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79
278화. 공주님 납치하기 (3)
10분의 재정비 시간.
4개의 진영에서 몇몇 인원이 빠르게 빠져나와 미리 약속된 장소로 이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곳에 모인 이십여 명의 사람들.
진영에 남아 있는 대다수의 기수와 달리 그들은 율리아가 미리 선정한 핵심 구성원들이었다.
율리아는 자신의 주위로 모여든 이들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피해 상황 보고하세요.”
“1진영 이상 무.”
“2진영도 이상 없어.”
“3진영은 경상 32명, 참전 불가 판정 25명. 그리고… 공주 역할을 맡았던 제리 비 선배가 아직 의식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2진영에서 제리를 대신해 나온 50기의 보고에 율리아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 걔는 그냥 때려서 깨워. 분명 기절한 척하고 있는 걸 테니까. 아니면, 공주 역을 다른 사람 시킨다고 하면 벌떡 일어날걸?”
“알겠습니다.”
가볍게 조언해 준 율리아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와 함께 찌푸려지는 고운 아미.
“…괜찮아요?”
이에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그곳에는 붉은 천으로 코를 막고 있는 안드레스가 있었으니.
이 자리에서 그가 부여잡고 있는 붉디붉은 천이 원래는 하얀색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 안드레스가 대수롭지 않은 눈빛으로 답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코뼈가 부러져서 출혈이 안 멈추는 것뿐이니까. 출혈만 멎으면 작전 수행에는 지장이 없다.”
일반인이었다면 꽤 심각한 부상이었을 거다.
하지만 부상을 달고 사는 기수들에게는 경상 정도에 그치는 수준.
율리아도 수긍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4진영 피해 상황은요?”
“경상 스물에 중상 열셋. 아, 나까지 포함하면 경상은 스물하나다.”
그렇게 피해 상황을 전부 들은 율리아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음… 유리 홀랜드의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기는 하지만, 다행히 피해 정도는 상정한 값 안이네요.”
그 말인즉슨, 아직까지는 그녀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뜻.
앞으로의 일을 머릿속에 그리며 고민에 빠진 율리아.
잠시 뒤, 표정을 푼 그녀가 살짝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좋아요, 일단 예비 병력을 3진영과 4진영에 보충해 줄게요. 그리고 2차전은… ‘그 계획’대로 갑니다.”
자신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율리아는 품에서 구슬 4개를 꺼내 들었다.
검은 구슬 3개와 흰 구슬 1개.
그녀는 이를 자신이 선정한 공주들에게 나눠 주었다.
“자, 출발하세요. 시간이 없어요.”
주어진 시간은 10분.
그 안에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야 할 터.
사람들이 빠르게 장소를 이탈했다.
그렇게 율리아가 떠나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볼 때.
부스럭-.
아주 미약하게 나무의 꼭대기가 흔들렸고.
그로부터 나뭇잎 2개가 바람을 타고 살랑살랑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 * *
부스럭-.
굵직한 나뭇가지에 쪼그려 앉아 턱을 쓰다듬는 유리.
“음…….”
조금 전 저들의 작전 계획을 훔쳐보고 온 그의 표정은 자못 심각해 보였다.
“흐음…….”
저들의 작전 계획은 그리 특별할 게 없었다.
짜놓은 계획은 사전에 전부 공지가 된 건지 ‘그 계획’이란 말로 이야기를 끝낸 것이다.
율리아가 얼마나 철저하게 이번 일을 준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이후 벌어진 일에서 유리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이것 봐라?’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흰 구슬과 검은 구슬을 나눠 준 율리아.
언뜻 보기에는 별로 이상할 게 없는 행동이었지만, 유리는 그걸 보자마자 썩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사전에 모든 계획을 공지해 놓고 막판에 그딴 짓거리를 한단 말이지?’
구슬은 가죽 주머니에 담아서 줘도 될 것을 굳이 꺼내서 나눠 준다고?
‘그거 꼭… 누군가에게 대놓고 보라고 하는 거 같네?’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임을 유리가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그는 율리아의 별거 아닌 ‘그 행동’에서 많은 것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그 좋은 머리라면 애초에 내가 훔쳐보러 온다는 것도 충분히 예상했을 거다.’
그렇기에 대놓고 구슬을 나눠 준 그 행동은 율리아가 자신에게 내던진 도전장이리라.
“진영을 4개로 나눈 게 단순히 운빨이란 변수를 만들기 위한 요소가 아니라 이거지?”
4개의 진영.
이는 율리아가 유리와 싸우기 위해 만들어 낸 가상의 전장이었다.
서로의 심리를 파악하고.
확률의 수를 계산하고.
이로 말미암아 제대로 머리끼리 한번 부딪쳐 보자는.
율리아가 계획한 두뇌의 전쟁터.
‘거참, 치사하게… 자기가 제일 잘하는 거로 붙자고 하네.’
세상에서 가장 머리가 좋다는 혈통의 후손이 머리싸움을 하자고 도발해 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유리는 그런 율리아의 도발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때도 이곳이었지?’
