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208
207화
“그러니까, 마테오 그놈의 비밀 별장을 네가 안단 말이지?”
라세흠의 물음에 필립이 입꼬리가 축 처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좋아.”
“어떻게, 그놈 아직 살아있습니까?”
춘식이 창고 안을 슬쩍 살피며 들어오다 깜짝 놀랐다.
“어? 아직 팔다리 다 붙어 있네요? 웬일이래.”
“뭐라도 말하길래 일단 살려 놨지.”
“아하.”
“영 도움 안 된다 싶으면 처리할 거다.”
살벌한 말을 들은 필립이 몸을 움찔 떨었다.
마테오는 배신자를 살려 두지 않는다지만, 그와의 의리를 지키면 여기서 바로 죽는다.
‘젠장…….’
이놈들한테 운 좋게 풀려나면 바로 작은 섬이나 베트남으로 도망가야겠다.
그리 다짐하던 필립은 잊고 있던 친구가 떠올랐다.
“저기, 잠깐. 혹시 마크는…… 어떻게 됐습니까?”
“마크? 누구더라?”
“걔 있잖아요. 대표님이 잡은 놈…….”
춘식의 속삭임에 라세흠이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걔?”
그 반응에 필립은 불안해졌다.
마크가 이미 죽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살아는 있는 겁니까?”
“걱정하지 마라. 곧 만나게 해 줄 테니까.”
오히려 저 말이 더 필립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마크가 어디 있을 줄 알고 만나게 해 준다는 말인가?
사람 몇 명을 바닷속에 가라앉게 만든 적이 있었기에 필립의 불안감은 배로 증폭됐다.
죽기 직전의 사람들이 짓던 표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과 마크의 얼굴이 대입됐다.
“사, 사려 주세요.”
필립은 어눌한 한국어로 라세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혹시 마테오에게 밉보였을 때를 대비해 공부해 놓은 문장이었다.
“뭐? 갑자기 왜 이래. 누가 죽인댔어?”
“살려 주세요!”
“놔! 이 새꺄.”
“아악…….”
라세흠의 발길질에 필립이 부러진 무릎을 붙잡고 뒹굴었다.
그때, 바람을 쐬겠다며 잠시 나갔던 고상미가 창고로 들어섰다.
“얘기는 끝났어?”
“어. 자기가 마테오 놈 비밀 별장을 안다네.”
“그래?”
“일단 주혁이한테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리자고.”
“굳이 그래야 돼?”
라세흠이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 인원으로 가서 뭐 하게?”
“기다렸다 잡으면 되는 거 아냐.”
“체계가 있는데 그러면 안 되지.”
어차피 떠도는 고상미와 춘식과는 달리, SA시큐리티는 엄연히 거점이 있는 조직이다.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사업체이기도 하고 말이다.
해외에서 뭘 하든 대표인 이주혁에게 보고하고 진행하는 게 맞다.
“그래, 그럼.”
어차피 고상미도 강하게 밀어붙일 생각은 없었다.
“뭐든 전 따르겠습니다.”
춘식이 고개를 끄덕이자, 라세흠은 주저앉은 필립에게 손짓하며 영어로 말했다.
“별장으로 안내해.”
“예?”
“가자고. 별장.”
그 말에 일어나려던 필립은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을 뱉었다.
“으윽.”
“왜. 못 가겠어?”
필립은 그렇게 말하려다 라세흠의 얼굴을 보고 대답을 바꿨다.
“가,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필립은 일어나 절뚝대며 걷기 시작했다.
* * *
서해결 검사가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그동안 누적된 피로에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후…….”
드디어 이주혁에게 보내 줄 자료의 정리를 마쳤다.
이주혁은 어디서 구해 온 건지는 몰라도, 판교신도시 리스트에 있던 사람들이 불법을 저질렀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뇌물수수, 성매매, 폭행 및 협박 사주까지.
그걸 알아내는 과정이 합법적이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지금은 한시가 중요한 상황이다.
그런 것까지 다 따지기엔 잡아야 할 거악(巨惡)이 존재했다.
드륵.
창문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이른 아침 출근했는데도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 버린 것이다.
서해결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었다.
오래 의자에 앉아 있으면 꼭 스트레칭을 해 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골병이 드는 나이였다.
탁탁.
서류들을 정리하던 서해결은 순간 회한을 느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의 이삼십 대는 썩은 고위층과의 투쟁으로 흘러갔다.
자신을 압박하던 검사장과 맞서고, 뇌물로 기소를 취하하려던 정치인과도 싸웠다.
하지만 지금 남은 건 무엇인가.
일련의 사건들로 발언권이 커지기 전까진 그저 청렴결백하다는 허울을 가졌을 뿐인 일개 검사였다.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이주혁 씨를 만나서 다행이야.’
