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86
086화
“아파요?”
“아뇨. 괜찮아요.”
“그럼 한번 해 봐요. 팔꿈치 벌리고, 손에 힘주고, 더 강하게. 오케이, 좋아요.”
납치당해 묶인 채로 시작되는 촬영 탓에 팔다리를 테이프로 감은 지원의 옆에서 스태프가 테이프를 찢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한두 번 예행연습을 해 본 그녀는 감을 잡은 듯 곧잘 테이프를 찢어냈다.
“오, 신기하다. 예전에 비슷한 영상 본 적 있긴 한데 이게 진짜 찢어지네요.”
“지금은 한번 찢은 거 위에다 한 겹만 붙여둔 거라 그렇지 원래 그 정도 힘 가지고는 어림도 없어요. 힘을 너무 과하게 주면 그대로 찢어질 수 있으니까 힘 조절 잘해요.”
“넵.”
편집점을 최소화한 채 이어져야 하는 촬영에 혹시나 스태프들의 동선이 겹칠까 우려한 송 감독은 촬영감독을 포함한 모든 스태프들을 세트장에서 철수시키고선 직접 카메라를 잡았다.
“감독님, 마이크랑 조명은요?”
“조명은 1, 3, 8번만, 마이크는 저쪽에 고정해 두고 나머지는 전부 철수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심지어 필수 장비인 마이크와 조명마저 최소화하자 모두를 기만한 범죄자의 아지트라고 하기엔 너무 평범한 가정집과 같았던 세트장이 살짝 어두워졌다.
“들리십니까.”
― 이상 없습니다.
직접 카메라를 든 그녀가 밖에서 모니터를 통해 안을 보고 있을 스태프들에게 무전을 치자 송 감독 대신 모니터링을 맡은 촬영 감독이 응답했다.
“자, 바로 슛 들어가겠습니다. 레디, 큐.”
송 감독이 낮은 목소리로 오더를 내리자 촬영 감독을 포함한 모든 스태프들이 다닥다닥 붙어 모니터 속으로 빠져들어 갈 듯 집중했다.
첫 장면은 의자에 앉은 채 묶여 있는 솔이로부터 출발했다.
카메라가 눈과 팔, 그리고 다리에 청테이프가 둘둘 감겨 있는 솔이를 천천히 훑었다.
“어?”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과 다르게 흘러나오는 경쾌한 최신 가요에 정신을 차린 그녀가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살짝 움직였다.
“어어?”
눈을 떴음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에 놀란 솔이가 손을 움직이려는 듯 어깨가 움찔거렸지만, 그녀의 손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 역시 다리와 마찬가지로 묶여 있었던 탓이었다.
“후우….”
솔이가 애써 침착하게 팔 전체를 들어 올려 묶인 손 부분을 얼굴로 더듬었다.
“테이프 같은데….”
깨어나다 보니 사지가 결박된 것도 모자라 눈까지 가려진 상황에도 솔이는 최대한 침착하게 움직였다.
대형 범죄조직의 수사를 담당하는 전담 A팀 소속인 만큼 이런 최악의 상황에 대한 교육을 충분히 받은 덕이었다.
테이프에 얼굴이 쓸려 벌겋게 자국이 남을 때까지 한참을 더듬거리던 그녀는 자신을 묶은 것이 청테이프임을 짐작하고선 테이프를 찢기 위해 팔을 힘껏 아래로 내리면서 벌리는 것을 반복했다.
가닥가닥 씨실로 된 청테이프의 결박을 풀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훈련을 통해 익숙해진 솔이라면 금세 테이프를 찢어내야 했지만 어째서인지 요지부동이었다.
“하.”
짧게 한숨을 쉰 그녀가 반복해서 테이프를 찢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카메라가 또다시 움직였다.
“…….”
솔이를 시작으로 직선으로 집안을 훑던 카메라가 도착한 곳에 있는 것은 바로 수한이었다.
결박을 풀기 위해 애를 쓰는 솔이를 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수한의 행동은 지극히 평화로워 보여 괴이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 달카닥
하지만 그의 행동은 괴이함을 넘어 어딘가 이질감이 드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가 얼굴을 반쯤 가리던 머그컵을 내려놓자 곧 그 이질감의 정체가 드러났다.
“와 씨, 무서워.”
그의 얼굴이 주는 섬뜩함에 모니터를 통해 현장을 보고 있던 스태프 중 한 명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대외적으로 유지하고 있던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수한의 얼굴도, 그보다 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는 A의 웃는 얼굴도 아닌 완벽한 무표정.
CG 처리라도 한 듯 텅 빈 눈동자와 단 조금의 호선도 그리지 않는 입가에 번듯한 외모가 더해지자 마치 그림을 보는 듯 그 이질감이 증폭되었다.
“하, 됐다.”
그사이 가까스로 손을 묶고 있던 테이프를 찢은 솔이가 시야를 가리고 있던 안대를 벗어 던졌다.
“으….”
그리 밝지 않은 장소였지만 내내 어둠에 묻혀있던 그녀의 눈이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타박, 타박.
