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Michelangelo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172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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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 buon gusto è si raro, il mondo è cieco.
(좋은 취향은 이제 너무 드물다, 세계는 눈멀었다.)
– 미켈란젤로의 시, 109에서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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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어요.”
구미령이 집안으로 들어섰다. 거실부터 부엌까지 환하게 불이 들어와있는 집을 둘러보며 구두를 벗고 구미령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안 잤네요?”
“응. 알잖아. 야행성인 거.”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고두한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스도쿠를 풀고 있는 고두한을 바라보며 구미령이 흐응, 콧소리를 내며 부엌으로 걸어갔다.
물을 유리컵에 따라마시며 구미령이 정면을 응시했다. 고두한은 굳게 다문 입술로 연필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숫자를 표시하고 있었다. [전문가도 어려워하는 고급 스도쿠 100]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번에 풀던 것은 이미 다 푼 모양이었다.
슬쩍 고개를 기울이자 소파 팔걸이에 올려진 [강석의 인체소묘집]이 눈에 들어왔다.
유일하게 보유한 강석의 그림이라며 보관용, 독서용, 공부용, 대여용으로 각각 두권씩 구매했던 그 책이었다. 초판으로 같은 책이 이 집에 고두한 소유로만 8권이나 있는 셈이었다.
끝에가 살짝 닳아진 것이 독서용 중에서도 주로 사용하는 독서용이었다. 강석과 직접 찍은 사진이 안쪽 표지에 붙여져 있는 책이었지. 구미령이 물을 마시며 [강석의 인체소묘집]을 바라봤다.
구미령의 개인 서재에도 저 책이 네권 쯤은 꽂혀있었다. 고두한과 똑같이 보관용, 독서용, 공부용, 대여용이었다.
‘그럼 총 12권인가?’
구미령이 예전부터 고두한이랑 저의 취향이 겹친다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 대표님이 갤러리에 오셨어. 한국에 들어오셨나봐.”
“그래? 잠깐, 누가 와?”
고두한이 스도쿠 책을 내던지듯 하고 구미령을 바라봤다. 구미령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대표님.”
“당신이 대표라고 말할 사람은 석이잖아. 그놈이 한국에 들어왔어?”
“오셨더라고. 몰래 들어오신 모양이야.”
“······그럼 지금 늦게 들어온 이유가···,”
“맞아. 대표님이 작업하시던 걸 구경하다 왔지.”
구미령이 물을 따랐다. 딱히 오늘 짠 것을 먹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물을 안 마신 것도 아닌데 갈증이 일었다. 꿀꺽꿀꺽. 오늘따라 물이 유달리 시원하고 달았다.
“은 재작업에 들어갔어? 어때? 이번에도 대작이야? 아니. 그 녀석은 왜 방송을 안 켰대?”
“카메라로 녹화는 하시는 것 같던데···그것보다 기밀 유출이거든. 궁금하면 직접 보러와. 대표님 번호도 있잖아.”
“치사하게.”
“원래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하는 게 좋은 거야.”
구미령은 그렇게 말하며 서류뭉치를 들어 올렸다.
“뭐야?”
고두한이 새로 꺼낸 컵에 물을 따르며 구미령의 서류 쪽으로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날카롭게 생긴 눈의 동공이 크기를 키웠다. 그리고 빠르게 글씨를 읽어내리기도 전, 구미령이 서류를 높이 들었다.
“대표님이 맡기신 마이애미 왕복권 이벤트랑 마이애미 관련으로 블룸 미술관하고 논의할 자료들이야. 읽지마. 당신도 이벤트 응모한 거 모를 줄 알아?”
고두한이 입을 삐죽였다.
구미령은 꼬리라도 달렸으면 팩팩, 식탁을 거세게 칠 것 같은 고두한의 표정을 바라보며 어림도 없다는 듯 눈빛을 쏘아붙였다.
고두한이 꼬리를 말듯 서류에서 시선을 뗐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상하다는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오랫동안 스도쿠를 하느라 뻐근해진 목을 이리저리 풀며 고두한이 묘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근데 그걸 당신이 왜 해? 꼭 아티스트 컴퍼니나 할 짓을······”
고두한이 새삼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당신, 석이 매니저 일도 해주게?”
“···뭐, 시켜달라는 건 아니고···워낙 일이 편하니까. 이거라도 도와드리고 싶은 거지. 대표님은 매니저라거나 이런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조동범씨에게도 너무 맡겨도 좀 미안하고, 안 좋게 소문 날 수도 있잖아.”
“조사장은 좋아할걸?”
그 사람은 강석이 시키면 하루만에 제주도까지 가서 약수물 퍼와서 서울로 복귀할걸? 고두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잘은 몰라도 조동범의 인생을 강석이 세 번 정도는 구한 게 틀림없다.
“거의 인생에 은인대하듯 하던데···저번에 비싼 보약까지 지어줬더만.”
