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33
신의 일 (3)
“아서.”
클레이오는 침대용 간이 식탁에 트레이를 내려놓는 아서를, 눈을 가늘게 뜨고서 살폈다.
다친 덴 어떤지, 독은 다 해독된 건지 걱정되고 궁금했다.
어차피 물어봐야 놈에게선 솔직한 답을 들을 수 없다. 「지각」을 통해 살피는 게 빨랐다.
클레이오는 가볍게 ‘약속’ 위를 쓰다듬었다.
식탁을 차리는 아서의 움직임은 경쾌하고 피나 고름의 냄새도 전혀 안 풍겼다. 비누와 면도 크림 향기만 살짝 남아있을 뿐이었다.
에테르를 미세 단위까지 다 털어 쓴 치유 마법은 성공한 모양이었다.
“캔튼 부인이 너희 집 요리사 가엘을 닦달해서 만들어 왔대. 일어났으면 국물이라도 좀 마시고 다시 자. 기억된 세계에서 나온 뒤로 하루 동안 꼬박 굶었다구, 너.”
클레이오는 제 앞에 놓인 대접 안을 들여다보았다.
뽀얀 사골 국물, 옅게 풍기는 부케가르니 냄새, 가늘게 썬 리크.
트리스테인식 국물 요리였다.
‘아, 설렁탕.’
아서는 클레이오가 깨어난 게 기쁜지 연신 조잘댔다.
“와, 확실히 대주교님이 다녀가시니까 열도 내리고 안색도 확 낫네.”
“…대주교님? 깨어나지도 못하는 사람이 여길 어떻게 와.”
클레이오는 방어적으로 부정했다.
그게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제까진 그랬지. 하지만 어젠 일어나셨어. 깨어나자마자 바로 기억된 세계의 희생자가 없느냐, 하문하셨다는데 소식 듣자마자 잽싸게 매달렸지. 클레이오가 아파요! 하고. 야야, 손 멈췄다. 국물 떠먹어가면서 얘기해.”
아서의 강권에 밀려 클레이오는 맛도 모르면서 맑은 국을 한 스푼, 두 스푼 떠먹었다.
정신도 못 차리고 앓던 친구가 사람 꼴을 하고 있는 게 감격스러운지 국물 줄어드는 수위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는 아서였다.
“아무튼, 대주교님은 방금 왔다 가셨어. 오셔서 침실 문 열었다가, 사감 선생님이 차 좀 준비해 오니까 벌써 문 닫고 나오시더라고. 그 짧은 새 뭘 했나 싶었는데, 신성력이란 게 대단하긴 대단하구나.”
클레이오는 우주의 시작과 신들의 정원을 보고 왔건만, 실제의 세상에서는 고작 한 찰나가 지났을 뿐인 것이다.
그 대화는 편집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팔림프세스트의 바깥에서 일어난 일, 이들의 시간에 별리되어 있었던 일이니.
스푼을 쥔 클레이오의 손이 또다시 공중에서 엉거주춤 멈췄다. 갈색과 연둣빛이 얼룩진 눈이 흐릿하게 멀어졌다.
아서는 클레이오가 다시 정신을 잃을까봐 초조해졌다.
“레이, 레이! 괜찮아?”
“아… 괜찮아. 그냥. 대주교님께서 다녀가셨는데도 눈치조차 못 챘다니 어떻게 그랬나 싶어서… 좀 충격받은 거뿐이야.”
그릇 바깥으로 흐른 스튜를 남은 냅킨으로 쓱쓱 닦아주며 아서가 농담했다.
“뭐냐, 이스토리아 대주교님에게 차이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야. 하기야, 그렇게 보러 가도 눈 한 번 안 떠주던 양반이 자는 새 왔다 갔다면 짝사랑하는 학생 마음이 막 찢어지고, 어, 그런 건가?”
“야, 아니라고. 진짜 그런 거 아니라고.”
대주교를 좋아하네 마네 그러는 건, 그냥 아서의 말버릇이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가볍게 띄우려는 장난인 걸 알면서도 상태가 나쁜 클레이오는 아서의 페이스에 슬슬 걸려 넘어갔다.
