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13
13화
오염된 왕 구렁이는 언제나 굶주려 있는 설정이었다.
커다란 덩치에 느릿하고 비실비실한 모습이지만, 플레이어에게 한 번 달라붙으면 죽을힘을 다해 칭칭 몸을 감는다. 그 때문에 네임드 급은 아니어도 들개나 늑대보다 더 혐오스럽고 성가신 몹이었다.
우래귀는 울며불며 방패를 들어 다가오는 꼬리와 아가리를 튕겨 냈다. 탱커가 분전하는 사이, 캐니와 헤른은 정신없이 구렁이를 공격했다.
몹은 아직도 피가 한참 남아 있었다.
헤른의 공격은 몹에 비해 레벨이 낮아 그런지 적중률과 대미지가 떨어지는 편이었고, 그나마 대미지가 나오는 캐니는 바꾼 장비의 무게 때문에 움직임이 시원치 못했다.
차분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리디안은 먼저 파티원들에게 대상자들의 모든 스탯을 일정 시간 동안 소폭 상승시키는 ‘여신의 세례’를 시전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동 속도 증가 버프인 ‘성령의 축복’을 걸었다. 그 덕분에 헤른의 공격 적중률이 좀 더 높아지고 캐니와 우래귀의 움직임이 빨라지자, 구렁이의 HP가 눈에 띄게 줄어 갔다.
리디안은 연신 파티원의 상태 창과 주위를 살폈고, 적당한 타이밍에 우래귀에게 힐을 넣었다.
처음에는 현실감 넘치는 공포에 다소 굳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게임 시절의 감각이 돌아오는지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뒤에서 조용히 리디안을 지켜보던 페페는 흡족하게 웃었다.
사실, 리디안이 스펠을 얼마나 활용할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 파티원들에게 일부러 기본 버프만 걸었다. 그 때문에 처음엔 조금 당황하는가 싶더니, 금세 침착해져 익숙해진 리디안 모습을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페페는 아닌 척, 작은 걱정을 했었다.
게임 시절, 리디안은 비교적 쉽고 편한 맵만 다니던 소극적인 플레이어였기에 본격적인 파티 플레이에 익숙하지 않은 점이 있어, 어려워하지는 않을지. 다소 우려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한 재능이었다. 무엇보다 몬스터를 두고 겁먹지 않는 게 큰 장점이었다.
페페는 모든 사람이 이 상황에 익숙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게임 내에서 컨트롤이 좋기로 유명했던 세인트들은 이 세계에 전이된 이후, 상당수 적응을 못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응급실 길드는 대체로 고레벨의 컨트롤 좋은 세인트로 이루어져 있지만, 지금은 그저 평범한 세인트들의 모임에 불과했다.
페페처럼 이쪽 세계에 익숙해져 게임 때처럼 활동하는 세인트는 드문 편이었다. 굳이 세인트가 아니더라도. 모든 직업군의 플레이어가 그러했다.
이 세계에 떨어진 플레이어들은 실제로 맞닥트린 몬스터의 모습에 혼란과 공포에 빠져 오랫동안 필드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
지금의 리디안 파티처럼 겁먹지 않고 침착하게 스펠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타 길드의 상황도 비슷하면 비슷했지. 덜하진 않을 거라고, 페페는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당장 미드가르드 도시만 돌아다녀도 의욕 없이 절망에 빠진 눈동자를 한 사람이 몇백 명인데.
그래서 페페는 리디안의 용감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강인해져야 모두가 살아남을 확률이 커지니까.
그녀의 파티원들도 썩 나쁘지 않았다. 우래귀가 지나치게 겁이 많은 것이 조금 걸렸지만, 뒤에서 들어오는 힐이 안정적인 걸 느낀 이후로는 용감하게 어그로를 끌고 있었다.
캐니는 실수가 좀 많은 편이지만 나이트인 직업 특성상 기본 공격력이 높아 괜찮았다. 헤른은 저레벨임에도 스킬을 활용하는 컨트롤이 뛰어났다. 갓 스무 살이라 그런지, 아니면 기본적으로 게임에 재능이 있는 건지 역시 습득력과 센스가 남달랐다.
