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46)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46화
사나이 (2)
왼쪽 가슴에 똘똘 뭉쳐 있는 성흔의 마력을 풀어내며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린다.
떠올린 이미지는 폭탄.
무시무시한 벼락을 한껏 머금은 채 반경 수십 미터를 휩쓸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뇌전의 폭탄.
그 이미지를 유리병 안에 담아,
던진다.
-파지지지직!!
푸른 뇌전을 머금은 유리병이 작은 돌풍을 만들어내며 쏘아졌다.
의자에 묶여 있던 쿠로사키 소스케의 눈살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맑은 물방울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뇌전을 휘감은 유리병을 둥글게 감쌌다.
유리병 안에서 터져 나온 푸른 뇌전이 얇은 물방울을 뚫지 못한 채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깊게 가라앉은 눈빛.
눈빛이 변한 것만으로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았던 유약한 인상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공포에 벌벌 떠는 먹잇감에서, 먹잇감이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리는 교활한 사냥꾼으로.
짙은 물안개가 낀 것처럼 끈적한 살기가 지하실을 뒤덮었다.
“처음부터.”
오진은 보통 사람이라면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짙은 살기 속에서 느긋이 웃었다.
“…어떻게?”
소스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오진을 바라봤다.
그의 부하들조차 자신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는데, 어떻게 처음 만나자마자 그의 거짓말을 간파할 수 있단 말인가.
“말했잖아? 나라면 여동생을 구해달라 했을 거라고.”
“정말 그것만으로 거짓말이라는 걸 눈치챘다고? 그 말을 나한테 믿으라는 거냐?”
“물론 그거 하나만으로 알았던 건 아니지.”
오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다리를 꽜다.
“지난 몇 개월간 너희는 철저하게 ‘소화실’의 위치를 속이며 활동했지. 그런데 때마침, 아주 공교롭게도 내가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소화실의 위치가 탄로가 났다고?”
그래.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쿠로우시 조직에서 쏟아부은 몇 개월간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하지만.
“폐병동 주변에 아무런 보안장치도, 하다못해 보초조차 없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마치 문을 활짝 열고 쿠로우시 조직의 방문을 반기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래도 그것만으로 내 정체를 알 수는 없었을 텐데.”
소스케가 가늘게 눈을 뜨며 물었다.
그의 말마따나, 단순히 놈들의 보안이 허술하다고 해서 유지와 소스케 사이에 연결점을 찾기는 어려웠다.
애초에 세간에 알려진 쿠로사키 소스케의 정보와 사카이 유지 사이에는 너무나 큰 갭이 있었으니까.
해마의 왕이라 불리며 공포의 존재로 군림하는 쿠로사키 소스케와, 삐쩍 말라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유약한 외모의 외팔이 개발자가 동일 인물이라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
“팔.”
“팔?”
오진이 휑하니 잘려 나간 소스케의 왼쪽 팔 부근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 팔, 분명 쿠로사키 소스케에게 반항하다 잘렸다고 했었지?”
“…그래.”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쉽게 믿게 된다.
애초에 배신을 당한다 해도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건 이성이나 논리의 문제가 아닌, 감성과 본능의 영역.
유명 반전 영화에서도 절름발이를 범인으로 내세웠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쿠로사키 소스케는 이런 인간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기 위해 사카이 유지를 외팔이로 만들었다.
‘신체의 결손’만큼 명확하게 자신이 약자라는 걸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으니까.
하지만.
“왜 팔이었을까?”
“뭐?”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뭐가 이상하다는 거냐?”
오진은 낄낄 어깨를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라면 사카이 유지는 ‘별에게 버림받은 땅’을 재건할 수 있는 유일한 개발자였잖아. 그렇지?”
그렇다면.
“팔이 아니라, 다리를 잘랐어야지.”
쿠로사키 소스케의 눈이 부릅뜨였다.
팔이 아닌, 다리를 잘라야 했다.
오진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징징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하.”
절로 흘러나오는 헛웃음.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의문이었다.
개발자의 팔을 잘라서 일의 능률을 떨어트리는 것보다, 다리를 잘라서 도망치지 못하게 만드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니까.
“너도 제정신이 아니었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의 영역이다.
실제 눈앞에 팔이 잘린 채 벌벌 공포에 떠는 사람을 두고 효율을 따질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건 그야말로.
“대체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여기는 게 아닌, 도구나 가축 정도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떠올릴 수 없는 의문이다.
“하하! 이야, 설마 산 사람을 잡아다가 영약을 만드는 새끼한테 그런 소릴 들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오진은 맑은 웃음을 터트리며 손뼉을 쳤다.
“뭐, 어쨌든. 이 정도면 내가 어떻게 네 정체를 알고 있는지 알겠지?”
“왜 그랬던 거지?”
“응? 뭐가?”
“왜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이제까지 모른 척했던 거지?”
소스케는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처음부터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혔으면 됐다.
그런데 왜 굳이 3일이나 지난 지금에야 자신의 정체를 밝힌단 말인가?
“그야 네가 제 살 파먹기를 할 거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제 살 파먹기?”
오진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희생’이 필요했을 테니까.”
예를 들어.
그가 이제까지 쌓아 올려왔던 해마자리 파벌이라거나.
“하, 내 목적까지 모두 알고 있다는 말투네.”
“알고 있지.”
모를 수가 없었다.
