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17
기사와 귀인 (5)
그는 쓰러진 아서와 클레이오 앞에서 멈추어 섰다. 두 소년은 추위 속에 고립된 조난자들 같았다.
아서는 귀중한 동료인 클레이오를 구하려 했고, 클레이오 역시 아서가 지탱하는 세계가 무사하길 바랐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하려는 상대가 있다는 조건은 인간을 강인하게도, 유약하게도 만드는군.”
왕세자는 기이한 것을 들여다보듯, 소년들을 향해 살풋 허리를 굽힌다.
“이중 발진을 무결하게 완료해 내었으니, 경에겐 답을 해 주어야겠군.”
클레이오는 꺼져가는 정신 속에서도 흘러내리는 단어들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멜키오르의 탄식엔, 클레이오가 갈급하게 알고 싶어 한 진실들이 드러나 있었다.
“이 고통은 여러 번 반복된 것이고, 종래에는 이것이 내 명예를 취해가고야 말겠지. 허나 나의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는 존재가 주어진 것은, 영원 가운데 처음이군.”
멀리까지 울리는 멜키오르의 목소리가 아서의 의식을 두드려 깨운다. 3왕자는 아직 눈을 감은 채였지만, 그의 주변으로 에테르가 고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왕세자는 아서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가 응시하는 것은 오로지, 이제껏 두 번 있지 않은 존재이다.
“반복은 모든 것을 마모시키지. 고통도 기쁨도 마찬가지. 그 억압적인 굴레 가운데 그대가 와, 이는 내 대적의 결과로 얻은 복인가, 변덕스런 신이 내보인 회유의 증좌인가 의아히 여긴 적이 있었지만… 그 어느 쪽도 아니었던 거야.”
멜키오르의 음성은 여전히 사람의 감정을 모르는 듯 맑건만, 말이 담고 있는 내용은 어조를 배반한다.
“그 새로움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나의 몫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 이 세계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눈물과 땀으로 흐릿해진 클레이오의 시계가 가까스로 초점을 되찾는다. 그는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긴장 속에서 왕세자의 표정을 확인한다.
세상이 자신을 위해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덤덤히 인정하는 멜키오르의 얼굴에는 체념도 분노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래서 클레이오는 두려웠다.
그 긴 세월 동안 내내 패배하고, 명예를 잃고, 끝내 죽음에 이를 만치 무시무시한 고통을 겪어왔으면서도 품위를 지키려는 멜키오르의 의지가.
역사 속에서 그런 자들이 벌였던 일들을 ‘정진’은 안다.
증오보다 강한 것은 신념이고, 분노보다 강한 것은 자신의 정의를 실천하게 만드는 확신이다.
아서를 꽉 붙잡은 클레이오의 팔이 희미하게 떨린다. 혹은 클레이오의 등을 감싼 아서의 팔이 떨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년들은 한 배에서 난 짐승의 새끼들처럼 가까웠으므로 구분은 무의미했다. 꽤나 상징적인 광경이라고 멜키오르는 생각한다.
“그래 물론, 신은 응답하지 않는 자이니 이 모든 사건은 우연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
별들의 궤도처럼 가까웠다가 다시 멀어지는 희망, 그를 위하여 짜이지 않은 규칙과 우주의 법칙들을 멜키오르는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거역하려고 할 뿐이다.
“알비온 왕국의 왕은 대관의 순간, 우리 우주의 법칙에 불가해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 나는 그 관을 부수려고도, 외면하려고도 해 보았어. 하지만 실패했지.”
서사의 틀에 매였으나, 그 틀을 벗어나고자 하는 존재. 펜을 든 저자의 뜻을 거역하려는 자. 그를 고작 책장 위의 등장인물로만 여길 수 있는가?
클레이오는 떤다. 그의 불안을 감지한 듯, 아서의 주변으로 감돌던 에테르가 결국에 [강화]를 일으킨다.
아서와 한데 뭉쳐 있는 클레이오의 주변 역시 [강화]를 입고 옅게 빛나기 시작했다.
끙끙 앓으며 아직 정신도 못 차리는 어린 왕자는 무의식중에 이런 일을 해내는 것이다.
멜키오르는 미소 짓는다.
“내 아우는 정의롭고 신의를 아는 아이지. 나는 이 애, 나의 어린 동생으로 정의되는 소년을 결코 미워하지 않아. 우리는 둘이고, 왕관이 하나인 것이 문제일 뿐. 범상한 인간의 몸에 신성이 깃드는 기적의 순간을 나는 원하네, 내 항명의 도구로써.”
클레이오는 저 두 리오그난의 필사적임이 지나치도록 생생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살려낸 생명의 뜨거움이. 운명에 저항하는 자의 선언이.
그저 원고를 읽은 이, 애정도 기쁨도 없이 원고를 교정하는 이, 저자의 의지를 수동적으로 수행할 뿐인 외부자가 이들의 생애를 정정할 권리가 있을까?
여덟 번이나 반복된 다시쓰기의 목적은 무엇인가?
저자의 뜻은 진실로, 정해진 결말에 가 닿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애초에 ‘정진’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모른다.
알지 못하는 마지막을 위해 현재를 살아내야 한다는 점에서 더 이상 는 한낱 이야기로만 느껴질 수 없었다.
그때.
왕자의 에테르가 가호하는, 처참한 꼴의 마법사에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손끝이 가 닿는다.
기다란 손가락은 소년의 볼품없는 목 위를 별안간 짓누른다.
어린 리오그난의 [강화]는 폭력의 시도에 강하게 반발한다. 멜키오르는 손끝이 붉게 짓이겨지는데도 아랑곳 않고, 클레이오의 숨통을 죄이려 든다.
아서의 에테르와 멜키오르의 고유 스킬은 상극이었다. 아서가 갓 태어난 연약한 어린아이일 때부터 그랬다.
멜키오르는 예측할 수 있었다. ‘간파의 구조시’를 강행하여 쓴다면, 이 자리의 누구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세 번째와 다섯 번째의 생애에서 아서를 살해해 보았다.
그러면 세상은 거기에서 끝난다.
그리고서, 또 반복되는 것이다.
그는 또 다른 반복을 원치 않았다.
멜키오르의 손은 살의 없이 떨어져 나간다.
