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62
62화 알아서 찾아오겠지
클레어는 멀어지는 도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말했다시피, 시간이라면 많았으니까.
한편 전화를 받으러 간 도율이 수화기 너머 상대, 센터장 최강현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내 정말 자네 때문에……. 어?]그런 도율의 말이 의외였는지 최강현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용건은?”
최강현이 다시 한번 물었을 땐 이미 평소의 태도로 돌아온 후였다. 그런 도율의 태도에 최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그럼 그렇지.
그래도 평소와 같아서 안심이 되는 분위기였다. 맨 처음 예상했던 것과 똑같은 반응이어서, 최강현은 자연스레 용건을 꺼냈다.
“임무?”
[이번에 내 덕을 좀 봤으니, 부탁 좀 들어주는 셈 치고. 물론 보수도 지급하지.]센터장 직속 비밀 조직, ‘현학’의 일이었다.
도율은 딱히 센터장에게 충성하는 것도 아니고,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조건이 달린 계약서를 작성한 것도 아니었다. 다른 조직원들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도율에게는 강제력이 없는 상태.
하지만 굳이 부탁 운운하지 않아도 도율은 들어줄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신세를 좀 지지 않았던가. 시골에서 서울로 태워 준 것도, 플레이아데스 길드의 후속 처리를 도맡은 것도.
어느 정도 서로 윈윈인 구석이 있었다고는 하나,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안 돕는다고 해서 어쩔 수 없지, 하고 물러설 영감이 아니야.’
최강현은 나이 먹은 노친네답지 않게 자기 몸을 불사르는 면이 있었다.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 그런 속물적인 이유로만 계산하는 게 아니더라도, 도율에게는 이런 노인은 죽지 않고 오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괜찮은데.”
“그러지.”
통화가 종료되었다.
* * *
영감과의 통화 후. 나는 이어서 온 문자 내용에 따라 다음 날 센터장 집무실에 방문했다.
“세이렌의 눈물?”
“그래.”
세이렌의 눈물.
영감은 내게 구해다 주길 바라는 물건이 있었다. 그 물건의 이름이 세이렌의 눈물이었다.
영감이 내민 서류에는 짧게 아이템의 설명이 적혀 있었다. 그 자체로 완성품은 아니고, 포션이나 장비를 제작할 때 사용되는 소재의 용도였다.
특이 사항으로 입수 난이도에 주의할 점이 있다고 작성되어 있었다. 세이렌이란 존재가 바다에 서식하다 보니 던전이나 게이트도 그런 환경으로 조성되어 있고, 원활한 전투 진행이 어려워 본체의 강함에 비해 구하기가 어렵다는…….
내가 서류를 내려다 놓으며 물었다.
“그래서, 나보고 이거 구해다 달라고? 난 던전 찾아다니는 재주는 없는데.”
균열 내부의 환경과 출몰 몬스터를 분석하는 건 따로 전문적인 분석 기관이 존재했다. 국가 공인으로도, 대형 길드에서 각자 운영하는 방식으로도.
균열 환경 분석 기관에 세이렌이 출몰할 법한 균열을 찾아달라고 해야 하지만, 내가 그런 기관과 연이 닿아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잊었나? 나는 균열에서 보상을 받지 못하는데.”
마력과 반발하는 성질은 가진 힘, 내공. 그로 인해 던전 보상들이 죄다 망가져 버리는 탓이다.
그러나 영감이 내게 원하는 건 균열에 들어가 세이렌을 사냥하고 그 보상을 구해다 오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 균열에 들어갈 필요는 없고.”
영감이 테이블 위로 새로운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포스터 같은 생김새의 종이엔 커다랗게 제목이 쓰여 있었다.
“아크투러스……?”
영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를 받아 읽어 내려가던 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히 한국어로 쓰여 있긴 하지만, 내용이 모두 붕괴되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낱말들이 억지로 연결된 문장들투성이였다.
“뭐라는 거야?”
“일종의 암호문일세. 쉽게 말하자면 투기장이지.”
“투기장?”
영감이 설명했다.
이 아크투러스라는 것은 투기장의 이름이었다. 이들이 제공하는 콘텐츠는 명쾌했다. 피와 싸움.
“사람 대 사람. 사람 대 몬스터. 몬스터 대 몬스터. 자극적인 대결이라면 뭐든지 보여 주지.”
“수익은 입장료나… 배팅 수수료를 통해 벌어들이는 거겠군.”
“역시. 척하면 척이구만.”
내 짐작이 맞다는 듯 영감이 손가락을 튕겼다.
“거기서 가끔 이벤트로 토너먼트를 개최하기도 한다네.”
아크투러스의 토너먼트 이벤트.
