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92
091화
탁.
모자랄까 봐 더 사 온 식재료들을 냉장고에 정리했다.
분명히 가기 전에는 냉장고가 꽉 차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절반이나 비어 있는 거지?
저녁 한 끼만 준비하는 거 아니었나?
아무리 인원이 열여덟 명이라지만, 이 큰 냉장고의 절반이나 써야 한다니.
“거의 밥 먹는 하마구만.”
고기, 채소, 빵 그리고 기타 등등 마실 것들을 넣은 후, 따로 챙긴 샴페인을 들고 팀원들이 모인 곳을 향했다.
인원이 워낙 많아 넓은 식탁 두 개를 붙여 놓고 거기 둘러앉은 게 보였다.
“오.”
테이블 위에는 진수성찬이 놓여 있었다.
이거 완전 명절 분위긴데?
칠면조에 커다란 고기, 한국식으로 잘 구워진 생선에 불고기까지.
설마 이걸 다 유나 씨가 한 건가?
“다 직접 하신 거예요?”
“다는 아니고, 태섭 씨가 많이 도와주셨어요.”
주방 안쪽을 보니 꽉 끼는 앞치마를 두른 정태섭이 엄지를 척 들었다.
나도 엄지를 마주 들어 준 뒤 젓가락을 들었다.
“유나 씨. 수고하셨어요.”
“아뇨. 손님들인데 제가 대접해야죠.”
캬.
역시 돈이 많은 사람이 마음도 넓다니까.
“그럼, 잘 먹겠습니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칠면조가 배 속으로 넣어 달라고 날 유혹하고 있었다.
찌익.
“와.”
부드러운 살코기를 찢어 입에 넣자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입 안으로 맛을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
내 눈에 숟가락을 떨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우재성 씨? 손을 왜 그렇게 떨어요?”
우재성이 원망과 후회가 담긴 눈으로 날 노려봤다.
그렇게 봐도 부장님한테서 구해 줄 순 없는데.
“…….”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운동을 하는데 몸이 더 안 좋아지는 거 같습니다.”
“조금만 버티면 좋아질 겁니다.”
나는 커다란 정태섭을 가리켰다.
“저 녀석도 우재성 씨 정도 체형이었는데 2년 사이에 저렇게 된 겁니다.”
“후…….”
한숨을 내쉰 우재성이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몇 번 더 들었다 떨어뜨렸다 하더니, 이내 소리가 나게 책상에 탁 내려놓았다.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왜요? 더 안 드시고.”
“입맛이 없네요.”
우재성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안타깝네. 평소에 자전거만 타던 양반이 부장님의 운동을 버티긴 힘들었을 텐데.
“부장님. 대체 뭘 했길래 우재성 씨가 저렇게 골골거려요?”
내 물음에 칠면조 다리를 찢어먹던 라세흠 부장이 우물거리며 답했다.
“음? 별거 하지도 않았어. 기초 체력만 좀 다져 줬지.”
40km를 달리기로 주파하는 부장님의 기초체력 단련이라.
군 시절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라세흠 부장에게 당부했다.
“야밤에 도망가지 않을 만큼만 굴려 줘요.”
“음? 진짜? 말릴 줄 알았는데.”
“에이. 저 정도는 해야죠. 부장님 말대로 갱단의 표적이 됐는데. 달리다가 지치면 총 맞는 거 한순간이잖아요?”
“흐흐. 알았다.”
라세흠 부장이 씩 미소를 지었다.
칠면조 다리를 들고 저러니 무슨 원시 부족 족장 같네.
나는 샴페인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분. 오늘은 첫날이니까 일과 관련된 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뭐, 우재성 씨도 여기 있으면 안전할 거고요. 그러니 오늘은 마음껏 먹고 마십시다.”
“캬!”
“이게 대표지!”
팀원들이 각자 수저를 들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내일부터 여러분들은 라세흠 부장님 밑에서 빡세게 훈련할 겁니다. 다들 총 잡은 지 오래됐지?”
내 말에 팀원들이 사색이 되었다.
“아니! 난 주말마다 사격 나가서 괜찮은데.”
“서든 어택 대령이다. 필요 없어.”
“난 심심하면 총 가지고 놀아.”
“다들 지랄하지 마시고.”