선생이라는 존재를 알지도 못한 채 알량한 정의를 논하며 세월을 보냈다.
당장 몸이 조금 힘들긴 해도 목표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서해결 같은 기성세대는 몰라도, 조카들이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줘야 할 것 아닌가.
‘이번 주말엔 한결이 집에나 놀러 갈까.’
오랜만에 귀여운 조카 녀석들이나 놀아 줘야겠다.
그리 생각한 서해결이 커피를 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
끼익-.
나는 고문실로 쓰이는 지하실의 문을 열고 내려갔다.
애들 말로는 백기준이 오자마자 내려갔다는데, 내 눈으로 직접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
저벅.
-……욱. 아억!
비명 같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 보니, 백기준이 의자에 묶여 있는 남자에게 뭔가를 먹이고 있었다.
그때 만들었던 사료였나 그거 같은데.
필수 영양소는 다 들어있지만, 맛은 더럽게 없다고 했었지.
“우웁.”
그 피해자는 우리가 쳐들어갔던 방직 공장의 관리자, 조민수였다.
“아직도 여기 있었네.”
“왔냐? 큰일 날 뻔했다. 내가 먹이를 깜빡하고 나갔더라고.”
“그래?”
“근데 어쩐 일로 왔냐?”
“강유찬 어딨어?”
스윽.
내 물음에 백기준이 저기 어두운 구석을 가리켰다.
그쪽으로 가 보니, 속옷만 남겨진 강유찬이 줄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손은 뒤로 단단히 묶여 있었고, 입에는 혀를 깨물지 못하게 하려는지 흰색 천이 쑤셔 박힌 게 보였다.
머리로 피가 몰렸는지 놈의 얼굴은 시뻘게진 상태였다.
“얘는 왜 이러고 있어?”
“갔다 오니까 탈출해서 문 뒤에 숨어 있더라고. 안 잠가 놨으면 그대로 놓칠 뻔했다.”
“의자에 묶어놓지 않았냐?”
“엄지를 빼고 깔창 밑에 있던 칼날을 꺼내서 줄을 푼 모양이더라.”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나 혼자였으면 좀 위험했을 수도 있는데, 대련실에 있던 애들이 다 같이 몰려와서 두들겨 팼다.”
역시 보통 놈은 아니라 이건가.
그 상황에서도 탈출에 성공할 뻔하다니. 대단한데?
입을 막아 놓은 탓인지 강유찬의 팔에는 수액이 꽂혀 있었다.
“읍. 으읍.”
매달려 있던 놈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조용히 있다 갑자기 왜 이래?”
“뭐, 말하고 싶은 거라도 생겼나 보지.”
“입에 있는 거 빼도 되냐?”
백기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혀 깨물어도 상관없으면.”
그 말에 나는 강유찬의 입안에 박힌 천을 잡고 쑥 빼 버렸다.
사실 시체를 처리하기 번거로워서 자살을 막았던 거다.
하지만 이놈이 입을 열 생각이 없는 광신도라는 걸 깨달았으니, 강유찬의 생사는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푸학…….”
“강 권사. 잘 지냈어?”
내가 손을 흔들자 강유찬은 날 죽일 듯이 노려봤다.
“이주혁……!”
“어. 지하실은 살 만하냐?”
“퉷.”
슥.
놈이 뱉는 침을 가볍게 피한 뒤, 몸을 낮추며 물었다.
“마테오라고, 알지?”
“…….”
“대답 잘하면 멀쩡한 음식 먹게 해 준다. 흰 쌀밥 먹은 지 한참 되지 않았나?”
강유찬의 울대가 움직였다. 쇠약 상태에서 음식 얘기를 들으니 저절로 몸이 반응한 거다.
“뜨끈한 국밥 한 사발 말아 줄 테니까 이제 슬슬 포기해.”
“…….”
잠시 침묵하던 강유찬이 입꼬리를 슥 올렸다.
그리고 거꾸로 매달린 채 광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뭐야. 오랜 감금 생활 끝에 드디어 정신이 나간 거냐?”
이 새끼 왜 이래?
살짝 당황한 내가 백기준을 돌아보려는데, 웃기만 하던 강유찬이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하나?”
“뭐?”
“선생님께 순조롭게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
히죽.
뒤집힌 강유찬의 얼굴에 일그러진 웃음이 퍼졌다.
“멍청한 놈……. 너무 멍청해서 할 말이 없을 정도야.”
자꾸 도발하길래 밑으로 내려온 강유찬의 머리채를 붙잡고 흔들었다.
“넌 그 멍청한 놈한테 잡힌 놈이고. 이 양파 대가리 새끼야.”