참가자들을 토너먼트 형식으로 대결을 붙여, 마지막까지 이겨 내는 우승자를 만드는 방식. 그리고 그 참가자들을 꼬드기기 위한 수단이 바로 우승 상품. 이번에 있어선 세이렌의 눈물이었다.
상품을 구하기 위해 강자들이 참가하고, 평소보다 치열한 대결을 보여 줌으로써 더 높은 수익을 벌어들인다. 그걸 위해서 상품으로 인한 지출 정도는 눈감아 줄 만하다는 계산인 거겠지.
어려운 얘기는 아니었다. 이런 시스템은 시대를 불문하고 반드시 존재해 왔으니까.
“그런데 이 세이렌의 눈물이라는 아이템, 그렇게 구하기 힘든 건가?”
물론 서류에는 구하기 어려운 아이템이라 쓰여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몬스터의 강함에 비해 구하기 어려운 거지, 구하는 게 불가능한 수준의 희귀 아이템은 아니었다. 센터장 정도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굳이 이런 번거로운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것보다도.
그러자 영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실 이 아이템이 정말로 필요한 건 아닐세.”
역시. 이미 예상한 답이었다.
“이 아이템의 출처가 의심스러운 걸세.”
“그런가?”
영감이 고개를 끄덕이고 덧붙였다.
“그래. 그러니 정말 필요한 건 아이템이 아니라,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할 만한 전력인 게지. 아무래도 이런 일은 자네가 적임이라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영감은 출처 분석을 도울 사람도 한 명 있다고 말했다. 나야 서류 만지는 일은 들어 봤자 제대로 알지 못할 테니 상관없고.
영감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당부했다.
“그러니까……. 얌전히 토너먼트에 참가해서 우승해 주길 바라네. 알겠지? 이번 임무는 어디까지나 비밀 잠행이니까.”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이번엔 진짜로 안 돼. 이미 대형 길드 하나 터뜨리고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인력이 과로사하기 직전이라고.”
플레이아데스 길드 건이었나.
그 정도 대형 길드가 공중분해된 사건이다. 해당 길드가 차지하고 있던 이권을 탐내는 자들 사이에서 거센 싸움이 벌어질 뻔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 뒷수습으로 아직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고.
영감에게는 이미 내 사정을 얘기해 뒀다. 내가 다른 세계에서 지내다 온 것도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 동생의 병과 관련이 있었다는 얘기도 전해 뒀다.
“그건 어쩔 수 없었잖아.”
“그렇긴 하다만…….”
영감이 인정했다. 영감은 불안해 보이던 기색을 지우고 밝게 큰소리쳤다.
“뭐, 설마하니 이번에도 그런 일이 있겠나?”
* * *
“출장… 이라고요?”
파를 썰던 클레어가 나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며칠 걸릴 것 같아서, 현장에서 묵을 것 같던데요.”
영감이 전해 준 말 중 하나였다.
토너먼트 기간 동안 집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번거로울 테니, 근처 숙소를 잡고 지내도 된다는. 물론 나도 그게 편했다.
그 사실을 클레어에게 전했더니, 그녀는 뭔가 내키지 않는 듯이 머뭇거렸다. 그래도 내게 무어라 확실히 말은 하지 못한 채 받아들였다.
“알았어요…….”
왜 이렇게 떨떠름한 반응이지.
내가 의아하게 여기자 거실 소파에 늘어져 티비를 보고 있던 흰돌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바람피우려는 줄 아는 거 아닙니까?」
「뭐?」
무슨 개소리를 하나 했더니, 녀석이 보고 있는 드라마가 마침 그런 내용이었다.
[조사한 내용입니다.] [이 사진들은…….] [출장을 갔다던 사모님의 남편분께서는 사실 그 시각 내연녀와 모텔을…….] [진해용……! 동네 구멍가게에서 우동이나 팔던 널 주워서 여기까지 키워 준 내게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그리고 중간 광고가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화면 구석에 떠 있는 드라마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드라마 이름은 ‘국물이 진해용’이었다.
남자가 주인공이었나…….
「저건 드라마잖아.」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하다던데.」
무시하려 했지만, 신경이 쓰였다. 그걸 눈치챘는지 흰돌이가 내게 물었다.
「뒷내용 알려 줄까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미래 예지 같은 대단한 게 가능한 놈은 아닐 텐데.
「저거 재방이에요.」
「…말해 봐.」
「여주가 칼 들고 찾아갑니다.」
「칼?」
클레어가 칼 들고 찾아오는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가 항상 쓰던 그 검의 모양새가 내게도 익숙했다.
