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109
108화. 탕진 (2)
유리에게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몇 가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를 마침내 달성한 순간, 그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부르르르-.
‘크으! 이 말을 하는 날이 오다니!’
자기가 내뱉어 놓고 혼자서 감동해 버린 유리.
그의 뇌리로 과거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불타 버린 마을과 한순간에 머물 곳을 잃고 비렁뱅이 신세가 된 어린 시절.
그때부터 유리는 먹고살기 위해 해 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쉬지 않고 일했기에 수익은 끊이지 않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벌어도 고통을 잠재울 진통성 약제를 사고 나면 겨우 입에 풀칠할 수준의 돈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가격을 신경 쓰지 않고 물건을 사 보는 게 꿈이 된 거였다.
비록 그게 자신에게 필요 없는 물건일지라도 말이다.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그렇게 해 보고 싶었는데, 이제 그 꿈을 이뤘다.
‘비록 진짜 골드나 실버는 아니지만!’
그래도 요람에서는 이 포인트가 화폐이지 않은가.
이 정도면 충분히 꿈을 이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유리의 얼굴에는 행복감이 가득했다.
한편, 그런 유리를 뚱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으니.
후욱-.
새하얀 궐련 연기가 뿜어지고.
“뭐 하니?”
코코가 유리를 향해 그리 물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얘는 뭐 하는 병신이지?’라는 의미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대뜸 걸어와서 하는 말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주세요’인데.
어느 누가 황당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코코의 적나라한 시선을 받은 유리의 어깨가 조금 축 처졌다.
“너무 그렇게 병신 보듯 쳐다보시면 아무리 저라도 조금 상처받습니다만? 전 나름 진지했는데.”
시무룩해진 유리를 코코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녀가 궐련의 연기를 폴폴 피워 내며 물었다.
“1년 차? 특별 판매점을 이용하러 온 거니?”
“그렇죠.”
“처음?”
“특판을 이용하는 건 처음입니다만?”
유리의 답변에 코코는 자신의 시계를 확인하고 짧게 말했다.
“아직 시간 안 됐다.”
“…눼?”
“아직 특판 열 시간 안 됐다고.”
그러면서 코코는 제 시계를 보여 주었다.
2월 1일 자정까지 아직 1분여가 남아 있었다.
이를 본 유리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럼 저 진열장의 물건들은……?”
“저거? 저건 그냥 전시 상품. 2월 특별 판매 물품은 아직 꺼내 놓지도 않았는데?”
“……?!”
유리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너, 너무 흥분했다!’
꿈을 이루겠다는 생각으로 빠르게 걸어왔더니 시간을 맞추지 못한 거다.
‘그럼… 아까 내가 한 말은?’
기껏 인생 목표 중 하나를 달성했다고 여겼건만.
이건 완전 허공에 삽질한 꼴이지 않은가.
이에 유리가 신중한 얼굴로 말했다.
“아까 그거… 그냥 못 들은 거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후욱-.
짙게 뿜어진 연기 너머로 ‘이건 진짜 뭐 하는 병신이지?’라는 시선이 강렬하게 유리에게 닿았다.
그걸 느낀 유리가 고개를 모로 돌렸다.
“하하… 그 오, 오늘 부업은 매점 주인이신가 보네요. 누가 코코 씨보고 제일 한가하다고 했습니까! 흑검병단에서 가장 바쁜 게 코코 씨인데!”
누가 봐도 어떻게든 화제를 전환하려고 애를 쓰는 게 보였다.
이에 코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뭘 좀 아는 아이구나.”
유리의 이야기에 흡족해하는 코코.
“시간 됐네.”
그녀는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과거에 그랬듯, 진열장 옆의 고급스러운 밧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드르르륵-.
기존의 진열장이 뒤로 빠지고 새로운 진열장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코코는 진열장에서 가볍게 물러서며 말했다.
“자, 2월 특별 판매 물건이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리가 눈을 빛내며 또다시 힘차게 손가락을 뻗었다.
“여기서부터…….”
“한 번만 더 그 짓거리 하면, 다시는 여기 발도 못 붙이게 만들어 줄 거야.”
“…….”
힘차게 뻗어진 팔이 시무룩하게 되돌아왔다.
오랜 꿈을 이룰 기회를 박탈당해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유리.
그가 코코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에도 제한 시간은 10분인가요?”
“아니, 특판은 제한 시간 없다. 언제든 와서 살 수 있지. 아! 물론, 한 번 팔린 물건은 재입고되지 않지만.”
