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175
174화. 상생 (4)
검고 긴 속눈썹이 꿈틀거린다.
“으음…….”
작은 신음이 짧게 들려오고.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한순간에 확 치켜 올랐다.
번뜩-.
그렇게 드러난 황금빛 눈동자.
끔뻑끔뻑-.
한순간에 확- 눈을 뜬 것과 달리 유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여긴……?’
익숙한 천장.
바로 균열 내, 자신의 보금자리였다.
‘내가 왜… 여기에?’
분명 돈오에 들었고, 세경이 선보인 광성극화술에 관한 비밀을 알아냈다.
‘그러고 나서 어떻게 됐더라?’
무의식적으로 검을 빼 들고 성검을 펼친 것까지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유리가 기억하는 건.
‘어쩌다 내가 여기 누워 있는 거지? 어떻게 온 거지?’
유리가 눈을 끔뻑이며 어떻게든 기억을 떠올려 보려 할 때.
“깼으면 후딱후딱 일어나지 않고. 언제까지 처자빠져 있을 생각이냐?”
약간의 짜증이 담긴 익숙한 목소리에 유리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아, 할배 언제 왔…….”
너무도 자연스럽게 목소리의 주인을 대하려던 유리는 움찔거리며 멈추고 말았다.
“…….”
잠시 침묵하던 그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뉘신지?”
분명 목소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영감탱이인데 생긴 건 전혀 딴판이었다.
저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영감탱이보다 머리가 더 검고.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영감탱이보다 피부가 더 탱탱한.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영감이 조금 젊어진 듯한?
그래, 마치…….
“…회춘한 영감탱이 같은?”
그런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응징이 날아왔다.
딱-!
경쾌한 소리를 내며 유리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그가 이마를 부여잡고 벌떡 일으켰다.
“캭! 아파!”
“아프라고 때린 거다.”
너무나도 익숙한 상황과 대화에 유리는 눈앞의 노인네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요한이란 것을 인정해야 했다.
이에 놀란 유리가 물었다.
“뭐야, 할배 회춘했네? 어떻게 된 거야?”
그 물음에 움찔거린 요한.
그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일단 몸부터 확인해 봐라.”
“몸?”
요한의 제안에 유리는 제 몸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팔다리 멀쩡하고, 어디 아픈 데도 없는데?’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나를 돌렸을 때.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 영감! 어, 없어… 없다고!”
“뭐가?”
“내 마나 핵… 마나 핵이 사라졌어!”
“뭣이?!”
그 이야기에 놀란 건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리가?! 조금 전 확인했을 때는 분명 멀쩡하였건만!’
그가 다급히 유리의 손목을 낚아채고 몸 상태를 살폈다.
몇 분 뒤.
따아아악-!
어마어마한 소리의 딱밤이 이마에 작렬하며 유리가 뒤로 두어 바퀴 굴렀다.
“끄엑!”
벌겋게 볼록 솟은 혹은 부여잡고 유리가 버럭 소리쳤다.
“아니, 왜 때려!”
“없어지긴 개뿔. 제대로 살피고 말해라.”
“정말로 없어졌다니까!”
“없긴 뭐가 없어! 에이, 옘병할 새끼. 저딴 놈한테 내 마나가…….”
“……?”
“뭘 멀뚱멀뚱 보고 있냐!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요한의 외침에 이상하게 기가 죽은 유리는 제자리에 정좌하고 바로 관조에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어……?’
요한의 말처럼 자신의 내부를 관조했던 유리는 기겁하고 말았다.
그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여, 영감! 내… 내 마나 핵이… 속 빈 수박이 되어 버렸어!”
무언가 빈약한 표현이었지만, 그보다 더 정확히 유리의 상태를 말해 주는 표현은 없었다.
유리의 마나 핵은 딱 그 상태였다.
그가 마나 핵이 사라졌다고 느낀 건 작은 수박 크기가 된 마나 핵의 속이 텅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야?! 내 마나 핵이 왜 이렇게 됐어?!’
보통의 마나 핵이 속이 꽉 찬 구체라면, 현재 유리의 마나핵은 구체는 구체이되, 속은 텅 비어 있는 거였다.
‘아, 텅 빈 건 아닌가?’
넓은 마나 핵의 내부 공간에 조그만 마나 덩어리가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마치 작은 혹이 난 것처럼.
‘이건 또 뭐야? 젖꼭지도 아니고?’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혼란스러워하는 유리를 보고 요한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네놈 말이다…….
그리고 그는 유리가 무의식에 빠져들었을 때 벌어진 일들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요한의 이야기를 들은 유리는 동그래진 눈을 연신 끔뻑였다.
“그러니까… 내 마나 핵이 깨질 뻔했는데 영감이 그걸 막아 줬다고?”
“운도 좋은 놈. 내가 아니었으면 네놈 마나 핵은 진즉에 아작 났을 게다. 내가 아니었다면!”
그건 요한의 말처럼 정말로 운이 좋았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만약 요한이 하루만 늦게 왔어도 유리의 마나 핵은 정말로 깨져 버렸을 테니까.
