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80
80화
크라이그는 생각보다 오래 버티는 핑크푸크의 모습에 안면을 구겼다. 이트의 힐 범위 밖으로 빼내고 싶은데, 제 목숨 줄이라는 걸 알아 정신없는 와중에도 범위는 꼭 지켜 움직이고 있었다.
상대가 민첩 스탯인 만큼 빗맞는 걸 고려하고 잡으려면 고레벨 공격 스킬을 연계해야 하는데, 고레벨 스킬 중 쿨타임이 돌아온 건 ‘일섬신월’밖에 없었다. 조무래기인 아빌린, 플루, 요한을 잡느라 지나치게 소비해 버린 탓이었다.
이러다 타이밍이 어긋나 누군가 합세라도 하면 좀 곤란한데……. 그런 고민을 하던 크라이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건 테세우스였다.
때마침 달아나던 비격수를 쫓던 테세우스는 핑크푸크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크라이그를 목격하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눈치 빠른 테세우스는 단일 공격 마법인 ‘소울 스피어’를 날려 존재감을 과시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푸른 마법 창에 허리를 맞은 핑크푸크가 비틀거렸다. 시전자를 확인한 핑크푸크는 낭패한 얼굴로 급히 발을 뗐다. 테세우스와 일대일이라면 모를까, 크라이그가 있는 상태에서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였다.
그래서 핑크푸크는 서둘러 거리를 벌려 떨어졌다. 하지만 그 기회를 놓칠 크라이그가 아니었다. 거리가 벌어져 이로운 건 크라이그도 마찬가지였다.
다가오는 테세우스와 눈빛 교환을 한 크라이그는 곧장 ‘일섬신월’을 날렸다. 동시에 테세우스도 고레벨 공격 스펠인 ‘엘레멘탈 스피어’를 날렸다.
오색찬란한 마법 창살과 백색 검기가 타이밍 좋게 한꺼번에 들어갔다. 전체 HP가 3천도 되지 않는 터라, 핑크푸크의 피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법 방어력이 낮은 탓에 엘레멘탈 스피어로 받는 피해가 상당했다.
거진 쭉 떨어진 HP에, 확실하게 죽여 놔야 한다며 크라이그는 빠르게 접근해 주력 공격 스킬인 ‘일도양단’과 함께 주특기인 더블 샷 콤보를 넣어버렸다.
힐이 들어올 틈도 없이, 순식간에 들어온 일반 공격 연타에 딸피가 되어 있던 핑크푸크가 헉 신음하며 고꾸라졌다.
핑크푸크의 HP는 0이 되어 있었다.
“윤재 형, 나이스 샷! 역시 개똥컨들. 제대로 비비지도 못하죠~”
한참이나 환호하며 비웃던 테세우스는 다른 목표를 찾아 떠났다.
크라이그는 그대로 멈춰 시체가 된 핑크푸크를 바라봤다. 힐만 아니었으면 진작 잡았을 거라고. 짜증스레 이트를 찾는 순간, 그의 눈에 구석에서 소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따거가 포착됐다.
따거는 워로드인 파프리카, 가디언 빅토리아와 몰려다니며 점차 리디안이 있는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크라이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모른 채, 비열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가디언이 있는 1 대 3은 불리하지만, 가디언이야 범위 내에 안 들어가면 그만인, 워로드는 옆그레이드의 폐해로 이도 저도 아니게 된 어중간한 직업이다. 셋 중에서 그나마 쓸 만한 따거만 처리해도 리디안이 위험할 일은 없었다.
크라이그는 무기를 바로 쥐며 방향을 틀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스펠, 스킬 소리. 그리고 플레이어들의 비명이 안겨 주는 공포는 상당했다. 게임이면 그저 음향 효과에 불과했을 텐데, 질끈 눈을 감아도 그려지는 현장 상황에 리디안의 혼이 쏙 빠졌다.
리디안은 한참 전부터 창백해진 얼굴로 ‘여신의 손길’만 연달아 외우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힐이었고, 길드원은 덤이었다. 그만큼 핑크푸크의 공격은 공포스러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 리디안의 자신의 HP가 꽉 찬 상태로 멈춰 있는 것을 확인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서운 속도로 떠오르던 공격 메시지 창도 보이지 않았다. 놀란 리디안은 반짝 정신 차린 채 주변을 둘러봤다.
