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02
사자의 심장 (3)
같은 시각.
알비온 궁성의 가장 높은 탑 위.
발토스의 검을 뽑아든 피어스 클라겐은 궁성을 공격하는 마수 몇 마리를 일격의 [진격의 원]으로 추락시켰다.
피이이이이이이이!
슈우우우우!
쿠콰쾅!
흩어져가는 마수의 먼지 너머, 강 건너 수도방위대 학교의 모습이 드러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압도적으로 [강화]시킨 안력을 통해서 수도방위대 학교의 중심을 감싼 제베디의 서클이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히 잡혔다.
동안과 서안을 가르는 템푸스강도 피어스의 주시에는 방해가 되지 않았다.
구궁!
구구구구궁!
역으로 발동된 학교 내부 결계는 무수한 수의 마수를 억누르며 므네모시네의 문의 완전 개방을 막아내고 있었다.
엄청난 부하를 견뎌내는 서클 안은 무시무시한 에테르의 응집체로, 안의 상황은 들여다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제베디의 서클 안에서 힐끗힐끗 밝은 주홍빛 검기가 비치는 것을 같은 소드마스터인 피어스는 감지할 수 있었다.
므네모시네의 문 앞에선 처절한 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부웅.
우우우우웅.
다시금, 그의 발아래에서 에테르의 역장이 요동쳤다.
수도방위대 마법단 단장 타디우스 예츠켈이 다섯 번째로 왕성 결계를 재시동하는 소리였다.
문은 학장이, 궁성은 단장이 지킨다.
그렇게 정해진 규칙이 실제로 실전에서 준수된 것 역시 천 년 만이다.
전설의 시대를 다시 사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피어스는 도취감 따위 느끼지 않았다.
스스스슷!
쿠쾅!
긴급히 명령을 내려 수도방위대를 동편에 파견한 뒤 피어스는 부관과 함께 궁성의 높은 곳에 올랐다.
피어스 한 명이 나머지 수도방위대원 전부만 한 무위를 가졌으니, 궁성을 지키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서안의 궁성에서는 저 동편까지 [진격의 원]이 닿지를 않았다. 이래선 이미 문밖으로 완전히 풀려나온 마수만을 상대하게 된다.
콧수염 끝을 신경질적으로 문지르던 피어스는 쉴 새 없이 마수들을 꿰뚫어내며, 왕세자에게 보낸 전갈의 답을 기다렸다.
‘왕세자는 문이 다 터진 뒤에나 학교로 사람을 보내려는 건가? 누가 천한 핏줄이 아니랄까봐, 상황이 나빠지면 판단력이 떨어지는군.’
기다림이 길어지자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테르가 사막의 모래 폭풍처럼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마법감은 치유 마법에나 빼어나고, 로사 페히테는 늙었어. 그 둘로는 문을 다 막아내기 역부족이야. 억지를 부려 설립한 왕세자 근위대인지는 뒀다 어디 쓰려는 건지. 이동명령 한 번이면 될 것을, 쯧.’
연원 모를 초조함이 피어스의 핏줄을 달구는 것 같았다. 그의 눈길은 스스로의 의지를 배반하여 자꾸만 강 저편을 향했다.
이상한 기시감이 심장을 불쾌하게 자극했다.
언젠가 자신은 이리 조급하게 군 적이 있었던 것만 같다. 로사 페히테를 그렇게 놔둘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왜? 자신이 왜 전 기사단장 따위를?
뒤엉킨 생각은 탑에 다가오는 기척에 의해 끊겼다.
달칵.
예상보다 한참 늦게 탑의 입구가 열렸다.
스슷! 콰쾅!
연달아 검기를 날려 다가오던 세 기의 마수를 흩어놓은 피어스는 흉흉한 검기가 가시지 않은 검을 쥐고서 입을 열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거기 나타난 불청객의 정체는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태서턴 트리스테인이었다.
“경을 부르지 않았는데. 내 부관은 어디로 갔지?”
“비상 상황이라 해도 간과할 수 없는 불경의 죄를 저질렀기에, 부득이하게 근위대에서 구류하고 있습니다.”
“하, 공작 각하. 군의 지위와 경의 귀족 작위는 무관하오. 내 부관에게 그런 월권행위를 저지르고도 무사하리라 생각한다면…!”
태서턴은 지위로 저를 억누르려던 피어스의 말을 잘랐다. 그는 수도방위대 기사단장과 실랑이할 뜻이 전혀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저하께서 직접 명령하셨습니다, 피어스 경. 수도방위대학교에 대한 증원 요청은 수락되었습니다. 지금 즉시 수도방위대 학교로 이동하시길 바랍니다.”
