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Remove the Kind Protagonist’s Mask RAW novel - Chapter (103)
103화
“뭘 멍청하게 있는…….”
“어?!”
그때 요이델이 율리시스의 손을 덥석 잡았다.
탁!
그는 격렬하게 손을 뿌리쳤지만 어쨌든 지금은 요이델의 힘이 더 강했다. 율리시스는 허탈하게 웃으며 요이델을 노려보았다.
“놔!”
“여기 다쳤잖아요, 성하.”
율리시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제 손을 쳐다보았다. 요이델의 말대로 베이고 쓸린 상처가 가득했다. 물집이 부르터서 눌러 터진 흔적까지.
“침입자 주제에 건방지긴. 그리고 누가 성하야. 아까부터 물었잖아, 대답해.”
“저희 왕이에요. 대답했으니까 상처 좀 보여 주세요.”
“네 집단의 왕은 성하라고 불리는 인간인가?!”
“인간은 아니고 반만 인간일걸요?!”
율리시스의 손목 안쪽에서 두근두근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그는 요이델의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
“……나를 말하는군. 넌 왜 계속 내게 아는 척을 하는 거지? 너 같은 인간은 본 적도 없다.”
율리시스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작아졌다. 아까의 날카로운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요이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는 어머니가 보낸 인간이냐.”
“제가요?”
“아버지는 내게 위해를 가할 정도의 관심조차 없다. 어머니는 그렇지 않지. 비록 그런 관심이라 하여도.”
목소리가 이상해. 왜 성하가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지?
작은 손을 꼼지락거린 그는 이제 손을 빼내는 걸 포기한 듯했다. 율리시스는 눈을 감고 목을 내밀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뭐, 뭐를 마음대로 해요?”
그는 요이델의 손을 제 목에 갖다 댔다.
“환심을 사느라 애쓸 필요 없다. 안심시켜 죽이려 들지 말고 단칼에 베어라. 너는 그걸 하기 위해 온 것 아닌가?”
“……지금 저보고 성하를 죽이라는 말씀이세요?”
“성하, 성하. 모르는 소리. 죽일 거면 단칼에 죽여.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이제 이런 일도 지긋지긋하군.”
요이델의 앞에 고개를 내민 율리시스의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보석 같은 파란 눈은 여전했지만 무척 어두웠다. 그가 가진 분위기는 도저히 어린애의 것이 아니었다.
‘생일에 의미를 안 두려고 했던 것도 이유가 있던 거야.’
위해를 가할 침입자라고 여기면서 어머니가 보냈을 거라고 말했다.
보통 어린애라면 절대 하지 않을 생각들. 여전히 목을 드러낸 작은 성하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어서 해.”
툭.
그러나 요이델은 그를 해치지 않았다. 대신 칭찬하듯 머리에 손을 올리고 쓰다듬었다.
“……무슨 짓이지?”
“예쁘다, 예쁘다 해 주는 거예요.”
“……!”
율리시스는 순간 모든 무장을 풀고 멍한 민낯을 드러냈다.
“누가 예뻐? 미쳤나?”
곧장 정신 차린 율리시스는 황당한 얼굴로 요이델을 노려보았다.
“저는 성하의 말대로 침입자나 암살자치고는 둔해서, 막 사람 죽이고 그런 건 못 해요! 그래서 못된 말만 하는 작은 성하한테 이렇게 복수하는 거예요.”
“…….”
“우리 성하 귀엽다. 아이, 예쁘다.”
“넌 나를 동물 취급하는군.”
“아! 그건 아니에요, 애 취급이에요.”
“내가 그걸 정말 몰라서 하는 말 같나!”
벌떡 일어난 율리시스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다가 다시 앉았다.
어린 성하는 화도 잘 내는구나.
요이델은 목을 베는 대신 그의 이마에 축복 마법을 불어넣어 주었다. 따뜻한 빛이 율리시스의 안에 쏙 들어갔다.
그는 요이델을 보며 눈을 흘겼다.
“너는 이상한 마법을 쓰는군. 이런 건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는 이마를 문지르더니 뾰로통한 얼굴로 요이델을 직시했다.
“메디아 대륙의 사람이냐?”
“네? 아니에요.”
“거기가 아니면 이런 희한한 마법은 본 적이 없어. 아니면 네가 만들었나?”
“성하가 만드셨어요.”
“네가 성하라고 부르는 작자는 나라며.”
이 아이도 성하는 맞지만, 굳이 따지자면 무의식 세계 속 과거의 성하는 현재 성하가 아니니까…….
어떻게 대답하지? 아, 맞아.
“미래의 성하가 만들게 되실 거예요.”