‘그를 위하여 주어지지 않은 세계’가 안기는 좌절은 왕세자에게 익숙한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그 법칙이 존속함을 확인하려는 절차에 가까웠다.
“물론 그대는 내가 그리는 미래를 바라지 않겠지. 내가 기적을 소유하는 것을 방해할 테고. 나는 그대가 실패하길 바라면서도, 그대에게 감사하고 싶어. 이 두 가지는 모순 없이 공존 가능한 마음이지. 인간이란 본디 그렇게 설계된 존재가 아닌가?”
의식이 꺼져가는 클레이오의 귓가에 남는 것은 맑고 고요한 웃음소리였다.
***
마수의 습격으로부터 나흘이 지났다.
그 사이 선대 공작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알비온의 대부분 지역에서 매장이 관습인데, 트리스테인 영지에선 특이하게도 화장(火葬)을 했다.
초대 공작 랑슬로 트리스테인부터 시작하여, 이제껏 사망한 공작의 유해는 모두 화장 후 제카브르 항에 뿌려졌다고 한다.
클레이오와 아이들은 모두 외부인인 데다 부상이 심해 성에만 머물렀지만, 산골(散骨)을 위해 항구에 띄운 배에 태서턴을 수행해 갔던 로탄이 눈마저 녹일 듯 울었단 이야긴, 입이 싼 트루데에게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쯤 오래 앓았으면 친부모라도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인데… 이 기사단이 얼마나 공작가와 정서적으로 밀착돼 있는진 알겠어.’
공작의 처참했던 최후에 대해선 멜키오르가 적절히 앞뒤를 생략해 발표했다.
피톤의 공격으로 본성이 부서지며 계단이 끊긴 탓에 미에츠와 이시엘의 진입이 늦어진 데다, 멜키오르를 수행한 태서턴이 공작의 경비병을 모두 물려놓아 가능했던 일이었다.
즉, 사태에 대한 근거리 목격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원거리 목격자는 엄청나게 많았지.’
멜키오르가 산중까지 끌고 들어온 신문기자들과 사진사들은 엄청난 특종을 잡았다는 흥분 속에서, 수도로 전보를 쳐댔다.
그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중앙일간지는 물론이고, 북부의 신문들도 베일에 감싸인 기사단이 벌인 마수 떼와의 일전, 새 트리스테인 공작의 엄청난 무위, 의연히 처신한 왕세자의 지도력을 주제로 활활 타오르게 되었다.
일단 지면에 등장하면, 제아무리 열화된 화상이라도 멜키오르가 판면의 기조를 지배한다.
이미 성인기에 이른 지 오래되었음에도, 왕세자의 외견은 나날이 현혹의 정도를 더해가는 것 같았다.
아슬란을 찬양하던 기사들의 면적이 줄어들고, 중앙 일간지 1면은 다시금 멜키오르의 행적을 좇는다.
여론이 반전되며 호사가들이 입을 재게 놀리는 동안에도, 태서턴은 멜키오르의 안위 외엔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신문에는 태서턴의 모습도 실려 있었다. 길어난 앞머리를 올려 넘기고 예복을 입은 그에게선, 공작 각하다운 귀족적 풍모가 느껴졌다.
‘실체는 좀 다른 것 같지만 말야. 사진이란 건 얼마나 자의적 매체인지.’
추도사를 낭독하는 왕세자의 곁에 선 제23대 아르모리크 공작은 슬픔을 숨긴 부단장에게도, 부친의 관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게, 꼭 귀족이라서 그런 건 아닌 거 같고.’
과거에도 충성스런 기사이기는 했으나, [영원성의 직유]라는 언약을 얻은 태서턴의 행동은 그 정도가 더했다.
‘태서턴이 도대체 뭐의 환생자란 말이지? 초대 트리스테인 공작의 환생이란 뜻인가? 그건 또 완전 새로운 설정이잖아.’
클레이오가 짐작하기에, 환생이란 게 원고의 개정을 뜻하는 건 아닐 것 같았다.
‘그렇다면 디오네처럼 지난 원고에 안 나오는 사람을 뺀 나머지 모든 인물은 다 환생자여야 하는데, 그런 타이틀은 안 떴잖아. 아, 도대체 뭐가 뭔지.’
“후우우우우.”
긴 한숨을 내쉰 클레이오는 오래 누워 아픈 허리를 이리저리 뒤틀며 반대 방향으로 몸을 뒤집었다.
‘하룻밤 만에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잘 정리도 안 되네. 한동안 평화롭다 싶더니, 무슨 이런 급전개냐고.’
이꼴저꼴 다본 상태로 에테르까지 탈탈 털린 클레이오는 사흘간 거의 정신도 못 차리고 앓았다.
병명은 에테르 고갈이 아니라 감기몸살이었다.
그 추운 밤, 지붕이 떨어져 나간 건물의 찬 바닥에 나뒹군 대가였다. 여름정원의 케이프도 이번엔 완벽한 방비가 돼주지 못했다.
아서는 하루 반 만에, 나머지 아이들은 하루 만에 멀쩡해졌는데, 클레이오 혼자만 침대 신세를 못 면했다.
물론 그 돌발적인 전개 때문에, 얻은 것도 많기야 했다.
아서의 레벨이 6으로 올랐다. 클레이오 자신도 드디어 5레벨을 달성했고, 북쪽 포탑에서 싸웠던 안젤리움 쌍둥이들 역시 4레벨로 승격되는 경사가 있었다.
다들 방학 동안에도 엄청난 양의 수련을 거듭한 뒤이다 보니, 마수를 잡으며 경험치를 쌓자 금세 레벨이 오른 것 같았다.
‘거기에, 내 고유 스킬까지 원쁠원 됐네.’
클레이오는 누운 채로 자신의 손을 뻗었다.
왼손에는 약속이, 오른편에는 희미한 실금으로만 남은 성흔의 흔적이 보였다.
직사각형의 ‘편집자 권한’ 가운데, 손등뼈를 따라 2센티가량의 금이 새로이 그어졌다.
고유 스킬을 가동시켜 보자 짧은 메시지가 떴다.
[고유 스킬: 작내 서술―발현 형태: 미정
―발동 조건: 미충족]
발동 당시에 고지된 것처럼, 혼자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실행이 안 되는 스킬이었다.
