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82
281화. 승자 독식 (1)
처음부터 모든 상황이 율리아의 장난질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규칙을 설명해 줄 때의 말장난부터였을 거다.
‘가죽 주머니는 재정비 시간에만 딱 한 번 열었다가 닫을 수 있다고 했지.’
그건 유리가 공격 중에는 연합 측이 구슬을 바꿔치기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허점이 있었으니.
‘구슬이 든 가죽 주머니째로 바꾸면 상관이 없다는 거지.’
유리는 감탄을 터뜨렸다.
“이야, 이런 꼼수… 정말 오랜만이네.”
이는 시장통 야바위 사기꾼들이 자주 쓰는 수법 중 하나이다.
4개의 컵 중 하나에 구슬을 집어넣는 척하면서 뒤로 빼돌리고.
나중에 확인할 때는 가장 돈이 적게 걸린 곳에 구슬을 집어넣은 뒤, 그 외의 컵들을 먼저 뒤집어 보여 주는 수법.
율리아의 수법도 이와 똑같았다.
애초부터 공주들이 가진 가죽 주머니에는 검은 구슬밖에 없으니, 유리가 어떤 순서대로 가든 세 번째까지는 절대로 진짜 공주가 나올 리가 없을 테고.
다만 혹여라도 유리가 4번째 가죽 주머니를 손에 넣을 수도 있는 상황을 가정.
그때를 대비해 따로 흰 구슬을 관리하는 운반책을 둔 뒤, 유리가 당도할 가장 마지막 진영에 있는 공주와 흰 구슬이 든 가죽 주머니를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운반책이 바로 아린.
“역시 신호탄도 이걸 위한 포석이었구만.”
신호탄은 각 진영 간에 상황 정보를 주고받는 역할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아린에게 유리의 위치를 알리는 역할이 더 컸을 거다.
“우우…….”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유리의 눈빛에 아린은 체념한 표정으로 쭈그려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망했어…….”
그걸 본 유리는 씨익 웃었다.
아린이 자신에게 잡힌 이유는 간단했다.
2번과 3번 진영에서 연달아 올라온 신호탄.
이를 보고 아린은 바로 자리를 옮길 생각을 했을 거다.
그런데 유리가 3번째로 방문할 후보지들이 하필 극과 극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1번과 4번 진영이네?
그래서 그녀는 다음에 유리가 어디에서 나타날지 몰라 딱 두 진영의 중간에서 신호탄이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거였다.
신호탄이 터진 곳의 반대 진영으로 곧장 달리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애초부터 유리가 그걸 노리고 2번과 3번 진영에 신호탄을 쏘아 올리게 한 거였지만.
“우우…….”
망했다는 얼굴로 울상이 된 아린을 뒤로하고 유리는 신난 표정을 지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이걸 어떻게 되갚아 줄까?”
그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가죽 주머니에 구슬을 집어넣은 유리가 아린의 어깨를 짚었다.
“야.”
“…응?”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린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날 따라 해 봐. 나는 공주다.”
“으, 웅?”
“쓰읍, 안 해?”
유리의 표정이 대번에 험악해지자 아린이 곧장 허리를 곧추세우며 답했다.
“나, 나는 공주다아아!”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은 유리.
“그래, 넌 공주인 거야.”
“…그런데 내가 왜 공주야?”
“야, 진짜 공주의 조건이 뭐냐?”
“흰 구슬을 가지고 있는 거?”
“그 흰 구슬을 누가 가지고 있었지?”
“…나?”
“그럼 네가 뭐라고?”
“…진짜 공주?”
“바로 그거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유리가 그대로 아린을 어깨에 짊어졌다.
“으, 으에?!”
난데없는 상황에 놀라 발버둥 치는 아린.
그녀의 양다리를 팔뚝으로 감싸며 꽉 움켜쥔 유리가 즐거움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니까, 너 지금부터 납치당하는 거야!”
그 말과 함께 유리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 * *
시간을 조금 거슬러.
유리가 3번 진영을 벗어나 달리기 시작한 순간.
율리아는 허공을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이걸 여기서 쓸 생각은 없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일일이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정말 자신의 예상대로 유리에게 모든 상황이 들켰다면, 남은 수를 모조리 꺼내야만 했다.
‘제발 늦지 않기를.’
또한, 율리아는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라며 활시위를 놓았다.
피유유유-.
하늘로 빠르게 솟구친 화살.
그리고.
펑-!
높디높은 상공에 검은색의 연막탄이 터졌다.
* * *
다시 제시간으로 돌아와.
아린을 납치하고 달리기 시작한 유리.
그의 어깨에 가죽 뭉치처럼 걸려 있던 아린이 양손을 파닥거렸다.
“으아앙!”
“징징거리지 마.”
“유리이이이잉!”
아린이 자꾸 등을 치자 유리가 인상을 와락 구기며 짜증을 냈다.
“바둥거리지 말지?”