“그래?”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구미령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3대 아트페어 중 가장 격조 높다는 아트바젤에 대한민국 화랑 중 유일하게 매번 참여해왔던 국제 갤러리를 이끌었던 수장. 구미령의 날카로운 눈이 서류를 빠르게 훑었다.
고두한이 입을 삐죽, 움직여 모난 웃음을 그렸다.
눈높기로 소문난 구미령도 강석에게는 단단히 빠진 모양이었다.
“가만 보면 석이 녀석이 인복이 있어.”
“인복?”
“그래. 당신 같은 사람이 그 녀석 곁을 알아서 찾아가잖아.”
“말은.”
“진짠데?”
제 얼굴에 금칠하는 꼴이지만 구미령은 고급인력이었다. 정확하게는 고급인력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의 고급인력이었다.
작가의 잠재력을 알아보는 눈썰미는 물론, 작가의 케어를 하는 솜씨로 따지자면 대한민국제일 아니 세계에서도 손에 꼽힐 갤러리스트가 바로 구미령이었다.
실제로도 아트바젤로 증명해내지 않았었나.
‘또 그 산증인이 여기있지.’
고두한이 소묘실력 말고 아무것도 없을 때. 그를 대한민국의 블루칩 작가로 만든 것에는 구미령의 역할이 굉장히 컸다.
고두한이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면서 구미령이 국제 갤러리 관장직을 내려놓았으니까. 수백명을 담당하던 갤러리스트가 한 명만을 케어할 때의 이점을 고두한은 제대로 경험했다.
작가가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
구미령은 그런 사람이었다.
‘강석은 목표가 있는 놈이야. 여기서 만족할 리 없지. 더 큰 세상, 더 큰 규모로 놀기 시작할 거고 그때의 강석에게는 구여사 같은 사람이 필요하겠지.’
여태까지의 굵직한 건으로 보건대 수완이 없는 녀석은 아니니 앞으로도 큰 거래에는 강석이 직접 나서는 게 좋을 테지만 그 외에 일에는 할애할 시간이 없을 터였다.
작게는 구미령이 지금 보고 있는 마이애미 왕복 항공권 이벤트가 그렇고, 크게는 세금 문제 등이 그러했다.
···강석은 앞으로 크게 될 사람이었다.
그런 녀석에게 구미령 같은 사람은 복이 되겠지.
“그래도 별도로 월급 받기로 한 것도 아닌데 이런거 해주는 거 보니까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봐?”
고두한의 말에 구미령이 서류를 살짝 내려놓았다.
부부는 닮는다고,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매를 가진 구미령이 허공을 바라봤다.
강석이 천장을 향해 조각도를 움직이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마치 어둠속에 빛을 새기는 사람 같았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을 띄우는 예술가와 같았다.
죽을 때까지. 제 육신이 흙으로 되돌아가는 그 날까지 그 순간을 잊지 못하리라.
모래로 변한 것들이 흑색의 헬멧 위로 흘러내리고, 가느다란 빛의 실선이 밤하늘 같은 검은 천장에 새겨짐과 동시에 그 뚫린 실선과 같은 틈 사이로 유리돔 너머에 설치된 조명으로부터 별빛과 같은 빛이 쏟아져내리던 장면들.
어둠은 점점 가느다란 빛에 잠식당해갔다.
강석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무광의 어둠, 무저갱 속으로 유성처럼 쏟아져내려오던 빛들.
한 편의 뮤지컬과도 같았다.
조각도로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지.
얼음을 조각할 때와는 또 달랐다.
어둠과 빛을 조각하는 것과 같았다.
녹화를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이 이걸 보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 순간에 구미령은, 이런 게 예술(藝術)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숙련된 동작 하나하나가 높다란 경지에 이르러 예술 같았다. 작품을 만드는 그 행위 자체가 아름다운 인간의 몸짓과도 같았다. 생을 살아가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구미령은, 그곳에서 느끼고 왔다.
구미령은 확신했다.
제 예감이 틀린 게 아니었다.
강석은, 한계가 없다.
이미 세상이 기염을 토할 정도의 천재인 강석은, 더 성장하고 있었다. 얼음으로 순간을 담아내고, 순간으로 시간을 담아내며, 시간을 역행하는 마법을 보여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앞으로 무언가를 보여줄지 구미령은 궁금했다.
그 길을 같이 따라가고 싶었다.
어딘지 모를 곳으로 걸어가는, 아무도 걷지 않았던 길을 향해 도전하는 강석의 걸음이 멈추지 않았으면 했다.
강석은 진짜였다.
작품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을 홀릴 수 있는 진짜. 불세출의 천재가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 예술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구미령은 그때 확신했다.
구미령은 그 순간을 또렷하게 떠올리며 어렵게 읊조렸다.
“······내가 마음에 들고 말고할 문제가 아니야.”
“음?”