재밌게도 과거 이 퀘스트 구역에서 아주 짧게나마 율리아와 맞부딪힌 적이 있었다.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유리를 자신이 짠 판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던 율리아.
하지만 단순히 이용하려고만 했던 유리가 정말로 마왕을 잡아 버리면서 그녀의 계획은 엎어지고 말았었다.
그게 율리아와 유리의 첫 싸움이었고.
두 사람 모두 당시의 싸움을 무승부라 여기고 있었다.
유리의 입장에서는 율리아에게 수를 완전히 간파당한 것도 모자라 역으로 이용당했기에.
율리아의 입장에서는 결국 최종적으로 이득을 본 건 유리였기에.
둘 모두 자신이 이겼다고 인정하지 않은 거다.
‘그럼 이게 재대결이 되는 셈인가?’
어쩌면 그래서 율리아가 이 장소를 선택한 게 아닐까?
하여 유리는 율리아의 도발에 응해 줄 생각이었다.
그 역시도 한 번쯤 검증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현자라 불리는 이의 혈손에게 자신의 잔머리가 얼마나 통할지.
“오랜만이네, 이렇게 긴장되는 싸움도.”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세상에서 가장 머리 좋은 인간 중 하나가 걸어온 두뇌 싸움이다.
긴장이 안 되는 게 이상할 터.
반면 유리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으로 빛났다.
‘율리아가 정한 규칙, 가죽 주머니는 재정비 시간 중 단 한 번만 열고 닫을 수 있다고 했었나?’
처음에 유리는 그 규칙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공격하는 시간에 저들이 구슬을 바꿔치기 하면 안 되는 거니, 너무도 당연한 규칙이라 생각한 거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이 또한 허점이 많지 않은가.
‘율리아가 흰 구슬은 준 건 안드레스.’
다만 안드레스는 회담 장소를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구슬을 가죽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그 말은 다시 말해 남은 재정비의 시간 중 얼마든지 다른 구슬로 바꿔치기를 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율리아가 나눠 준 구슬이 아닌, 자신들이 미리 가지고 있던 거로 말이다.
‘이걸… 믿어, 말아?’
과연 안드레스는 정말로 흰 구슬을 그대로 가죽 주머니에 넣었을까?
그리고 율리아가 말한 ‘그 계획’은 무엇일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온갖 경우의 수가 유리의 머릿속에 폭풍처럼 몰아쳤다.
그러다 마침내.
“좋아.”
유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모두가 떠나고, 홀로 남은 율리아.
이번 작전의 사령탑인 그녀는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연합 측에게 주어진 10분의 시간이 모두 지나고.
추가로 10초 남짓이 흘렀을 때쯤.
피유융- 펑!
하늘에서 터져 나온 붉은색의 연막.
유리를 발견하였다는 신호탄이 올라온 곳을 확인한 율리아는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저기로 갔네?”
유리의 예상이 옳았다.
율리아는 그가 자신들을 훔쳐보러 오리란 걸 알고 있었다.
또한, 마치 보란 듯이 구슬을 나눠 준 것도 다분히 계산된 행동.
그렇기에 그녀는 유리가 ‘저곳’으로 간 이유마저 빠르게 눈치챘다.
‘유리가 저 진영을 가장 먼저 찾아갔다는 건… 내 의도를 알아차렸다는 거겠지.’
자신이 구슬을 나눠 주는 걸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유리가 저 진영을 가장 먼저 선택했다는 건, 자신이 보인 행동의 진위를 파악할 정도로 머리가 돌아간다는 뜻이리라.
“역시 똑똑하단 말이지.”
일전부터 느끼고 있긴 했었다.
유리가 수 싸움에 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아니, 능한 수준 정도가 아니야… 저 정도면 타고난 거야.’
남들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것도 분석하고 수를 읽어 내는 유리.
그건 분명 재능이라 부르기 마땅했다.
거기다 유리가 내보이는 수 싸움의 기풍은 지금껏 율리아가 마주한 상대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유리가 펼치는 수의 전개 방식은… 틀이 없어.’
지금껏 율리아가 수를 주고받은 이들은 전부 가문의 사람들.
그도 그럴 것이 현가의 인물이 아니라면 대등한 수 싸움이 성립되기 힘드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요람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요람에서 그녀와 능히 수를 주고받을 만한 이는 얼마 전에 수료한 친오빠뿐.
그랬기에 현가 특유의 기풍에 익숙해진 율리아에게 유리가 보이는 기풍은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현가의 방식이 모든 것을 완벽히 계산해 내려는… 격과 식이 있는 기풍이라면, 유리의 것은 자유로워.’
조금 과장을 보태 표현하자면 ‘파격’이라고나 할까?
‘틀… 격이 없기에 상황 대처가 빠르고 창의적일 수 있는 거지.’
그건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종류의 기풍이었다.
그렇기에 율리아는 유리의 파격적인 수 싸움 방식이 부러웠고, 더더욱 붙어 보고 싶은 거였다.
“자, 과연… 지금부터 넌 나에게 어떤 재밌는 수를 보여 줄까?”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율리아.
