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180
180화
연락을 받고 출동한 박회장과 마리타가 무덤 C구역에 입장한 건 그 직후였다.
자신의 길드원들이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는 모습에 박회장의 눈이 돌아갔다. 부외자여야 할 태양 길드원이 자리에 있는 것도, 그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사안이었다.
순간적인 분노에 휩싸인 박회장은 바로 백두오리를 공격했다. 무섭게 날아드는 ‘섬멸검기’에 놀란 솜사탕과 이상무의 파티는 서둘러 대기실로 도망쳤다.
애초부터 박회장은 전투 길드를 목표로 한 사람이기에 PVP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입장과 동시에 시작된 PK에 허둥지둥 당황하는 마리타와는 달리, 박회장은 백두오리에게 달려들어 주요 급소부터 차례로 찔렀다.
백두오리에겐 유감스럽게도 여기선 박회장의 컨트롤이 한 수 위였다. 박회장은 상대방이 스펠을 시전하기 어렵게 바로 근접해 검술류로 몰아붙였다. 매지션을 상대하는 나이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전략이지만, 그 반응 속도만 보자면 괜히 ‘짬바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몇 분 전만 해도 포식자였던 백두오리는 한순간에 피식자가 됐다. 제대로 된 반격도 못 한 백두오리는 바닥이 된 HP에 놀라 서둘러 대기실로 도망쳤다.
마침 C구역이라 바로 이동할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1초만 늦었어도 자신보다 1레벨 낮은 박회장에게 죽었을 것이다.
“저 개X끼. 어디 한번 해보자 이거지?”
잔뜩 자존심 상한 백두오리는 씩씩대며 분노를 터트렸다. 아무리 박회장이 한 길드의 길드 마스터라지만, 친목 길드 따위에게 당했다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캐니가 그랬던 것처럼 백두오리도 순간의 감정에 휩싸였다. 그래서 자신과 친한 사이인 아쳐 커피라떼를 불렀다. 커피라떼는 고목나무 전쟁 때도 신나는 얼굴로 달려와 만만한 불꽃심장만 줄기차게 쫓아다니던 플레이어였다.
커피라떼까지 나타나자 자연스럽게 2 대 2 구도가 잡혔다. 물론, 마리타는 별 도움이 안 되기에 실질적으론 2 대 1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10분이 지나 살아난 차돌과 캐니 파티가 박회장에게 합세했다. 진작 대기실로 도망쳤던 솜사탕과 이상무의 파티도 다시 들어와 백두오리와 커피라떼를 거들었다.
전투의 판이 커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각 파티의 세인트들이 버티지 못하는 스펙의 전투였던지라 사십여 분 동안 미드가르드 게이트 앞에 몇몇이 되살아나길 반복했다.
얼마간의 텀을 두고 자꾸 시체로 나타나는 모습은 근처 플레이어들의 관심을 끌었다.
“오, 뭐야. 쟤네 왜 계속 죽어서 옴?”
“청마녀 C구역에서 싸움 났다!”
이후 눈덩이처럼 번진 소문은 각각 뒤풀이 중이던 레기온과 태양 연합 측에도 닿았다.
“친목 길드끼리 피케하는데 태양 애들 와서 생태 교란 중임.”
“대기업이랑 델피네 개발리는 중. 곧 ONE이랑 레기온이 도와주러 올 듯?”
“태양 일반 랭커 둘 있는데, 박회장한테 처발리고 있음.”
“태양 호구 인증 중?”
각기 다른 시선에서 퍼진 소문이 자꾸 들려오니, 언급된 길드의 간부들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서로 시선을 나눈 간부들은 뒤풀이 중인 길드원들을 뒤로하고 마녀의 무덤으로 향했다.
* * *
마제스티, 레온, 샤봉, 풍월주가 청색 마녀의 무덤 C구역에 진입하자, 먼저 와있던 제니스가 그들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동맹인 핑크푸크와 무너스키, 아퀴나스, 네오가 자리에 있어서인지 제니스는 아주 의기양양했다.
하이 랭커들의 등장으로 필드 분위기는 잠시 소강상태였다. 그렇다고 싸움이 끝난 건 아니라, 캐니와 이상무가 아직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말싸움 중이었다. 쓸데없이 끼어들어 판을 키운 백두오리는 커피라떼와 구석에서 연신 핑크푸크의 눈치만 살폈다.