‘내 맘대로 쓰지도 못하는데 고유 스킬이라는 분류는 뭐 하러 해놨담.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스킬명 역시 아리까리하긴 마찬가지였다.
‘약속’을 풀로 돌리고서야 교양 수업 를 수강했을 때, 복사 자료로 꾸역꾸역 읽었던 설명 몇 구절과 간신히 연결시킬 수 있었다.
‘연극이나 문학에서 작품 내의 사건을 배우 연기나 묘사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화자나 저자의 대리자가 말로 들려주는 기법. 뭐, 그런 거 아니었나… 맞지?’
솔직히 확신은 안 갔다. 구글링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었다. 없는 구글을 애달피 그리워하는 동안, 다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자리끼를 벌컥 들이킨 후 도로 드러누운 클레이오는, ‘작내 서술’이 발동될 때의 메시지를 되새겨 봤다.
이제껏 클레이오가 읽을 수 있었던 부분의 에선 ‘약속’의 메시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클레이오의 내면 역시도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메시지는 원고에 쓰이게 된다고 했으니, 나랑 연관된 서술이나 뭐 그런 게 에 나온다는 거 아냐. 근데 그런 게 너무 많이 나오면 글이 삐걱댄단 거고. 으, 편집자 권한 쓸 일 있음 확인을 해 봐야겠어.’
처음으로 귀에 들렸던 메시지.
『세계의 안위에 깊이 연루된 존재와 진심어린 뜻을 같이할 때, 신의 영예로운 총애가 지상에 임한다.』
신은 저자이고, 영웅은 주인공이다.
정보전달 위주로 사무적인 ‘약속’의 메시지에 비하자면, ‘작내 서술’의 문장은 사뭇 시적이었다.
새로이 생긴 고유 스킬 ‘작내 서술’의 개입은, 편집자인 ‘정진’이 원고에 관여하는 것과 다른 행동으로 분류된단 뜻 같았다.
‘서사 개입도가 높아진 탓도 있으려나.’
클레이오는 기분이 묘하게 뒤숭숭했다.
‘파란 약 먹고 눈 딱 감기로 한 뒤엔, 서사 개입도가 높아지면 언젠간 나도 등장인물이 되는 거 아닐까 싶긴 했어. 이쯤 오면 나도 삼분지 일은 작품에 걸친 존재라 이건가.’
물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 세계를 벗어나지도 못하는 클레이오가 인간이든 인물이든 간에, 그 자신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항상 아서와 원고와 왕세자이다.
근로기준법 준수가 시급함
우선은 왕세자.
클레이오 입장에선 차라리 그가, 이전 수정 버전의 책 빙의자라든가, 저자의 사악한 쌍둥이 같은 거면 상대하기가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베헤못은 멜키오르를 인간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그는 뮤즈의 가호를 받을 뿐, 그저 인간이란 결론에 이른다.
환생자로 각성한 태서턴이 기절할 때의 정황을 돌이켜 보면, 멜키오르에게도 클레이오의 것과 비슷한 정보창이 뜨는 것 같았다.
멜키오르 주변에 떠오른 메시지가 ‘클리오의 약속’의 출력 영역을 벗어난단 경고는, 그렇게 설명이 되었다.
왕세자의 고유 스킬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스킬을 쓸 때 사람들 생각과 신상명세라도 띄워 주는 용도인 것 같았다.
‘뮤즈의 이름이 붙은 고유 스킬을 가진 건, 지금까진 나랑 그 작자뿐인데… 뮤즈랑 엮인 사람은 모두 메시지를 보게 되는 건가?’
LED 전광판 메시지를 띄워주는 그리스 신이라니, 이 무슨 끔찍한 혼종이란 말인가… 따위 생각을 하던 클레이오는 이내 의문에 부닥쳤다.
주인공인 아서도 아니고, 악역인 멜키오르가 뮤즈의 가호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직접적으로 위력행사는 안 한다는 신이, 그럼 이름과 ‘말씀’으로만 흔적을 남기는 건가? 일종의 후원자로서?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애초에 이게 저자의 의도긴 한가?’
‘정진’에게는 세계를 갱신해야한다는 목적이 주어져 있었다. 작품 외부에서 온 그는 이 세계 안에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약속’의 형식으로 클리오의 이름을 받았다.
멜키오르가 ‘정진’ 자신처럼 작품 외부로부터 온 존재가 아니란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그가 에라토의 성흔을 가진 이유는 미궁에 빠진다.
‘…그리고 그 인생은 너무 참혹해지는군.’
오로지 주인공의 최종적인 승리를 장식하기 위해 살아낸 여덟 번의 생애, 감당해야 할 여덟 생애의 선명한 기억.
라는 원고에서, 멜키오르의 투쟁에 대한 서술은 완전히 누락되어 있었다. 그 원고가 이해하고 해명하려는 대상은 아서이지, 멜키오르가 아니기에.
클레이오는 세계의 대적자에게, 극히 희박하면서도 불가해한 연민을 느낀다. 동시에, 그따위 부정한 인정을 느낀 자신을 비난하고 싶어진다.
‘지금 누가 누구 걱정을 해. 내 인생이야말로 꼬라지가 말이 아니구만.’
이건 어쩌면 ‘매혹’ 스킬에 노출된 후유증일지도 몰랐다.
그날 밤 ‘약속’이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 하며 널을 뛰던 새, 「이격」의 기능이 약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에라토의 매혹’은 막강한 스킬이었다. 멜키오르가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지닌 수단이므로 그럴 법도 했다.
납득이 된다고 해서 스킬에 휘말린 게 기쁠 리 없었다.
클레이오는 군생활을 했던 그 지방에서만 쓰이던 비속어 여섯 가지 정도를 속으로 질러 놓고서야 화가 좀 가라앉았다.
‘기분 더럽네, 젠장. 심지어 그 자식 막판에 신을 시험해 본답시고 내 숨통을 틀어쥐었지. 놈은 그냥 악역도 아니고, 완전 신념 있는 미친놈이 된 거잖아. 골치 아프게.’
그날 밤 컨디션이 바닥을 치는 와중에도 멜키오르의 극적 독백을 열심히 주워들은 클레이오는, 그가 대관식 자체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나라의 미래나 인민의 안녕, 뭐 그런 데엔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이제 삼분의 일은 알비온 국민인데, 놈 같은 왕은 절대로 사양이다.’