“내가?”
율리시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딴 귀찮은 걸 내가 왜 해. 게다가 너 같은 인간에게 가르치느니 안 하는 게 낫다. 너처럼 허둥지둥하는 인간은 딱…….”
작은 율리시스는 그녀를 올려다봤다.
왠지 신기한 기분이었다. 성하가 똑바로 서 있는데 이렇게 내려다볼 수 있다니. 그런데 작은 성하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멍하게 서 있던 그는 요이델의 붉은 눈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눈가를 만졌다.
“예쁘군.”
“……네?”
“아니다, 됐다.”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중얼거린 율리시스가 얼굴을 붉히며 돌아선 그때.
그는 느닷없이 요이델을 풀숲에 처박았다.
“꺄악!”
“쉿, 어머님이 오신다.”
율리시스는 요이델을 보고 쉿, 하며 손가락을 입술에 붙였다.
“절대 소리 내어선 안 된다. 알았지?”
요이델을 풀숲에 숨긴 율리시스의 앞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성하의 어머니구나. 정말 많이 닮았어. 머리 색이랑 눈 색은 아버지 쪽을 닮았는지 아예 달랐지만, 외관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여기 있었니?”
“네, 어머니.”
하지만 그다음부터 들리는 말에 요이델은 귀를 막았다.
‘……어떡해.’
그의 어머니는 견디기 힘든 모진 말들을 퍼붓고 자리를 떴다. 이미 성인인 자신조차 가만히 듣고 있기 힘들 정도로 저주에 가까운 폭언이었다.
‘너희 성하는 부모를―’
키베르크가 했던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요보힐데 공작보다 훨씬 심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요이델은 눈을 감고 자는 척 몸을 말았다.
“이제 나와도 되는…… 뭐야, 자나?”
나는 아무것도 못 들은 거야. 성하가 아니라 그 누구여도 그런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을 테니까.
툭, 툭.
“일어나. 여기가 비렁뱅이 집인 줄 알아?”
“……하음.”
하지만 구박을 계속 참기는 좀 힘드네. 요이델은 자연스럽게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날이 따뜻해서 잠이 오네요. 춘곤증인가 봐요.”
“가을이다.”
“어쩐지 시원하더라고요!”
요이델은 머쓱해져서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가장 잊고 싶은 기억이 무의식 속에 있다는 건 알겠어. 그런데 어떻게 깨워서 나가야 하지?’
여기가 무의식이고 과거인 걸 보면 분명 부모 때문에 생긴 상처가 문제일 텐데.
그를 보며 한참 고민했다.
“성하! 레일루스가 참 예쁘네요!”
“조랑말의 이름은 언제 터득했지?”
“방금 말씀하셨잖아요.”
“네가 그렇게 습득력이 좋다고?”
첫 단계, 어린 성하와 유대감을 형성해 보자.
“수상하기 짝이 없군.”
완벽하게 실패했다.
조금 누그러졌던 그의 기색에 흉포함이 다시 떠올랐다.
“성하, 다른 팔도 주세요.”
“팔을 잘라 갈 셈인가? 가져가서 무엇에 쓰려고.”
“아, 아니, 생각이 왜 그렇게 돼요? 너무 무섭잖아요. 제가 마르셀리나 님도 아니고. 그냥 회복 마법을 걸어 드리려고 그래요. 검을 잡느라 상처가 많잖아요.”
율리시스는 뜨끔한 표정으로 요이델을 바라보았다.
순수하게 놀란 얼굴은 똘망똘망한 토끼처럼 그저 귀여웠다. 성하가 이런 얼굴도 할 수 있었구나.
무의식 속이지만 그의 어린 시절을 볼 수 있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이러다 원래의 성하마저 귀여워 보이면 어떡하지?
“검을 잡은 건 어떻게 알았나.”
“성하를 도와주러 온 사람이라서 전 뭐든 알아요.”
이번엔 잠잠하네.
요이델은 반격 없는 율리시스의 손을 살폈다.
‘어린 성하가 숲속에 왜 혼자 있나 했더니, 열심히 연습하고 있던 거였어.’
검술 연습을 한 듯한 지푸라기 인형이라든가 나무 밑동 위에 가득 쌓여 있는 책.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여기가 그나마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장소 같다는 것.
‘부모의 눈을 피해서 안식하는 공간이었나 봐.’
그래서 대지의 풍경이 많이 바뀌었어도 이곳만은 남겨 놓은 듯했다.
어쩐지 코가 시큰했다. 그의 어린 시절이 짐작돼서.