나는 팀원들의 불만을 일축하며 라세흠 부장에게 말했다.
“이 녀석들 전역하고 놀면서 감 다 죽었을 테니까, 확실하게 훈련 부탁드립니다.”
라세흠 부장이 음흉한 표정으로 엄지를 척 들었다.
“뭐? 감이 죽어?”
“이주혁이. 솔직히 사격은 내가 너보다 나았던 것 같은데.”
“사격장 없냐?”
“X밥이랑 안 한다.”
“썅!”
낄낄 웃으며 긁어 주니 자존심 강한 녀석들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러면 훈련도 좀 적극적으로 참여하겠지.
“자, 그럼…….”
뻥!
샴페인의 코르크를 딴 뒤, 유나 씨의 잔에 따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일단 다들 받으시고.”
나는 테이블을 돌며 모두의 잔에 샴페인을 따라 줬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내 잔을 높이 들었다.
날 따라 유나 씨와 부장님, 팀원들도 잔을 들었다.
“다들 먼 타지까지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비즈니스 타고 왔는데.”
“기내식도 기가 막히더라.”
이 자식들이 대표가 말하는데.
“어쨌든. 우리 팀원들이랑 같이 작전하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은데, 한번 제대로 놀아 봅시다!”
“가자!”
“다 박살내 버리자!”
“SA시큐리티를 위하여!”
“위하여!”
고개를 돌려 임유나를 보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풍원한정식을 위하여.”
“위하여.”
임유나가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었다.
“위하여!”
“위하여!”
“야. 그런데 대표 멘트가 뭐 이렇게 센스가 없냐.”
라세흠 부장의 핀잔이 들려왔다.
쌍팔년도도 아니고 위하여만 남발하는 게 별로인가 보다.
하긴, 내가 봐도 이건 구식 멘트네.
“그럼, 정말 하고 싶은 말 하나만 할게요.”
“??”
“정의는 승리한다.”
“!!”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목구멍으로 차가운 스파클링을 밀어넣었다.
등줄기를 시원하게 만드는 짜릿함.
내가 만들어낼 정의는 이제부터 사회를 청량하게 만들 거다.
내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잔을 들이켰다.
같은 사상과 목표를 가지고 있는 동료들.
이들이 있어서 든든하다.
‘그나저나, 우재성은 많이 힘든가 보네.’
나는 우재성이 올라간 2층을 올려다보며 잔을 들었다.
조금만 더 고생해라.
절대 전생의 싸가지 없던 네가 구르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야.
진짜로.
***
널찍한 사무실 형태의 방.
의자에 앉은 한 남자가 책상 위에 놓은 명패를 쓰다듬었다.
[서장 박민구]송태석 과장의 전 직속 상관이자 주철수에게 돈을 받고 경찰 내부에 스파이를 넣은 남자.
지금은 서장이 된 박민구였다.
박민구 서장은 애꿎은 명패만 만지작대며 고민에 빠져 있었다.
“씁…….”
그가 고민하는 건 바로, 주철수와 강남파의 몰락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도 뒷세계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는 있다.
하지만 일전의 경찰 살인미수 사건으로 주철수와 강남파가 완전히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다.
이름을 숨기지 않고 진행하던 사업은 날아갔고, 그 많던 조직원들도 체포가 무서웠는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심지어 자수하는 새끼도 있었지.’
그렇기에 박민구 서장은 주철수와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일부러 안 받는 건지, 도망 다니느라 바빠서 못 받는 건지.
박민구 서장은 주철수가 제공하던 것들에 대한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세탁된 현금과 여자는 물론이고, 불법적인 약물까지.
돈이 있어도 뒤탈 없이 구하기 힘든 것들을 주철수를 통해 쉽게 구했었는데 말이다.
‘배성복. 그 병신 같은 놈은 왜 갑자기 주철수 뒤통수를 쳐?’
주철수 몰락의 주 원인이 바로 배성복 전 서장이다.
얌전히 뒷돈이나 처먹던 새끼가 갑자기 눈깔이 돌았는지, 주철수를 체포하겠답시고 나대다가 나락으로 가 버렸다.
그동안 저질렀던 비리가 터졌다는데, 딱 봐도 배신당한 주철수의 복수일 것이다.
