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Remove the Kind Protagonist’s Mask RAW novel - Chapter (2)
2화
그는 감정 한 톨 담기지 않은 얼굴로 요이델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장발이 그녀의 코앞에 드리워졌다.
“무슨 수로 이곳까지 오셨는지.”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목소리는 차가웠다. 눈동자는 가을 창공처럼 맑고 아름다웠으나 담긴 빛은 겨울보다 시렸다.
곧게 뻗은 콧대와 날카로운 눈매,
미의 현신으로 착각할 아름다움이었으나, 피 웅덩이에 서 있던 그는 꼭 마신처럼 보였다. 사람을 홀린다던, 아주 매혹적인 마신의 현신.
지금 자신이 두려워하면서도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검뿐만 아니라 손에도 피를 잔뜩 묻히고 있었다. 검과 손에 묻은 피가 뚝뚝 떨어져 저 멀리 동그랗고 촘촘한 길을 만들었다. 그야말로 피바다였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시체.
결전을 치르고 홀로 살아남은 것처럼, 그의 뒤로 붉은 산이 쌓여 있었다.
“말을 잃으셨습니까.”
남자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웃고 있지만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지 않는, 서늘한 반쪽짜리 웃음이었다.
이게 기의 차이인가. 그는 본인이 내리누르는 살기 때문에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짓궂은 물음을 했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구길래 이럴까? 어떡해, 미친 것 같아.’
요이델이 기억하는 소설에는 이런 남자가 등장하는 장면이 없었다.
피에 미친 살육자도, 은발을 나부끼는 아름다운 남자도.
‘아니야, 있긴 있어. 단 한 명.’
요이델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러나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전율하게 했던, 그 소설 속의 주인공이 눈앞의 이 정신 나간 사람일 리 없었으니까.
아니어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이 남자는 ‘그’가 아니어야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남자의 옷은 눈부시게 하얗고 고급스러운 성직자의 의복이었다.
순백색으로 길게 떨어지는 부드러운 옷감과 화려하게 수놓아진 금실 자수.
언뜻 수수해 보이지만 화려한 세공이 들어간 옷은 그의 신분이 높다는 걸 증명했다. 여태까지 이곳에서 본 사람들에겐 저런 특별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는 거대한 검, 그건 오직 한 사람만이 들 수 있는 물건이었다.
다시 말해 성황의 증표였다.
저 남자는 아마도…… 자애롭고 상냥한 남자주인공.
‘율리시스.’
이 성국의 주인.
“그럴 리가 없어.”
“무엇이 말입니까.”
그때 불쑥 입이 트였다.
요이델은 제 입에서 나온 소리에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이미 그 남자가 들은 뒤였다.
남자는 서늘한 얼굴로 웃으며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두려워하시는군요.”
그는 턱을 쥔 손을 움직여 요이델의 손을 치웠다. 갈라지고 튼 입술을 바라보던 그는 상처 난 입술을 꾹 눌렀다. 그러자 바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눈에 띄게 놀라는 요이델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꼴은 엉망이시고.”
그가 자아내던 살기가 사라지자마자 요이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장에 붙었다.
쿵쿵쿵!
자신을 이곳으로 인도한 책장을 닥치는 대로 두드렸지만 철문 같은 책장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아서 도망친 건데, 또 이런 식으로 죽는 건 너무하잖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도망칠 곳도 없었다.
아까 그가 헤집은 입술의 상처가 따끔거렸다. 종이에 벤 정도로 얇은 상처였지만 통증 때문에 계속 목이 아렸다.
남자의 눈에는 동정 한 점 비치지 않았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쥐새끼라든가, 무생물체를 보는 하찮은 시선이었다.
‘남자주인공은 착한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나른하게 움직이는 눈과 권태로운 시선. 보기 힘든 아름다운 외형의 묘사까지, 남자주인공과 모두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아니어야 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상냥하고 언제나 모두의 귀감이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사실 남자주인공이 쌍둥이였던 게 아닐까?
“가엾게도.”
요이델을 지그시 바라보던 남자의 입이 열렸다.
“이리 떨고 계셔서는…… 제가 무엇 하나 여쭐 수 있겠습니까. 요이델 님.”
“저, 저를 어떻게 아세요?”
그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 팔라디움의 모든 이가 제 휘하에 있는데, 어찌 당신을 모르겠습니까.”
남자는 나긋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리고 당신이 어디 잊힐 만한 분이던가요.”
율리시스의 얼굴은 온화하고 차분했지만 눈은 경멸의 빛을 띠었다.
“처형장으로 인도됐을 시간이 지났습니다. 한데, 제법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 계시는군요.”
“그, 그건…….”
“도망치는 중이셨습니까?”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는 걸까.
요이델은 일개 수련신관에 불과했다. 성황이 조무래기 악역인 자신의 사형 집행까지 기억할 리 없는 것이다.
요이델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과연 무슨 죄목으로 요이델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는지.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로는, 일단 성황을 시해하려고 시도한 죄라고 했다.
