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69
068화
다음 날, 나는 간만에 숍에 들러 머리를 다듬었다.
원래는 어제 녹음기에 대해 알려주려 했지만, 약속이 잡힌 김에 오늘 말할 생각이었다.
딸랑-.
“후…….”
약속 시간까지는 2시간.
나는 핸드폰을 꺼내 이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형.
“특이사항 없지?”
-네. 아직 안 보여요.
“오케이. 뭔가 다른 행동 하면 바로 연락해.”
-넵!
전화를 끊고 끌고 온 람보르니의 문을 열었다.
위로 열리는 문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한동안 꺼낼 일 없었는데, 이럴 때 안 타면 언제 타겠어?
내가 차에 오르자 주변의 모든 시선이 몰렸다.
아직 연극 시작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지만, 임유나와 밥이나 먹으며 박준규를 찾아볼 생각이다.
부릉-!
차에 시동이 걸리자, 다시 한번 이목이 쏠렸다.
자랑하려고 타고 온 건 맞는데…… 막상 다 쳐다보니까 뭔가 좀 그렇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유나가 사는 건물이 앞에 보였다.
예전에 왔던 곳이라 그런지 주변이 슬슬 눈에 익었다.
이리저리 동네를 둘러보며 운전하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유나 씨.”
-아, 네! 주혁 씨. 오고 계세요?
임유나에게는 미리 간다고 말해 놓은 상황.
아마 지금쯤 준비를 다 마쳐서 전화했을 거다.
“도착했습니다.”
-네? 벌써요?
“네. 이제 내려…… 오셨네.”
이미 임유나는 준비를 마치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복장이 평소와는 달랐다.
원래는 깔끔한 재킷에 치마나, 출근 안 하는 날에는 청바지에 맨투맨 정도를 입었다.
하지만 오늘은 산뜻한 블라우스를 입고 테니스 스커트를 팔랑거리고 있었다.
새로운 모습에 순간 심장이 철렁했지만, 나는 겉으로 티 내지 않으며 차를 몰아 임유나의 옆에 섰다.
“타요.”
선글라스를 슥 쓰며 말하자, 임유나가 고개를 돌렸다.
뭐지, 설정이 좀 과했나?
임유나는 잠시 그러더니 조수석 문을 열었다.
“실례할게요.”
임유나가 조수석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고 치마를 정리하길래, 나는 몸을 기울여 안전벨트를 매 줬다.
“…….”
그러자 붉어진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길래, 의아한 마음에 물었다.
“왜요?”
“……아니에요.”
왜인지 차 안에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이 침묵 속에서 어떻게 녹음기 얘기를 꺼내야 하나 생각하던 때, 임유나가 말을 걸었다.
“저, 주혁 씨.”
“아, 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저번에는 갑자기 전화해서 질문만 하시고……. 가끔 안부나 묻자면서요.”
“어…….”
이런, 요새 많은 일이 있어서 잠깐 까먹고 있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요새 비즈니스 때문에 조금 바빠서…….”
“연락 자주 해요. 딱히 용건 없어도 괜찮으니까.”
임유나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래요. 아주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해서 귀찮게 해 드리겠습니다.”
“좋아요.”
“예?”
“좋다고요.”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을 이렇게 받아 버리니 말문이 턱 막혔다.
음……. 괜히 얘기했나?
이럴 땐 역시 화제 돌리기지.
“이번에 제가 그 위장 직원에 대해 알아낸 게 있는데, 혹시 알고 싶으세요? 모르고 있는 게 더 안전하겠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뭘 숨기고 계셨는지는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아, 네. 알려주세요. 대체 그 남자는 왜 제 가게에 들어왔고, 자꾸 이상한 사람들이 엮이는지.”
나는 몇 주 동안 발로 뛰면서 알아낸 최철호에 대한 정보들을 적당히 걸러서 설명했다.
그러자 임유나는 예상했다는 듯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풍원요정이 높으신 분들 밀회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라는 건 알았는데…… 국회의원이 보낸 깡패니, 녹음기니, 머리가 복잡하네요.”
“그래도 제가 일단락 짓긴 했으니까 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용 후 1년은 사후관리가 가능하니까요.”
“그런 게 있어요?”
“제가 나서서 일을 키운 감이 없진 않으니까, 최대한 도와드려야죠.”
“정말 감사해요. 해코지당할뻔한 걸 몇 번이나 막아 주시고. 이번 일은 제가 따로 입금을…….”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임유나의 말을 막았다.
“돈이라뇨. 괜찮습니다. 연극 표 정도면 충분하죠.”
“그래도…….”
“그리고 유나 씨가 무사한 게 저한테는 보람입니다.”
“아, 그런가요……?”
“그럼요. 제 고객님이신데요.”
“…….”
“벌써 다 왔네요. 내립시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이촌역에 도착했다.