내 말에 강유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새삼 지하실에 붙잡혀있는 자신의 신세를 자각한 모양이었다.
“자꾸 선생 꽁무니를 빨아 주는데, 그렇게 그놈이 좋으면 네가 일을 잘 처리했어야지.”
“…….”
“그거 아냐? 사격장에 있던 총이랑 마약들, 내가 싹 다 경찰서에 넘겼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알아? 러시아 물건인 거 걸려서 너랑 붙어먹던 정광제는 X됐고, 항구 단속도 강화돼서 이제 그쪽으로는 절대 밀수 못 할 거다.”
꿈틀.
“갇혀 있느라 몰랐지? 어휴, 병신…….”
“개소리.”
“내가 왜 널 회유할 시도도 안 하는지 아냐? 실탄 들고 고무탄에 지는 놈을 왜 우리 편으로 만들겠어?”
나는 오히려 사실만 늘어놓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강유찬의 턱에 힘이 들어가고, 이마의 핏줄이 더 불거졌다.
“죽여 버린다.”
“이제 와서 그러면 뭐 해? 탈출도 못 할 텐데.”
“개새끼가……!”
강유찬이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까지 도발하는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론, 이렇게 계속 긁어서 나에 대한 증오로 자살하지 않게 만드는 것.
복수의 대상이 눈앞에 있으면 쉽게 죽진 않겠지.
그리고.
씨익.
날 비웃었는데도 그냥 곱게 넘어가는 사람은 아니거든. 내가.
나는 잡고 있던 놈의 머리카락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뭐, 계속 물어봤자 얌전히 대답할 것 같진 않고.
그냥 합동기도원 조지고 나면, 그 소식 듣고 다시 와서 또 괴롭혀 줘야겠다.
다음이 기대되네.
그런 나를 지켜보던 백기준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근데 쟤가 널 싫어하긴 하나 보다. 너 오니까 금방 흥분해서 날뛰네.”
“나한테 처맞고 잡혔으니까 당연하겠지. 몇 대 패 주니까 바로 픽 쓰러지던데?”
내 구라에 강유찬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 새끼가 뒤통수만 안 쳤어도……!”
“응. 너 싸움 개 못해.”
듣기만 해도 열받는 멘트를 날려주고 몸을 돌렸다.
“가끔 들릴 테니까 팔팔하게 잘 관리해.”
“걱정하지 마라.”
백기준의 미소를 뒤로하고 대련실로 올라오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부장님한테 마테오의 비밀 별장 위치를 알아냈다는 연락이 와 있었다.
비밀 별장이라면 아마 비상시 은신처로 사용하는 곳일 거다.
[일단 건물 좌표 보내 주세요]문자를 보내고 입꼬리를 올렸다.
은신처를 알아냈으니, 당연히 인터폴에 제보를 해 줘야겠지.
탁.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은 후, 나는 합동기도원이란 장소를 어떻게 조질지 고민했다.
아무래도 저번처럼 누군가를 내부로 잠입시키는 게 가장 좋은 방법 같은데…….
그럼 누굴 보내면 좋을까.
일단 연기를 적당히 잘해야 하고, 돌발 상황에 대비해 임기응변도 뛰어나야 한다.
“아.”
이 조건에 걸맞은 한 사람이 떠올랐다.
주철수가 스카우트할 만큼 사람들을 속이는 데 있어 능력치가 뛰어난 사람.
전직 사기꾼 출신이자, 현재 SA시큐리티의 영업이사.
일명 사발, 추현국.
씨익.
‘오랜만에 한 건 하자고.’
.
.
.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후배 녀석들한테 세를 놔 줬던 집에 들렀다.
원래는 녀석들만 여기서 묵지만, 필리핀에서 있었던 이야기나 좀 풀어 줄 심산이었다.
그래서 어젯밤 카지노에서 즐겼던 게임을 좀 알려 줬더니, 갑자기 야밤에 나가서 플레잉 카드를 사 가지고 왔다.
“행님! 행님도 한 게임 하시지예.”
“어우, 기운도 좋다. 난 됐어.”
탁.
내 방문을 닫고 들어가 컴퓨터 책상에 앉았다.
한참 전부터 술 마시면서 카드 치는 것 같던데, 아직 젊어서 그런가 지치지도 않고 아직 팔팔했다.
“후…….”
슬슬 자야겠다 싶어 자리에 누우려는데, 갑자기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다.
“이 밤에 뭐야?”
달칵.
핸드폰을 열어 확인하는 순간, 내 표정이 절로 딱딱하게 굳었다.
[故 서한결 님께서 별세하셨기에 삼가 알려드립니다.-일시 : 2006년 02월 21일 02시 36분]
이번 생은 빌런이다
지은이 : 글빌런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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