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155
49 내가 뿌린 씨 (5)
새는 굳게 닫혀 있는 문 앞으로 날아갔다. 쑤어하오주는 거기는 잠겨 있다고 말하려 했지만, 마법처럼 굳게 닫혀 있었던 문이 스스로 열렸다.
쑤어하오주는 뱁새를 따라 조심스레 문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마치 꿈속의 세상처럼, 생기 하나 없었다.
뱁새는 복도 끝에서 그녀를 향해 날갯짓했다. 어서 문밖으로 나와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뭐, 좋아.]
쑤어하오주는 곧바로 문을 박차고 나왔다. 어차피 이곳에 오래 갇혀 있고 싶진 않았다. 사고를 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있었을 뿐, 언젠가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는가.
다만 궁금할 뿐이다.
[그 사람이 널 보낸 걸까.]
쪽지의 주인공은 분명 션이 맞았다.
오랜만이야, 그리고 또 뭐?
[나에게 할 말이 그것뿐이래?]
마치 그에 대한 대답이라도 되듯,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 놓인 두 번째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쑤어하오주는 재빨리 손을 뻗어 두 번째 쪽지를 주웠다.
「그동안 잘 지냈어?」
다정한 말투에 열이 받았다. 여전히 자신을 가지고 놀려는 걸까. 네가 나에게 다정했던 건 거짓말일 뿐인데. 거짓말이어야 하는데.
이딴 쪽지 찢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쑤어하오주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동화 헨젤과 그레텔 속에 나오는 조약돌처럼 쑤어하오주가 걸을 때마다 눈앞에 쪽지가 하나씩 나타났다.
쑤어하오주는 검은 모래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며 그 위에 놓인 하얀색 쪽지를 하나하나 주웠다.
「날 찾아 한국까지 올 줄은 몰랐어.」
「하지만 나쁜 사람들과 엮였어.」
「이곳에 있다간 큰일이 날 거야.」
쪽지 속 그의 말은 여전히 다정히 그녀를 향한 걱정을 담고 있었다.
그럴 주제가 없는 사람이, 감히 다정했다.
그리고 뱁새의 안내 또한 그러했다. 그녀의 모습을 비출 CCTV는 가려진 상태였고 잠겨 있던 문도 모두 풀려 있었다.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도 없었다.
며칠간 그녀를 고생시켰던 이 철옹성 같았던 건물은, 어느새 어린아이도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형편없는 우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뭐, 날 구하러 오기라도 했다는 거야? 그러면 이딴 쪽지 말고, 내 앞에 직접 나타나야지.]
그에 대한 대답이라도 되듯, 다음 쪽지가 나타났다.
「직접 나타나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알잖아.」
이 길 끝에는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처음 쪽지를 집었을 때 했던 그 생각은 그다음 쪽지에 짓밟혔다.
「아직 당신 손에 죽어 줄 수 없어서 말이야.」
그 쪽지에 쑤어하오주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걸 보면 정말로 당신이 나한테 죽어 주고 싶다는 것처럼 보이겠어.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나를 만나러 올 용기가 없는 거면서. 그런 주제에 나는 왜 구하러 왔대?]
그렇게 말한 쑤어하오주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이건 눈물이 아니다. 그냥 화가 나서 물이 흐른 거다, 암. 그렇고말고. 너 따위 인간 때문에 내가 울 리가 없잖아.
어느새 감옥 같았던 건물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뱁새는 마지막 쪽지 위에 앉았다가 모습을 감추었다.
마치 여기까지가 자신에게 허락되었던 여정이라는 듯이.
쑤어하오주는 이게 션이 보낸 마지막 쪽지라는 걸 직감했다.
「그러니 다음까지, 건강히.」
끝까지 이기적인 인간.
[우리한테 다음이라는 게 있어?]
그 쪽지를 끌어안고 쑤어하오주는 이를 악물었다. 또 한 번 이런 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들쑤신 남자를 감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감정을 겨우 추스르고 일어났을 때쯤, 그녀의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쑤어하오주의 정면에 나타난 것은,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한 여자였다.