귓가에 울리는 노랫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에 솔이는 최대한 실눈을 뜨고 자신을 납치한 범인으로 예상되는 인물을 보기 위해 애썼다.
― 찌이익.
“아, 아파요. 살살 좀 떼요. 피부 다 벗겨지겠다.”
“가만히 좀 있어.”
아직 풀지 못한 다리의 테이프를 대신 떼어주는 익숙한 뒤통수와.
그 행동에 솔이가 잠시 안심한 채 몸에 힘을 풀었지만, 이윽고 그의 손이 살에 닿자 저도 모르게 그를 세게 밀어냈다.
“윽!”
“아.”
소름 끼치는 느낌에 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하게 밀어낸 탓에 아직 의자와 함께 고정되어 있던 그녀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라니까.”
뒤로 젖혀진 솔이의 다리에 얻어맞은 그가 제 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선배…!”
“가만히 있어. 풀기 더 귀찮아지니까.”
자칫 범인이 아니라 구하러 온 사람이라 착각할 정도로 평안한 어조였다.
“미쳤어요?”
하지만 시야가 트이자 그녀를 이곳으로 납치한 사람이 바로 그, 수한임을 기억해 낸 솔이가 소리를 질렀다.
“단단하게도 묶어놨네.”
솔이는 깨어나자마자 사지가 묶여 있던 상황에서도 소리 한번 내지르지 않을 정도로 심지가 곧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수한의 행동은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일이었다.
“수한 선배!”
“한솔.”
납치한 장본인답지 않게 묶여 있던 다리를 풀어 준 것도 모자라 친절히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기까지 한 그가 허리를 숙여 솔과 눈을 마주했다.
“이거 놔요.”
어지간한 범죄자들은 붙잡는 순간 엎어 치는 그녀였지만 정작 그녀에게 현장 기술을 가르친 수한 앞에서는 모든 게 다 무용지물이었다.
“이 테이프, 이것도 선배가 한 거죠.”
솔이가 이제는 바닥을 굴러다니는 테이프들을 가리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둘둘 감은 청테이프는 힘만 있으면 찢기 쉽다고 찢는 방법 알려준 것도, 대신 중간에 세로로 둘둘 감으면 찢기 힘들어지니까 주의하라고 한 것도 다 선배잖아요.”
솔이의 눈에 눈물이 가득 담겼다. 일렁거리는 눈물이 흘러넘치지 않은 것은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이럴 때 자신은 어떻게 대답했더라. 그가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는 솔이를 바라보았다.
수한이라면 귀찮게 기어오르지 말라며 그녀를 구박했을까, A라면 귀찮으니 대충 어디다 팔아버렸을까.
“이상하게 여기만 오면 기분이 이상해진단 말이야….”
하지만 수한의 얼굴은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같은 장소, 같은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한쪽을 가리고 보면 두 장르의 영화를 한꺼번에 틀어놓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대체 언제부터였어요? 왜? 선배가 뭐가 부족하다고?”
경찰대학 선후배 사이인 솔이와 수한. 솔이는 대학교 시절 겪은 수한을 따라 다들 말리는 전담 A팀에 자원했을 정도로 그를 존경했다.
“그게, 중요해?”
평소의 수한은 물론 재한을 놀리던 A와도 다른 텅 빈 표정.
하지만 깨끗하고 맑은 느낌이 아니라 재를 뿌려놓은 듯 탁하고 불투명한 느낌의 표정이었다.
“내 말 잘 들어.”
수한이 여전히 솔이의 어깨를 세게 눌러 잡은 채 말을 이었다.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문은 딱 하나. 그 외에는 어떠한 출구도, 창문도,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수단도 없어.”
그 말에 그녀가 반사적으로 주변을 훑었다. 가정집 거실로 보이는 흔한 인테리어였지만 그의 말대로 거실이라면 흔히 보여야 할 창문이나 바깥 풍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 딱 10분 동안 여기에 서 있을 거야.”
솔이는 이런 괴이한 행동을 하는 수한을 이해하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10분이 지난 후에 네가 내 손에 잡히면 넌 죽을 거야.”
수한은 마치 기계적으로 ‘감기이시네요.’라고 말한 뒤 약을 처방해 주는 약국과도 같이 담담하게 선고했다.
“이게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기회야 어쩔래.”
그녀는 A를 잡겠다는 목표 아래 미쳐버린 재한과는 엄연히 달랐다.
수한이 A임을 확신하고도 전담 A팀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잡으려고 애를 쓰는 재한과 달리 솔은 그저 어쩌다 운 좋게 정황증거를 발견한 것뿐이었지만, 누설 위험이 압도적으로 높았기에 수한은 더 이상 그녀를 가만둘 수 없었다.
아예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과 정황증거를 가지고 의심하는 것은 그 위험 수위가 현저하게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수한은 솔이를 죽이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행동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선배 대체….”
기죽지 않고 할 말을 쏟아내던 솔이 수한의 얼굴을 보고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결국, 입술을 짓씹은 솔이 뒤돌아 출구를 찾기 위해 달렸다.
“…….”
그 모습을 본 수한이 가만히 알람시계 예약 버튼을 누르자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전자시계의 알람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진짜 중요한 롱테이크는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