클레이오가 생각하기에 멜키오르는 뭘 너무 많이 알아서 돌아버린 자였다. 그런 놈은 한 작품에 한 놈도 너무 많았다.
그리고 아서.
정통파 주인공 아서는 주인공답게, 끝까지 세상의 잘못 만들어진 구석 같은 건 좀 몰라줬으면 하는 바람이 클레이오에겐 생겼다.
‘그런데 새 고유 스킬 여파가 그따위라니…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냐고.’
클레이오는 ‘작내 서술’ 발동 시 떠오르던 경고문을 꼼꼼히 되짚어보았다.
1. ‘작내 서술’의 활성화는 작품의 내적 일관성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
2. 원고의 내적 일관성이 심각하게 저해될 경우 서사 구조가 해체될 위험성이 존재한다.
저 알 듯 말 듯 한 경고의 내용은 스킬을 쓴 직후 확실해졌다.
‘지금이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뭐든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네. 그 모든 의문에 답이 존재하는 거였다니.’라는 아서의 혼잣말 때문에.
도대체 무슨 의문이 풀린 거냐고는, 사건이 끝난 뒤에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물어보려 해도 코빼기나 보여야 말을 붙이지. 그 자식은 다친 지 얼마나 됐다고 모래주머니를 매고 산을 오르냐고. 수련에 미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서가 전에 없이 진지한 태도로 단련에 돌입하자, 객원 기사로 공작령에 남은 미에츠 역시 교육 혼에 불이 붙었다.
아서와는 같은 방을 쓰는 데도 요 나흘간 얼굴한 번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식사를 들여 주는 사용인들이나, 문안 온 기사들을 통해서야 아서, 이시엘, 미에츠 세 사람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공작령 사람들은 이시엘과 아서가 대련하다 열두 번째로 다시 훈련장 바닥을 파헤쳤다느니, 산에서 폭발음이 나 순찰대가 가 봤더니 아서와 미에츠가 나무막대기만 들고 싸우고 있었다느니 하는 에피소드를 토막토막 전해 주었다.
마수 습격의 밤 이후, 아서는 살벌하게 기운을 빡 돋우고 다니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렇잖아도 자신에게 이런저런 의문을 품고 있는 듯한 사춘기 왕자를 찔러 봤다 본전도 못 찾으면 어쩐단 말인가?
클레이오는 아서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너무 많았고, 수많은 비밀들은 앞으로도 내내 극비일 예정이었다.
‘이미 아서는 환시까지 보는데, 거기다 원고에 관해 알게 되면 어쩌라는 거야.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더니. 이건 또 뭔 염병인지, 원.’
믿고 있던 ‘편집자 권한’은 먹통이 되질 않나, 그나마 정이 좀 든 주인공 살려 보겠다고 애를 썼더니, 이번엔 작품의 내적 일관성이 침해된다질 않나. 편하게 운신할 구석이 없었다.
분통이 가중되는 이유는 또 있었다.
중요한 순간 팍 퍼졌던 ‘편집자 권한’은, 일이 다 끝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기능이 돌아왔다. 깨어나자마자 에테르를 밀어 넣어 보니 멀쩡하게 청남빛 광채가 도는 게 확인됐다.
그때 클레이오는 뭐라도 집어던져 부수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남의 성에 얹혀 있는 입장이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저자 새끼, 내가 권고해도 안 들어 처먹으면서 이름만 그럴듯하게 지어 놨네. 그럴 거면 스킬 횟수는 뭐 하러 정해 놨담. 횟집에 붙어 있는 시가처럼, ‘되는 날: 저자 마음’이래 놓지. 참나.’
당면한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클레이오는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그렇지만 근육통과 고열의 여파가 남아 쑤시는 몸뚱이를 좁은 침대 위에 누이고 있자니 드는 생각은 딱 하나였다.
‘휴직계 내고 싶다. 딱 한 달만이라도 원고고, 뭐고 아무 생각 안 하고 싶다! 아! 책 빙의자에게도 근로기준법을 적용시켜 줘!’
***
클레이오의 열이 완전히 내리기까지는 일주일이 걸렸다. 체온이 정상이 되자마자 클레이오는 기차표부터 예매했다.
먼저 돌아가라고 권해도 안 가고 버티던 아서 일행 역시 내일이면 수도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 클레이오에게 [경감] 마법이라도 걸어 주었다면 회복이 빨랐으련만, 일이 꼬이자니 끝도 없었다.
견습 마법사는 마수 습격 이후 일을 그만둬 버렸다. 메이어 영감은 태서턴 트리스테인 한 명 치료하는 것도 힘에 부쳐, 클레이오까지 봐줄 수 없었다.
대신 성의 하녀들이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여럿이 돌아가며, 클레이오의 긁히고 찢긴 상처를 소독하고 연고를 발라주었다.
기사들, 병사와 그들의 가족까지 꿀이며 졸인 과일, 생강차 같은 걸 잔뜩 쟁여 와 먹이기도 했다.
그동안 아이들은 성의 복구를 돕고, 수련에 매진했다.
놀 만한 것도 재미난 것도 없는 산속의 고립된 성채이다 보니, 말 그대로 폐관 수련의 양상을 띠었다.
‘그나마 쌍둥이들이나 첼이 하고 있는 게 수련의 영역이지… 아서 자식은, 휴.’
이때, 클레이오가 짐을 싸고 있는 방에 트루데가 방문했다.
“여! 꼬마마법사 짐 싸나!”
땅콩과 호두로 가득 찬 광주리를 든 기사는 지난 일주일 내내 그랬던 것처럼, 오늘 자 아서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서의 기행은 도가 심해져 기사단원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 되었다.
모두들 믿고 있는 미에츠가 감독하지 않았다면, 산중에서 폭포의 얼음을 부수며 거꾸로 올라가는 짓 같은 건 진작 뜯어말렸을 것이라 했다.
클레이오의 얼굴이 ‘아, 아서 새끼….’의 뜻을 드러내며 구겨지자, 땅콩을 까던 트루데가 미적미적 아서를 감싸주었다.