“배 아프다고, 이 나쁜 노망! 나보고 공주 하라며! 그럼 최소한 공주처럼 안고 가 달란 말야!”
“쯧, 이게 뭘 모르네?”
“뭘 몰라?”
“납치범한테 납치 대상은 그저 짐 덩어리일 뿐이야. 남녀노소, 공주든 왕자든, 지위 따위는 하등 상관없다 이 말이지. 그리고 납치범이 납치 대상을 어깨에 짊어지는 건 이 바닥에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
“아, 물론 납치 대상이 아아아주우 돈이 많다면 대우가 쪼금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너, 왜 그렇게 잘 알아? 꼭 많이 해 본 거 같다?”
“…아니, 나도 다른 사람한테 들은 건데?”
“바, 방금 그 묘한 공백은 뭐야?! 너, 진짜 해 봤어?!”
“…그럴 리가.”
“거봐! 지금도!”
등 뒤에서 아린의 경악성이 들려왔지만, 유리는 무시했다.
그렇게 빠르게 오르막길을 달려 나가는 유리.
숲길을 빠져나온 순간, 유리는 마침내 익숙한 건축물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
위험천만해 보이는 협곡 너머에서 여전히 그 위용을 뽐내고 있는 마왕성.
이를 본 유리는 감탄을 토해 냈다.
“크, 여기도 오랜만이네.”
과거에는 공인 5단급 마왕이 무서워 꽁지 빠지게 도망쳤어야 했었는데.
이제 이렇게 마왕성을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새록새록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유리.
하지만 계속해서 추억에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이 기회다.’
괜히 시간을 낭비했다가는 율리아가 눈치채고 들이닥칠지 몰랐다.
마왕성에 무혈 입성할 기회는 어쩌면 지금뿐이리라.
그런 생각을 품은 유리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마왕성으로 건너갈 다리를 찾아보았다.
‘보자, 건널 수 있는 다리가…….’
과거의 출렁다리는 그가 끊어 먹었지만, 분명 요람에서 다시 만들었을 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나타난 다리를 보며 감탄을 토해 냈으니.
“역시, 흑검병들 일 처리 하나는 빠릿빠릿하다니까!”
역시나 끊어졌던 다리는 제대로 재건되어 있었다.
이를 발견하고 신이 나 달리던 유리.
하지만 그의 속도는 서서히 늦춰졌고.
그러다 다리의 입구에 도착해서는 완전히 정지했다.
유리는 정면을 빤히 응시하며 살짝 한숨 섞인 말을 토해 냈다.
“…빠르기도 하네. 벌써 눈치 깠다고?”
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자신이 3번 진영을 벗어나 아린을 납치해 온 건 불과 5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출렁다리의 중간에 율리아가 떡하니 서 있었다.
그녀가 유리에게 미소 섞인 인사를 건네 왔다.
“바빠 보이네? 여긴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이거 거기다 집어넣으려고 왔지.”
그러면서 유리는 자신의 어깨에 걸쳐 축 늘어진 아린을 내보였다.
이제는 자포자기한 아린이 율리아를 향해 손을 짤랑짤랑 흔들었다.
“아하하… 선배, 미안요… 잡혀 버렸어요.”
그런 아린의 인사에 율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걔가 거기 걸려 있는 걸 보니 이미 전부 알고 있는 거겠지?”
“뭘? 위대한 현가의 후인께서 사기를 쳤다는 거?”
“사기라니, 은밀한 계책이라고 해 주지 않을래?”
율리아의 인정에 유리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순순히 인정하네? 난 이 멍청이 따위는 모른다고 발뺌할 줄 알았더니?”
“물론 그럴 생각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으에? 나… 버리려고 했어요, 선배?!”
아린이 경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유리도 율리아도 모두 무시했다.
율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여기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는 마당에 구차하게 변명해서 뭐 하겠어?”
“시원시원해서 좋네. 그럼 인정도 했으니… 내가 얘를 마왕성 꼭대기에 올려놓으면 내 승리다?”
“어차피 흰 구슬도 네 수중에 있을 테고, 그렇게 해.”
“너무 흔쾌한 거 아냐?”
“괜히 너랑 말싸움해서 기운 빼는 것보다는, 그냥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 정신 건강에 좋으니까.”
“차라리 말싸움이라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지금 거기서 그렇게 날 마중 나온 것도 시간을 끌려고 그러는 걸 텐데?”
“…….”
“예를 들면 저 성 안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하여간…….”
…눈치는.
이러니 뭘 속일 수가 있겠냐고.
율리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유리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녀는 속으로 바짝 긴장을 끌어올렸다.
‘계획이 전부 틀어졌어.’
원래 율리아의 계획대로라면 그녀가 유리 홀랜드와 대면하는 건 4차전에서였다.
진짜 구슬이 든 가죽 주머니를 바꿔치기하는 방식으로 유리가 반드시 4번째 진영까지 가게 하여 시간 낭비 하게 만들고.