핑크푸크가 서있던 제 뒤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 그곳에 크라이그가 서있었다. 그 발밑에 널브러진 핑크푸크의 시체를 본 순간, 리디안은 바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어, 또 검닉…….”
애초부터 ‘썩고목’은 자유 피케이가 허용되지 않는 논피케 맵이었다. 그런 곳에서, 정당방위고 뭐고, 눈에 보이는 대로 모두 죽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비단 크라이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중간한 플레이어를 상대로 가장 많이 학살한 테세우스, 시우도 똑같은 검닉 상태였다. 리디안은 그들의 페널티가 염려되었지만, 그래도 핑크푸크의 죽음 덕분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부터 새어 나왔다.
어이없게도, 핑크푸크의 시체와 크라이그의 모습에서 리디안은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 역시 크라이그 님. 아군이니까 엄청 든든하네.”
가끔 필드 PK 때 크라이그에게 부지런하게 쫓겨 다니던 오토마타가 박수치며 감탄했다. 리디안도 조용히 공감했다. 평소에도 곁에 있으면 든든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오늘만큼은 엎드려 절을 하고 싶을 만큼. 너무나도 고맙고 듬직했다.
리디안은 울듯한 웃음을 흘리며 뒤늦게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입구 쪽은 아직도 전투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땅바닥에 누운 시체는 대부분 태양, 무법자였다.
물론, 레기온에도 사망자는 있었다. 아이템 세팅상 HP 최대치가 낮은 또치, 앵두군, 양말, 세자 등이 그 희생자였다. 다행히 무니가 돌아다니며 잽싸게 부활시키는 바람에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대신 노네임은 여전히 시체 상태였다. 살려 봤자 바로 죽어 오뚝이가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무법자의 이트도 시우에게 괴롭힘당하면서도 간간이 근처에 있는 시체에 부활을 시도했다. 하지만 악당을 처리하고 다음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테세우스가 얄밉게 부활자들을 도로 죽여 놨다. 똥 씹는 표정의 이트와는 달리, 훈장처럼 KILL 수를 늘려가는 테세우스는 겔겔 웃을 뿐이었다.
박 터지게 싸우는 입구 방향과는 달리, 핑크푸크의 죽음으로 느긋해진 리디안 쪽은 잠시 멈춰 상황을 관전했다.
“근데 쟤네 왜 이렇게 허접해요?”
오토마타의 중얼거림에 도도가 그러게, 라며 동의했다. 오토마타는 눈살을 찌푸린 채 비판을 이어갔다.
“이해가 안 가요. 애초에 주력 딜러 없이 덤빈 것도 어이없는데, 태양 컨트롤 수준은 노답이고, 무법자는 동맹이라면서 자기들끼리 따로 놀고 있고, 게다가 증원이랍시고 맵에 들어오는 애들은 죄다 듣보잡들이고……. 진짜 무슨 자신감으로 시비 건 건지 모르겠어요.”
“이쪽 와서는 길드끼리 처음 붙는 거 아니야? 그래서 자기네랑 실력 비슷한 줄 알고 얕잡아 보고 있었던 거 아닐까. 우리도 여기 와서 우리끼리만 연습했지, 다른 사람들이랑은 붙어 본 적 없어서 누가 잘하고 못 하는지 몰랐잖아.”
“그런가? 그래도 이건 뭐, 급이 안 맞는 수준이니… 좀 재미없네요.”
그 신랄한 평가대로, 현재 전세는 레기온이 유리했다.
태양과 무법자 측은 PVP에 능숙한 변변찮은 딜러가 없어, 제대로 된 공격도 못 하고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비격수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다들 도망 다니기 바빴고, 힐러도 무법자의 이트와 타로티만 남아 있었다. 그마저도 거의 이트가 혼자 다 해먹는 상황이고, 타로티는 페이지를 피해 바삐 도망 다녔다. 이트가 어떻게든 코헤이를 살려 상황 개선을 바랐지만 방해하는 시우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타로 누나! 그냥 이쪽으로 와서 붙어!”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이트가 타로티를 불렀다. 솔직히 말해 별 도움 안 되는 인물이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지금이라도 보호해야 했다.
