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153
153화
토요일 저녁, 점심에 이어 저녁까지 배달 음식을 시킨 훌륭한 이 시대의 직장인 은주가 음식을 건네받은 뒤 꾸벅 인사했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포장도 뜯지 않은 저녁을 그대로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둔 그녀가 향한 곳은 바로 냉장고 앞.
“맥주, 소주, 콜라, 사이다. 맥주, 소주, 콜라, 사이다. 음…. 어제 너무 달려서 그런가. 오늘은 사이다 삘이다.”
혼자서 노래를 부르듯 흥얼거리던 은주가 이내 한 손에는 사이다 캔과 핸드폰,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얼음이 가득 담긴 컵을 들고 휘청거렸다.
“와. 골로 갈 뻔했네.”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 한 번 더 왕복한다면 굳이 넘어질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귀찮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몇 시지?”
한쪽 발로 대충 냉장고 문을 닫은 은주가 시간을 확인하고 후다닥 자리에 앉았다. 이제 곧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드라마가 시작할 시간인 탓이었다.
“아 어제 본방 못 본 거 생각하면 아직도 짜증 나네.”
평일 내내 일에 시달리는 그녀의 소박한 낙은 바로 배달 음식과 함께 드라마를 보는 것.
특히나 본방송을 챙겨보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는 보통 아예 놓칠 일 없는 토, 일 드라마를 주로 보지만, 이번에 꽂힌 드라마는 하필 금, 토 드라마였다.
“회식 요일이랑 시간 투표하면 뭐해? 툭하면 이래서 옮기고, 저래서 옮기고.”
그 이유는 바로 이 당당하게 최근 본 영화 순위 베스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의 이정이 주연인 드라마이기 때문이었다.
3회차 재방송. 앞선 회차를 놓치면 이해하기 어려운 속도감이기 때문일까, 은 토요일 본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금요일 방송분을 재방송해 주고 있었다.
“좀 특이하긴 한데 나야 좋지 뭐.”
보통 재방송은 본방송 이후, 그러니까 다음 주쯤에나 볼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인 편성임을 생각해보면 독특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금요일 방송을 놓친 흔한 시청자로선 오늘 당장 본방송을 볼 수 있어 좋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실제로 이 이런 독특한 재방송 시스템을 결정하기까지 꽤 많은 논의와 문제가 있었지만, 결국 은주처럼 지난 방송을 놓친 사람을 다시 본방송으로 끌어들이기에 적합한 것은 사실이었다.
의 배경은 98년, 드라마는 처음부터 IMF가 터진 직후인지라 사회 곳곳에는 괜찮은 척하는 암울함이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암시하고 시작한다.
이런 와중에도 청춘을 즐기고 싶은 20살 희도는 처음엔 다소 철없으면서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제 뿔뿔이 흩어지게 될 친구들과의 마지막 추억여행을 기획하면서도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을 생각에 어렵게 자리를 구해 일을 하는, 아직 아이의 티를 벗지 못한 성인으로.
경제적 어려움에도 싸구려 술 한잔으로 시름을 잊어보려는 사람은 넘쳐났고, 희도 역시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날것 그대로의 사회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비록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살인 용의자라는 입장이 되어 돌아왔지만.
1, 2화는 시대의 배경과 희도의 누명, 의도적으로 사라진 증거, 희도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동네 사람들의 입에서 멋대로 재해석되는 김희도라는 사람의 불우함에 치중되었다.
시작만 보자면 드라마 같다기보단 영화 같다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정도로 묵직한 연출이었는데, 오히려 이 점이 같은 시간대의 드라마들 사이에서 의 존재감을 높였다.
딱딱한 폰트의 제목이 지나가고 주연들의 얼굴이 차례대로 유리창에 반사되는 듯한 모습 아래로 그들의 이름이 스르륵 새겨졌다 연기처럼 흩어졌다.
“오, 시작한다 시작해.”
3화의 시작. 은주가 사이다 뚜껑을 따며 침을 꼴깍 삼켰다.
* * *
현대 배경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무적이고 깔끔한 취조실이 아니라 공간이 남는 창고에 대충 의자와 책상만 가져다 두고 취조실이라 이름 붙인 듯한 허술한 공간.
“전 아니라고요! 형사님!”
그런 취조실에 갇힌 희도가 수갑 찬 손을 흔들며 필사적으로 억울함을 토로했다.
“저는 그냥 회식 끝나고 술 좀 깰 겸 걸어가다가 본 거라니까요? 아니 그렇잖아요! 어떤 미친놈이 자기가 죽인 사람이 자살했다고 신고를 해요? 그냥 도망가지.”
“신고 내역이 있으면 너 여기 잡혀들어오지도 않았어 임마.”
“그러니까 그게 왜 없냐고요! 분명 구급차도 오고. 경찰서 가서 쓰라는 것도 다 썼다니까요. 아씨, 답답해서 진짜.”