요한은 자신의 공로를 은근슬쩍 강조했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그냥 그 정도에서 고마움을 표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리는 달랐다.
무언가 낌새를 느낀 유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해.”
“무… 뭘?”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지?”
“잘못? 이 은혜도 모르는 놈이! 다 죽어 가는 걸 살려 줬더니만!”
냅다 버럭 소리를 치는 요한의 태도에 유리의 눈매가 더 가늘어졌고.
그에게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말야, 영감?”
“…….”
“갑자기 어떻게 회춘했어?”
“회춘은 무슨!”
“뭐 좋은 거라도 잡쉈나 봐?”
“그, 그럴 리가.”
슬쩍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요한을 보고 유리는 재빨리 제 목 부근을 더듬었다.
하지만 손에는 그 어떤 것도 걸려들지 않았다.
“어, 없어?!”
“그…….”
“내… 내 엘릭서!”
“그… 음…….”
“영감, 내 엘릭서!”
“자, 잠깐 내 말 좀 들어 봐라!”
유리의 눈깔이 돌아가려는 찰나 요한이 다급히 외쳤다.
“거기에는 다 사정이 있었다!”
요한은 유리가 발작할까 싶어 자신이 엘릭서를 마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이게 전부 다 너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고, 사심은 일절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며.
이를 가만히 들은 유리.
그가 의외로 잠잠한 기색을 보이면 질문을 던졌다.
“후우… 좋아, 그래, 알았어. 그건 알겠는데… 내 마나 핵이 왜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야? 왜 속 빈 수박이 된 건데?”
“왜긴…….”
무언가를 아는 듯 살짝 말꼬리를 흐린 요한.
그가 살짝 뜸을 들이고 답했다.
“…덜 만들어져서 그런 거다.”
“엉?”
“만들어지다 말았다고, 네놈 마나 핵.”
“……?”
이는 정확히 요한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유리에게 마나를 빼앗기며 그는 깨달았다.
이대로 빨리다가는 정말 자신의 마나가 전부 빨리겠다는 걸.
그래서 그는 억지로 마나의 공급을 끊었고, 그로 인해 유리의 마나 핵은 내부가 채워지지 않은 상태로 남게 된 거였다.
“그… 아마 네 마나 핵은 빈 내부가 전부 채워지기 전까지… 제구실을 하긴 어려울 거다.”
“내 마나 핵… 이제 못 쓰는 거야?”
“흐음, 그 제 구실을 못 한다는 게 아니라, 생긴 건 그 모양 그 꼴…….”
“…그 모양 그 꼴?”
“크흠, 아무튼 그 모양이지만, 성능에는 문제없다. 원래 마나 핵이 가지는 성능을 똑같이 낼 게야. 다만…….”
“다만?”
“마나 핵 내부에 작은 돌기 형태 같은 게 느껴지지 않냐?”
“이 달랑달랑 붙어 있는 젖꼭지?”
“…그래, 그 젖꼭지가 아마 현재 네가 운영할 수 있는 마나의 전부일 거다.”
“…….”
“앞으로 꾸준히 영약이나 비약을 섭취해서 그 빈 내부 공간을 가득 채운다면… 그 마나 핵 전체에 담긴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겠지.”
구구절절 설명을 덧붙인 요한.
그는 여전히 말없이 입을 다문 유리를 보고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설명을 이어 붙였다.
“그,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그냥 크기만 크고 제 값어치 못하는 병신 마나 핵… 이 아니라! 그냥 원래 마나 핵에서 크기만 좀 커졌다고 생각하면 되는 게다!”
요한의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받은 유리의 얼굴에 서늘한 그늘이 졌다.
이윽고 그에게서 스산한 목소리가 튀어나오니.
“그러니까…….”
“…….”
“영감이 한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내 엘릭서를 꿀꺽한 대가가 고작 이 젖꼭지 같은 마나 덩어리가 전부란 거네?”
“어허! 그게 전부라니! 그 덕에 멀쩡히 마나 핵도 고치지 않았더냐! 그리고 그 젖꼭지가 어디 보통 젖꼭지인 줄 알아!”
요한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설명했다.
네놈이 나한테 가져간 21%의 마나 중 90%가 마나 핵 복구에 쓰였고 나머지 10%가 돌기의 형태로 남은 거였다.
그리고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유리가 뚱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봤자 2.1%잖아?”
“이 저주받을 애새끼가… 그 2.1%가 네놈이 원래 가지고 있던 마나보다 훨씬 많다! 마나 핵 살려 주고 내 피 같은 마나까지 넘겨주었건만… 뭐? 그래 봤자? 그래 봤자아아?”
요한이 눈에서 시퍼런 불똥이 튀어나왔다.
담이 약한 이라면 오금이 저렸을 정도의 눈빛.
하지만 유리는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영감한테 남은 마나가 얼마야?”
“그래, 네놈 말 잘 꺼냈다. 안 그래도 엘릭서 때문에 70%밖에 안 남았던 마나를 네놈 때문에 왕창 쓴 거다! 이 은혜도 모르는 놈아!”