그러나 근처를 돌던 하츠가 귀신같이 달려와 상태 이상 필드를 깔아 타로티의 진로를 막아버렸다. 방어구도 빈약해 물처럼 물렁한 몸인데, 저주까지 걸리면 답이 없었다. 결국, 타로티는 엉엉 울며 외곽으로 빠졌다. 그녀도 리디안처럼 PVP가 익숙지 않아,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궁지 몰린 타로티가 혼자 살겠다고 대기실을 향해 뛰어갔지만… 은밀하게 따라붙은 페이지가 그녀의 등을 향해 사정없이 채찍을 후려갈겼다. 타로티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쓰러졌다.
최종적으로, 태양과 무법자 동맹의 힐러는 이트 혼자 남아 고립됐다. 그러나 나름 하이 랭커라고 이트는 혼자서도 잘 버텼다. 그래도 부담스러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트가 주변을 둘러봤으나 생존자 상황이 좋지 않았다.
태양은 오디오스와 따거를 포함한 열 명 남짓만 남았고, 무법자는 이트를 비롯해 가디언 아퀴나스, 바드 지울리아노, 아쳐 프리미엄, 매지션 불새만이 남은 상태였다.
소식이 퍼져 중간중간 길드원들이 새로 진입하고 있었지만, 다들 스펙이 어중간해 그다지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심지어 몇몇은 플레이어가 아닌, 몹사로 죽어 더 굴욕적이었다.
시체들도 10분 텀이 있어, 죽은 이가 도시에서 리젠되어 도로 맵에 진입하길 기다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인원이 더 많은 태양에게 기대해야 했으나, 태양도 희망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한껏 투지를 불태우던 오디오스는 레기온의 길드 마스터인 마제스티와 쫓고 쫓기는 상황이었다. 재주껏 도망 다니면서 공격 스펠을 날리고 있지만, 바바리안의 기본 방어력과 마법 방어력 아이템 세팅으로 인해 마제스티는 크게 타격을 받지 못했다.
문제는 마제스티도 공격력이 딸려 오디오스에게 치명타를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10초만 여유 있으면 바로 공격 세팅으로 스위칭을 하겠는데, 오디오스가 그럴 여유를 줄 상대는 아니었다. 그래도 랭커라고 공격력은 높았기 때문이다.
마제스티는 짜증 섞인 한숨을 삼켰다. 개인적인 감정도 있어 가급적 오디오스는 자기 손으로 잡고 싶었다. 그러나 이대로는 시간만 낭비할 뿐. 조금 치욕스러워도 전체적인 흐름을 위해 효율을 따져야 했다. 마제스티는 별수 없이 근처에서 비격수를 쫓던 테세우스를 불렀다.
바드인 검은양을 쫓던 테세우스는 오디오스라는 새로운 먹잇감에 웃으며 달려왔고, 마제스티는 떨떠름한 얼굴로 근처에 있던 서모너 에치를 잡으러 빠져나갔다.
한편, 오디오스는 배턴 터치된 상대에 욕지거리를 삼키는 중이었다. 하지만 공격력이나 아이템발로 치면 자신이 한 수 위였기에 상위 스펠을 총동원해 딜로 찍어 누르려 했건만, 갑작스레 난입한 환경파괴자의 힐과 버프 연타에 실패하고 말았다.
힐러의 개입도 짜증 나는데, 저를 보며 비웃는 괴자의 낯짝을 보니 속이 더 뒤집어졌다. 오디오스는 한껏 짜증 내며 이번에는 괴자를 노렸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녀는 죽지 않는 세인트였다.
테세우스는 오디오스가 삽질을 하는 그 틈을 노렸다. 그리고 속성 연계 마법을 난사했다. 아이스 필드, 아이스 스피어, 아이스 랜스. 그리고 75레벨 단일 공격 스펠인 블리자드까지.
수속성의 공격 스펠이 4연타로 쏟아지자 추가 속성 대미지가 떴고, 오디오스의 HP는 순식간에 500 아래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