“그래도 막내왕자가 미에츠랑 짝지어서 온 산을 쑤시고 다닌 덕분에 그림자 거미가 다 어서 튀어나왔는질 찾아냈으니, 큰 성과지. 대~단한 놈이여.”
그날 영지에 출몰한 그림자 거미는 물경 수천 마리였다.
마석을 핵으로 삼아 만들어지는 것이 마수이니, 어딘가에 대량의 마석 부스러기가 매립돼 있었다는 것인데, 천 년간 꾸준히 마석을 채취해온 영지민들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런데 오리무중이던 그림자 거미 습격의 원인을, 아서와 미에츠가 수련 중에 알아냈다는 것이다.
“딴 데도 아니고 발 삐끗하면 바다로 풍덩 하는 갈고리 절벽 제일 깊은 곳에 마석 흑수정이 그렇게나 많이 묻혀 있었을 줄이야. 진작 알았음 얼마나 좋았을까.”
“아마 지층에 파묻혀 채굴 불가능한 장소에 엉겨 있었을 겁니다. 마수가 되는 마석들은 대개 그렇다고… 자료에서 본 적이 있거든요.”
“맞어맞어, 라이사도 그렇다고 하더라. 요 근래 산사태가 나서 바위가 쩍 갈라지니 마수가 더 많이 나온 거라고.”
“조사와 연구가 정확하고 빠르군요. 대단합니다.”
“라이사는 우리 중에 제일 똑똑하거든. 근데 꼬맹이 마법사도 보통이 아닌데? 너두 그렇고 저 왕자랑, 늘 같이 다니는 빨갠머리 기사예비생도 그렇고. 수도방위대 학교엔 그런 똑똑이 괴물들밖에 없는가?”
“아서와 이시엘은 예외적입니다. 특히 아서는, 재학생 중에선 비견할 동료가 없을 정도로 기량이 뛰어납니다.”
“어구구. 난 저 나이 때 순 천둥벌거숭이였는데, 또 왕자님이라고 다르긴 다르네. 햐, 꼬마 왕자, 우리 공작님 어릴 때 생각난다는 거 취소야, 취소. 그래도 공작님은 어… 무뚝뚝해 봬도 은근 얼뜨고 인간적인 데가 있었단 말이야?”
오늘분의 수련을 마치고 씻은 뒤 상쾌한 모습으로 클레이오의 방문을 연 첼이 클레이오 대신 트루데의 의문에 답을 해줬다.
아주 자연스런 끼어들기였다.
“트루데, 넌 아서한테 사람의 마음이 없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말도 안 돼. 걔 원래 완전 망나니로 유명한데.”
“망나니 다 뒤졌남? 축하연에서두 술 한 방울 안 마시고, 딱 밥 먹고 나가선 새벽 세 시까지 똑같은 검식 천 번 넘게 긋고 있는 놈이 망나니야?”
“뭐… 사람이 계기가 있으면 변하기도 하고, 그런 거지.”
첼은 어느새, 기사단의 떠벌이인 트루데와 경칭을 생략하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나이가 어리고 성격이 단순한 트루데는 호탕한 첼과 은근히 죽이 잘 맞았다.
클레이오가 느릿느릿 짐을 싸는 동안 침대 주변에 대충 둘러앉은 첼과 트루데는 호두와 땅콩을 빠각빠각 까먹으며 수다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둘의 대화를 듣던 클레이오는 속으로 혀를 찼다.
‘6레벨이 되었으면 한 며칠만이라도 자축하며 쉬어도 좋지 않겠냐고. 아니면 그 레벨업이 온전히 자기 힘이 아니라거나, 뭐 그런 생각 하나?’
아서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6레벨이 되었는데도 칭호가 안 뜨고 그냥 공란으로 보이는 것 역시, 클레이오의 고유 스킬과 얽힌 채로 레벨업한 탓이라 여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미 이렇게 된 거 어쩌겠는가.
‘새끼, 안 그렇게 생겨선 별일 아닌 데 은근히 연연한단 말야.’
킬킬 웃던 첼이 트루데에게 답을 해 줬다.
“난 왕자님 뭔 생각하는지 알겠던데. 공작 각하가 그 정도 부상 입었으면 그렌델이란 마수가 보통이었겠어? 자기 힘이 부족해서 일이 다 엉망이 되고, 우리 골골이 마법사도 쓰러졌다고 생각하는 거야.”
“왜 그게 왕자 책임인감?”
한참 수트케이스를 정리하던 클레이오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게 멈췄다.
분위기 파악에 천재적인 첼은, 트루데의 해맑고도 난처한 질문을 능숙하게 흘려냈다.
“그러게? 왜 그럴까? 근데 트루데 이 호두 어디서 딴 거야? 너무 맛있는데?”
“아, 그거 우리 삼촌이 호두나무를 몇 그루 가지고 있는데, 좀 더 줄까?”
“오오, 고마워. 기차에 가면서 까먹어야겠어. 너도 나중에 수도에 오면 카멜리아 관에 들러 줘.”
“캬캬, 그래! 봄이면 이 몸이 다시 룬데인에 뜬다!”
마수 준동 이후 아이들과 기사단원들은 엄청나게 가까워졌다. ‘생사고락을 같이했으니 동료다.’라는 로탄의 말도 효력이 있었다.
그는 츤데레 중년으로서, 클레이오의 예상대로 누구보다 극진히 아이들을 돌보아 주었다.
그런 포용적인 지도력이 필요할 때긴 했다. 성 안의 분위기가 뒤숭숭했기 때문이다.
마수 습격 사건 때문이 아니었다.
트리스테인의 군사들은 사망자 한 명 내지 않고 효율적으로 마수들을 막아냈다. 대승이라면 대승이었다.
오히려 멜키오르가 남기고 간 명령이, 공작의 사망이나 마수 준동보다 더 큰 풍파를 일으키고 있었다. 사정은 외부인인 클레이오의 눈에도 빤히 보였다.
이 영지에서 스킬의 후유증도 [경감] 했겠다, 트리스테인 기사단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도 손에 넣었겠다, 실속을 톡톡히 챙긴 왕세자는 공작의 장례식을 마친 후 곧바로 수도로 돌아갔다.
시류를 잘 읽은 멜키오르는 큰 저항 없이 트리스테인 기사단의 제약을 풀 수 있었다.
