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20
역사학 개론 (3)
레지나는 정진의 결론을 대번에 부정했다.
“□□아, 제발. 알잖니. 네게는 상상의 능력이 없어. 너는 너만을 돋워 올리고, 네게만 다정한 세계를 형편 좋게 만들어내 안주할 수는 없는 인간이야.”
상상력이 부족한 거야 스스로도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저 고운 목소리로 단언하니 ‘정진’은 불이 이는 듯 속이 꽉 죄었다.
“…만에 하나 네 존재가 내 망상 따위가 아니라 해도, 나와 □□이 그렇게 서로를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니. 나는 널 알았어. 아주 오래.”
이럴 때, 레지나의 언설은 기억 속 민산의 말투와 괴리를 일으킨다. 레지나는 계시를 전하는 예언자처럼 말한다. 확신과 열망에 찬 어조는 너무나도 낯설다.
‘오히려 그 앤 목소리가 나직했고, 사람과 낯을 가리는 구석이 있었는데.’
이전의 세상에서 저 대주교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은, 일어나지 않을 멸망을 깃발처럼 걸고 구세주를 참칭하는 이들이었다.
클레이오의 회의적인 시선은 레지나의 기세를 조금도 꺾지 못했다.
“너는 결코 사실 위에 네 상상을 덧붙이지 않아. 너는 주어진 사실을 네 저자성의 허기를 채울 재료로 집어삼키지 않지. 네게는 그러한 욕망이 부재하기 때문에, 나는 너를…∂≒〕▲↓의 편집자로서 ∩Å∠….”
유창하던 레지나의 말에 뭉개지는 구간이 생겼다. 보통 저런 건 서사개입도의 문제였다. 정진은 걷어내지 못할 노이즈에 연연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네가 저자도 아니고, 내 망상도 아니라고 쳐. 그럼 어떻게 여기에, 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어? 넌 원래의 너라 주장하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됐잖아.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거지?”
“저자는 나를 알았지만, 너에 대해서는 오직 읽기만 했기 때문이야. 네 자리를 이곳에 마련키 위한 개연성의 그물을 엮는 것만으로도 힘이 부쳤지. 신은 자신의 세계에서조차 전능하지 못한데, 자신의 것이 아닌 세계의 존재에겐 더더욱 그렇지 않겠니.”
“…뭐? 신?”
“여기 마지막 세계의 신은, 우리의 세계를 •‣⁛⁖⁙⁁으나, 온전히 겪지는 못하였기에.”
불완전하게 부서져 내리는 말들 속에서 클레이오는 익숙한 조어를 발견했다.
마지막 세계.
‘약속’이 맨 처음에 주어질 때 뜨는 메시지에서도 이곳을 ‘마지막 세계’라고 칭했다. 이제껏 그건 그저 의 시적인 표현이라고만 생각했다.
“마지막 세계라니. 이 모든 건 그저 무사이가 쓴 소설이고 만들어진 세계인데, 그 이상의 다른 뜻이 있단 건가?”
“네 말이 맞아. 이곳은 무사이가 쓴 세계이지. 동시에 역사의 반복이 일어나는 세계.”
뜬구름 잡는 대답이었다. 클레이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게 좀 설명해. 누가 너를 여기로 데려왔지? 날 데려온 작자랑 같은 놈이 아닌 거야?”
“아, □□아… 진정해. ▲⁆⁘∠‡⁍의 당연한 귀결로서, 나는 여기에 있어. 나는 순리와 예정에 따라 이곳에 왔고, 네가 이곳에 온 연유는 나로부터 기인해.”
가장 중요한 말은 들리지가 않고 자꾸 방해가 끼어든다. ‘정진’은 답답한 마음에 의자의 등받이를 꽉 쥐었다.
“내가 여기 온 게 너 때문이라니. ‘전언’을 보낸 사람이 너였던 거야?! 저자의 이름을 훔쳐 쓴 거냐고.”
“이름을 훔치다니 그럴 리가. 나 역시 한 명의 무사로서, 첫 ‘전언’을 보낸 이는 내가 맞아. 그렇지만 네가 여기에 있는 게 나로 인해서라 해도, 나는 이 이야기에 아무런 권한이 없어.”
메일을 보낸 이가 자신임을 시인하는 레지나는, 저자가 아니다.
그 ‘무사이’가 저자일 거라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정진은 가장 근본적인 전제가 뒤집힌 데 충격을 받았다.