길드 마스터들은 불편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박회장, 마리타, 제니스를 통해 대강의 상황을 전달받았지만, 그 누구도 잘잘못을 따져 판단할 순 없었다.
묵직한 분위기 속에서 샤봉이 먼저 태양의 경솔함을 지적했다.
“근데 백두오리 님은 친목 길드도 아니면서 왜 오셔서 끼어든 거예요?”
웃음 섞인 말투엔 가시가 가득했다. 이미 엎지른 물이긴 해도, 스스로도 경솔함을 인지하고 있는지 백두오리는 창피함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바라보는 핑크푸크의 속은 까맣게 탈 뿐이었다. 이번에도 또 자기네 길드원의 실수가 명백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또 레기온이 있는 자리에서 지적당할 건 뭔지. 자칫하면 또 굴욕적인 모습을 보일 것 같아 핑크푸크는 지친 한숨을 뱉었다.
그때, 핑크푸크의 옆에 있던 오디오스가 한마디 거들었다.
“왜긴요. 오리랑 상무 님이랑 서로 친한 사이고, 길드끼리 동맹이니까 도와주러 올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자기도 원로 멤버라며 부득불 우겨 따라온 오디오스의 발언에 핑크푸크의 콧잔등이 찌푸려졌다. 질문에 걸맞은 솔직한 대답이지만, 이 상황에서 적절한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디오스가 어디 그런 걸 따질 사람인가. 누가 제게 삐딱하게 대하기만 해도 ‘지금 시비 거는 거지?’ 하고 잘됐다며 일단 맞대응부터 하는 사람이었다.
“저, 형님. 여기선 그냥…….”
대장군도 그 발언이 잘못됨을 알아 오디오스의 팔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그러나 말리기엔 늦었다. 오디오스는 이미 샤봉이 던진 미끼에 제대로 걸린 상태였다.
자신의 실언을 모르는 오디오스가 잔뜩 미간을 구기는 사이, 샤봉은 그 멍청함에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어, 그럼 저희도 대기업, 델피네랑 동맹이니까 끼어드는 게 당연한 거네요? 아! 그리고 제가 저기 계신 자두 님이랑 좀 아는 사이라서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와서 도와줄걸.”
샤봉은 델피네마켓 길드의 슬픈자두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누가 봐도 싸우자고 달려드는 태도라, 잠시 분위기가 굳어졌다.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니면 샤봉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슈퍼문의 무너스키가 찌푸리며 한마디 했다.
“거, 말 좀 가려서 합시다. 다 정리되는 판에 뭐 하러 또 쓸데없이 부추깁니까?”
약간 높은 목소리에 샤봉의 입매가 실룩거렸다. 네가 뭔데 날 훈계하느냐는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덩달아 무너스키의 눈매까지 더 일그러지자, 일촉즉발을 직감한 마제스티가 서둘러 샤봉의 앞을 가로막았다.
“네네, 맞습니다. 제삼자인 우리가 싸워 봤자 서로 기분만 상하고 여러모로 손해죠.”
부정적으로 해석하자면, 다 끝나가는 판에 굳이 서로 더러운 꼴 보지 말자는 뜻이었다. 레온도 불필요하게 싸움이 더 커질 필요 없다고 판단했기에 즉각 마제스티의 편을 들었다.
“자, 진정들 하세요. 어차피 이건 친목 길드원들끼리 시작된 싸움이고, 백두오리 님이 합세해서 커진 싸움이니 그냥 딱 당사자들끼리. 박회장 님, 마리타 님, 제니스 님, 핑크푸크 님이 원만하게 푸는 게 베스트일 것 같네요.”
그러니 관계없는 전투 길드는 그만 빠지자는 제안에 길드 마스터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일부는 레온이 또 자기가 해결사인 듯 나선다며 불쾌한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태양 연합에게 있어 레온은 무슨 말을 해도 밉상인 상대였기 때문이다.
잠시 내려앉은 경멸의 시선에도 레온은 끄떡없었다. 저런 대우를 초반 랭커 회의 때부터 받아 왔기에 이젠 익숙했다.