그가 남긴 명령은 ‘제23대 아르모리크 공작 태서턴 트리스테인에게 북의 영지를 지킬 의무를 면제하며 상속 절차를 마무리한 후‘필요한 인원을 동반하여’ 수도로 상경하라‘는 내용이었다.
천 년 만에 주어진 이주 허가증에, 젊은 기사들의 분위기가 들떴다.
겨울 방학의 마지막 즐거움
“아! 글고 보니, 우리 집 작은놈에게 들었는데, 어, 꼬마 네가 그렇게 유명인사라며! 난 수도에 못 간 지 한참이 돼서 이제야 알았어라?”
달칵.
다 정리한 수트케이스를 닫은 클레이오는 적당한 대답을 주워섬겼다.
“작은 트루데 님이 과장하신 감이 있습니다. 수도의 신문들이 별것 아닌 이야기도 부풀리기 좋아하는 걸 트루데 경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신문 같은 건 태어나서 한 페이지도 다 읽어본 적 없는 트루데였다. 하지만 소년 마법사가 그를 점잖게 돋워 올려주니, 에헴에헴 거리면서 수긍하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이야길 듣던 첼은 웃으면서 호두만 깠다. 레벨 4의 검사는 망치로 부숴야 할 호두 껍데기를 맨손으로 잘도 깠다.
“그, 그래. 맞아. 신문은 일을 너무 과장하곤 해. 나아쁜 놈들.”
클레이오의 은근한 화술에 말린 줄 모르는 순진한 기사는 영지의 다른 소식도 낱낱이 전해주었다.
나이가 지긋한 기사들은 동요가 없었지만, 여기 트루데 같이 선발대로 뽑힌 자들은 벌써부터 짐을 싼다, 어머니에게 인사를 한다, 난리였다.
“아! 우리 공자님, 아니 새 공작 각하가 말이야! 그림자 거미에게서 나온 마석 흑수정은 병사와 기사 모두에게 공평히 나눠줬는데, 꼬마 너 때문에 말여, 그 양이 팍 줄었잖어.”
클레이오도 자신의 레벨이 오를 때, 에테르 폭주가 와서 마수뿐 아니라 마석까지 녹여버렸단 이야긴 들었다.
소년이 어색하게 고개만 갸웃거리니, 트루데는 조막만 한 손을 뻗어 클레이오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아니, 못했단 게 아니고! 잘했는데, 너무 잘해서 큰일이다, 인마!”
트루데는 키가 작고 몸집도 작았지만, 힘은 셌다. 활의 명인인 데다, 걸음이 날쌘 4레벨 기사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클레이오의 등을 두드리니, 기다란 소년이 구불구불 수그러드는 모양새가 웃겼다.
호두를 다 까놓은 첼이 깔깔 웃어젖혔다.
“그만해. 애 잡겠다.”
“허, 고작 이걸로. 하여간에 무슨 가로등이 걸어 다니는 것처럼 빼싹 말라놓으니 그렇지. 좀 잘 먹어야겠어.”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김에 여쭙는데, 혹시 트리스테인 영지의 향토 음식을 잘하는 요리사를 좀 소개시켜주실 수 있습니까?”
“그건 왜?”
“이곳 영지의 음식이 너무나도 훌륭한 진미라, 꼭 수도로 모셔가고 싶습니다.”
“하하, 꼬마가 맛을 아네! 그래 우리 영지 음식은 최고지! 보자… 있어, 그래! 두 갈래 자작나무집 막내아들을 소개해 주지. 우리 옆집인데, 그 집 어머니부터 솜씨가 끝내주거든.”
신이 나 ‘두 갈래 자작나무 집 막내아들’의 조부모 대 신상부터 터는 트루데를, 번개같이 들이닥친 라이사가 끌고 나갔다.
“트루데! 어디 갔나 했더니 또 여기 와서 땡땡이냐? 5분 내로 북벽 순찰 준비 마친다. 실시!”
“아, 알겠다니까요, 부단장대리님.”
“여기서 자란 너보다 객원인 미에츠가 일을 세 배는 더 하는 것 같다. 뭐 느끼는 점 없어? 어? 수도 가서도 이렇게 얼빠지게 굴면 우리 기사단의 이름이 뭐가 되겠나?”
두 사람은 폭풍처럼 사라졌다.
다 깐 호두를 클레이오 앞에 밀어준 첼이 여유롭게 턱 밑을 받쳤다.
“그나저나 미에츠 선생이 여기 눌러앉다니, 의외인걸?”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못 두고 보는 성미인 거지.”
앞으로도 기사단원 전원이 수도로 이동하는 건 아니었다. 이를테면 부단장인 로탄은 이 북방의 방벽에 뼈를 묻기로 했다. 아르모리크 공작 각하의 성채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맹세였다며.
그렇다 해도 인원이 부족해진 건 사실이라, 미에츠의 잔류는 기사단에 큰 도움이 됐다.
“과연. 로사 교수님의 핏줄다워. 아서 그놈도 그놈이고 말이지. 자기 스승이 장미의 난 때문에 축출당한 정예 기사인 걸 뒤늦게 알았는데도, 태도가 하나도 안 변하는 게 대단해, 정말.”
첼은, 이 영지의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미에츠의 정체를 알았다. 왕세자가 방문한 날 연회장에는 그녀 역시 있었으니까.
멜키오르가 직접적인 견제를 한 탓에, 요 며칠 첼은 바빴다. 자신의 재무상황과 사병 양성 후원 루트에 문제가 생겼는지를 점검하느라 그랬다.
‘그 김에 미에츠 선생의 뒷조사도 싹 해본 것 같군.’
“첼 네가 직접 택한 주군이잖냐. 그릇이 크면 좋은 거 아니야?”
“하하, 그 호칭은 좀 낯간지러운데. 그렇지. 내 명운을 걸 놈이라면 담대하고, 사사로운 덴 연연을 안 하는 게 좋지. 너무 연연을 안 해서 나만 속이 타긴 해도 말이지.”
“…왜. 연락 돌려보니 멜키오르가 무슨 짓이라도 했어?”
“전혀. 내 재산에도, 키시온 자작령에도 제재를 가한 흔적은 없어. 실무자는 모두 오래 알았던 사람들이기도 하고. 어쨌거나, 일이 닥칠 때까진 일단 직진해야지 뭐.”
