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425
425화
【광룡 파프니르】
해가 뜬 아침. 마치 침공전 당일을 보듯, 미드가르드 도시의 거리엔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파프니르, 헤임달과의 결전을 앞둔 플레이어들은 줄을 맞춰 도시를 가로질렀다.
그들이 굳은 얼굴로 걷는 동안 한구석에선 일찌감치 나온 비전투원들이 갖가지 감정을 교류하기 바빴다.
오늘의 결과를 고대하는 사람 중에서도 누군가는 승산이 없을 거라며 죽은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이미 전투 길드가 보여준 신뢰와 믿음의 증거가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곧 탈출한다는 희망에 가득 차,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덕분에 리디안은 밝은 마음으로 도시를 떠날 수 있었다.
“다들 남은 템, 다 돌렸어요?”
“네. 저는 창고 끝 칸까지 탈탈 털었어요.”
전투 길드원들은 지원자들의 장비를 하나라도 더 챙겨주기 위해 분발했다.
대장군이나 캐티스, 이모탈은 한 명, 한 명 세심하고 면밀하게 장비를 봐준다고 한참을 돌아다니다 결국 밤을 지새웠다. 퀭한 얼굴을 하고서도 그들은 도움이 되어 다행이라며 바보처럼 웃었다.
“여러분.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입니다.”
중심가 게이트를 앞에 두고 레온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길드별로 늘어서 침묵을 지키던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일제히 레온을 향했다.
깨끗하지 못했던 과거 고백 이후, 오랜만의 발언이었다. 멋쩍어하면서도 레온은 공손한 자세로 참가자들을 바라봤다.
누구도 레온의 발언을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집중했다.
레온은 짧은 심호흡 끝에 말을 이었다.
“기나긴 방황과 모험 끝에 비로소 탈출구에 다다랐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태를 빚은 헤임달과 맞서 싸울 겁니다. 어쩌면 오늘의 전투가 이 혼란의 상황을 끝낼 종지부가 될지도 모릅니다. 잘하면 오늘을 끝으로. 저희는 원래의 세상으로 귀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레온은 일부러 미소 지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저희는 무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무수한 죽음을 경험하거나, 혹은 죽음의 끝을 경험하거나. 어느 쪽이든 여러분께 좋지 않은 기억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이 위험에 함께해 주셔서,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레온을 시작으로 각 전투 길드의 간부들, 길드원들이 차례로 고개 숙였다.
“다음엔 노르드 월드가 아닌, 현실에서. 여러분과 다시 만나길 희망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레온은 푸른 망토를 펄럭이며 돌아섰다. 대미를 앞둔 격려의 말치고는 간결했지만 전하고자 하는 뜻은 명확했다.
살아서 돌아가자.
그리고 다시 만나자.
모두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엄한 박수갈채 하나 없이 고요한 동의와 열띤 각오가 잔잔하게 번져갔다.
남이 보기엔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고 담담한 반응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둘씩 옅게 웃기 시작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더 이상 ‘타인’이 아니었다.
플레이어들은 수많은 ‘동료’ 사이에서 안정을 느끼며 함께 희망을 염원했다.
* * *
파프니르와 헤임달에 맞서기 전, 첫 목적지는 ‘레빈의 숲’이었다.
레빈의 숲은 파프니르의 둥지로 향하는 일반 루트가 발견된 곳. 전투 길드 외 침공전의 참가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시구르드의 인장 퀘스트를 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소수 정예로 이루어진 별동대가 먼저 도착해 보스인 ‘거짓말쟁이 레빈’을 미리 처리했다. 다행히 C 구역인 데다 맵 자체로도 난도가 높지 않은 곳이라 정리에 어려움은 없었다.
또, 가을 길드가 얻은 정보를 통해 비밀 입구도 미리 찾아 준비한 상태였다. 별동대가 숲의 정리를 끝낼 무렵, 게이트를 통해 진군한 후발대가 레빈의 숲으로 들어섰다.
“난도는 C구역 선택하시고, 하이 랭커들부터 먼저 입장해주세요.”
원활한 이동을 위해 하이 랭커들도 대부분 일반 루트에 동행했다. 중간에 기다린 간부들의 안내를 따라, 긴 행렬이 숲을 꽉꽉 채워 가로질렀고 새로 발견한 비밀 통로를 지나쳤다.
레빈의 숲을 통해 플레이어들이 처음으로 발 디딘 곳은 ‘황금 강가’였다. 황금 강가는 구름을 잔뜩 머금은 흐린 하늘에 황금빛 갈대가 무성한 들판이었다.
왼편을 차지한 넓은 강은 유난히 반짝이며 경쾌한 물소리를 흘렸고 들판 아래에선 풀벌레 소리가 찌르르 울렸다.