“먼저 사는 사람이 주인인 거네. 어? 그러면 기존에 있던 진열대의 물건들은 뭡니까? 그건 1월 특별 판매품 아닌가요?”
“1월은 특별 판매가 없었단다.”
“아아! 특별 할인 판매 때문이구나. 그래서 아까 그 물건들보고 전시 상품이라고 했던 거였어. 그냥 구색 갖추기로 세워 놓은 물건들.”
“그래, 정확하게 맞…….”
유리의 이야기에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던 코코는 순간 멈칫거렸다.
‘왜 이렇게 대화가 잘 이어지지?’
가만…….
‘특판을 처음 이용한다는 1년 차가 특할판을 알고 있다고?’
그녀가 눈을 끔뻑거렸다.
그렇게 첫 이상함을 감지하자 지금까지 귀찮음에 설렁설렁 넘겼던 것들이 전부 이상하게 느껴졌다.
‘1년 차가 특판을 알고 찾아오는 거는 그럴 수 있지…….’
한데 대뜸 오자마자 진열대를 가리키며 물건을 달라고 한다고?
진열대의 물건이 뭔지 알고?
거기다 저 녀석은 진열대가 바뀌는 것을 보면서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건 특판을 처음 이용하는 1년 차가 보일 반응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쟤한테 내 이름을 알려 주었던가?’
분명 오늘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름은 물론, 부업 중이란 것도 알려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저 녀석은 그것들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입에 담고 있지 않은가.
‘1년 차 중 내가 그걸 알려 준 건…….’
코코가 손을 뻗었다.
팔짱을 끼고 신중하게 진열장을 바라보는 소년.
그 아름다운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려 보았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위로 올려 하관만 살짝 드러나게 하니, 무언가 익숙한 모습이 언뜻 보였다.
“어?”
휙- 휙- 휙-.
놀란 코코가 손바닥을 치웠다 가렸다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익숙했던 모습은 점점 또렷하게 변해 갔고.
“……?!”
동시에 지금까지 들었던 목소리와 말투가 이제야 완벽하게 한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코코에게서 작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유리… 홀랜드?”
툭-.
어찌나 놀랐던지 코코가 물고 있던 궐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편, 코코에게 인생 목표를 제지당한 유리.
그는 뾰로통한 마음을 털어 내고 신중한 눈으로 진열대를 바라보았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막혔다면, 포인트가 되는 대로 모조리 쓸어 담아 주겠어!’
현재 유리의 은행 계좌에 있는 전 재산은 대략 3,300만 포인트.
그 정도면 진열대를 거덜 내는 게 가능할 거라 여긴 유리가 의지를 불태우면서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우선 사야 할 거는 비약 혹은 영약.’
진열대를 슥- 훑으며 물건을 살펴 가던 유리의 시야에 비약 하나가 걸려들었다.
-하급 마나 증강의 비약 2,500,000P
‘일단 하나.’
일전에도 먹어 본 적 있는 하급 비약.
다른 50기들이었다면 그거 하나만으로도 기겁했을 포인트였지만, 유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빠르게 진열장을 훑어 나갔다.
‘더 없나? 저걸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가는데?’
유리는 어느새 고작 하급 비약 하나로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린 상태.
조금 더 좋은 물건을 찾아 눈을 굴리던 그가 곧 원하던 물건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하…….”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기쁨의 탄성이 아닌 어이없을 때 나오는 욕설이었다.
“와… 미쳤네?”
유리의 눈이 끔뻑거렸다.
그의 동공에 한 줄기 글자와 숫자가 비쳤다.
-상급 마나 증강의 비약 10,000,000P
무려 천만 포인트.
그걸 본 순간 유리는 헛웃음을 흘렸다.
“난, 애송이였어.”
진열대를 거덜 내?
고작 3,300만 포인트를 가지고?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아마 진열대에 상급 비약이 몇 개만 더 있다면 거덜 나는 건 자신의 통장 잔액이리라.
이에 혀를 내두른 유리가 코코를 바라보았다.
“코코 씨.”
“…….”
“코코 씨?”
멍하니 유리를 바라보던 코코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깨어났다.
그녀가 불신의 눈빛으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너… 유리 홀랜드니?”
“왜요?”
“…진짜였어?”
코코의 그런 반응이 무엇 때문인지 깨달은 유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이예이, 그 거지 같은 꼬락서니로 돌아다니던 50기의 유리 홀랜드가 바로 접니다.”
“맙소사, 정말이었구나! 아니, 너 아까 특판 이용이 처음이라고 했잖아!”
“처음이잖아요? 특할판은 써 봤어도.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코코 씨.”
“왜?”