멜키오르가 비밀정보부 요원을 투입시킨다면, 방비할 방도는 없었다.
첼은 그걸 알면서도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손끝에 묻은 호두 껍데기를 털어내는 첼의 어조는 여전히 가벼웠지만, 말에 실린 책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불법 사병 양성의 자금원.
발각된다면 가문 전체가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계획의 주요 인물인 첼은, 이제 겨우 열여덟 살이었다.
클레이오에게는 새삼스런 의문이 떠올랐다.
“…어쩌면 말야, 네가 원하는 권리를 멜키오르 역시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이야 티플라움 광산이 왕실 소유가 되었으니, 왕실의 재산이 흘러넘치게 되었지만, 그전까지는 점점 세수가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첼이 상속받은 재산을 가지고 처음부터 멜키오르 측에 붙었다면 충분히 협상의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장난쳐? 그 작자는 치를 수 없는 걸 대가로 지불하게 하는 자야. 그에게 충성하는 이는 자신의 모든 걸 바쳐야 한다고 하지. 태서턴 하는 꼴을 봐. 멜키오르 놈은 공정 거래란 걸 모른다고.”
“그 왕세자가 참정권 확대에 미적지근한 입장이기야 하지만, 그렇게 말할 것까지야. 태서턴이 오히려 특수한 경우 아닌가?”
아슬란의 정치적 성향이 시대착오적 왕권 강화를 꾀하는 것이라면, 아서는 환경 때문에라도 평등주의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멜키오르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중간쯤으로 현상 유지에 힘쓰는 쪽이었다.
‘온정적 보수주의자인 왕세자는 아슬란보다 더 첼과 안 맞을 거 같기는 한데, 이렇게 학을 떼며 싫어하는 이유가 뭘까? 악역이라?’
“아니. 그런 식의, 목숨과 영혼을 다한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면, 멜키오르는 누구도 자기 사람으로 삼지 않아. 듣기로, 비밀정보부의 수장도 왕세자의 열렬한 신도라던 걸. 나는 사업가의 딸이야. 같은 금액을 투자해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데에 명운을 걸어보는 게 뭐가 이상해?”
“그러기엔 손해 볼 확률도 너무 크잖아.”
왕국의 왕자들을 주식 투자하듯 재어보는 소년, 소녀의 대화는 몹시도 이상한 것이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일상적인 것이기도 했다.
“디오네에게 안 배웠어? 모험 없이 어떻게 극적인 이익을 바라. 게다가 말야, 나에게도 자존심이란 게 있어. 한탕을 치려면, 내 능력을 가장 간절히 원하는 놈이랑 일을 쳐야 성미에 맞아. 그러면 너는 왜 그 앨 택한 거지? 너야말로 멜키오르의 촉망받는 측근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저자의 뜻 때문에… 라고 답할 수 없는 클레이오는 생각에 빠진 척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골랐다.
“음… 나에겐 그렇게 대단히 객관적인 이유는 없어서. 굳이 따지자면 나를 저랑 같은, 사람의 하나로 봐주는 놈을 택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었던 거지. 어쨌든 나는 평민이기도 하고.”
첼의 은빛 눈에 시린 현기가 돌았다.
“그래, 너도 아는 거군. 왕세자의 이상함을.”
“어떤 이상함?”
‘이상한 점이 어디 한두 가지라야지.’
“그가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정말 좆같다고. 내일 죽을 하루살이의 비행을 쫓듯, 다음 계절이면 시들 들풀을 보듯, 무념의 시선으로 인간을 봐.”
클레이오는 첼의 안목에 탄복했다. 여덟 번의 생애를 고스란히 기억하는 자를 표현하는 말로, 그 이상 정확할 수가 없었다.
“왕족이 타국의 망명자를 하찮게 취급하든, 계집이 사내 흉내를 낸다 시비를 걸든, 난 다 이겨낼 수 있어. 하지만 불멸하는 자들과 같은 시선을 가지고서 남을 굽어보는 그 이상한 태도만큼은 참을 수가 없어.”
잠시 숨을 삼킨 첼은 답지 않게 망설이는 태도로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런 주제에 외견만은 지독하게 아름다우니, 기만적이지. 그 작자의 우미함은 우릴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닌데.”
“…네 통찰력은, 네 검술보다도 더 뛰어나구나. 감탄했다, 첼레스테스.”
“흠. 우리 왕자의 가능성을 너보다 몇 년은 일찍 알아본 날 현인으로 모시기라도 하려고?”
첼은 장난스럽게 클레이오의 팔을 툭툭 치며 진지한 분위기를 흩어놓았다.
***
다 함께 수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달력이 3월로 넘어간 뒤였다.
수도 중앙역에서 인사를 나눈 뒤 아이들은 모두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이제 방학은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정말 파란만장한 겨울 방학 실습이었네.’
클레이오는 트루데에게 소개받은 요리사를 데리고 귀가했다.
알고 보니 그는, 첫날 묵었던 모롤트 유일의 여관에서 주방 보조로 일하던 젊은이였다.
만난 자리에서 지금 받는 급료의 3배 지급을 약속하고, 월급 한 달 치 금액의 수표를 교통비 명목으로 끊어줬다.
수표에 적히는 숫자를 본 청년은 가타부타 없이 바로 짐을 싸, 다음날 기차역에 나타났다.
캔튼 부인은 그녀에게 상의도 않고 사람을 새로 고용한 클레이오의 행동에 난색을 표했지만, ‘트리스테인 영지의 요리가 너무나도 먹고 싶었다.’고 답하자 잔소리를 딱 멈추었다.
생선 가시처럼 마른 도련님이 뭘 먹고 싶다니 그게 뭐든 환영, 대환영이었다.
***
갖은 사건사고가 벌어졌던 실습에서 돌아온 뒤, 클레이오는 아세르 저택에 틀어박혀 한 발자국도 밖에 나오지 않았다.
두문불출이 한 주 넘게 이어진 후, 디오네가 아세르 저택을 방문했다.
그녀는 단행본 작업 진행상황을 알리고, 원고를 가져다줄 겸 온 것이었다.