“바, 반가워요!”
남주현은 살벌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애에게 애써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당신의 한국 정착을 도울 N이라고 합니다!”
빌어먹을, 벨츠머츠 자식들하고 손을 잡는 게 아니었다.
* * *
쑤어하오주를 무사히 남주현에게로 넘긴 한서현은 무전기를 켰다.
“보스, 저희는 이제 끝났어요.”
하지만 무전기 너머의 목소리는 답이 없었다.
“역시…….”
한서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잖아! 아무 일도 없긴!
“이 인간이 정말!”
“또 연락이 안 돼?”
“어! 진짜 내가 가만히 안 둔다, 이번에는.”
그 말에 김재호가 슬쩍 물었다.
“내가 한 대 쿵 때릴까?”
그 말에 한서현은 김재호의 주먹을 슬쩍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한 대만 쳐 달라고 하고 싶지만, 김재호의 주먹은…….
‘사람의 것이 아니지.’
저런 걸 맞았다가는 보스의 키가 5cm는 줄어들 거다. 목이 몸통 안으로 파고들 테니까.
“됐어, 대충 혼내 두면 되겠지.”
“말로 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김재호의 말에 한서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생각도 똑같았지만, 그래도 매로 다스릴 수는 없다.
“아니, 진짜 한 대만 때릴까.”
“한 대만 때리자.”
“하……. 진짜 또 어디 다친 거면 죽인다.”
다치지 않았어도 죽인다. 어쨌거나 죽인다. 속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살심을 억누른 한서현은 흑마력을 끌어 올렸다.
강이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의 위치가 머릿속에 훤히 그려지기 시작했다.
“일단 잡으러 가자고.”
“응.”
두 사람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큿!’
일이 왜 이렇게 됐더라.
나는 날아오는 주먹을 피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훙, 하고 바람이 찢기는 소리가 났다. 제대로 맞았다면 갈비뼈가 그대로 부러졌을 거다.
정호산은 나에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도채희와 정호산 사이에 난입해 차송진을 구출(?)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문제는 정호산이 나를 노리고 달려들기 시작했다는 거다.
“벨츠머츠!”
여기가 포X몬 세상이라면, 정호산의 이름은 벨츠머츠몬이 될 게 분명하다. 아까부터 벨츠머츠라는 말만 반복하는 걸 보니 확실하다.
여차하면 사격할 기세로 총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도채희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내 뒤에서 덜덜 떨면서 도망칠 생각도 못 하는 차송진이 더 문제다. 차라리 저게 어디 멀리라도 가면 나도 거리를 벌리고 도망이라도 칠 텐데! 바짝 굳어서는 아무것도 못 하잖아!
나에게 날아드는 주먹을 가까스로 피해 낸 난 숨을 헐떡였다. 레이가 답답하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능력도 안 쓰고 뭘 하는 짓이냐.
‘그랬다가 다치면 어떡해요!’
내가 익힌 건 사람들의 목숨을 노리는 기술들뿐이다. 진심 전력 펀치밖에 없다고! 이래서야 포X몬을 잡으려다가 포켓X을 실수로 죽여 버리는 얼뜨기 트레이너 같은 꼴이 나 버려!
━아까부터 예시로 드는 포X몬이라는 게 뭔데?
레이의 말에 대꾸할 새도 없이 나는 바닥을 굴러야만 했다. 정호산의 주먹이 내가 조금 전까지 있었던 공간을 꿰뚫었다.
다행히 금 박사가 업그레이드를 제대로 해 놓은 가면 덕분인지, 가까이에서 몇 번이나 주먹을 나눴는데도 정호산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강이신은 어디에 있지?”
너무 못 알아보는 걸지도!
“대답할 수 없다면 비켜, 저 인간에게 물어볼 테니까.”
정호산이 말하는 ‘저 인간’이라는 건 내 뒤에서 얼어 버린 차송진이었다.