“권한이 없는데 어떻게 날 끌어들일 수 있었지?”
레지나는 침통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이미 말을 했는데, 지금의 네게는 그 뜻이 전해지지 않아.”
“왜?”
“네 서사개입도가 아직도 충분하지 않아서. 이전 세계의 네게 애매모호한 문장만을 보냈던 것 역시, 그때는 너의 서사 개입도가 극히 낮았기 때문에 네가 정합성 있다고 여길 표현으로 에두르느라 그랬던 거야.”
“…애초에, 나한테 원고를 보낸 것부터가 계획이었던 건가?”
“그래. 네가 원고를 읽어야만 모든 일이 시작되니까.”
“내가 그걸 안 읽고 무시했으면 어쩌려고?”
레지나는 이 순간, 부적절하도록 여리게 웃는다.
“너라면 읽어줄 줄 알았거든. 그냥. 넌 항상 그랬잖아. 쓰인 것들에게는 가감 없는 친애를 베풀었지.”
클레이오는 머리카락에 손을 넣어 헤집었다. 머리끝이 마구 엉켜 더더욱 엉망이 됐다.
숨이 가파르게 받히고 뺨이 붉었다. 클레이오의 육신이 정신적 과부하를 버티지 못해 열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정진’은 그조차도 느끼지 못했다.
레지나는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마치 그러한 질문을 입에 담을 자격이 자신에게 있는지 의심하는 것처럼 조심스런 어조였다.
“□□아, 그래도 이 세계는 네게 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지 않니? 네가 보기에 좋은 것이 하나라도 있어?”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정진’은 불현듯, 아직 여름이 한창이던 시절 아세르 저택의 침실에서 하던 생각을 다시금 떠올렸다.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실제의 세계와, 자신을 간절히 원하는 만들어진 세계 사이의 위계에 관하여.
그때 자신은 이미 선택을 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를. 이 세계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조성해낸 것인지 모르면서도.
이전 세계의 고통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한껏 올랐던 열이 가라앉고, 숨통을 죄던 답답함이 스르르 풀린다.
클레이오는 조금 물러나 원래의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는 한참 만에야 대답을 한다.
그의 답변은 희미하고 미약하지만, 레지나의 귀에는 정확하게 식별 된다.
“…어쩌면.”
정진의 말을 이해한 레지나는 다시금 ‘민산’의 미소를 지었다.
외모의 차가움을 봄처럼 누그러뜨리고, 그 누구라도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웃음.
갈비뼈 안쪽을 콱 치이는 느낌에 ‘정진’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화를 궤도로 돌려놓았다.
“어쨌거나, 전언을 보내고 날 데려온 게 너라면 ‘약속’을 준 것도 너겠구나.”
레지나는 긍정의 뜻을 표했다.
드디어 이 차원을 넘는 졸업반지, 오프라인 전환이 안 되는 업무용 메신저의 비밀이 밝혀졌는데도 ‘정진’은 전혀 상쾌하거나 기쁘지 않았다.
“그럼 이 ‘약속’이 내려준 「적절성 판단」을 내가 어떻게 믿지? 네가 저자이면서 거짓말을 하고, 네 마음대로 결과를 조정하는 것 아냐?”
레지나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적절성 판단이라는 게 뭔지 알 수 있을까?”
“네가 준 거라면서 어떻게 ‘약속’의 기능을 모를 수가 있어?”
그녀는 무구한 시선을 정진의 왼손 위로 향했다.
“그건 내 손을 떠나 네 손에 끼워진 순간부터, 온전히 네게 속한 힘이야. 내 모든 것을 담은 약속이자, 두 세계를 잇는 원의 고리. 그것이 너와 함께하며 어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지는, 난 알지 못해.”
“그럼 이게 띄워내는 전언 역시 네가 보내는 게 아니란 말야?!”
“그것은 주석 본연의 기능… 내게는 원고를 열람할 권한이 없는데, 어떻게 주석의 내용을 알 수 있겠니. 나는 아홉 무사이의 하나이지만, 이 세계의 쓰기엔 결코 관여할 수 없어.”
여전히 두서없는 얘기였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무사이의 하나라. 그렇다면 네가 정말 클리오라는 건가?”
자기가 입에 담으면서도 정신 나간 소리라는 자각이 드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레지나는 클레이오의 질문을 농담 취급하지 않았다.
“기술(記述)의 측면에서는 그것이 참이다. ‘클리오’는 내 존재를 정의하고 명명하던 이름이지.”