그 완연한 가을 풍경이 플레이어들의 시선을 한참이나 빼앗았다.
[황금 강가 C구역―1 / 적정 레벨 : 40 이상] [출현 몬스터 : 거대 황금 메뚜기 / 육지 잠자리 / 뱀 요정 릴리스 ] [출현 필드 보스 몬스터 : 금색 물뱀 / 재등장까지 남은 시각 : 04 : 51 : 23]불과 몇 분 전, 별동대가 한 차례 휩쓴 터라 맵에는 몬스터도 없었다. 중간 지점에서 나타난 보스, 금색 물뱀 때문에 상당한 시간을 소모했으나, 40레벨 대 난도라 어렵지 않았다.
별동대에 속했던 스타일리쉬는 돈게스와 친목 길드 마스터들에게 금색 물뱀의 패턴을 정리해 전달했다. 파프니르 레이드 중에 다시 뛰어와야 할 상황을 대비해서였다.
그렇게 되면 편의를 위해서라도, 일부 팀은 맵 곳곳에 남아 길을 정리해야 했다. 재수 없으면 이번 한 번에 끝나지 않을 수 있어, 각 맵의 보스 공략 패턴은 모두 공유하기로 한 것이다.
“다음, 난쟁이의 마을. 강가 들어왔던 것처럼 똑같이 입장해주세요.”
리디안은 잘 정리된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난쟁이의 마을은 작은 나무집이 옹기종기 모인 동화 같은 장소였다.
새로 나타난 난쟁이 몬스터를 구경하고 다음으로 또 넘어간 곳은 황금 평야, 황금 고원. 허허벌판과 숲이 우거진 산길을 지나 마침내 다다른 곳은 시구르드가 등장했던 황폐한 검은 대지였다.
[황금 산맥 초입 / PK 불가 / 스펠, 스킬 사용 가능]“페이지 님이 은신하고 탐색해 봤는데, 여긴 아무것도 없고요. 다음 맵인 황금 산맥부터 그때 만났던 ‘소형 가디언’이 많다고 하네요.”
여기까진 예상대로였기에 다들 놀라지는 않았다.
소형 가디언의 등급은 나스 평야 B구역의 일반 몬스터 수준. 하지만 지난번과는 달리, 지금은 든든한 지원군이 많았다.
“그럼 작전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신사의 손짓에 탱커들이 먼저 황금 산맥으로 진입했다. 플레이어의 입장에 곳곳에 분포해 있던 소형 가디언들이 반응해 동시에 고개 돌려 바라봤다.
“공격 범위 예상해서 조금씩 전진하세요!”
80레벨이거나 그에 가까운 탱커들이 전방위에 걸쳐 소형 가디언의 주의를 끌었다. 그들이 꾸역꾸역 밀려오는 몬스터들을 방어하는 동안, 뒤이어 입장한 딜러들이 합공했다.
다굴에는 장사 없다는 우스갯소리처럼. 떼를 지어 위협하던 소형 가디언들은 인해전술에 밀려 순식간에 함락됐다.
“진짜 하이 랭커들 없이 우리끼리 잡은 거예요?”
“탱커가 하이 랭커잖아요. 그러니까 버텼지.”
“그래도 우리끼리 잡은 건 맞잖아요. 한 서른 명이 다굴했지만…….”
“다행이다. 그래도 우리가 영 쓸모없는 건 아니네.”
직접 몬스터를 상대한 일반 플레이어들은 기분 좋게 웃었다.
위험한 레이드에서 정말 도움이 될지 긴가민가하며 따라나섰던 사람들은 그제야 안도하며 의욕을 불태웠다.
하지만 다음 맵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너무 큰데.”
날고 기는 하이 랭커들조차 기를 죽게 만든 대형 가디언이었다.
플레이어들은 이질적인 외형보다 고개를 들어올려야 할 만큼, 압도적인 크기에 굳어버렸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마른침만 꼴깍 넘기는 소리만 울렸다.
“겁먹지 마세요. 대형 가디언은 맵에 다섯 마리뿐이었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 더 리젠될 수 있지만. 당장 저것들을 용맹하게 처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마제스티가 큰 목소리로 용기를 북돋웠다.
다행히 플레이어들은 인해전술이라는 강점을 인지했고 활용할 줄 알았다.
적 몬스터의 수가 고작 다섯이라니.
두려움이 가득했던 플레이어들의 얼굴로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용기의 외침!”
한술 더 뜬 자토가 일부러 큰 목소리로 외쳤다.
마치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듯한 외침에 플레이어들은 홀린 듯이 달려가 대형 가디언을 공략했다.
소형 가디언보다 높은 능력치라 쉽지만은 않았으나, 어차피 시간 싸움이었다. 합심한 플레이어들에 의해 하나둘 쓰러지는 가디언의 모습에 리디안은 작은 설렘을 느꼈다.