「왜 하필 칼이야…….」
「총을 들 순 없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 결국 찔리냐?」
「아뇨.」
흰돌이의 대답에 내 얘기도 아닌데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알고 보니 오해였다고, 내연녀가 아니라 직장 동료였다고 알려 주죠.」
「…칼까지 들고 찾아가서 그걸로 용서해 줘?」
「물론 남주가 입을 막 털었죠. 나한텐 너밖에 안 보인다는 둥. 키스 신도 완전 레전드…….」
흰돌이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드라마 OST인 모양이다. 이 녀석, 노래 실력은 형편없군.
나는 클레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클레어도 내가 출장을 간다고 해서 탐정 같은 녀석들한테 내 뒷조사를 시키는 걸까?
영감한테 받은 건 나름대로 비밀 임무다.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다. 그래서 클레어에게도 자세한 내용은 말해 주지 않고 있었는데. 탐정 같은 제3자에게 들키면 그것도 웃기는 짓이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 약속했다.
“출장 말인데요…….”
“네?”
클레어가 칼을 쥔 채 나를 돌아보았다. 조금만 뻗으면 내 명치를 찌를 수도 있었다. 다칠 일은 없겠지만 기분이 오싹했다.
“카, 칼 좀.”
“아차, 미안해요.”
클레어가 태연하게 도마 위로 칼을 내려놓았다. 이래서 초보한테 칼 쥐여 주는 게 아닌데…….
“그래서, 뭔데요?”
“저 다른 여자 같은 거 없습니다.”
“네……?”
클레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뜬금없이 무슨 소릴 하냐는 얼굴이었다.
“…그냥 그렇다고요.”
역시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라니까.
“갑자기 뭐죠?”
“예?”
“혹시 켕기는 거라도…….”
“아니에요. 없어요, 없어.”
젠장. 괜히 긁어 부스럼이었네.
클레어는 싸늘하게 노려보던 눈빛을 치우고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농담이에요. 당신한테 다른 여자가 생긴다고 제가 화낼 이유가 있나요? 진짜 부부도 아닌데 말이에요.”
“그렇… 죠?”
“자의식 과잉.”
“윽…….”
클레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돌아봤다.
“아니, 그래도 엄연히 남들 앞에선 부부라고 밝히고 다니는 사이니까. 지킬 건 지켜야죠. 화는 안 나더라도 곤란한 상황엔 처할 수 있잖아요.”
“그렇네요.”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괜히 가십에 휩쓸릴 테니까.
“그땐 나도 제대로 연기할게요.”
“네?”
연기라니.
무슨 의미인지 묻는 내게 클레어가 대답했다.
“치정극.”
“…….”
잔뜩 얼어붙은 내 반응을 살피던 클레어가 피식 웃으며 지시했다.
“다 됐으니까 앉기나 해요.”
“예…….”
클레어는 자기도 가끔씩 식사 준비를 하고 싶다는 고집을 부렸다. 그냥 내가 해도 된다고 했지만, 클레어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래 주면 나야 편하지만, 실력이 걱정이었다. 일단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하자는 말에 그녀가 첫 메뉴로 선택한 건 다름 아닌 라면이었다.
…라면도 요리라 치나?
“어때요?”
클레어가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고 물었다.
의외라고 할까, 라면 맛은 멀쩡했다. 하긴. 라면 맛에 실패라고 할 게 있나.
“굉장히…….”
대답하려는 찰나.
으득, 하고 계란 껍질이 씹혔다.
* * *
영감이 맡긴 임무를 수행할 날짜가 다가왔다. 토너먼트는 등록을 해야 참가가 가능하니 더 늦을 순 없었다.
좁은 입구 속 복잡하게 뻗어져 있는 도로. 밤인데도 불구하고 밝은 거리.
불야성不夜城.
잠들지 않는 성이었다.
“여기 오는 것도 오랜만이군.”
커다란 행사가 있는 기간이라 그런지 전에 왔을 때보다 한층 활기찬 분위기였다. 지나다니는 사람의 수도 많았고, 거리 역시 활기가 넘쳤다.
그럼 우선.
“엔트리 등록부터인가.”
영감이 말한 아크투러스라는 토너먼트에 참가하기 위해, 신규 참가자로 등록해 예선전부터 차근차근 올라가야만 했다. 출장은 대기 시간 때문에 길어질 예정이었다.
영감은 ‘가능한 문제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우승만’ 하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과연 그런 게 가능하기나 할지. 우승을 하더라도 제대로 상품을 받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현학의 또 다른 멤버가 지원을 할 거라고 했는데, 그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때가 되면 그쪽에서 연락할 거라고.
“알아서 찾아오겠지.”
엇갈리게 되더라도 내 잘못은 아니었다. 굳이 알려 주지 않은 걸 보면, 어쩌면 날 찾아내는 게 그쪽 멤버의 미션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나는 내가 할 일을 하기만 하면 됐다. 토너먼트 우승, 부탁받은 건 그거니까.
가면을 고쳐 쓰고 거리 속을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