“그럼 왜 귓가는 벌겋게 붉힐까? 먹던 수프가 왜 안 넘어갈까? 응?”
저차원적인 놀림을 어른스럽게 무시하지 못하고 클레이오는 남은 국물을 그릇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달각.
제대로 대답 안 하면 아서가 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놀리려 들 것 같아서 클레이오는 쌈박하게 답을 해 줬다.
“딱 한 번만 대답해 줄 테니 다시는 이걸로 놀리지 마. 이스토리아 대주교는 내 첫사랑과 닮았어.”
아서는 커다란 눈을 꿈뻑꿈뻑 하더니, 제 허벅지를 두드려대며 박장대소했다.
“첫사랑! 이럴 수가! 첫사랑! 학교 온 후에 알았던 사람은 아니겠네. 그 정도 미인이라면 수도에 소문이 안 날 리 없으니. 그럼 레이, 좀 넉넉하게 얘길 더 풀어 봐봐. 세 살 때 유모거나, 여섯 살 때 가정교사, 그런 거면 무효다?”
“그럴 리가. 내 가정교사는 남자였거든?”
열이 내리고 아픔이 가신 뒤 뜨끈한 국물로 속을 데우자 클레이오도 슬슬 정신이 돌아왔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는 하나도 모르면서 제 친구의 아픔을 덜어주고 기분을 낫게 해 주려 애쓰는 아서를 보니, 명치께에 눌려 있던 응어리 같은 게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아무튼, 대주교님도 부르고 애써줘서 고맙다.”
“이게 고맙단 소릴 할 일이냐. 네가 누구 땜에 그렇게 된 건데.”
아서의 투덜거림은 일견 가볍게 들렸지만 그 아래, 가장 깊은 바닥에 고여 있는 것은 쓴 죄책감이었다.
클레이오는 그냥 비스스 웃기만 했다.
“굳이 따지자면 제일 큰 원인은 이놈의 물건 아니겠냐.”
마법사는 밥 먹는 동안 시트 가운데 방치해 뒀던 완드를 쥐어 보았다. 손을 딱 뻗으니 자동으로 스르르 와서 쥐이는 게 꽤 편했다.
마도구가 실체화되어 있을 땐 팔에서 공작 그림이 사라져, 걷어둔 소매 아래 드러난 창백한 팔에는 푸른 핏줄만 드문드문 곤두서 있었다.
그 손에 놓인 완드는 어울리지 않게 요요한 광채를 흩뿌렸다.
마도구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아서는 제가 칼에 베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레이, 이제 팔은 안 아픈 거지?”
“어. 아프면 마도구를 쓰겠냐. 꼴이 지랄 맞긴 해도 좋기는 되게 좋네. 에테르가 한 방울만 남아도 [방어] 마법 정돈 거뜬히 뽑아내겠는걸.”
“진짜 다행이다.”
공작의 완드는 레지나가 올 때까지 클레이오의 팔을 괴사시키고 있었다.
마도구를 포기하더라도 저 아픔을 덜어줄 수 없냐고 누구에게든 묻고 싶었던 아서였다.
그 문제를 해결해 줄 마법사들의 상태 또한 클레이오보다 특별히 나을 것도 없었기에 답을 얻지 못했을 뿐.
아서는 밝은 어조를 유지하며 공작의 완드에 대한 자신의 본심은 슬그머니 눙쳐 놨다.
“네 열은 안 내리고 팔의 먹선은 제멋대로 움직이고, 오죽하면 프란을 다 불러올까 했다니까.”
“아이고, 아서라. 걔는 이거 감당 못 해.”
“프란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제일 천재 같은데.”
“천재라고 해도 전능은 아니지. 프란한테 부담 주지 마. 그리고 천재 어쩌고는 네가 들어야 할 소리 아니냐? 너 이제 7레벨 검사잖아. 어이쿠.”
아서는 아슬란과의 대결 중 던전 안에서 7레벨에 올랐다.
“아,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그때 안에서, 아슬란 새끼가 칼에 독까지 바르고 오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더러운 꼴은 안 봤을 텐데.”