박민구 서장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주철수……. 아무래도 정리해야겠어.’
배성복 전 서장을 보면서 느낀 게 있다.
바로 자기 약점이 될 증거를 가지고 있는 놈은 미리 없애 둬야 한다는 것.
‘뭐, 돈은 이 자리에 있으면 알아서 들어올 거고……. 약은 서에 있는 거 조금씩 떼 가면 되니까. 김성우 시키든가 해야겠어.’
김성우 팀장.
예전부터 배성복 밑에서 잡일하던 놈인데, 팀장 달더니 요새 대가리가 좀 커졌다.
‘좀 써먹을 만한가 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버려야지.’
박민구 서장이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던 그때, 누군가 서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어, 들어와.”
-예.
문이 열리고 선 굵고 건장한 남자가 서장실로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어. 앉아.”
남자의 이름은 황성빈.
조폭 행동대장 출신으로, 지금은 순경 신분으로 경찰 내부에 잠입한 스파이다.
그 신분은 박민구 서장이 마련해 줬고 말이다.
“황 순경. 일은 할 만해?”
“예.”
“너도 알다시피, 상황이 많이 꼬였다.”
원래는 위장한 경찰 신분을 이용해 강남파에 언더커버로 잠입시킬 생각이었다.
그럼 강남파에 대한 거짓 정보를 경찰 측에 흘려 교란할 수도 있고, 경찰 내부의 정보를 강남파에 전달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주철수가 쥐구멍에 숨어 버리면서 이 계획이 모두 어그러졌다.
‘이놈이 쓸데가 없어졌지.’
강남파의 말단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던 황성빈이 허공에 붕 떠 버린 것이다.
박민구 서장은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황 순경.”
“예. 서장님.”
후.
연기를 내뿜은 박민구 서장이 말했다.
“나랑 일 하나만 같이 하지.”
***
-와-!
-이게 진짜 있다고요?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시끌벅적한 목소리를 들으며 내가 찜해 놓은 방으로 이동했다.
원래 술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오늘은 분위기를 타서 너무 많이 마셔 버렸다.
샴페인이 달달해서 그런가, 떠들다가 내려다보면 어느새 잔이 비어 있었다.
“어우. 내일 고생 좀 하겠는데.”
복도를 걸어 맨 끝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끼익.
“후…….”
나는 샴페인 향이 섞인 숨을 길게 내뱉으며 침대로 다가가 풀썩 몸을 던졌다.
옷은 갈아입어야 하는데…… 내일 하지 뭐.
몰려오는 졸음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맡기자, 점점 의식이 멀어졌다.
.
.
틱. 틱.
“으음…….”
이상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
창문 바깥은 아직 어두운 상태. 아직 새벽인 것 같은데.
틱. 틱.
“뭐야…….”
다른 사람들도 다 슬슬 잠들었는지 별장은 조용했다.
그런데 내가 있는 방에서만 이상한 소리가 반복되고 있었다.
시계 소리라기엔 문 바깥에서 들리는 것 같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침입자?’
아니,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만약 별장에 침입자가 들어왔다면 동물 같은 감각의 라세흠 부장이 그냥 들여보냈을 리가 없지.
그리고 나도 자면서 적의를 감지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2년 동안 잘 때마다 불시에 라세흠 교관의 습격을 받으니 그렇게 됐다.
틱. 찰칵.
-하.
문고리에서 잠금 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누군가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팀원이 장난친다기엔 너무 소소하고, 침입자라기엔 너무 부주의하다.
문 뒤에 숨은 후 날카로운 펜 하나를 챙겼다.
철컥.
“이…….”
튀어 나가 문을 따고 들어온 놈을 붙잡고 벽으로 밀친 뒤, 목을 팔로 누르고 펜촉을 갖다 댔다.
“컥.”
그런데 침입자의 얼굴이 익숙했다.
“우재성 씨?”
“소, 손 좀…….”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나는 얼른 제압을 풀고 옷매무새를 정리해 줬다.
“콜록!”
“아니, 이 새벽에 남의 방문은 왜 따고 들어오신 겁니까?”
“후……. 이주혁 씨.”
“네?”
고개를 든 우재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 옷깃을 붙잡으며 말했다.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이번 생은 빌런이다
지은이 : 글빌런
발행인 : 손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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