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Michelangelo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6
06
아버지.
전생의 아버지 로도비코 디 리오나르도 디 부오나로티는 환전상 아들로, 상속 재산에 기대어 사는 자였다.
그는 가족의 곤궁은 돌보지 않았다.
한평생 가장의 무게를 감당한 적 없는 인물. 그게 아버지 로도비코였다.
덕분에 나는 아버지 로도비코 대신 가장의 무게를 감당해야만 했다. 아버지를 돌보았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형제들을 챙겼었지.
“아버지.”
그렇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아버지 강현도의 어깨에 올라간 가장이라는 무게가 얼마나 무겁고 괴로운지.
‘하지만, 그러지 마세요. 저희 때문에 꿈을 포기하지 않으셔도 돼요. 조금만 더 같이 힘내봐요.’
말을 하기 위해 목울대에 힘을 주는 순간. 아버지가 멋쩍게 웃으며 입을 여셨다.
“석아.”
“···예. 아버지.”
“무슨 오해를 했는지 알 것 같은데 나는 절대 그런 뜻으로 말한 게···음, 그러니까···”
아버지는 뒷머리를 긁으시며 매장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폐가구업체에서 얼씨구나 하고 넘긴 중고가구를 쌓아놓은 장소였다.
말이 좋아 중고가구, 폐가구지. 하나같이 손때가 얼룩덜룩 묻은 쓰레기들뿐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쓰레기더미에 손을 얹은 채 허허롭게 웃으셨다.
“이것들을 빨리 팔아치워서 매장을 깨끗하게 정리하자는 소리였는데···내가 말을 너무 두서없이 해서 오해를 하게 만들었구나.”
“···뭐에요, 그런 거였어요?”
“······.”
거짓말이다.
아버지는 거짓말을 할 때 꼭 뒷머리를 긁적이곤 하셨기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런 뜻이었구나.”
돈에 쪼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아버지의 마음 또한 이해가 되어서였다.
아마 돈 때문에 꿈을 접는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주기 싫으신 거겠지. 엊그제 미대를 포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내 모습과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당신도 참. 그런 뜻이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해주셔야죠. 저도 완전히 그런 뜻이라고 생각해버려서···!”
“미안, 미안.”
호들갑을 떠는 어머니와 그걸 달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나는 오백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오백만원.
그게 있으면 지금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오백만 원을 구하는 게 쉬울까?
쉬울 리가. 차게 식은 눈으로 매장을 구석구석 살폈다.
···근래 물건이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지를 않는다고 하시더니, 진짜였구나.
매장에 사람 발 디딜 틈 없이 가구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장관이었다. 열심히 팔아서 오백만 원을 벌어보겠단 생각이 절로 사라질 만큼.
다른 방법이 필요해 보였다. 무슨 좋은 방법이···,
– ‘···만약에 네 자료집이 뽑혀서 잘 팔린다면 인세도 얼마 받아볼 수 있고, 추가인쇄가 들어가게 된다면 그때부터 꽤 쏠쏠하게 벌릴 거다.’
– ‘개인전 같은 경우는 어려울 거 없어. 그냥 내 개인전에 네 작품 한두어 개 거는 거다. 잘 그렸으면 팔릴 거고, 팔린 수익은 네가 갖는 거다.’
아.
하나 있었다. 고두한 선생님의 제안이었다. 자료집 같은 경우에는 워낙 과정이 더뎌서 연임대료 지불 날짜까지 수익이 발생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고두한 선생님의 개인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종이에 적힌 대로라면 고두한 선생님의 개인전이 열리는 건 앞으로 한달 반 뒤.
연임대료 지불은 내년 3월이니까···그림이 팔릴 경우, 수익금은 연임대료 지불일 전에 통장에 꽂히게 될 터였다.
물론 그림이 얼마에 팔릴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나는 포트폴리오 화일 안에 잠들어있는 비너스 석고소묘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시력이 제 기능을 하는 전공자 한 명만 와도 오백만 원은 넘고도 남을 거였다.