“이게 레비 씨가 본 최종고예요. 타이프라이터로 친 거니까 읽기 편할 거예요. 마지막으로 당신이 한 번 체크하고 나면 수정사항 반영해서 연재분을 따로 추리고, 슬슬 본문 조판에 들어가려고 해요. 봉투에 든 건 표지 스케치인데, 보고 의견 줘요.”
‘최종고’란 말에 움찔하긴 했지만, 이내 동요를 숨긴 클레이오는 디오네에게 감사를 전했다. 장정에 대해선 미의식 높은 그녀에게 일임했다.
클레이오는 원고도 당연히 누워서 봤다.
「기억」기능이 있으니 초교와 대조할 부분이 있어도 일어나 교정지를 뒤적이는 대신, 머릿속에서 비교하면 되어서 편했다.
종종 사환 아이 편으로 교정지만 보내고 받던 와식 생활이 2주가 넘어가던 무렵, 베헤못이 클레이오를 침대 밖으로 끌어내겠다고 잠옷 자락을 이로 물고 당겼다.
“먀오오오옼!(인간이면 좀 인간답게 활동을 해라!)”
베헤못의 공격에 미적미적 일어난 클레이오는 캔튼 부인의 특제 아침 겸 점심을 먹고서, 교정 끝난 원고를 마법으로 두 부 복사해 마리아 교수를 만나러 갔다.
“이제 정말 책 모양새가 나는구나. 얼른 검토하고 돌려주마.”
교정본을 받아본 마리아 교수가 하도 환하게 웃어, 클레이오까지 묘하게 마음에 설렜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발간의 기쁨이었다.
두 번 나오기 싫은 그는, 같은 날에 제베디 교수와도 약속을 잡았다. 전화가 있는 세계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학장과 만나자마자, 에테르 레벨이 상승한 일부터 고했다.
자신의 제자에게 서클을 열어보게 한 노교수는, 나잇값도 못 하고 팔짝 뛰어올랐다. 소년을 목마라도 태울 기세였다.
클레이오는 신이 난 교수를 달래고는, 물이 들어오는 김에 노를 팍팍 저었다. 마리아 교수 책의 추천사를 부탁한 것이다.
제베디는 자세히 듣지도 않고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
.
.
과업을 마치고 귀가한 클레이오는 후다닥 씻고, 대낮부터 파자마와 가운으로 갈아입은 뒤, 벽난로 코앞의 소파에 눌어붙었다.
삼월에 접어든 날씨는 살을 에듯 춥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으슬으슬하고 썰렁한 기운이 돌았다.
해라도 쨍하게 나면 좋겠건만, 룬데인의 삼월은 아직 햇빛이 내리쬐는 절기가 아니었다.
한참을 멍 때리던 클레이오는 그제야 생각난 듯 마광석 루비 한 줌을 금고에서 꺼내왔다.
만사가 귀찮긴 했지만 발열 장판에 대한 열망은 남아 있었다. 벽난로나 라디에이터로는 뭔가가 미진했다.
마석 가공에 대한 책을 몇 권 훑어보긴 했는데 기능보다는 심미성에 주력하는 방식이라 클레이오에겐 도움이 안 됐다.
일단 발열장판을 만들기 위해선 루비들을 열선 형태로 엮어 적어도 두 겹 천 사이에 고정해야 할 텐데, 그러면 마석의 모양이 가려지게 된다.
마석은 기본적으로 보석이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게 가공되는 예는 없었다.
‘하기야 옥장판에 박아둔 정체불명 돌덩이도 모양새가 보이도록 만드는데, 진짜 보석보다 비싼 마석 루비를 안 보이게 집어넣는 건 너무 심한 처사려나?’
심한 처사면 어쩌란 말인가. 금고에는 마석 루비가 잔뜩 있으니, 그냥 계속 진행하기로 했다.
형이란 작자의 드잡이질까지 당하고서 얻게 된 마석인데, 어떻게든 탈탈 털어 써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마석 루비는 적당히 일정한 간격으로 넣어주면 될 거고. 위아래엔 얇은 펠트로 감싸고, 그 위는 플란넬을 덮는 게 감촉이 좋을 것 같아.’
종이를 꺼내 간단한 설계도를 끼적인 클레이오는, 열선 재질로 티플라움을 생각해 냈다.
하지만 왕실이 독점하고 있는 주요 전략자원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쓸 만한 게 없나 금고 서랍과 아공간 지갑을 뒤지던 클레이오의 손에 은은히 빛을 내는 금속 조각 하나가 집혔다.
‘맞다! 그때, 필드 트립 때 실험한다고 한 조각 슬쩍한 게 여기 들어있었구나!’
응접실에서 전화를 걸다 프리다에게 곧장 잡혀간 터라, 침실에 있던 티플라움 조각은 돌려놓지 못하고 그대로 가져와버렸던 기억이 났다.
그 후로는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귀찮아서 아공간 지갑 정리를 안 한 덕을 볼 줄이야.
‘이걸 녹여서 와이어 형태로 뽑은 뒤에 루비를 전부 엮고… 마법식은 시작점 한 점에만 써넣으면, 보석을 상하게 할 필요도 없고.’
상당히 좋은 아이디어 같았다. 클레이오는 최소 크기로 서클을 열고는 [발열] 마법식을 전개했다. 그 가운데 티플라움을 녹이기 위해 던져 넣었다. 에테르 낭비이긴 했지만, 믿을만한 대장장이를 찾느니 그게 빠를 터였다.
‘시작품이 가동되면 이 설계를 가지고 디오네의 가게에 제작을 맡기자. 멋지게 완성해 주겠지.’
만듦새가 정리되면 저 루비를 갖다 안긴 아버지란 자에게도 루비 장판 한 장 정도는 보내주는 편이, 앞날을 위해 나은 처신이리란 생각이 들었다.
‘블라드 제깟 놈이 수작 부리려고 해봐야 아세르 준남작 눈을 속일 수야 있겠냐만은, 이만한 걸 받았으면 자식이라고 해도 고마움을 표시해놓는 편이 좋겠지.’
처음에는 원망스러웠던 아세르 준남작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그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수도방위대 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던 덕에 많은 일을 이룰 수 있었다.
어쩌면 그의 잃은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 켕겨 이러는 것일 수도 있지만….
‘뭐, 내가 그랬나? 저자 선생이 그랬지.’
클레이오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으며, 바꿀 수도 없는 일에 관해서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