“사카이 유지의 정체가 쿠로사키 소스케였다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왜 쿠로사키 소스케가 사카이 유지라는 인물을 연기하면서까지 붙잡혔는가였다.
“쿠로사키 소스케라는 존재를 지워 버리려고 했던 거겠지.”
범인이 자신의 범행을 지워버리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 뭘까?
아무도 모르게 잠적하는 거?
전신 성형을 해서 다른 사람으로 위장하는 거?
아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범인’ 자체가 죽었다고 착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미 죽은 사람을 쫓을 방법은 없으니까.
“왜, 천도윤이 뒤졌다는 얘길 듣고 똥줄 타기라도 했어?”
“…….”
소스케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졌다, 졌어. 이거 못 당하겠네.”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계획이라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지만.
설마 이 정도로 철저하게 파훼 당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소스케가 허탈한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을 때.
-저벅, 저벅.
계단을 내려오는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사카키와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는 하은이 지하실로 내려왔다.
사카키의 뒤에는 코시로를 비롯한 쿠로우시의 조직원들이 줄지어 지하실로 내려오고 있었다.
“사카이 유지… 아니, 쿠로사키 소스케.”
사카키는 모든 대화를 들었다는 듯 사납게 눈을 빛내며 소스케를 노려봤다.
“뭐야? 밖에 모여서 옹기종기 엿듣고 있었던 거야?”
소스케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지하실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쭉 둘러봤다.
“이 노오오오오옴!!!”
쿵쿵!
사카키는 귀가 아플 정도로 쩌렁쩌렁 울리는 노성을 터트리며 의자에 묶인 소스케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 모든 게… 그 모든 게 전부 연기였단 말이냐!!!”
지난 3일 동안 유지에 대한 일로 얼마나 갈등하고 고민했던가.
무릎 꿇은 채 죽여달라 울부짖는 유지의 모습에 차마 검을 내려치지 못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쫄리기는 했는데 말이야, 역시 우리 사나이 중의 사나이는 다르다니까!! 죽이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다고!”
소스케는 멱살을 잡힌 채 실성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데… 우리 미친 황소 씨. 그거 알고 있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연기를 했던 게━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거?”
“뭐라고?”
사카키가 눈살을 찌푸렸다.
-타닥!!
그의 뒤에서 거칠게 발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서늘하게 사카키의 목덜미를 스치는 살기.
사카키가 다급히 고개를 돌린 곳에 보인 것은,
“…죄송합니다, 오야붕.”
두 손으로 칼을 쥐고 있는 코시로의 모습.
코시로는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칼을 들어 올린 채, 사카키의 등을 향해 내려찍었다.
물웅덩이에 집어넣었다가 빼낸 듯 투명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칼날이 사카키의 심장을 꿰뚫으려 했을 때.
-탁.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듯.
어느새 코시로의 옆에 다가온 오진의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
손을 붙잡힌 코시로의 입에서 안도 섞인 탄성이 흘러나왔다.
차라리 공격이 막힌 게 다행이라는 듯.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하아.”
코시로의 팔을 붙잡은 오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지랄만큼은 안 나길 바랐는데.”
거친 욕지기를 중얼거리며 코시로의 배를 거칠게 걷어찼다.
쿠웅!
코시로가 뒤로 튕겨 나가며 벽에 처박혔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칼이 바닥을 굴렀다.
“이게, 무슨….”
사카키는 유지의 정체가 쿠로사키 소스케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충격받은 표정으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
오진은 씁쓸한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진 코시로를 내려다봤다.
그가 가만히 입을 닫고 있었다면 굳이 먼저 얘기를 꺼내려 하지 않았지만.
결국 사카키를 향해 칼을 뽑아 든 이상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사카키 씨, 유메하나시를 썼을 때 기억하십니까?”
“…기억, 나네.”
“그때 분명 소스케는 유메하나시에 걸렸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방법은 간단했다.
지루할 정도로 단순했고, 하품 날 정도로 싱거웠다.
“유메하나시는 가짜였습니다.”
“…….”
“그리고 그때, 진짜 유메하나시와 가짜 유메하나시를 바꿔치기할 수 있던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죠.”
오진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코시로를 내려다봤다.
기절한 건 아니다.
방패자리의 각성자인 그가, 벽에 좀 처박힌 정도로 기절할 리가 없을 테니까.
“코시로….”
사카키는 떨리는 눈으로 코시로를 바라봤다.
“왜? 대체, 왜…?”
오야붕이라 자신을 부르던 코시로의 모습이 떠올랐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자신과 같은 사나이가 되고 싶다며 힘차게 외치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코시로는 그에게 단순한 부하가 아니었다.
제자이자, 아들 같은 존재였다.
“왜, 왜, 왜, 왜애애애!! 대체 왜 그런 거냐 코시로오오오!!!!”
사카키는 절규하듯 외쳤다.
“…오야붕.”
코시로는 입술을 짓씹으며 파르르 어깨를 떨었다.
오진은 그런 코시로의 모습을 지그시 내려다보다 이내 소스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카이 유지가 왜 쿠로사키 소스케를 따랐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뭔 소리 하는 건가? 사카이 유지는 저놈이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
“왜, 쿠로사키를 따랐다고 생각하십니까?”
“…….”
사카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소스케의 멱살을 틀어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오진은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독에 중독된 건 사카이 유지의 여동생이 아니라… 코시로 씨의 여동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