지금의 성하는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어린애였다. 한창 보살핌이 필요할 텐데, 아픈 것도 참고 이렇게 몰래 노력하다니.
그는 타고난 천재인 줄 알았다.
“성하는 노력이 필요 없을 줄 알았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명검도 썩기 마련이다.”
“맞네요, 성하는 명검이에요.”
자신감 있는 툴툴거림이 귀여웠다. 요이델이 푸훗, 소리 내어 웃자 율리시스는 멍하게 쳐다봤다.
“있죠, 성하―”
고개를 든 요이델은 깜짝 놀랐다. 언제부터 성하의 안색이 이렇게 창백했지?
“성하?!”
“목소리가 너무 커―”
“열이 나잖아요, 지금 엄청 아프다고요!”
━━━━⊱⋆⊰━━━━
요이델은 그를 방에 몰래 데려가 눕혀 놓았다.
다행히 방 구조는 현재 성하의 개인 공간과 비슷해서, 필요한 물건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성을 무너뜨리고 성궁과 대신전을 세웠다고 해도, 사실은 어릴 적 기억이 많이 반영된 거였구나.
“성하는 여러모로 일관성이 있네요.”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지진 않는군.”
“아하핫…….”
요이델은 이불을 덮어 주고 배를 토닥였다.
“일어나면 안 돼요.”
“침입자는 아닌 것 같지만 수상하기 짝이 없고. 넌 정말로 누구지?”
“저는 성하의 부하요.”
“……역시 미친 인간인가.”
율리시스는 열이 나는 와중에도 쯧쯧 혀를 찼다.
“아니에요, 신관이라고요.”
“아, 그 미치광이처럼 닦달하는 인간들을 말하는군. 신성력에 혈안이 되어서 눈을 벌겋게 뜨는 그것들.”
이때의 신관은 어떤 사람들이길래 저렇게 싫어하는 걸까?
“종종 외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고. 너도 개중 하나겠지.”
“어디서 들었는데요?”
“성에 오는 많은 이들.”
어린 성하의 방은 성궁에 있는 방처럼 드넓고 하얬다.
그리고 그때보다 훨씬 더 쓸쓸하고 슬펐다. 왜일까, 이런 기분이 드는 건.
“후우, 쓸데없는 짓 말고…… 레일루스를 마구간에 묶어 줘.”
“네?”
“어디 가 버리면 안 돼. 걔는 길이 덜 든 조랑말이어서 이리저리 날뛰거든.”
요이델은 묵묵히 율리시스의 말을 들어 주었다. 레일루스를 정말 아꼈구나.
그러고 보니 이곳에 있는 물건은 극히 적지만, 남아 있는 건 전부 율리시스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레일루스는 습격에서 저를 보호하다 어린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가 예전에 했던 말을 떠올리니 괜히 마음이 아팠다.
암살이니 침입이니 하던 말들. 모두 그에게는 농담이 아니었던 거다.
덜컹.
그때 창문이 세차게 흔들렸다.
“오늘따라 바람이 심하네.”
무의식 세계여도 자연 현상은 다 있구나.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요이델은 물수건을 바꿔서 율리시스의 이마에 놔 주었다.
“그냥 치유 마법 해 드리면 안 돼요?”
“네 마법을 내가 어떻게 믿고.”
“하지만 축복 마법은 받아 보셨잖아요. 그건 괜찮지 않았나요?”
율리시스는 물끄러미 요이델을 바라보다 옷을 잡았다.
“네가 침입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 봐. 믿을 수가 없잖아.”
그는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정말 안 믿으셨다면 여기 들여보내 주시지 않았겠죠? 성하의 방에 들어와서 간호해도 괜찮다는 건, 이미 침입자로 생각하지 않는단 뜻이잖아요.”
정곡을 찔렸다. 민망함에 얼굴을 구긴 율리시스는 등을 휙 돌렸다.
물수건이 떨어져서 새로 얹어 주었지만, 화가 제대로 났는지 고개를 휘휘 저어 재차 떨어뜨렸다.
‘치유 마법을 거부하는 건, 혹시 간호해 주는 게 더 좋아서일까?’
지금의 성하로서는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어린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율리시스는 요이델이 오랫동안 토닥여 주자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는 하지 말라고 했지만, 잠든 사이 치유 마법으로 몰래 율리시스를 회복시켰다.
“좋은 꿈 꾸세요, 성하.”
“응…….”
“깨어 있었어요?”
다행히 잠꼬대였나 보다.
요이델은 그가 잠든 걸 확인하고 밖을 바라보았다.
히이이잉!
밖에서 조랑말 소리가 들렸다.
‘습격으로 죽었어.’
어쩐지 심상치 않은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