“뭐라고?!”
파지직!
피어스의 검 끝에서 회갈색 검기가 공격적으로 뻗어 나왔다.
끼긱.
그 기세에 태서턴 트리스테인의 왼쪽 흉갑 이음매가 녹아 떨어졌다.
의도된 ‘실수’였다.
그리고 그 실수는 태서턴을 전혀 동요시키지 않았다.
“피어스 경과 교대하는 시점부터, 궁성 상부의 수비 업무는 근위대로 이관됩니다. 즉시 이동하십시오.”
“감히, 감히 내게 명령을 내려?! 여기는 나의 권역이고, 그대는 내게 명령을 할 자격이 없어. 자알 훈련시킨 그대의 기사단을 움직이라 세자께 전하게.”
경칭도 무엇도 없는 면전의 모욕에도 태서턴은 무정물 같은 무표정을 유지했다.
공작은 발검조차 않고, 무슨 경비나 서는 것처럼 부동자세로 멈췄다. 태산 같은 묵묵함이었다.
피어스 혼자 일방적으로 날뛰었다.
“내 말을 못 들었나? 그대의 왕세자에게 가서 일깨워주도록. 궁성을 지키는 의무는 수도방위대 기사단장의 것, 국왕 대리께서 함부로 어그러트릴 수 없는 법도라고!”
“저는 변경에서 자란 터라 중앙의 세세한 법도는 모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압니다. 주군의 명령은 완수되어야 한다는 것. 지금은 경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예우하고 있는 겁니다.”
군과 경찰, 기사단의 최고 통수권자는 국왕이었다.
전시에 국왕 대리는 국왕과 마찬가지의 존재. 명령 불복종은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태서턴의 말뜻을 풀이하자면 이랬다.
‘지금 너를 당장 끌어내 명령 불복종을 근거로 직위 해제시키는 대신, 네가 명령을 수행하여 체면을 지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지독히도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파아앗!
파스슷.
파직.
참지 못한 피어스가 날린 검기가 이번엔 오른편으로 날았다.
흉흉한 회갈빛 광채는 태서턴의 어깨를 찢고 지나가며 견갑을 완전히 부숴놓았다.
명백히 살의가 담긴 공격이었다.
쿠쿠쿵!
피어스의 검기가 공작의 등 뒤에서 강하하던 ‘하늘의 귀족’ 한 기를 산산조각 냈다.
이미 수차례나 [진격의 원]을 썼는데도 피어스의 기세는 약해지지 않아, 마수는 마석조차 남기지 못한 채 미세한 먼지로 비산했다.
솨아아아아!
죽은 마수가 흩어지는 먼지 가운데서도 태서턴은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피어스 자신이 어떤 식으로 도발하거나 공격해도 태서턴은 왕세자의 명령 없이 수도방위대 기사단장을 향해 발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지독한 번견 놈.’
아드득 이를 간 피어스가 분을 눌러 담으며 말했다.
“그래서 경이 그리 버티고 있는 동안 수도의 동안이 전소돼 폐허로 화해도 상관없단 말인가?”
“저는 저하의 명령을 수행할 뿐입니다.”
딱딱한 북부억양으로 내뱉은 고저 없는 대답은 지극히 담담했다.
온전한 진심이었다.
눈앞의 이 작자는 피어스를 상대로 배짱을 시험하거나 기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왕세자의 명령 외엔 모든 것이 이 미친 자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뿐.
기세를 올리는 소드마스터도, 한 나라의 왕도를 불태울 듯 몰려드는 마수의 공격도, 그에게는 한낱 벌레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당장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왕세자의 명령 없이 이 미친 자를 상대로 뜻을 이루는 건 불가능했다.
피어스는 일그러진 얼굴 뒤로 경악을 감추었다.
‘저것이 인간이기는 한가?’
그저 사람의 형상을 한 이종이 아니고?
빛 한 점 서리지 않은 남색 눈은 불타고 있는 룬데인을 불타지 않을 때와 아무런 차이가 없는 방식으로 바라본다.
수도의 파괴 따위 명령 바깥의 사안으로서, 이 자의 마음에 한 점 파문조차 일게 하지 못했다.
이 순간.
태서턴은 검조차 뽑아들지 않았는데도 피어스는 기세에서 밀리고 말았다.
피어스의 검 끝이 힘없이 바닥을 향했다. 어떤 깨달음이 그의 투지를 차갑게 얼려버렸다.