“이거 가격이 이따위면 사는 사람이 있긴 해요?”
그 물음에 코코는 유리가 무얼 보고 있었는지 슥 확인했다.
그러고는 다시 궐련 하나를 꺼내 물면서 피식거렸다.
“네 생각보다 훨씬 많을걸?”
“…천만 포인트짜리를요?”
“뭐, 이제 막 요람에 들어온 햇병아리들에게는 무리겠지만, 상위 연차가 되면 그것보다 더 비싼 것도 살 여력이 되지.”
“아!”
유리는 그제야 이해한 얼굴이었다.
‘하긴, 그 변태만 해도 100만 포인트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을 정도니.’
솔직히 그래야만 말이 된다.
명예의 전당에 올라간 억 단위의 말도 안 되는 점수들이.
‘상황이 좀 특수하긴 했지만, 일단 나만 해도 1년 차 퀘스트를 깨고 수천만 포인트를 벌었으니까.’
상위 연차 퀘스트라면 그 이상도 가능할 것이다.
퀘스트 하나로 억 단위도 벌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버는 만큼 쓰는 것도 많아지겠지만.’
그리 고개를 끄덕인 유리는 다시 진열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속해서 꼼꼼하게 물건을 살펴 나가는 그에게 한 가지 특이한 물품이 걸려들었다.
-강의 신청서 10,000P
요람과 정말 안 어울리는 물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게 무엇인지 궁금하여 코코를 바라본 순간, 그녀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내가 말했지, 난 물건을 파는 사람이지 설명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고.”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보란 그 눈빛에 유리는 질문할 마음을 접었다.
대신 그는 마저 진열품을 전부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2월에 올라온 비약은 하급 하나, 상급 하나로 끝이군.’
최종적으로 확인을 끝낸 그가 손가락을 뻗었다.
“저거랑 저거, 그리고 이거랑 이것도 주세요. 아, 저쪽에 저것도.”
유리는 원하는 비약 이외에도 상처 회복을 돕는 외상약 및 내상약을 같이 구매했다.
이번 가죽 퀘스트를 하면서 응급 약품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편, 유리가 고르는 물건들을 본 코코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저걸 전부 다?”
마치 너 이게 전부 얼마인지 아냐는 듯한 그 눈빛에 유리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탁-!
품에서 은행 잔액 증명서를 꺼내 위풍당당하게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 잔액을 슬쩍 본 코코.
그녀의 눈이 조금씩 커지더니 이내 가볍게 혀를 내둘렀다.
“이번에 50기 통합 퀘스트에서 웬 미친놈 하나가 가죽을 싹 쓸어 갔다더니… 역시 그게 너였구나?”
물론 가죽 정산 담당은 뽀삐의 이름으로 했지만, 그 가죽의 주인이 자신이었기에 유리는 딱히 코코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상대가 포인트를 지불할 능력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 코코가 물건을 내주었다.
탁-.
“자, 가져가라. 물건값은 통장에서 알아서 빠져나갈 거니 신경 쓰지 말고.”
드디어 손에 넣은 비약.
그것도 무려 하급과 상급 비약을 손에 넣었지만, 어째서인지 유리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정확히는 만족하지 못한 거였다.
‘남은 재산은 대략 1,700만 포인트.’
물건만 있다면 상급 비약 하나를 더 손에 넣고도 남는 금액이었다.
이에 유리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비약은 여기 있는 게 전부겠죠?”
“이번 달에 올라온 비약은 그게 전부지.”
“역시… 또 비약을 사려면 다음 달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네.”
하지만 그마저도 불확실했다.
‘특판 물품은 매달 갱신되지만, 무엇이 올라올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지.’
이번 달에는 하급과 상급 비약이 하나씩 올라왔지만, 다음 달에는 하나도 없을지도, 혹은 2개 이상이 올라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정말 운이 없다면 몇 달 동안 비약이 한 개도 안 올라올 수도 있고 말이다.
‘흠… 이번 달에 2개 건진 거로 만족해야 하나?’
유리가 그리 아쉬움을 달래고 있을 때.
“뭐, 굳이 다음 달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
의문 섞인 유리의 눈빛에 코코가 바(Bar) 테이블 밑으로 손을 넣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큼지막한 상자 하나가 들려 나왔으니.
탁-.
탁자 위에 올려진 검은 상자에 유리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그게 뭡니까?”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코코가 음험한 미소를 머금었다.
“복불복 상자.”
“…복불복 상자?”
코코의 말을 따라 되뇌는 유리의 시야에 시커멓고 네모난 상자가 한가득 들어왔다.
마치 그를 유혹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