무엇보다 다들 성격 자체가 긍정적이고 순한 편이라, 서로 손발도 잘 맞는 편이었다.
“음, 좋네요. 헤른 님 레벨을 좀 더 올려서 한 단계 높은 맵으로 진입하면 나쁘지 않겠어요. 그래도 아직 레벨 업보다는 파티 플레이에 더 익숙해져야 하니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하세요.”
종종 페페의 조언을 들으며 파티는 어느새 맵을 한 바퀴 돌았다.
헤른은 경험치가 반 이상 올라간 것을 보곤 쩍― 입을 벌렸다. 아직 한 시간도 안 됐는데! 고속버스에 올라탄 기분이라며 헤죽거렸다. 다른 파티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리디안은 이번 기회 덕분에 비로소 한 사람 몫을 하는 기분이 든다며. 큰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 * *
“아, 설마 내가 여기 와서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페페와 동행한 지 일주일이 되던 날, 헤른은 50레벨에 도달한 자신의 모습에 깊은 자괴감을 느꼈다.
단순히 친구가 꼬드겨 잠깐 하게 된 게임이었다. 초반에 플레이를 도와준 리디안이 아니었으면 진작 때려치웠을 게임. 재수 없게 이상한 세계에 빨려 들어온 것도 억울한데, 어쩌다 보니 몰두하여 기어코 레벨 50을 찍고 말았다.
“축하해!”
“축하해요, 헤른 님.”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축하해요.”
리디안, 우래귀, 캐니, 페페가 차례대로 손뼉 쳤다. 현재 일행은 소소한 축하 파티를 이유로 도시 내 제법 큰 식당이나 다름없는, ‘발할라의 아침’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여관의 음식은 게임 배경이 배경인지라 중세 느낌 나는 음식들뿐이고, 현실 세계 음식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기분 좀 내보자고 이거저거 시켜 만찬을 즐기는 중이었다.
리디안과 우래귀, 캐니도 페페의 조언 덕분에 제법 많이 성장한 상태였다. 우래귀는 레벨에 어울리는 듬직한 탱커로 발전했고 캐니는 전보다 실수가 줄었다. 리디안 역시 힐러로서의 역할을 차분하고 똑똑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아마 다음부터는 레벨 업을 목표로 적당한 사냥터에 진입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다들 의견을 모으던 때였다.
“오, 페페 님! 반가워요. 이런 데서 다 뵙네요.”
시끌벅적한 식당 내부를 뚫고 온 이가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남녀였다.
하지만…….
플레이어 정보
이름 : 레온 / 길드 : ONE(M)
레벨 : 79 / 직업 : 나이트 / 보조 직업 : 목수
HP : 3670 / MP : 1050
플레이어 정보
이름 : 버베나 / 길드 : ONE
레벨 : 79 / 직업 : 엘레멘탈 서모너 / 보조 직업 : 연금술사
HP : 2850 / MP : 4105
그 평범해 보였던 그들은 놀랍게도 랭킹 1위와 2위였다.
특히 레온은 ONE 길드의 길드 마스터이자, 전이된 후 전투 길드를 대표해 광장에 나선 사람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동네 지인을 만난 사람처럼 편안한 차림에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페페 역시 그들과 오랜 친분이 있어 방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레온 님, 버베나 님. 오랜만이네요. 오늘은 두 분만 식사하러 오셨나 보네요?”
“곧 몇 명이 더 올 예정이긴 해요. 그나저나 일행분들이신가요?”
“네. 제 지인분들이에요.”
슬쩍 고개를 내민 레온이 방긋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그저 평범한 인사 한 마디인데, 리디안을 포함한 모두의 표정이 얼떨떨해졌다.
그 옆에 있던 버베나도 레온처럼 화사하게 인사를 건넸다.
리디안은 신기했다.
랭킹 1위, 2위. 이런 사람들과는 절대 인연이 없을 줄 알았는데……. 동네 사람 만나듯이 밥 먹다가 마주친 것은 물론, 그간 알고 있는 이미지와 다른 그들의 모습도 의외였다.
리디안은 친근한 버베나의 눈웃음에 멍해졌다.