.
.
.
“저 먼저 들어가요?”
늦은 밤. 이미 매장을 닫을 시간이 훌쩍 넘은 뒤건만, 어머니는 이제서야 작업실 문 너머로 얼굴을 내미셨다.
매장이 소등되길래 아까 가신 줄 알았는데 아버지를 기다리셨던 모양이었다. 작업실 주광등에 의존해 가구를 제작하던 아버지도 놀란 얼굴로 뒤를 도셨다.
“아직 안 갔어?”
“같이 가려고 기다렸죠.”
“먼저 가지 않고.”
“안 그래도 이제 들어가려고 합니다. 채영이 학원 끝나고 올 시간 다 되었어요.”
어머니는 집에 혼자 있는 걸 싫어하는 채영이 녀석이 걱정되시는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어서 들어가 봐.”
“네. 네. 석이도 더 있다가 올 거지?”
어머니의 시선이 순간 나에게서 내 아래 있는 액자로 이동했다. 일부러 지지부진하게 액자를 만들고 있는 걸 들킬까 싶어 잽싸게 가렸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부끄러워한다고 오해하셨는지 후후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알았어. 알았어. 안 볼게. 부끄러워하기는. 나중에 아버지랑 같이 들어오렴. 자전거는 내가 타고 갈게.”
“그게 아니라···, 아니에요. 나중에 봬요.”
“응. 당신도 나중에 봐요.”
“그래.”
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작업에 집중하셨다. 얼마 안 가 멀리서 뒷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어머니가 나가시는 소리였다.
이제 진짜로 아버지와 나 둘만 남은 거다.
나는 액자를 이리저리 만져댔다. 아버지에게 할 말이 많았는데 막상 하려니 목이 턱 막혔다. 가시라도 낀 기분.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며 작업실을 둘러봤다.
작업실 벽 한쪽에는 사진들이 가득했다. 젊을 적의 아버지부터 시작해서 아버지와 어머니, 갓 태어난 나, 그리고 채영이까지 추가되며 사진은 점차 풍성해져 갔다.
세월.
그게 저 벽에 담겨 있었다. 아버지가 작업실에서 꿈을 꿔온 시간이기도 했다. 이 긴 시간 동안 빛을 보지 못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나는 이런 시간을 겪어보지 못할 테니······.
아득함이 느껴졌다. 동시에 하고 싶은 말 또한 정해졌다.
“···아버지.”
“음.”
창칼 모양의 조각도로 목재를 섬세히 다듬어가던 아버지가 등을 돌렸다. 피곤이 쌓인 눈 밑 그늘 속. 아버지의 눈동자가 왜 그러니, 하고 물어왔다.
“저 이번에 소묘 A반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렇구···, 뭐?”
아버지가 대답을 하다 말고 놀라 되물었다.
A반.
청화예고에서 상위 20명만 들어갈 수 있는 앨리트반이었다.
2년 내내 D반이었던데다 바로 며칠 전에 미술에 대한 재능이 없다고 통보받은 학생과는 어울리지 않는 반이기도 했다.
“A반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예. 오늘 반편성 배치고사가 있었거든요.”
1등을 했다는 얘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기뻐하셨다.
“그래···하, 하하! 이거 나랑 같이 남을 게 아니라 삼겹살이라도 사서 네 엄마랑 같이 들여보낼 걸 그랬네. 아니, 근데 언제 그렇게 소묘를 잘하게 된 거냐? 응?”
“발전할 때가 된 거죠.”
“하하? 발전할 때! 그래. 지금까지 노력했으니 발전할 때도 되었지. 이제 더 더 잘 그릴 일만 남았겠구나!”
아버지가 환하게 웃었다. 나보다 더 기뻐하는 모습에 마음 한쪽이 따스해졌다.
나는 쑥스러움에 애꿎은 액자만 이리저리 꾹꾹 눌러댔다. 그러다 슬쩍 본론을 꺼냈다.
