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70
070화
“오셨어요.”
“진짜 미안해. 오늘 촬영이 생각보다 늦게 끝나서.”
“괜찮습니다. 우선 앉으세요.”
“그럴까?”
훈진의 성격을 알고 있다 해서 숨 막히는 정적이 편해지는 건 아닌지라 주석의 등장이 못내 반가웠다.
“내가 불러놓고 이것 참 민망해서 정말. 서로 인사들 했나?”
“저희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가볍게 인사만 나눴습니다. 정말 별로 안 늦으셨어요. 걱정 마세요.”
훈진의 낯가림을 아는 주석은 그가 오기 전까지 분위기가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저놈 성격이 성격인지라….”
“…….”
훈진은 대놓고 그를 타박하는 말에도 묵묵히 세팅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언뜻 주석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법도 했지만, 실상은 맞는 말이라 대꾸를 못 하는 것에 가까웠다.
“이정 씨는 붙임성이라도 좋지. 저놈은 진짜…. 고기 굽지 말라니까 말도 더럽게 안 듣고!”
훈진이 구운 고기는 어느새 고기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만 숯덩이가 되어있었다.
그의 손에서 집게를 빼앗은 주석이 아프지 않게 훈진의 손등을 내리쳤다.
“라면도 물도 못 맞추는 놈이 퍽이나 소고기를 굽겠다고.”
훈진이 라면도 못 끓이는 요리치라는 건 의외의 사실이었다.
한참 후에 어느 정도 낯가림을 이겨내고 돌아온 그는 요리 자격증이 있을 정도로 수준급의 요리실력을 자랑했기 때문이었다.
‘활동 쉬는 동안 요리라도 배운 건가.’
“뻘쭘하면 물이나 따라!”
주석이 대화하는 와중에도 묵언 수행이라도 하듯 한마디도 않는 훈진에게 일거리를 주자 그는 그제야 할 일이 입력된 로봇처럼 움직였다.
“아, 제가 할게요.”
“됐어. 가만히 있는 놈 일이라도 하라지.”
“하하….”
훈진은 주석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만히 물을 따라 이정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에도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는 훈진에 주석이 다시 한번 혀를 찼지만, 정말로 그가 싫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두 분 다 속 타시겠네.’
사실, 훈진의 성격을 알고 있는 이정이기에 훈진의 속마음을 지레짐작할 수 있을 뿐, 객관적으로 보면 신인에게는 너무 가혹한 환경이었다.
‘셋이서 밥 먹는데 한 분은 선생님이라 불리는 대배우, 다른 한 분은 성격 안 좋다고 소문난 선배….’
특히 훈진은 악소문에 악소문이 더해져 신인 배우 군기를 잡았다더라, 스태프에게 욕을 했다더라 등 꽤 자극적인 소문까지 퍼져있는 터라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기 힘든 신인에게는 오히려 대배우인 주석보다도 무서운 선배일 법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체하기 딱 좋겠네. 정말.’
이 상황에서 주석이 대놓고 훈진을 타박하는 것은 ‘아무리 성격이 나빠도 내 아래이니 걱정하지 말아라’라는 의미를 내세워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강했다.
물론 그 안심의 대상에 이정이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따라드릴게요.”
주석에게 고기 집게를 빼앗긴 뒤 혼자 술만 들이켜는 훈진의 모습에 이정이 술병을 잡았지만, 주석이 만류하는 탓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됐어. 저놈은 술 좀 들어가야 입이 풀리니까 마시게 두고 우리는 우리끼리 고기나 먹지.”
그렇게 다른 사람이 보기엔 이정이 제일 불편한 자리, 실제론 훈진이 제일 불편한 자리가 계속되었다.
훈진은 술 한 잔 마실 때마다 이정과 주석을 향해 입술을 달싹였지만, 술 한 병이 다 비워질 때까지 말이 되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한 잔 한 잔 술이 넘어갈 때마다 그의 낯빛은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갔다.
‘와 말로만 들었지 진짜 심각하네.’
이정도면 훈진이 오기 전 두 마디나 대화할 수 있었던 게 기적이었다.