“대표님을 보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사람이 예술계에 몸담고 있어도 되나를 고민해야 할 문제지.”
강석은 그 존재 자체가 예술이었다.
구미령이 진지한 어조로 고두한에게 말했다.
고두한이 헛숨을 들이켰다.
“허?”
구여사가 이렇게 나오는 건, 또 처음이었다.
고두한이 낄낄 웃으며 물컵을 들었다. 그리고는 아래 위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처럼 사납게 솟아오른 눈매가 접히며 여우처럼 휘어졌다.
“그래그래. 잘 부탁해.”
나도 석이가 더 잘 되었으면 좋겠거든. 고두한이 물컵을 들고 소파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발걸음은 두 걸음도 채 되지 않아서 멈춰섰다. 아. 고두한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나왔다.
그가 구미령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당신 특기 있잖아. 절세. 강석이 눈이 휘둥그래질 마술을 이참에 보여주는 게 어때. 곧 종소세 신고기간이잖아.”
“아.”
구미령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매해 수백수천억대의 엄청난 수익을 거두었던 국제 갤러리가 비리 하나 없이 굳건할 수 있었던 이유.
갤러리스트이면서 세무사 자격증도 보유하고 있는 구미령의 그 엄청난 세무법 이해력과 응용능력. 그건 5월에 가장 빛을 발휘하는 재능이었다.
“그러네. 그것부터 여쭤봐야겠어.”
구미령이 빠르게 물컵과 당분거리를 챙겼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돈거래에 비상한 머리를 발휘하는 대표님이시라면 어느 정도 준비를 해놓으셨을 수도 있지만 그걸로는 모자랐다.
벌면 벌 수록 대한민국의 세금은 무서워지는 법이었다. 당장 이번 신고에 포함될 내용은 아니었지만 1,600만 파운드라는 경매가를 기록하며 국세청에서도 강석을 주시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일단 경비처리비용부터 확인해야 해. 그리고···’
구미령이 빠르게 먹을 거리를 챙겨서 자신의 서재 쪽으로 향했다. 거의 달리다시피했다. 단독주택이라 걸음을 조심할 필요가 없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오늘은 먼저 자···!”
“어.”
고두한이 설렁설렁 손을 흔들며 고개를 내렸다.
눈앞에 펼쳐진 스도쿠 문제가 거의 완성 직전이었다.
고두한이 날카로운 흑심을 문제집에 갖다대며 입술을 비죽 올렸다. 눈이 힐긋, 거실에 난 베란다 창으로 향했다.
하늘이 검게 물든 채였다.
‘밤하늘에 쏟아져내려오는 별이라···’
고두한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별이 보고싶어지는 밤이었다.
* * * *
5월 21일, 소만의 다음날.
창문도 없고 유리창도 없어 시간도 모르는 검은 공간. 강석은 사다리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턱, 턱, 턱, 사다리를 밟고 내려와 강석이 땅에 발을 디뎠다.
푹.
푹, 소리가 났다.
강석이 아래를 보자 하얀 가루와 같은 분진이 발에 즈려밟혔다. 강석이 고개를 들었다. 쓰고 있는 헬멧 탓에 흑백으로 보이는 세상 속에서 검은색에 가까운 진회색 모래가 넓게 펼쳐졌다. 강석이 천천히 헬멧을 벗었다.
검은 바닥 위를 덮은 진회색 가루들이 흑진주처럼 빛이 났다. 천장에서 쏟아져내려오는 빛을 반사하는 가루들을 바라보며 강석이 샐쭉한 웃음을 지었다. 이게 다 조각도로 파훼시킨 천장의 일부분이었다.
지금 쓰고 있는 마스크가 아니었다면 기관지에 굉장히 좋지 않았으리라. 역시 도구가 최고다. 강석이 맨땅에 헤딩하듯 주먹구구식으로 해결하던 그 옛날의 작업환경을 떠올리며 묘한 승리감을 맛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충분히 어둠속에서 적응하고 있던 눈이 깜빡였다.
마치 태양 아래 선 것처럼 무저갱 같았던 공간에 빛이 화살비처럼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강석이 제 온 몸을 꿰뚫듯 들어오는 빛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밤을 샌 보람이 있었다. 강석이 쏟아지는 빛을 반기며 양팔을 벌렸다.
그때였다.
“···선생님! 한국에 들어오셨다·········고···,”
조동범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하얗고 푸르른 수백수천개의 빛에 꿰뚫리는 강석을 바라보며 입을 멍하니 벌렸다.
밀려오는 바람에 땀에 젖은 강석의 갈색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동시에 강석과 조동범의 눈이 마주쳤다.
밤을 샌 강석은 조용히 조동범을 바라봤다.
적막이 흘렀다.
짧은 적막을 뚫고, 조동범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시, 시, 시시신이시여.”
173. 이것은 영롱한 색과 함께 찬란한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