“아, 그래서 얼마 남았냐고?”
“절반 남았다!”
“50%란 말이지? 그럼 순도는?”
“…….”
“엘릭서 먹고 순도 얼마나 올랐어? 엉?”
“…….”
“왜 말을 못 해? 얼마나 올랐냐고.”
“그… 한… 7% 정도?”
“오? 그럼 이제 97%가 된 거네? 자, 그럼 순도 90%짜리 마나 100과 순도 97%짜리 마나 50을 선택하라면 영감은 둘 중 어떤 걸 고를래?”
싱글벙글 웃는 유리의 얼굴에 요한은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답했다.
“어허! 당연히 순도 90%짜리 마나 100이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게 거짓말이란 것을 모를 리 없는 유리였다.
“이 영감탱이가 어디서 약을 팔어?”
“…….”
“와, 순도를 무려 7%나 올린 것도 모자라, 새장가 가도 될 정도로 회춘하게 만들어 줬는데! 그 몸에 좋은 걸 처먹고 고작 젖꼭지 같은 마나 덩어리 달랑 붙여 줬으면서 그렇게 생색을 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요한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완벽히 붕괴할 뻔했던 마나 핵을 되돌려 놓았다는 사실만을 빼고 보면 이번 일로 인해 자신이 오히려 더 이득을 보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유리가 이렇게 지랄해 댈 것을 알고 대충 넘어가려 했지만.
‘이 빈틈 없는 놈!’
유리는 그걸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요한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이노오옴!”
“왜?”
“새장가라니! 나 아직 한 번도 안 갔다!”
“…….”
“…….”
유리가 살짝 얼빠진 얼굴이 된 순간을 노려 요한이 다시 외쳤다.
“그리고 네놈이 뭘 모르나 본데, 다 늙어서는 몸에 좋은 거 챙겨 먹는 거 아니다! 늙어서 그런 거 챙겨 먹었다가는 뒈질 때 힘들어지는 법이야!
“…….”
“갈 때는 쉽게 명줄이 끊겨야 하는데 괜히 명줄만 두꺼워져서 쉽게 안 가는 게지. 내가 그런 늙은이를 한둘 본 줄 아냐? 갈 때는 쉽게 쉽게 가 줘야 나도 편하고 주변 사람들도 편한 거다!”
“…….”
“고로 내가 엘릭서를 먹은 게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란 소리지!”
“남들은 구하려고 해도 못 구하는 엘릭서를 홀랑 먹어 놓고 한다는 소리가 참 양심 없죠?”
“험험.”
“아무튼 영감 오래 살게 된 거 축하하고, 계산은 바로 하자고.”
“계산? 뭔 계산?”
“아무래도 이번 일은 내가 약간 손해를 본 거 같으니…….”
“그래서?”
“혹시 말야, 꿍쳐 둔 영약이나 비약 없어? 이 허한 내 마나 핵을 달래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인 듯싶어서.”
유리의 말에서 묘한 기시감이 느낀 요한은 생각했다.
‘이 새끼, 아까… 깨어 있었던 거 아냐?’
요한이 그런 생각으로 노려볼 때, 유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생각해 봐! 어디 꿍쳐 둔 영약이나 비약 있는지!”
“그딴 건 내가 먹고 죽으래도 없다! 그런데 네놈 어디 가냐?”
“꽁술 영감한테. 내기는 마무리 지어야 하니까. 아직 꽁술 영감 안 갔지?”
“조금 전까지는 있었다만은… 그런데 내기는 또 뭔 소리냐?”
“아, 그게…….”
유리는 요한에게 세경과의 내기를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이에 피식거린 요한.
“고작 야금술을 배우려고 별 짓거리를 다 하는구나.”
“고작 야금술이라니! 별짓이라니!”
무려 자신에게 두 번의 깨달음을 준 게 바로 야금술 내기였다.
그토록 신성한 야금술 내기에 이런 망발을 내뱉다니!
버럭 소리친 유리가 요한을 지나쳐 출입구 앞에 섰다.
그렇게 그가 막 은신처를 빠져나가려는 찰나.
“아, 맞다. 영감.”
“왜 또.”
이번에는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그러나 인상을 팍 찡그린 요한.
그런 그를 등진 채 유리가 입을 열었다.
“마나 핵은… 고마워.”
그 말을 끝내기 무섭게 유리는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렇게 유리가 떠나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요한은 혀를 찼다.
“쯧, 하여간 귀염성이라곤 쥐뿔도 없는 자식 같으니.”
뛰쳐 나간 유리의 양 귀가 살짝 붉어 보였던 건 단순한 자신의 착각일까?
요한의 입꼬리가 미약하게 호선을 그리다 돌아왔다.
이후 유리의 은신처에 홀로 남은 요한.
옅은 빛 속에 오도카니 선 그는 검버섯이 조금 사라진 제 손을 물끄러미 보며 작은 실소를 흘렸다.
“그래, 네놈 덕분에 오래 살긴 하겠구나. 프흐흐.”
요한의 웃음에는 옅은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