스스로를 뮤즈라 천명하는 여인은 여전히 정진이 아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사실판단의 영역을 벗어난 얘기였다.
대학교 동창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이나, 그걸 인정하는 그녀나, 원래 세상이었다면 머리가 이상한 사람들로 취급됐겠지.
그러나 이곳에서 원래 세상의 상식이나 규칙을 따지는 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면 ‘클레이오’는 정체가 뭐지? 저자도 아닌 네가 어떻게, 네 이름을 따고 네 힘을 깃들인 인물을 이곳에 심어놓을 수 있었지?”
“너는 내 ⁌▲⁆―야. 그리하여 이 세계의 신은 네게 나의 이름을 붙였지. ‘클레이오’, 내 ‘약속’을 가지기에 마땅한 자. 나는 나 이상의 것이 될 수 없지만 너는 너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는 자이기에, 네게 희망을 걸었다. 그 모든 실패한 시도들 뒤로 네가 ∂⁌▲⁆―∩∠‡….”
말하기가 힘든 듯 살풋 미간을 찌푸리며 레지나는 가냘픈 목을 감쌌다.
클레이오는 탁자에 놓인 물병에서 물을 따라 그녀에게 건넸다. 레지나는 컵을 받아들고서 새처럼 조금씩 물을 머금었다.
오후가 깊어, 일광이 방의 깊숙한 곳까지 들이쳤다. 해를 받은 레지나의 머리카락은 은처럼 빛났다.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클레이오는 여전히 알아야 할 것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멜키오르는 정체가 뭐지? 그자 역시 뮤즈의 성흔을 가졌고, 이 세계의 진실을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철저히 세계에 복속된 자, 마지막 세계가 탄생하던 순간부터 이곳에 속한 인물이었다.”
멜키오르는 작품 외부로부터 이식된 존재가 아니라는 대답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놈은 아서나 아슬란보다도 명확하게 반복의 존재를 확신한다고.”
물을 마시고도 목소리를 내기가 힘든지 레지나는 정진을 가까이로 오게 했다. 쉰 듯 가냘픈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이어졌다.
“멜키오르는 네가 아니라 내게 가까운 존재야. 그의 과거는 대과거이고, 그 역시도 세계의 ⁊‰⁋⁌‼을 겪기 전에는… 쿨럭!”
클레이오는 경련을 일으키는 레지나의 등을 반사적으로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은 지극히 가까이 마주하고 있었다.
숨길만 잘못 내어도 서로의 입술이 맞닿을 만큼. 누군가 이 장면을 보았다면 연인의 밀회라고 착각할 만큼.
레지나의 날숨이 클레이오의 머리칼을 흐트러트렸다. 둘 사이의 말은 허공으로 흩어져, 그녀는 그에게 아무것도 전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에라토와 클리오 외에도 그 자매들의 가호를 받는 이들이 더 존재하는지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레지나의 목소리는 수면 속에 잠겨 든 듯 쉼표 하나 전해지지 않았다.
클레이오의 심장이 마구 덜컹거렸다. 놀라움 때문인지 다른 감정 때문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음성이 되지 못 하는 말을 연신 잇던 레지나는, 밀려드는 졸음을 참으려는 것처럼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나한테 뭘 말하려고 할 때마다 점점 힘이 없어지고 있어.’
헛된 시도를 거듭하는 동안, 그렇잖아도 희었던 레지나의 뺨에서 혈색이 완전히 사라졌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피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졸음이 아니라 죽음이 그녀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전해질 수 없는 수많은 말들 뒤에, 결국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레지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해 짧게 헐떡거렸다. 레지나를 짓누르는 것은 일반적인 잠이라기보다, 그녀를 침묵시키려는 강제력처럼 느껴졌다.
손바닥에 손톱이 박히도록 꽉 힘을 준 레지나는 힘겹게 고개를 흔들었다. 꺾인 고개가 까딱이고, 등은 베개에 푹 감싸였다. 금방이라도 다시 잠들 것 같은 상태였다.
파리하게 질린 레지나는 죽어가는 자의 얼굴을 하고서 서글프게 미소 지었다.
잠시의 침묵.
다시 입술을 뗀 그녀는 이제야 겨우 클레이오가 들을 수 있는 말을 했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니? 이 세계가 원고를 모사한 것이 아니라, 원고가 세계를 모사한 것이라면? 글로 쓰이기 때문에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기 때문에 기록되는 것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