그녀가 즐거운 눈으로 바라보는 방향은 다름 아닌 1번 진영이었다.
* * *
1번 진영.
유리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이들과 그 중심에 선 이를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카락.
열심히 닦기는 했지만, 여전히 피딱지가 묻어 있는 입과 코.
그는 다름 아닌 안드레스였다.
그를 발견한 유리는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여기 있었네.’
유리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시간상으로는 그리 길지 않았으나 깊은 고민 끝에 유리는 한 가지 생각에 도달했다.
어차피 안드레스가 흰 구슬을 그대로 주머니에 넣었을 확률은 반반.
만약 정말로 안드레스가 흰 구슬을 가진 진짜 공주라고 가정한다면?
그렇다면 율리아는 어떤 의도로 그에게 진짜 구슬을 주었을까?
자신을 4번 진영으로 유도하기 위해?
거기서 유리의 뇌리에 한 가지가 스친 거다.
‘가만, 나 왜 안드레스가 4번으로 갔을 거라고 단정 지은 거지?’
그러고 보니 그랬다.
모든 것을 ‘그 계획’대로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했을 뿐.
율리아는 한 번도 공주들의 위치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유리는 너무도 당연히 이전과 같은 공주 역이라면 동일한 곳에 자리 잡을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던 거다.
이에 유리는 무의식적인 생각을 깨부쉈다.
‘공주의 위치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라면 진짜 공주로 선택한 안드레스를 어디로 보냈을까?
유리는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1번.’
바로 기존의 4번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진영.
그것이 유리가 내린 답이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안드레스는 정말로 1번 진영에 자리 잡고 있던 거다.
“자, 정답이 맞는지 확인하러 가 볼까?”
정말로 안드레스가 진짜 공주일지.
과연 자신이 단번에 진짜 공주를 찾아낸 것일지.
유리는 선물 상자를 여는 심정으로 내용물을 확인하러 출발했다.
“오, 온다!”
“막아!”
“버텨!”
“2분… 2분만 버티면 된다! 어떻게든 물고 늘어져!”
여기저기서 빗발치는 고함을 뚫고 유리가 합격진 속으로 뛰어들었고.
카강-!
쾅-!
비명과 폭음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채 2분이 지나기도 전.
우득-!
“컥!”
기괴한 소리와 함께 검을 쥔 채로 팔이 부러진 안드레스가 그대로 나가떨어지며 상황은 끝을 고했다.
기절한 안드레스의 가슴에서 가볍게 가죽 주머니를 가져온 유리.
그는 들뜬 마음으로 주머니를 풀어 뒤집었다.
그리고.
툭-.
굴러나온 검은 구슬을 보고 유리는 나직한 침음을 흘렸다.
“음…….”
기껏 안드레스의 위치를 예측하여 1번 진영으로 찾아온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정작 바라던 흰 구슬은 아니었다.
아마 이 또한 율리아의 계산일 터.
“거참, 쉽지 않네.”
정말로 쉽지 않다.
유리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한 진영에서 구슬을 확인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분 40초 남짓.’
그리고 한 진영과 진영 사이는 유리에게 대략 30초 거리였다.
여기서 만약 4번째 진영까지 돌고 나서야 진짜 공주를 찾는다 치면 이동하는 데만 90초가 허비된다.
‘그럼 공주를 찾는 데 걸리는 시간은 총 8분 16초 정도.’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8분 16초란 시간도 자신이 전력을 다했을 때의 경우였다.
‘애초에 율리아가 계산한 값은 이보다 더 빡빡했을 거다. 예를 들면… 한 진영에서 최소 2분은 버틴다면?’
유리는 조금 전 2분만 버티라던 누군가의 외침을 떠올렸다.
그게 바로 율리아가 상정한, 한 진영에서 유리가 주머니를 얻는 데 걸리는 최소 시간일 터.
‘거기에 진영 간에 이동 시간은 최소 30초 이상으로 잡았다면?’
그렇게 되면 4개의 진영을 전부 도는 데만 10분이 넘어갈 것이다.
모든 시간을 계산한 유리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공주를 찾아 4번째 진영까지 간다면 내가 이길 확률은 희박해진다.’
그리고 3번째라고 해도 시간이 여유로운 건 아니었다.
까딱 잘못해서 한 진영에서 2분을 넘기거나 자칫 동선이 꼬인다면 3번째 진영에서 10분을 넘길 수도 있었다.
지난 1차전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최고의 상황은…….’
유리의 눈이 밝게 빛났다.
“첫 번째… 늦어도 두 번째에 공주를 찾아내는 것.”
자신이 이 상황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율리아와 눈치, 심리, 두뇌 싸움에서 이겨야만 할 터.
“이거 좀… 재밌네?”
피식거린 유리의 황금빛 눈동자가 기이한 빛을 머금었으니.
그건 바로 ‘승부욕’이라는 이름을 가진 강렬한 열기였다.
파칙-!
이후 곧바로 푸른 뇌전에 휩싸여 자취를 감춘 유리.
그렇게 치밀하게 공주를 숨기려는 이와 악착같이 찾으려는 이의 수 싸움이 더욱 치열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