“······그, 아버지. 발전은 상승곡선이 아니라 계단식 그래프라는 말이 있잖아요?”
“음. 아티스트는 정체와 성장을 반복한다는 얘기 말이구나.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가로 선이 길어지고, 성장하면 세로 선이 길어진다는···그거 맞지?”
“예. 그거요.”
“그게 왜?”
“어···그 그래프에 따르면 가로 선과 세로 선이 비례한다고 나오거든요. 근데 사람의 눈높이는 곡선으로 상승하다 보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눈높이와 가로 선의 격차만큼 괴리를 느껴 정체감에 괴로워하게 되는 거죠.”
“음.”
가로 선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눈높이는 곡선으로 우상향할 테니 사람은 더욱더 힘들어지고, 결국엔 슬럼프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지.”
아버지는 내 말에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도 정체감에 괴로워하다 슬럼프에 빠져버린 걸까.
모르겠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오늘따라 말을 빙빙 돌리게 되었는데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다.
“하지만요.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봤다. 조각도에 끼인 말린 나뭇조각을 손톱으로 쳐내던 아버지가 고개를 드셨다. 주황등에 적갈색으로 빛나는 눈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중요한 건 가로 선과 세로 선은 결국 비례한다는 거에요. 정체기 동안 묵묵히 노력하다 보면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결국엔, 들인 노력과 시간만큼 성장하게 되는 거죠.”
저처럼요.
뒤에 말을 꺼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위로지, 잘난 척은 아니었으니까.
아버지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였다. 힘들 거고, 힘들겠지만, 성장하고 싶다면 계속해야 한다. 그게 결국은 성장의 발판이 될 테니.
“가로 선과 세로 선은 결국 비례한다······.”
강현도는 의미를 곱씹었다. 아들의 위로는 묵직한 돌과 같았다. 지금은 힘들더라도 참고 계속하다 보면 성장이 찾아올 테니 계속 묵묵히 견디라는 소리였다.
응원치고는 참 투박했다. 강현도는 쓴웃음을 삼키면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엊그제만 해도 미술을 하네 마네 집을 뛰쳐나가 아침이 다 될 때 서야 돌아온 아들이 맞나. 건네는 위로가 교과서에 나오는 철학자 못지않았다.
그 날의 새벽 산책이 무언가 강석에게 큰 작용을 한 것일까. 강현도는 자신을 닮아 적갈색으로 불타오르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성장했구나, 아들.
강현도가 갑자기 쑥 커져 버린 것 같은 강석을 바라보며 말을 고르는 사이. 강석이 강현도 옆에 있는 간의 의자에 앉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아아, 내가 말하고도 닭살이네. 밤이라서 감수성이 넘쳐났나 봐요.”
민망한지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며 고개를 숙이는 아들이 강현도는 오늘따라 왜 이리 뭉클한지. 문득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이렇게 위로까지 건네줬는데 찌질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을 순 없었다. 자신은 아버지였다.
백마디 말보다 한가지 행동이 확실할 때가 있는 법.
‘오백. 벌고 만다.’
강현도가 다짐하는 그 순간, 강석이 작업대 뒤에 있는 목재 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나저나 우리 아버지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데···계속 기다리기만 하면 지루하니까 저도 하나 만져봐도 돼요?”
강석이 들어 올린 건 원목 요람의 일부였다. 강현도의 미간이 고민으로 좁혀졌다. 맡겨도 될까.
폐가구를 리폼하는 법이야 강현도가 강석에게 어릴 적부터 알려줬던 것이니 못할 리야 없다.
하지만 판매하는 걸 맡기기에는 역시 좀 그렇지. 강석의 실력은 강현도가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에둘러 거절해야겠다는 쪽으로 의지가 기울 만큼.
입을 여는데, 불현듯 방금의 대화가 떠올랐다.