“아씨? 아씨? 이 새끼가 어려서 봐줬더니 아주 처맞으려고 작정을 했나 어디서 언성을 높여?”
90년대 후반에 이르러 80년대와 같은 폭력 수사는 많이 사라졌지만, 그렇다 해서 완전히 손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여간 멀쩡하게 생긴 놈들이 더 무섭다니까? 어지간하면 조용히 좀 있어라. 제발. 요즘 강압 수사다, 폭력 수사다 말이 많아서 병신같은 놈들 한 대 치지도 못하고 원.”
희도가 언성이 점점 높아져 이내 고래고래 소리 지르자 건성으로 그에 대꾸하던 형사가 들고 있던 서류철로 그의 머리를 툭툭 쳤다.
“하…. 야, 네 말대로 너같이 자기는 죄 없다고 빽빽거리는 놈들 수사하는 게 내 일이다. 엉? 억울하다고 염불을 외는 10명 중에 8명은 죄가 있어요.”
동철로선 흔적이 남든 말든 거리낌 없이 때리고 보던 이전에 비하면 그냥 쓰다듬은 것과 다름없었지만, 한 번도 폭력을 경험해 본 적 없는 희도가 겁을 먹기엔 충분한 타격이었다.
“전 진짜 아니라구요….”
“알았으니까 좀 닥쳐라. 응? 네가 진짜 아니면 어련히 수사 과정에서 드러나겠지. 우리도 그러자고 수사하는 거고. 안 그래? 애도 아니고 이제 성인씩이나 된 놈이 왜 이렇게 침착함이 없어?”
스무 살. 어엿한 성인이지만 어른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나이.
“제가 결백하면 곧 풀려날 수 있겠죠?”
“……네가 정말로 결백하다면 그렇겠지.”
난생처음으로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운데 범인 취급이라니.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지친 희도는 동철의 긴 침묵에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까 소리 좀 그만 지르고 얌전히 좀 있어. 네 목소리가 건물 전체에 울려 퍼져서 시끄러워 죽겠으니까.”
“네….”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억울해 돌아가실 지경이었지만 희도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이상, 피고인 김희도를 12년 형에 처한다.”
― 탕, 탕, 탕.
잠시 뒤, 까만 화면을 뒤로 일정하게 법봉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결백하면 괜찮다면서요. 그러려고 수사하신다면서요! 형사님! 김동철 형사님!”
서서히 화면이 밝아지고, 희도가 법정을 빠져나가는 동철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동철은 그런 희도의 울부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흔들림 없어서, 희도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김 형사님!!!”
동철을 향해 달려들 것만 같은 희도를 붙잡는 청원경찰과, 울부짖는 그를 중심으로 다시 한번 페이드 아웃. 그리고 페이드 인.
화면이 어두워졌다. 밝아지더니 한 교도소의 문이 열리며 아래로 작은 자막이 떠올랐다.
― 12년 후, 2010년.
12년 전, 체포당했을 때와 같은 옷을 입은 희도가 두꺼운 철문을 빠져나왔다. 그 누구도 마중 나오지 않는 쓸쓸한 출소.
“아무도…. 없네.”
6년, 그리고 3년 전.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던 부모님까지 돌아가시고 나니 희도는 완전히 세상에서 혼자가 되었다.
“있을 리가 없지.”
일가친척들은 3년 전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이제부터라도 잘 살면 된다고 어깨를 두드려 줄 어머니도. 여전히 네 결백을 믿는다며 두부를 건네줄 아버지도 없었다.
“집도 없고,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는 사람은 이제 어딜 가야 하나.”
차라리 죽은 생선의 눈이 더 생기있어 보일 정도로 살아 있는 사람의 생기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
희도는 눈이 부시지도 않은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거기나…. 가볼까?”
* * *
“악, 망할 중간광고.”
희도가 말한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 잔뜩 긴장해 있던 은주가 갑작스러운 중간광고에 확 짜증을 냈다.
“이 와중에 광고도 이이정이야?”
수 초 전, 보기만 해도 메마른 사람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던 희도와 달리 광고 속의 이정은 생기 넘쳤다.
그 차이가 어찌나 큰지 광고를 보고 있으면서도 두 사람이 생김새만 비슷한 다른 사람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어, 나 아직 밥 안 먹었네.”
팝콘을 왕창 사 들고 들어갔어도 막상 영화에 너무 집중하면 채 반도 비우지 못하는 것처럼 은주의 저녁밥은 아까 테이블에 올려놓은 흰 봉투 그대로였다.
“빨리 먹어야지. 이러다 본방 시작할 때까지 못 먹겠다.”
은주는 다 식은 저녁밥을 전자레인지에 데운 뒤 서둘러 저녁을 먹었다.
당연히 밥을 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긴 광고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밥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