아마 같이 작품 할 동료 배우인 만큼 최선을 다해 본 결과가 아니었을까 지레짐작해 볼 뿐이었다.
“화장실 좀 다녀오지. 뭐 더 먹을 건가 둘 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선생님.”
“저도요.”
주석의 질문에 지독히도 무거웠던 훈진의 입이 열렸다. 혼자서 마신 술이 두 병을 돌파했을 즈음이었다.
“어휴, 저 곰탱이. 연기나 좀 못하면 예뻐하지라도 않지.”
어느 정도 술을 마신 건 주석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비교적 큰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갈랐다.
“…….”
“…….”
주석이 나가고 이정과 훈진 사이에 처음보다 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안 그래도 점점 어두워지던 훈진의 낯빛이 이제는 아예 땅굴을 파고 들어가 먼지를 뒤집어쓴 수준이 되었다.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이정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주석 선생님이 선배님을 많이 아끼시나 봐요.”
“네. 부족한데도 참 많이 아껴주시죠….”
망했다.
싸늘한 기운이 이정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술이 들어가면 어느 정도 입이 풀릴 거라던 주석의 말과 다르게 훈진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못했다.
“고기는 좀 드셨어요? 계속 술만 드시는 거 같아서요.”
“먹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말주변 없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대화가 이어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면 낯가림이 아니라 정말로 이정과 대화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계속된 단답에 살짝 짜증이 올라온 이정이 그나마 대화할 수 있는 주제를 고르기 위해 고심했다.
“대본은 어떠셨어요?”
문득 과거 훈진이 촬영 관련 이야기는 그나마 쉽게 말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고 말했던 인터뷰가 생각난 이정이 이번에는 대화 주제를 대본으로 옮겼다.
“좋았죠.”
여전한 단답. 이것도 아닌가 싶어 포기하려던 찰나 훈진의 말이 이어졌다.
“주석 선생님이 같이하자고 하셔서 하기로 한 작품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대본 자체의 짜임새가 좋았어요.”
여태껏 했던 말을 전부 합친 것보다 긴 감상을 내뱉은 훈진의 눈은 연거푸 술 두 병을 마신 사람답지 않게 멀쩡했다.
“그쵸? 캐릭터들의 관계도 좋고, 뻔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탄탄한 반전도 좋고, 시나리오상으로는 이야기의 흐름이나 복선 회수 같은 것도 다 적절해 보였어요.”
드디어 조금 틈이 보이는 대화에 이정이 길게 말을 이어받았다. 훈진과의 대화가 목적이긴 했어도 자체가 워낙 흥미로웠던 덕에 말을 꾸며낼 필요는 없었다.
“촬영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송계나 감독님 작품 전부 찾아봤는데 유명한 분은 아니시지만 매니아층이 있을 정도로 탄탄한 작품들을 만드시더라고요.”
훈진은 제 무뚝뚝한 대답에도 서글서글하게 말을 이어가는 이정의 화술에 감탄했다.
본심과는 관계없이 서늘한 무표정과 흐름을 끊는 말투에 대부분 적당히 말을 하다 멀어지거나 똑같이 침묵을 고수하기 마련인데 이정은 한결같았다.
‘우연이겠지만 영화 얘기 꺼내준 덕에 말하기 한결 편해지기도 했고….’
훈진이 제때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대체로 너무 많은 답변이 머릿속에 떠다니기 때문이었다.
이 대답이 좋을지, 저 대답이 좋을지, 지금 하려는 말이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진 않을지 고민하다 보면 대답할 수 있는 골든 타임이 훌쩍 지나가 있고 본의 아니게 상대방을 무시한 꼴이 되곤 했다.
“송계나 감독님의 작품을 전부 다 봤어요? 직접?”
“전부는 아니고요. 두세 작품 정도 봤습니다. 나머지는 후기나 요약 영상을 찾아봤고요. 색이 뚜렷한 감독님이셔서 그런지 관련 영상도 종종 있더라고요.”
하지만 이정은 그런 그의 성격을 알고 있다는 듯 대답을 재촉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그가 가장 쉽게 입을 열 수 있는 주제를 가지고 말을 걸었다.