“리디안 님. 둥지 들어가자마자 시작하세요.”
마지막 한 마리가 무릎을 꿇었을 때, 상황을 두루 훑어본 신사가 리디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미 한참 전부터 ‘작전’을 의식해 긴장하고 있던 리디안은 고개를 끄덕이곤 하늘을 올려다봤다.
무닌과 후긴. 상공에서부터 플레이어들을 따라온 까마귀 두 마리가 근처를 맴돌고 있을 것이다.
당장 눈으로 확인되진 않지만, 헤임달의 영역에 들어오기 위해 오딘이 무리하게 힘을 쓰는 중이었다.
“들어가는 즉시. 길마 형 뒤에 서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크라이그가 최선의 선택지를 제시했다.
둥지에 입장한 리디안이 시행할 임무는 소환.
헤임달이 소환에 관해 알 가능성은 있겠지만, 상세한 방법까지는 알지 못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된 작전이다.
시구르드와 군나르의 소환이 헬라의 술트르와 리디안의 MP로 이루어지니, 헤임달이 그 핵심을 파고들어 리디안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너스키는 아마 모든 게 들통났을 거라며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레온의 생각은 달랐다.
헤임달이 소환 방법에 관해 알든, 모르든 굳이 소환하는 과정을 직설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없다며 말이다.
[파프니르의 둥지 / PK 불가 / 스펠, 스킬 사용 가능]대망의 최종 목적지에 입성했다.
우르르 입장하자마자, 리디안은 크라이그의 귀띔대로 재빨리 마제스티의 뒤로 숨었다.
이어 덩치 큰 플레이어들이 자연스럽게 리디안을 가렸다.
어쩌면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헤임달에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면서도 리디안은 그늘에 숨어 ‘술트르’를 꺼내 들었다.
“시구르드.”
한 방울의 피로 물든 검날이 조그마한 목소리에 반응했다. 행여나 헤임달이 알아볼까 봐 서둘러 술트르를 숨긴 찰나, 물러난 사람들 옆에서 다시금 시구르드가 나타났다.
“저게 그 ‘영웅’이야?”
“와. 지금 저 사람이 부른 거야?”
“NPC 아니고 진짜 맞아? 아니, 근데 저런 카드가 있었으면 진작 부르지.”
“소환이라고 하던데. 페널티 같은 게 있다더라. 그리고 저분만 부를 수 있다던데.”
소환 경위에 관한 사정은 대강 전달된 상태다. 하지만 이런 광경을 처음으로 눈으로 목격한 플레이어들은 쉽게 흥분해 떠들었다.
개중에는 리디안이 듣기에 조금 부담스러운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잖아도 예전부터 스카디며 신스펠이며 지혜의 증표까지, 헤임달에 의한 우연이긴 해도 플레이어들이 인식하는 리디안은 ‘축캐’. 그리고 이젠 선택받은 용사에 가까웠다.
사방에서 어처구니없는 추측이 사뭇 진지하게 흘러나오자 리디안은 실없이 웃고 말았다.
이런 관심이 조금 부담스럽긴 해도, 잠시나마 사람들에게 그리 기억되는 것도 상당한 영광일지 모른다면서 말이다.
“정말로 광룡의 둥지로군.”
리디안을 향한 수군거림도 찰나였다.
영웅 시구르드가 입을 열자, 사람들의 관심은 금세 바뀌었다. 영웅을 영접한 플레이어들은 감탄을 연발하며 눈을 떼지 못했다.
“이곳에 또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수선한 시선에도 시구르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씁쓸히 읊조리는 시구르드의 모습에 박회장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시구르드 님은 아무 걱정말고 파프니르만 상대해주세요.”
“내 공격이 너희에게 닿을 텐데?”
“추측이지만, 헬라의 술트르가 리디안 님에게 귀속되어 있으니 거기서 소환된 두 분도 아마 아군으로 인식되지 않을지……. 그게 아니라도, 아마 헬라가 손을 써뒀을 겁니다. 그러니 염려 말고 공격하세요. 혹시라도 공격받는다고 해도 그건 저희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요.”
끄덕인 시구르드가 사방을 둘러싼 플레이어들을 힐끔 바라봤다.
“나도 최대한 신경 쓰겠다. 다행히 너희 측에도 전사들이 많아 보이는구나. 그런데 놈은… 함께 하지 않는 건가?”
“군나르라면 곧 나타날 거예요. 두 분을 소환하는 데 있어 생각보다 큰 힘이 들어가서요.”
왜인지 군나르를 의식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박회장은 다소 껄끄러워 보이는 시구르드의 표정에 작은 불안을 삼키며 리디안을 쳐다봤다.
리디안은 바드들의 MP 회복을 받으며 이제 막 두 번째 소환을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