문제라면, 너무 긴장한 것 때문에 표정이고 몸짓이고 딱딱하게 굳어서 오히려 ‘어이어이,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내 부하를 꺾고 와라’ 하는 포즈가 되어 버렸다는 거지.
‘저래서야 완전히 도발 허수아비라고!’
안 그래도 진심 모드인 정호산이 5% 정도 더 강해진 것 같단 말이다.
하필이면 얘네한테 걸려서는. 나는 혀를 찼다.
당장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정호산과 도채희를 다치지 않게 하면서 거리를 벌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김재호와 한서현이 올 때까지 일단은 시간 벌기라도 하는 수밖에.
나는 나를 제치려는 정호산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놈의 손날이 내 손목으로 날아들었다.
“큭!”
방검 기능이 있다며! 충격이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 부딪침으로 손목뼈에 금이 갔다.
나는 재빨리 마력을 끌어올렸다. 손목뼈가 재생되는 중이었지만, 여전히 정호산은 나를 매섭게 몰아붙였다.
“난 당신한테 아무런 볼일도 없어. 그러니 놔줘. 저 인간이랑 할 얘기가 있다니까.”
그리고 매서운 훅이 들어왔다. 나에게 바짝 붙은 상태에서의 훅이라, 피할 공간이 없었다. 나는 팔목을 들어 올려 방어했다. 공격을 흘린다고 흘렸지만, 이번에도 팔목에서 불길한 소리가 났다.
“큭.”
부딪칠 때마다 뼈가 나가다니. 이게 사람이냐!
아카데미 때보다 훨씬 더 괴물이 됐잖아. 나는 흙을 움직여 정호산의 발목을 잡으려고 했지만, 정호산의 발 구름 한 번에 흙더미는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세상에 무슨 힘이…….
‘정호산이 아직 6급에 머물러 있는 건, 경험 부족 때문이니까요.’
경험을 조금만 더 쌓았더라면 정호산은 7성급에 올랐을 거다. 잠재력은 A급인 재능이지만, 정호산은 뼈를 깎는 수련으로 늘 본인의 잠재력 이상을 끌어냈다.
괜히 바벨 아카데미에서도 손에 꼽히는 기대주에 든 게 아니라고.
육체 강화계는 저평가받기 쉬운 재능 중 하나였다. 그저 몸이 조금 더 튼튼해지는 것뿐 아니냐고 비아냥거리는 인간들도 많이 봤다.
실제로 그런 평가가 맞아떨어지는 인간들도 있다.
하지만 정호산은 달랐다.
정호산은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다룰 줄 알았으니까.
“큿!”
하마터면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가면이 가루가 될 뻔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김에 나는 놈의 하체를 노리고 다리를 뻗었다.
하지만 내 움직임을 예상했다는 듯, 정호산이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떴다. 그리고 직후 내리꽂히는 발 차기.
체공 시간이 거의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정호산의 발은 빨랐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놈에게 당해 척추가 두 동강이 났겠지마는, 나는 가까스로 녀석을 피했다. 움직임을 보고 피한 게 아니라, 예상해서 피한 거다.
아카데미에서도 자주 써먹던 기술이었으니까.
문제는 녀석에게도 내 움직임이 익숙할 거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최대한, 나답지 않게 움직여야 한다.
나는 필사적으로 김재호의 움직임을 흉내 냈다. 최근 몇 번이나 몸을 맞부딪쳐 보며 녀석의 움직임을 익혀 뒀던 터라, 모방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모방은, 모방일 뿐. 이대로 가다간 내 몸이 가루가 되는 게 빠르겠다.
나는 허벅지에 매 두었던 단검을 집어 던졌다.
━아까는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았냐?
‘신뢰의 단검 던지기입니다만.’
━이상한 거에 신뢰라는 이름을 붙이지 말라고!
‘역시 너라면 피할 줄 알았어 단검 던지기입니다.’
━그게 그거잖냐!