그때 불현듯 기억의 단편들이 맞춰졌다.
‘나는 성하를 사랑해요! 성하는 모두에게 자애로우시잖아요! 나도 사랑해 주세요! 왜 모두가 나를 싫어하죠?!’
손톱이 뜯길 정도로 카펫을 거세게 움켜쥐며 울부짖는 목소리. 날카롭고 고통스러운 신음.
그녀는 누군가의 발치에 엎드려 발목에 손톱을 박아 넣고 꽉 쥔 채 울고 있었다.
‘……이 남자잖아. 난 이 남자를 해치려고 했었어.’
경악스러운 사실이었다.
‘미쳤나 봐!’
요이델은 땅 아래로 파고 들어가 거기서 평생을 살아 버리고 싶었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근성만큼은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도대체 뭘 하면서 살았으면 이런 기억밖에 없지?
조금 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이 남자와 관련된 기억들은 모두 자신이 미치광이처럼 집착하는 장면들뿐이었다.
이 남자가 목욕할 때 옷도 훔치고, 앉았던 의자도 가져가 모으고, 사사건건 지켜보는 것으로도 모자라 납치를 시도하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대행렬 도중에 습격까지.
‘맙소사, 이게 내 기억이라고? 거짓말이라고 해 줘, 제발.’
믿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자꾸 머릿속에 퐁퐁 떠올랐다.
마치 자신이 저지른 일인 것처럼 수치스럽고 당장이라도 땅 아래로 꺼져 버리고 싶었다.
이제 앞서 그가 자신에게 보였던 혐오감이 이해가 되었다.
왜 사형대에 올랐나 했더니, 기억이 떠오를수록 알 것 같았다.
‘그냥 변태 스토커였어! 이 과거를 어떻게 하면 좋지?’
머리를 쥐어뜯고 바닥을 구르고 싶었다. 왜 이런 범상치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지. 그리고 왜 하필 자신이 요이델이 된 건지.
그녀는 허공에 소리를 지르며 따져 묻고 싶었다.
꿈일 거야, 이건 꿈이어야 해!
“며칠 전 그대에게 잡혔던 발목이 저려 옵니다.”
하지만 그의 음성이 현실이라는 걸 말해 주었다. 분위기만큼이나 고요하고 나긋한 어투를 가진 그가 명확한 멸시를 담아 말했다.
손에 쥔 검에서 여전히 피를 뚝뚝 떨어뜨리던 그는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있는 벽을 짚었다.
그는 자신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흠칫 놀라며 떠는 요이델의 뒷머리를 쓰다듬듯 어루만졌다.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다독인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떨지 마세요. 단번에 죽여 드리겠습니다.”
귓가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녀의 몸이 떨렸다. 춥지 않은 날씨인데 체온이 쑥 떨어지는 것 같았다.
요이델의 눈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남자는 입매를 비틀었다.
“목숨이라도 구걸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면 그만두십시오.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니.”
어쩌면 저렇게 못되게 웃을 수가 있을까.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담기지 않은 눈이었다.
목숨 구걸이 통할 리 없다는 건 그녀도 잘 안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 우스웠다. 남자주인공이 살려 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니.
그의 본모습을 보고 만 지금은 너무나 뼈저리게 안다. 그가 자신을 살려 주지 않을 거라는 걸.
요이델은 그를 저지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단 하나.
‘남자주인공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이건 최후의 방법이었다. 만일 그 짓을 한다면 원작의 요이델과 똑같은 짓을 하는 거였다.
하지만 남자주인공이 다시 검을 들어 올리는 지금, 바로 이 순간에 하지 않으면 남자가 자신을 죽이겠지.
칼에 베여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였다.
이 낯선 곳에 떨어지게 된 것과 사형수가 된 것만으로도 태어나 겪을 수 있는 온갖 불행은 다 겪은 기분이었다. 그러니 거기에 조금 더 큰 불행 하나쯤 얹어지더라도, 그녀로서는 더 잃을 게 없었다.
실패하더라도 본전이다.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매한가지라면 시도라도 해 보자.
요이델은 주먹을 굳세게 거머쥐었다. 손안에 땀이 고이는 것만 같았다.
살고 싶어서 감행한 탈출이었다. 희생양을 두 명이나 만들면서.
그러니까 요이델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했다.
이 남자에게서, 살아남아야만 했다.
“죄송해요.”
남자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잔잔히 웃어 보였다.
그에겐 사과가 필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의미 없는 말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쥐새끼의 목숨이었다. 소문의 근원지가 될 만한 것은 죽여 없애는 게 옳으니까.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냉기를 담고 요이델에게 향했다. 이윽고 올라가는 검. 그녀는 그 모습을 보며 결심을 굳혔다.
만약 ‘그 방법’이 통한다면.
여기가 정말 자신이 봤던 소설 속이 맞다면…….
“전 미리 말했어요. 죄송할 거라고요.”
요이델은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힘껏 끌어당겼다.
둘의 입술이 거칠게 맞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