제 이야기로 주제가 옮겨오자 3왕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날 봐준 의사도 그러긴 하더라. 일반적인 독이 아니라 마법과 연관된 독극물에 노출됐던 것 같다고.”
완드를 팔에 도로 집어넣은 클레이오는 거의 공중에 삿대질을 할 기세로 열을 냈다.
“하, 귀족의 품위니 정정당당함이니 뭐라고 지껄여봐야 아슬란 놈은 저열한 개새끼야. 암살자로 부족해서 독이라니!”
클레이오의 매도를 듣던 아서는 문득 마인라트에서의 아슬란을 떠올렸다.
독 쓰는 것을 도에 어긋난다고 여기던 엄격함과, 스스로를 지고의 존재라 믿던 자의 오만함을.
“으음, 그렇지만 이번엔 말야… 아슬란이 알고서 일부러 독을 썼는지 아닌진 모르겠어. 선해해 주려는 건 전혀 아니고, 제 손을 그런 식으로 더럽히는 건 놈의 취향이 아니니까.”
마인라트의 대결 동안 아슬란이 어떻게 처신했는지 클레이오도 전해 듣긴 했다.
놈이 빌어먹을 정도로 오만한, 푸른 피 성격파탄자라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서사에서 아슬란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는 원하든 원치 않든, 결국 그렇게 행동하게 돼 있다.
아서는 그 점에 의문을 느끼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아서, 아슬란은 에테르가 떨어지려고 하면 자신의 기사를 살해해. 그럼 에테르가 다시 차오르거든. 그리고 붉은 에테르를 가진 기사들의 피는 독이야.
의도했든 안 했든, 아슬란은 널 독으로 공격한 게 맞아. 이미 패도를 걷는 작자가 피로 쌓은 탑 제일 꼭대기에 서서 제 손만 깨끗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면 그건 멍청한 거고.”
말을 하면서, 클레이오는 어딘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슬란 욕할 것도 없었다.
자신 역시 그런 불가능하고 우둔한 시도를 거듭할 것이기에. 아서의 손을 깨끗하게 남기기 위해서.
그 웃음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아서는 팔을 휘휘 내저었다.
“레이, 넌 그렇게 안 생겨서 은근 과격한 소릴 잘한다니까.”
“안 과격할 상황이냐? 애들은 어떻게 됐어? 자기 기사들 들어오는 거 방해했다고 아슬란 놈이 별짓 안 해?”
‘영원한 겨울의 도시’에 클레이오를 들여보내기 위해, 첼과 안젤리움 쌍둥이들이 아슬란의 기사를 무력으로 막아냈다.
혹시라도 그 때문에 해를 입었으면 어쩔까 걱정됐다.
“아! 그거. 야, 이미 지나갔다. 제아무리 아슬란의 수하라도 정식 기사가 학생한테 얻어맞았단 소릴 하고 다니겠어? 놈들도 가오가 있지.”
“그건 체면 때문에 넘어갔다 쳐도, 기억된 세계 파훼 보고서는 어떻게 처리했는데? 아슬란이 있어서 적당히 고쳐 적을 수도 없잖아.”
아서는 이마를 짚고는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클레이오는 늘 이랬다.
죽다 살다 하다가 겨우 기력이 좀 돌아오니 또 삼촌 노릇을 하려 든다.
“자자, 흥분하지 말고. 보고서는 오늘 오전에 제출했어. 내가 썼고, 아슬란과 잘 협력해 마수들을 물리쳤다는 훈훈한 내용이야.”
“허!”
“물론, 아슬란도 내 보고서에 사인했고.”
아서와의 싸움에서 부상을 입은 아슬란 역시 기억된 세계가 파훼되면서 이쪽으로 고스란히 돌아왔다.
고귀한 적자가 피투성이로 실려 오자 쥴레이카가 실신했다는 이야기도 힐레이다가 슬쩍 흘려주었다.
그래도 아슬란이 클레이오보단 덜 아팠다.
하룻밤 지나니 깨어나서는, 아서가 공손히 내민 보고서 사본을 읽어본 뒤 잠자코 사인을 해 주었다.