일부는 레온 때문에 또 싸움이 나는 거 아닌가 하고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레온의 말대로 괜히 또 더 싸울 필요는 없었기에 태양 연합 측은 찡그린 얼굴로 돌아섰다.
남아서 계속 자리고 지키고 있어 봐야 친목 길드 싸움에 끼어든 눈치 없는 놈들이라는 말을 들을 뿐이었다. 빠르게 판단한 무너스키와 아퀴나스, 네오가 물러감과 동시에 마제스티 측도 뒤따라 나섰다.
태양 길드원들도 대장군을 따라 모두 사라졌다. 사건의 당사자들만 남은 필드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일단 무차별 피케이부터 해결해야 했다.
제 차례라는 걸 알아, 핑크푸크는 한숨 쉬며 백두오리를 빤히 쳐다봤다. 먼저 사과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떨어지자 백두오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누구 같았으면 자신은 잘못한 거 없다고 길길이 날뛰었을 테지만……. 다행히 백두오리는 그 정도의 분별력은 가진 사람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죄송합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던 커피라떼도 무차별 학살에 관해 사과했다. 그제야 험상궂게 구겨져 있던 박회장의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그렇다고 모든 분이 풀린 건 아니지만, 고개 숙여 사과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더 화를 내봐야 무슨 소용일까.
한숨 쉰 박회장의 오케이 사인을 받고 나서야, 핑크푸크는 두 사람을 데리고 퇴장할 수 있었다.
이제 ‘누가 먼저 왔고, 누가 먼저 쳤냐’를 해결할 차례였다. 박회장과 마리타, 제니스가 한참 동안 서로를 마주 봤다.
당연히 쉽게 해결되진 않았다. 조금 전까지 의기양양했던 제니스는 동맹 길드 마스터들이 모두 떠나자 위축됐는지, 방어 본능에 더 성질을 부렸다.
“아, 그러니까 우리 애들이 먼저 왔다잖아요!”
“그거야 은신한 사람 말뿐이고요. 솔직히 은신하면…….”
“칡삵이 들어오고 개굴이랑 얘기하는 거 봤다면서요!”
“그러니까 그게 은신을 하고 나중에 들어온 건지, 원래 은신해서 들어와 있던 건지. 우리는 파악하기 힘들다, 이거잖아요. 솔직히 누가 들어도 믿기 힘든…….”
“그래서 은신한 상태로 들어와 있었다고 얘기하고 있잖아요!”
돌아오는 반격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짜증스러웠다. 대기업과 델피네마켓 사람들은 자꾸만 자기들의 말을 뚝뚝 끊는 제니스를 불편하게 쳐다봤다.
여기서 더 말을 해봤자 입만 아플 뿐,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상대임을 알아 캐니도 지쳤는지 두 손, 두 발을 들어버렸다.
“예. 알겠어요. 님들이 먼저 온 거로 하고 제가 먼저 친 거로 할게요. 죄송합니다. 미안하게 됐어요.”
차돌, 굴다리, 스푸도 지쳤는지 캐니를 따라 고개 숙였다. 시큰둥한 표정을 보니 뭐, 엎드려 절 받기나 다름없었다.
제니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짐과 동시에 몇 차례 기분 나쁜 언쟁이 오갔다.
그러나 다행히, 다시 2차전이 벌어지나 했던 분위기는 박회장, 마리타의 영혼 없는 사과로 일단락 해결됐다.
“시X. 별님반 저번에도 끝숲에서 쟤네 길드 애들이 은신해 있었다고 빡빡 우기더구먼. 지금 보니까 왠지 일부러 저러는 거 같네.”
“별님반 저것들은 쪽수만 믿고 진짜……. 하여튼, 우기는 건 졸X 잘해요.”
“에이, 뭐야. 별거 없이 끝났네. 싸운 거 제대로 구경도 못 했는데.”
싸움을 구경하러 왔던 플레이어들은 큰 실망을 하여 돌아섰다. 그들이 크게 기대했던 것치고는 대단히 허무한 결말이었다.
언뜻 서로 싸움을 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 ‘아마 쟤들은 싸울 마음이 없나 보다―’라는 인식이 생겨나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그 인식을 뒤엎을 큰 사건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