임유나와 연극을 보기로 한 극장도 역 근처에 있고, 박준규의 주요 동선도 역 주변이다.
‘운이 좋았어.’
차에서 내린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거리를 걸었다.
아직 연극이 시작되기까진 1시간 정도 남았고, 둘 다 점심도 먹지 않은 상태.
딱 점심 먹고 가면 시간이 맞다.
하지만 나는 딱 맞게 시간을 쓰면 안 되는 상황이고.
나는 임유나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시선은 계속해서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임유나는 내 눈을 제대로 보면서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안 들킬 수 있었다.
그때, 저 멀리 이준우가 가져온 사진으로 확인했던 얼굴이 보였다.
‘박준규.’
놈은 마약을 팔면서도 자기가 하지는 않았는지, 생각보다 멀쩡하게 겉늙은 얼굴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임유나와 녀석이 있는 핫도그 노점으로 다가갔다.
동아극장이 바로 근처에 있는 장소였다.
“어? 유나 씨, 핫도그 좋아하세요?”
“네? 아, 음. 먹어 본 적이 없어서요.”
핫도그를 안 먹어 봐?
확실히 부잣집 딸내미는 다르네.
어릴 때는 이거만 한 게 없었는데 말이야.
“그럼 이참에 먹어 보시죠. 몸에 안 좋게 생기긴 했지만, 맛은 있습니다.”
“좋아요. 어머니가 못 먹게 하셔서 항상 궁금했거든요.”
우리가 노점에 들어서자, 핫도그를 우걱우걱 씹던 박준규가 시선을 돌렸다.
‘이 새끼가?’
임유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게 기분이 아주 더러웠지만, 일단 넘어갔다.
어차피 조져질 놈, 더 아프게 조지면 되겠지.
“핫도그 두 개 주세요.”
“여기요.”
“감사합니다.”
임유나는 핫도그를 받아 들고 유심히 관찰했다.
“설탕을 묻히고 케첩을 뿌린 거네요? 애들이 좋아할 만하네요.”
“그렇죠?”
임유나가 고개를 돌리고 한 입을 베어 물더니, 눈썹을 치켜올렸다.
“맛있네요?”
“다행이네요. 하하.”
나는 박준규가 자리를 떠나는 걸 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유나 씨.”
“네?”
“정말 죄송한데, 잠깐만 어디 갔다 와도 될까요? 금방이면 돼요.”
“아……. 네. 그래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고마워요.”
시선을 돌리니 박준규가 코 밑을 비비며 동아극장으로 들어갔다.
밖에 숨어서 잠시 기다리자, 녀석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나왔다.
그리고 극장 옆의 으슥한 골목을 향해 걸어갔다.
자기 무덤으로 알아서 들어가다니, 수고를 덜 수 있겠어.
나는 조용하지만 빠르게 박준규의 뒤를 쫓았다.
박준규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품 안을 뒤적거리며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들고 있던 핫도그를 박준규를 향해 강하게 집어던졌다.
“업!”
얼굴에 핫도그를 정통으로 맞은 박준규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고, 옆구리에 주먹을 두 번 날렸다.
퍽! 퍽!
“윽! 억!”
“극장에서 약 가지고 나온 거야?”
“X발, 너 누구…….”
유나 씨가 기다린다는 사실에 마음이 급해진 나머지, 나도 모르게 박준규의 손가락을 한꺼번에 꺾어 버렸다.
우득!
“끄아……읍!”
혹시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입을 막았다.
하나씩 해야 됐었는데, 실수해 버렸네.
“준규야, 나 급하다. 물어볼 게 있으니까 빨리 대답해.”
“읍!”
아, 입을 막았구나.
“X발! 무슨 개소리야!”
“극장 안에 네 윗선이 있는 거지? 극장 주인이냐?”
“지랄…….”
쉽게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길래, 녀석의 쇄골을 힘줘서 꽉 붙잡았다.
“아, 아악! X발!”
“빨리. 기다리잖아.”
“X이바알…….”
나는 손에 힘을 더했다.
말하지 않으면 부러뜨리지 않을 생각이라는 걸 느꼈는지, 놈은 다급하게 내 손을 치며 말했다.
“맞아! X발! 동아극장 사장 맞다고!”
“그렇지. 알고 있잖아?”
“그, 그러니까 좀 놔…….”
“더 아는 게 있을 텐데.”
“아, 아악!”
나는 반대쪽 쇄골에도 손을 넣어 붙잡았다.
“뭐 구매자 명단 같은 거 없어?”
“며, 명단! 명단! 있어!”
“누가 가지고 있는데?”
“사장이겠지……. 끄악!”
“알면 한 번에 좀 불어. 새끼야.”
빠악!
주먹으로 핫도그의 잔해가 묻지 않은 박준규의 얼굴을 후려쳤다.