처음 보는 사람과 이렇게 말을 오래 나누는 것은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훈진 선배님이랑 찍게 되었다는 말 듣고 선배님 나오신 영화도 찾아봤고요.”
“저야 영화밖에 안 찍으니까요.”
사회성이 심각하게 부족한 훈진이 여태껏 작품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동년배 배우들 사이에서 눈에 띄게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덕이었다.
“이정 씨는 영화 처음이죠?”
하지만 그 탓에 또래 배우들 다 찍는 드라마 한번 못 찍어 본 훈진은 오히려 이정이 더 신기했다. 훈진이 처음으로 이정에게 질문했다.
“네. 드라마, 웹드라마는 해 봤는데 영화는 처음이에요.”
“웹드라마는 어때요?”
“제가 아직 영화 촬영을 못 해봐서 영화랑 비교가 힘든데, 드라마와 웹드라마의 가장 큰 차이점은 촬영 시간이었어요.”
연기에 대한 열정만은 엄청나서 여러 환경을 접해보고 싶어도 제 사회성으론 영화가 최선이기에 다른 환경을 거쳐 영화까지 온 그가 부럽기도 할 정도였다.
“편 수는 비슷해도 드라마는 1시간 이상, 웹드라마는 길어야 30분이다 보니 웹드라마가 대본도, 촬영 시간도 짧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렇구나.”
“아, 그리고 드라마나 영화에서 하는 무사 기원 고사 같은 것도 전혀 없었어요.”
민혁과 고사 기원 행사는 많이 다녀봤지만, 개인 작품으로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이정이 아쉬움을 표했다.
“드라마 촬영 때도 고사 없이 진행해서 해보고 싶었는데, 가벼운 분위기라서 그런지 안 하더라고요.”
“우리 영화는 할 텐데.”
“아 정말요?”
한편 화장실에서 살짝 술이 깨 부랴부랴 돌아온 주석은 룸 앞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대단하네.”
주석도 한참을 공들여 말문을 트이게 한 훈진과 단번에 대화를 나누는 이정이 놀라웠다.
“난 놈이다 싶긴 했지만.”
이정에게 반말하면서도 ―씨라는 존칭어를 빼놓지 않았던 이유는 너무 급하게 그를 아끼는 티를 내면 혹시나 자만해질까 걱정된 탓이었다.
종종 호의를 헛되게 쓰는 배우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정은 깍듯이 대하면서도 묘하게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어 더했다.
착하고 순한 것과는 별개로 나이에 맞지 않는 노련함이 있었다.
“촬영 걱정은 없겠네.”
그런 이유 때문에 모두가 어려워하다 못해 무서워하는 훈진과 짝지어줄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들 해?”
주석은 겉만 사납지 속은 물렁하기 짝이 없는 훈진과 썩 어울리는 파트너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미닫이문을 열었다.
“앗, 선생님. 선배님이 웹드라마 촬영 현장이 궁금하다고 하셔서 사진 찍은 거랑 같이 보여드리고 있었어요.”
“웹드라마? 아, 이랑 같이 찍었던 그거?”
“네. 배우들이 다 또래다 보니까 사진 찍어둔 게 꽤 있어서요.”
“어디 봐봐. 이야. 이정이가 제일 잘생겼네, 역시.”
이정은 주석의 말에서 그를 지칭하는 호칭이 빠진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고기 한 판 더 시킬까?”
그것이 그의 태도 때문인지, 아니면 훈진과의 대화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쁜 신호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건배사 한 번도 안 했지?”
잠시 나갔다 오기 이전보다 훨씬 신나 보이는 주석과 한결 편안해 보이는 훈진. 다소 경직되어있던 분위기가 풀리자 이정이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살았다.’
앞으로 줄곧 마주쳐야 하는 만큼 사이가 어색해지면 난감한 것은 이정이었다. 강현처럼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최대한 잘 지내고 싶었던 그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그러게요. 선생님, 건배사 한번 외쳐주세요.”
“그럼 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다소 맥 빠지는 훈진의 건배와 함께 술자리가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그날, 이정은 태어나서 가장 많은 술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