피어스 클라겐은 사욕을 추구했다.
우러름 받기를 원했다.
부정한 위세를 휘둘렀다.
권력의 향방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세력을 바꾸었다.
그러한 부덕을 다 가졌다 해도, 이 나라와 수도가 면전에서 불타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국가가 존속해야 그의 권세 역시 존속할 것 아닌가?
그러나 태서턴은 피어스 자신과 달랐다.
그는 이 도시를 지켜야 한다는 최소한의 의무감조차도 가지지 않았다.
태서턴은 고저 없는 음성으로 재차 물었다.
“세자 저하의 명령을 이행하시겠습니까.”
피어스의 내심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항명도, 복수도 수도가 남아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피어스는 자신의 등 뒤에서 점점 더 강한 에테르 압력을 뿜어내고 있는 므네모시네의 문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지키고 싶은 것이 도시와 국가인 자와, 지키고 싶은 것은 오로지 한 사람인 이 사이에선 필히 후자가 전자를 이긴다.
피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피가 배어 나오는 태서턴의 어깨를 거칠게 부닥치고선 탑 아래로 내려갔다.
태서턴은 피어스의 사소한 시비 따위에 연연치 않고 하늘을 향해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스스스스슷!
쿠쿠쿠쿠쿵! 콰쾅! 콰아아아앙!
피어스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막 닫히려던 탑의 문 사이로 보이는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진격의 원]은 통상 실검을 대는 공격보다 위력이 약했다.하지만 태서턴은 그러한 통념 따위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만치 강력한 검기를 연속하여 하늘로 쏘아냈다.
광폭한 에테르의 폭발이 궁성의 하늘 위를 뒤덮었다.
돌아본 채 굳어진 피어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패배자의 낭패감이다.
부서져 나간 마수의 잔해가 거센 바람에 흩어진 한순간, 궁성의 하늘 위로만 늦여름의 창공이 되돌아왔다.
피어스 자신 역시 나라 안에 대적할 자가 별로 없을 만큼 강한 검사였기에 더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태서턴의 성취는 피어스 자신을 한참 앞서 있었다.
‘어떻게… 고작 서른 살 남짓한 애송이가 저런 경지에 오를 수가 있단 말인가!’
키시온 영지에서 이랬느니 저랬느니 하는 소문은 들었다. 하지만 이내 잠잠해져 그저 헛소문이려니 했었다.
‘단 몇 번의 칼질로 성벽을 부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던 건가?!’
대대로 수도방위대 기사단의 기사는 나라 제일의 무위를 가진 자가 차지했다.
인망을 잃고 논란에 휩싸여서도 피어스의 지위가 위협받지 않은 건 그가 로사 페히테를 이긴 소드마스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 알량한 지위, 무인으로서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룬 기사의 영광이 마수와 함께 부서져 간다.
당장의 논공행상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일이 끝난 후 혹여라도 저자와 겨루게 된다면….
머잖은 미래에 피어스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자산, 왕이 청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역할이 값어치를 잃게 된다.
왕세자 근위대의 결성을 막기 위해 수를 짜내던 때부터 자라오던 불안이, 이제는 실체를 갖추어 피어스를 궁으로부터 축출하려는 것이다.
한편.
그런 어마무시한 위력을 가지고도 태서턴은 자만하거나 자랑스러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그저 자신의 검격 범위 안으로 새로이 마수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파수견의 침착함을 가지고서.
피이이이이이!
쿠쿠쿠쿵!
쿠궁!
앞서의 공격이 무력화되자 한 무리의 마수가 선회하여 궁성 주변을 빙그르르 돌았다.
태서턴이 가만히 선 동안에도 마수들은 태서턴의 검격 범위 바깥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무자비한 마법의 불을 지옥의 아가리처럼 뱉어냈다.
쿠콰쾅!
화르르륵!
궁성의 외성 바깥이 일거에 타올랐다.
업화의 불꽃을 보면서도 태서턴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오로지 궁성만을 수호했다.
욕설을 짓이기던 피어스는 단숨에 탑 아래로 뛰어내렸다.
휘이익.
타탓.
탑의 외벽을 디디며 내려와, 연결된 회랑의 지붕 위를 달리면서도 피어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태서턴은 왕세자의 개.
제 머리로 무언가를 판단하는 자가 아니다.
그의 뜻은 곧 왕세자의 뜻이란 말이었다.
왕세자의 명령이 내포하고 있는 의도는 피어스 자신을 학교나 지키도록 내쫓아, 근위대의 공을 늘리려는 단순한 계산 따위가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