물론 아서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눈빛은 더더욱 강렬해졌지만, 그 부분은 적당히 무시해 줬다.
이미 그는 몇 번이고 이 쪽을 살해하려 했다. 실행 완료에 이르지 못한 건 전적으로 아슬란의 역량 부족이다.
얌전히 죽어드리지 못해서 미안하달 수도 없잖은가.
“아슬란은… 그래 뭐, 공식적으로 항의할 입장은 아니지. 근데 네가 쓴 보고서를 멜키오르가 믿어?”
“안 믿겠지. 하지만 보고서는 우리 왕세자님 혼자만 보는 게 아니니까. 우애 좋게 협동하여 그 무서운 혹한의 마수가 나온 세계를 파훼한 2, 3 왕자의 미담은 특종을 쫓는 일간지 기자뿐 아니라 대사관 서기까지 얼쩡거리는 화제인데, 이 보고서를 공표 안할 수 없는 분위기야.”
자신이 침대에 엎어져 있는 새 아서가 해 놓은 일 처리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클레이오는 절로 감탄이 나왔다.
“야아, 아서 리오그난. 이제 제법 일 처리가 되는구나. 유명인다운 처신이다.”
“레이 너만 하겠냐?”
“나? 난 이번엔 그다지 사람들 앞에서 튀는 일 안 했는데.”
“기자들이 나 하나만 취재하려 들었겠냐. 지금도 저기 정문 밖에는 기자랑 사진사들이 세 다스씩 모여서 밤샘을 해. 네 소식 한 줄이라도 얻어 보겠다고.”
클레이오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거야말로 농담이지? 그냥 첫사랑 이야기나 더 할까?”
아서는 또다시 이마를 꾸우욱 짚었다.
학교 결계를 왕실마법감과 공동 설치하고, 기후 마법을 직접 실행시켰으며, 마지막엔 기억된 세계를 파훼하여 제1공헌자로서 전대미문의 대마도구를 얻은 게 어떻게 하면 안 튀는 행동이 되나.
‘그야 비행기를 타고 수도 상공에서 비를 흩뿌리는 것보다야 덜 눈에 뜨이긴 했지만.’
아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어쩌면 평화로운 청년 갑부 생활이 완전히 공중분해 됐단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저 똑똑한 애가 회피를 시도하는 건지도 몰랐다.
클레이오는 좀 망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전처럼 편지나 꽃 같은 건 안 쌓여있는데….”
“그건 내 보고서를 받아본 직후에 보안 문제로 내무보안국에서 직원이 와 막았어. 네 새 마도구를 숨길 순 없고… 기능을 가능한 한 축소해 적긴 했는데 통한 것 같지 않더라고. 보안을 지켜야 한다면서 우편은 전부 통제야. 캔튼 부인의 수프만 특별히 가지고 들어온 거라고.”
“그것 참 고맙기도 하군.”
아서와 비슷하게, 클레이오도 자신의 옆 이마를 뾰족하게 세운 검지손가락 마디로 꾹 눌렀다.
아슬란에게 분노하느라 진정 무서운 자를 밀어놓고 있었다.
바로 이 침실에서 내무보안국 요원들에게 끌려갔던 게 고작 반년 전 일이었다.
그런데 또 그 남빛 제복의 개들을 여기다 풀어놓다니.
‘재미난 막간극을 보여준 값을 참 더럽게도 치러 주네. 그래, 멜키오르라면 그러고도 남지.’
클레이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둘러싼 소란은, 이전에 수도방위장을 받았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영예 훈장을 받았던 때의 기억도 여전히 생생한데 또 다른 영웅담이 더해지고 말았다.
자신도 아서도 이젠 대양의 한가운데까지 와 버렸다.
“이젠 정말로 많은 게 바뀌겠군.”
“응. 그래도 그건 내일부터 생각하고 지금은 좀 더 자.”
“그래….”
그릇을 챙기고 가스등을 꺼주는 아서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또다시 의식이 끊어졌다.
어느새 영역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베헤못이 방의 주인을 수호하듯 그의 곁에 누웠다.
고양이가 불침번을 서는 새 클레이오는 깊은 잠을 잤다.
꿈도 없는 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