– ‘중요한 건 가로 선과 세로 선은 결국 비례한다는 거죠. 정체기 동안 묵묵히 노력하다 보면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결국 사람은 들인 노력과 시간만큼 성장하게 되는 것 같아요.’
성장.
열렸던 입이 뻐끔뻐끔 공기만 내뱉었다.
······그래. 애초에 헐값에 업어온 것들이고, 폐가구는 넘쳐난다.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들이 뭐가 아깝다고 거절하겠어.
강현도가 손을 들어 강석의 머리를 헝클었다.
“어떻게 하는지 까먹진 않았겠지?”
“당연하죠.”
허락이었다.
강석은 신이 난 얼굴로 조각도를 하나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부서진 요람의 지지대가 되어줄 목재를 이리저리 요람에 갖다 댔다.
“답답했지. 곧 꺼내줄게.”
무어라 중얼거리며 직사각형 모양의 커다란 목재에다가 초크로 선을 쭉쭉 긋는 게 시원시원했다.
막힘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무엇을 조각할지 정한 모양이었다.
강현도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제 자신도 다시 집중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강현도가 천천히 조각도를 들어 올렸다. 수십 평생을 함께한 또 다른 동반자였다.
창문 너머에는 검은색만이 가득한 깊은 밤.
나무 냄새 가득한 작업실. 방 안에는 조각도로 나무를 파는 소리와 숨소리만이 둥둥 떠다녔다.
촛불을 닮은 주광등에 의존하여 부자 둘이 나란히 앉아 작업에 집중하는 소리였다.
둘의 작업은 그렇게 밤새도록 이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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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파랑빛 하늘.
참새가 화단 사이를 포닥거렸다. 짹짹, 울음소리 위로 낮은 굽 하나가 아스팔트에 부딪혔다.
새들이 빠르게 날아올랐다.
아침이었다.
백명희는 겨울 회색 구름 사이로 내려오는 햇빛을 맞으며 석이 가구점의 뒷문을 열었다.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나고, 백명희는 장군이 출두하듯 문을 열어젖히며 가구점으로 위풍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여보! 석아! 일어나야지, 아침이에요!”
“작업하다가 잠들었을 텐데 천천히 깨우지.”
종종 걸음으로 어머니를 뒤쫓아가던 강채영이 중얼거렸다.
“아침은 먹어야지.”
어머니 백명희의 품에는 직접 말은 김밥 봉다리가 안겨있었다.
“토요일이잖아.”
“토요일이 무슨 상관이니. 사람은 밥심이야. 밥심. 그리고 채영이 너 내가 걸으면서 영어단어장 보지 말랬지. 넘어진다니까. 여보···!”
강채영이 영어단어장을 넘기는 사이, 백명희는 굳게 닫힌 작업실 문을 열어젖혔다. 울창한 숲에 들어온 것처럼 나무의 송진향이 코에 스며들었다.
백명희는 익숙한 냄새를 맡으며 불을 켰다. 작업용 주광등 대신, 생활용 형광등이었다. 새하얀 불빛이 천장에 켜지며 빛이 차단되어있던 작업실 전경이 한 번에 밝혀졌다.
푸드덕,
“···엄마야!”
무심결에 불을 켠 백명희에게 한 마리 새가 날아들었다. 백명희가 놀라 손을 엑스자 모양으로 들어 올렸다. 그 사이로 희한한 광경이 보였다.
새였다.
밤색 등 면에 갈색 반점. 작지만 날카로운 부리. 어디서 들어온 것인지 황조롱이 한 마리가 날개 깃을 요람에 비비고 있었다.
“아니, 이게···”
백명희가 당황하여 요람으로 다가가자 황조롱이가 경계하며 날개를 펼쳤다. 동시에 비비고 있던 날개가 요람에서 치워졌다.
자연스럽게 요람의 전면부가 드러났다.
“···새?”
거기엔 작품이 있었다.
거대한 날개를 가진 한 쌍의 새가 아기 새들을 감싸고 있는 고부조(高浮彫)였다.
7. 고부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