정호산은 내 예상대로 어렵지 않게 단검을 잡았다. 그리고 내게 되던졌다.
아니, 이럴 수가.
━이것도 신뢰의 단검 던지기냐?
‘아니요!’
젠장. 가슴팍에 구멍이 뚫릴 뻔했다. 내 몸을 스쳐 지나간 단검은 그대로 뒤에 있는 나무에 박혔다.
이제 보니 내 쪽으로 던졌지만, 단검은 정확히 뒤에 있는 차송진을 노리고 있었다.
차송진은 괜찮은 건가?
━다치지는 않았다! 스치기만 했을 뿐이야.
‘스쳐요?’
차송진의 어깨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차송진은 멍한 얼굴로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이런, 차송진에게 시선을 끌린 나를 정호산이 덮쳤다. 우리는 정신없이 서로에게 주먹질했다. 바닥을 구르는 동안, 나는 정호산에게 몇 대나 얻어맞았다.
그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고, 신음이 줄줄 샜다. 하여튼 무식하게 강하다니까. 고통에 하마터면 정신이 나갈 뻔했다.
‘그래도 힘 조절은 하네.’
━이게 힘 조절을 한 거라고?
정호산이 진심으로 나를 때렸다면 나는 지금쯤 피를 토하고 바닥을 뒹굴었을 거다.
내 몸 위에 올라탄 정호산이 내 멱살을 쥐었다. 나는 손을 들어 녀석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이내 손목이 잡혀 바닥으로 처박혔다.
“큭.”
놈에게 깔린 내가 겨우 숨을 몰아 내쉴 때, 정호산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녀석이 보고 있는 건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검은 가면일 테지만, 가면 속 얼굴을 그대로 보고 있는 것처럼 집요한 시선이었다.
녀석이 내 가면에 손을 얹었다. 안 돼, 그것만큼은. 나는 몸을 흔들어 놈을 떨쳐내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이윽고 내 얼굴을 가리던 가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맨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이, 이신이?”
내 얼굴을 확인한 녀석이 놀란 얼굴로 내 멱살을 놓았다. 쿵, 하고 내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아, 하아…….”
녀석은 충격에 젖은 얼굴로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네, 네가 어떻게, 여기에…….”
“당연히 우리 보스가 여기에 있는데 와야지.”
“너.”
그때 정호산의 얼굴을 검은 모래가 덮쳤다.
“큭!”
정호산이 자신을 덮친 모래에 당황할 때, 나는 놈을 밀치고 뒤로 물러섰다.
“정말 눈을 못 떼게 한다니까.”
애타게 기다리던 구원자의 등장이다.
“잠깐, 잠깐만! 도망치지 마! 제발 나랑 얘기 좀 해!”
모래 사이로 정호산과 눈이 마주쳤다. 정호산은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망, 도망이라.
나는 녀석의 말에 깨달았다.
어쩌면 불법 게이트 앞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우리의 운명은 이렇게 결정된 게 분명하다고.
“도망치려는 게 아니야, 돌아가는 거지.”
그렇다.
나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다.
나는 차송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시선을 눈치챈 한서현이 모래로 차송진을 끌어당겼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저 사람들 곁이거든.”
모래로 정호산의 시선이 끌린 사이, 나는 나와 정호산의 사이를 가르는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 냈다.
“큭.”
물줄기를 불러낸다고 마력을 잠깐 다른 쪽으로 돌렸을 뿐인데 온몸이 쑤셨다. 비틀거리는 나를 모래가 받쳐 주었다.
정신을 다시 차린 나는 물줄기를 바로 얼음으로 바꾸었다. 거대한 얼음벽. 제아무리 정호산이라도 쉽게 부술 수는 없을 거다.
빙벽 뒤로 숨은 내가 한서현에게 물었다.
“재호는?”
“여기에.”
삐죽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손을 맞잡은 내가 차송진을 향해 눈짓했다.
“뭐 해, 당장 집으로 가자.”
제15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