그렇게 3차전까지 버틴 뒤, 4차전에서는 최소한의 전력만 남겨 놓고 적당히 시간을 끌다가 유리에게 진짜 구슬을 넘겨줄 생각이었다.
그때쯤이면 유리가 진짜 구슬을 얻었다고 해도, 2~3분의 시간 정도는 소모했을 테니 결국 남은 시간은 고작 7~8분.
그럼 율리아는 3번째 재정비 시간에 미리 마왕성에 집결시킨 전력을 가지고 유리를 막는다는 게 최종 계획이었다.
조금 전, 율리아가 터뜨린 검은색의 연막탄이 바로 그때를 위해 남겨 두었던, ‘전 병력 마왕성 집결’의 신호탄.
하지만 중간에 유리가 모든 걸 눈치채고 아린을 납치해 버리며 모든 게 꼬이고 말았다.
거기다 흰 구슬이 유리에게 있는 이상 아린이 진짜 공주가 아님을 부정할 수도 없을 터.
명분과 증거가 저쪽에 있으니 말이다.
고로 지금부터 율리아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정해진 70분이 다할 때까지 악착같이 버티는 것.
율리아가 시간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은 앞으로 22분 12초…….’
유리가 진짜 공주를 납치한 순간부터 재정비의 시간은 없다.
오로지 유리의 공격만이 이어질 뿐.
“후우…….”
길게 숨을 내쉰 율리아가 살짝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개안한 그녀의 두 눈에 맑은 빛이 서렸다.
“유리, 그때 네가 그랬지. 승자가 모든 걸 먹는 거라고.”
율리아가 검을 뽑아 들며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어디 한번 확인해 보자고. 맛있게 준비된 것들이 과연 내 입으로 들어갈지, 아니면 네 입으로 들어갈지.”
그 말을 끝냄과 동시에 율리아가 출렁다리의 밧줄을 베어 냈다.
스걱-.
올올이 풀어 헤쳐져 떨어진 나무판자들이 협곡의 급류에 휩쓸려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잘라 낸 밧줄을 잡은 율리아가 밑으로 쑥 꺼지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위에서 보자고!”
밧줄을 잡고 떨어진 율리아는 이내 반대쪽 절벽에 도달했다.
그러고는 재빨리 밧줄을 잡고 절벽을 기어올라 성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리.
“…이런 기분이었나.”
그는 과거, 출렁다리를 끊어 버리고 도망치던 자신을 바라보는 마왕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편 그사이 어깨에 걸쳐 있던 아린이 빼꼼히 고개를 들며 물었으니.
“유리, 저게 무슨 말이야?”
“뭐가?”
“너, 설마… 나 빼고 율리아 선배랑 맛난 거 먹기로 한 거야?!”
“…….”
유리는 아린의 투정을 무시했다.
대신 절벽과 절벽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족히 50m는 되어 보임 직한 거리.
‘역시 멀어…….’
하지만 유리의 눈에 절망은 없었다.
과거, 이곳에 왔을 때.
그때와 비교하면 절벽 간의 거리는 여전히 똑같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은 그때와 다르다.
‘조금 아슬아슬하긴 하겠지만…….’
하여 유리는 확신했다.
‘이거… 뛸 수 있겠어.
한 번의 도약이면 반대편 절벽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예전처럼 돌조각을 밟는 등의 추가 동작 없이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견적이 나왔으니 유리는 곧장 행동에 나섰다.
저벅저벅-.
크게 뒷걸음질 치는 유리.
더는 물러날 수 없는 곳까지 도착한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후읍-!
그와 같은 상황에 무언가를 직감한 아린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유… 유리? 아니지? 내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지?”
하지만 유리는 이 또한 무시했으니.
“간다!”
짧은 출발 신호와 함께 그는 앞을 향해 달렸다.
어마어마한 높이와 폭을 가진 낭떠러지를 향해.
“가지 마아아아앙!”
아린의 외마디 비명이 음악처럼 울리는 가운데.
유리가 절벽의 끄트머리를 밟고 도약하니.
파측-!
하늘로 날아오른 그의 등 뒤로 뇌전의 날개가 펼쳐졌다.
아름다운 푸른 뇌익.
그가 익히고 단련시켜 온 절기가 유리의 육신을 멀리멀리 앞으로 날려 보냈다.
동시에 유리의 발이 구름을 밟듯 허공을 걸으니, 뇌익의 날갯짓이 더욱 힘을 받았다.
파치치칙-!
그렇게 구름을 유영하는 한 마리 뇌조가 되어, 엄청난 거리를 단숨에 날아간 유리.
시시각각 다가오는 반대쪽 절벽을 보며 그의 고개가 살짝 갸우뚱해졌다.
‘…어랍쇼?’
유리는 열심히 남은 거리를 계산해 보았다.
그런데 무언가 하면 할수록 이상했다.
결국,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으니.
‘이게 왜… 짧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