놈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벽에 부딪힌 뒤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나는 다시 임유나에게 돌아가며 박준규가 말한 걸 떠올렸다.
‘사장이라…….’
아무래도 극장주를 털어 봐야 할 것 같은데, 이대로 임유나를 두고 갈 수는 없다.
뭐, 연극 중간에 잠깐 나와서 확인하면 되겠지.
명단을 찾으면 좋고, 만약 없어도 다시 여길 찾아오면 되니까.
혹시 모르니 라세흠 부장한테 애들 시켜서 극장 주변을 감시하라고 문자를 보냈다.
핸드폰을 집어넣은 순간 흠칫했다.
‘잠깐. 유나 씨를 너무 오래 혼자 둔 것 같은데?’
황급히 골목을 달려 나가자, 저 멀리서 덩그러니 서 있는 임유나가 보였다.
핫도그는 진작 다 먹었구나.
“습. 어쩌지.”
그때 옆에 있던 꽃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빠르게 들어가 꽃 한 송이를 집어 들고 만 원권 한 장을 놔뒀다.
“돈 놓고 갑니다!”
그리고 훌쩍 달려가자 임유나가 내 쪽을 돌아봤다.
어딜 갔다 왔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꽃을 건넸다.
“눈에 띄어서요. 하나 선물해 드리려고 사 왔습니다.”
“아…….”
임유나가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기분이 많이 상했나? 미안하네.
고개를 든 임유나가 꽃을 받아들며 말했다.
“라벤더네요. 정말 감사해요.”
라벤더이었구나.
유나 씨가 꽃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앞으로 자주 선물해야겠어.
임유나가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주혁 씨. 라벤더의 꽃말이 뭔지 아세요?”
“아뇨. 뭔데요?”
“‘침묵’, ‘나에게 대답하세요’라는 뜻이 있대요.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들어 보시겠어요?”
“오, 네. 좋죠.”
임유나는 기억을 더듬는지 눈동자를 굴렸다.
“옛날에 어떤 공주가 타국의 왕자를 사랑했어요. 왕자도 미소를 지어 주며 호감을 보였지만, 공주가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는 말만큼은 대답하지 않았대요.”
“음. 여자 마음을 가지고 노는군요.”
“그러다 왕자의 나라가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게 돼서 왕자는 떠나야 했어요. 그래서 공주가 그 전에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 했는데, 왕자는 끝내 대답하지 않고 떠났어요.”
“아주 나쁜 놈이네요.”
“그렇죠. 아주 나쁜 놈이었죠. 자기도 호감이 있으면서 그런 말 한마디 안 하고…….”
음, 왜 나를 보는 거지?
잠시 나를 묘한 눈빛으로 보던 임유나가 말을 이었다.
“결국 전쟁에서 왕자의 나라는 이겼지만, 왕자는 전사하고 말았어요. 그걸 안 공주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공주가 죽은 자리에서 피어난 꽃이 라벤더라고 하더라고요.”
“오……. 그런 이야기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왕자도 공주를 사랑했다는 거죠. 다만 벙어리였고 수줍음이 많아 공주의 고백에 늘 대답하지 못했던 거예요.”
“그럼 나쁜 놈은 아니었네요.”
고개를 끄덕인 임유나가 나를 보며 물었다.
“주혁 씨는 수줍음이 많은 편인가요?”
“네? 음……. 거의 없는 편이죠.”
“말도 잘 하시구요.”
“뭐, 말싸움에서 진 적은 없습니다.”
왜 이런 걸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이주혁이다.
누구에게도 말싸움으로 져본 적이 없지.
내 말을 듣던 임유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좋아하는 상대가 있으면 꼭 호감을 표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말하지 않으면 모르니까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네요.”
잠깐 정적이 흘렀다.
임유나는 아직 붉은 얼굴로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스, 슬슬 극장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아, 네. 가시죠.”
나는 임유나와 동아극장을 향해 걸었다.
임유나는 건물 외부를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건물이 별로 안 크네요. 소극장인가 봐요.”
“그런가 봅니다.”
임유나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나는 도주 경로, 창문의 높이 등을 파악했다.
혹시 놈이 튀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내부로 들어서자 로비가 보였다.
몇 명 지나다니는 사람들 얼굴 상태를 보니, 아무래도 약쟁이들이 드나드는 곳이 맞는 것 같았다.
중앙에 보이는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아마 사장실은 위에 있겠지?
“유나 씨. 먼저 들어가 계세요. 화장실 좀 들렀다 가겠습니다.”
“아, 네.”
임유나를 먼저 보내고, 나는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그러자 복도 정면에 사장실이 보였다.
‘그럼 한번 뒤져 볼까.’
이번 생은 빌런이다
지은이 : 글빌런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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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949-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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