“와, 리디안 님 진짜 실제로 뵐 줄 몰랐는데, 소문대로 완전 깜찍한 여자분이시네!”
버베나가 불쑥 다가와 까르륵 웃었다. 갑작스레 이름이 불린 리디안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미리 꼬셔오는 건데! 리디안 님, 지금이라도 길드 들 생각 없어요?”
“네? 저, 저요?”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버베나는 살갑게 굴며 은근하게 가입을 유도했다.
하도 몰아치는 말발에 당황한 리디안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보다 못한 레온이 그녀의 귀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야, 한지원. 무례하게 굴지 말고.”
“아씨, 왜! 우리도 고렙 세인트 좀 받자! 채유리 같은 민폐 덩어리 말고! 내가 진짜 그거 하는… 읍! 읍, 억!”
버럭 소리친 버베나의 입은 레온의 손에 의해 가로막혔다. 레온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서둘러 버베나를 질질 끌었다.
“에고, 죄송합니다. 저희는 먼저 실례할게요. 식사 맛있게 드세요!”
그 말을 끝으로 레온과 버베나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남은 다섯 명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민망함에 애써 웃은 우래귀는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두 분, 뭔가 닮은 것 같네요. 얼굴이라던가, 분위기가.”
“그야 남매니까요.”
빙긋 웃은 페페의 말에 모두가 헉, 하고 놀랐다.
“헐. 진짜요? 애인 사이 아니고요?”
랭킹 1위인 레온과 2위 버베나는 서버 내에서 연인 관계로 유명했다. 현질도 현질이거니와 초창기부터 폐인 커플로도 유명했었다.
그런데 남매라니. 캐니는 처음 듣는 얘기에 눈을 반짝였다.
페페는 살짝 목소리를 낮췄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제 다 아는 얘기였지만, 남 얘기라 주의할 수밖에 없었다.
“버베나 캐릭 하시던 분이 레온 님 전 여친인데, 사정상 올 초부터는 여동생분이 대신 돌리고 있었어요. 여동생분도 원래 게임 하던 분이셨고, 다행히 전에 하시던 분이 운영 측에 정당하게 소유권 포기, 양도 각서 넘긴 덕에…….”
은근한 얘기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전 여자 친구라니……. 레온 님, 솔로 됐구나. 캐니는 괜히 눈물 닦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그 입은 웃고 있었다.
당사자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솔로 부대에는 즐거운 일이었다.
“와, 남매가 랭킹 1위, 2위라니. 뭔가 되게 멋있네요.”
우래귀의 말에 헤른도 크게 공감했다. 부럽다고, 자기도 여동생이랑 같이 게임 하고 싶다고 말이다. 우래귀는 두 사람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아련하게 웃었다.
“레온 님 폐인인데도 잘생기고 매너도 좋아 보이던데. 길드 분위기도 엄청 좋을 것 같네요. 저희 길드는 맨날 싸우느라…….”
“별님반이야 사람이 바글바글하니 어쩔 수 없죠. ONE 길드는 뭐, 유명한 길드라, 저희 친목 길드 계시다가 넘어간 분들 얘기하는 거 들었는데 다들 분위기 좋다고 그러더라고요.”
이번에도 역시 아는 거 많은 캐니가 설명을 시작했다. 레온 남매에 대해 잘 아는 페페는 모른 척 그 주접을 조용히 들어 줬다.
“그 외 전투 길드 중에서는 레기온이랑 무법자, 슈퍼문, 노르드연합 정도? 이쪽 길드들이 소수 정예 콘셉트라 다들 평판이 좀 좋은 편이고. 태양 길드랑 신세계 길드는 좀… 평이 안 좋죠. 길드 옮긴 분들 얘기 들어보면 분위기가 확실히 별로래요. 신세계는 그냥 쓰레기 집단이고 태양은 끼리끼리가 심하고.”
“어… 저번에 얼핏 들었는데. 태양 길드는 무슨 문제 있는 모양이던데요?”
헤른은 지난번 리디안과 저녁을 먹을 때, 뒷자리 플레이어들이 떠들던 것을 떠올렸다. 캐니는 “아, 그거―”하며 콧잔등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