠흠, 그래요. 생기면…….”
“꼭 약속해 주셔야 해요. 아니면 나도 당신과 한 약속을 깨겠어요.”
날 죽이겠다고?
끄응, 당신 아들은 곧 내 아들이고요. 그 아들의 아버지는 바로 나거든요?
그런데 이자벨의 마음도 이해가 되긴 했다.
‘이자벨의 진짜 본심은 자신의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싶은 거겠지.’
그러나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녀의 아들에게 영지를 준다고 해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녀의 아들은 내 아들이니까.
이 세계에선 아들은 아버지의 성을 쓰고, 아버지의 가문을 이어받는다.
다만 성인이 된 아들이 분가하듯 새롭게 자신의 가문을 만드는 건 가능하다.
그렇다 해도 가문의 역사에는 분명 베르게르가 따라간다.
“약속… 할게요.”
“실버훈 남작님도 동의하시겠죠?”
“레아 양의 아들이 더 큰 걸 받을 테니 반대할 리는 없겠죠.”
“…제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열다섯이 된다면 그때부턴 저와 제 아들은 이곳에 와서 실버훈 남작님 대신에 영지를 맡고 싶어요. 그것도 부탁드려요.”
아까는 반드시 받아 내겠다는 태도였다면 지금은 부탁이라는 말을 했다.
‘열다섯이라……. 아들을 빨리 낳는다면 애가 열다섯이 되어도 난 30대, 이자벨도 30대. 그런데 그때부터 별거를 해야 한다고?’
레아와 아나이스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떨어지기엔 너무 이른 나이 아닌가?
하지만 거절하면 이자벨의 태도가 어떻게 변할까?
‘끄응, 내가 마법을… 아주 열심히 익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
포탈 마법진을 가동하려면 막대한 마정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대마법사에 준하는 마력을 가진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마정석이 필요한 건 마력 때문인데, 그걸 내가 몸에 지닌다면 마정석은 필요가 없어지니까.
‘대마법사 수준이 되면 내가 원할 때 마음껏 포탈 마법진을 쓸 수 있게 되지.’
그럼 이자벨이 원할 때 언제든 포탈 마법진을 써서 올 수 있다.
게다가 아들이 언제 태어날지 기약도 없는 일이다.
미리부터 안 된다고 하면서 이자벨의 적대감을 키울 필요가 있을까?
“그래요. 당신 뜻대로 해 줄게요.”
“감사해요. 당신을 믿을게요.”
“문서로 써 줄까요?”
“종이 따위는 안 믿어요.”
응? 안 믿어?
어쩌면 이자벨은 내가 약속을 어기길 바라는 건 아닐까?
‘그래야 복수를 할 테니까.’
끄응, 더 조심스러워지네.
이자벨과 나눈 얘기는 공식화할 필요가 있었다.
뒤로 미뤄 두면 나중에 레아나 아나이스에게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차라리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지금 확정을 지어 두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하여 먼저 실버훈부터 만나서 이 이야기를 했다.
“그럼 차라리 지금부터 이자벨 양에게 영지 대리를 시키는 게 어떤가?”
실버훈의 태도를 보니 영지 관리에 대한 의욕이 싹 사라진 모습이었다.
“남작님께서 맡아 주시지 않겠다고 하시면 저로선 말콤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말콤도 나처럼 내켜 하진 않을 텐데? 아나이스 양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들에겐 어떤 걸 물려줄 건가?”
“적당한 걸로 물려줘야죠.”
“큼큼, 그런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남작님, 제가 앞으로 자녀를 몇이나 낳을지, 아들은 몇이나 낳을지 모르지만 레아 양과의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들은 가장 늦게 태어난 아들이라도 최대한 많은 걸 물려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 영지보다 더 큰 걸로?”
“하하, 그것까진 약속 못하겠네요. 첫째 아들에겐 당연히 큰 걸 주겠지만, 막내아들까지 챙길 자신은 없네요.”
“…….”
“저로선 이게 최선입니다.”
“알았네. 그런데 왜 이자벨 양을 이렇게 챙겨 주지? 레아보다 이자벨 양이 더 좋은가?”
실버훈의 질문은 계속 날카로웠다.
“그녀는 부모를 잃고 수녀원에서만 자랐습니다. 정확한 신분은 모르지만, 범상치 않은 가문 출신이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범상치 않아?”
“수녀원에서 평민의 자식을 받아 주지는 않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