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53
진주의 도시 (7)
그 덧없는 매혹은 하인이 디저트를 내오며 와장창 깨졌다.
두 명의 안젤리움은 소란을 피우며 대나무 찜기를 열고선 뜨겁다고 손에 [강화]까지 해 가며 디저트를 집어 먹었다.
꽃보다 떡이 더 좋을 나이의 쌍둥이들이 클레이오는 고맙기까지 했다.
응접실 한쪽 편에 있는, 비단을 씌운 의자에 앉으며 멜키오르가 말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들 이야기하게. 이 기억된 세계를 파훼하기 위한 방안을 찾으려는 것 아닌가.”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레이오는 우선 서클을 열고 [방음][차폐] 마법식을 펼쳤다.
쌀과 설탕에 절인 연밥에 대추야자와 호두를 곁들여 라드에 뭉쳐 찐 떡을 쌍둥이들이 집어 먹는 동안, 클레이오는 왜 천 노인이 자신들을 환영하는지 그 내막을 설명했다.
사정을 다 들은 첼이 말했다.
“실종된 연인을 찾아달라는 절세 가희의 부탁이라니, 사정만 허락했다면 꼭 들어주고 싶지만 이번만은 어렵겠군.”
과연 첼 다운 반응이었다.
이미 사라진, 지난 세계의 유령이라도 미녀의 부탁은 들어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클레이오는 풀어진 분위기를 다잡았다.
첼은 여왕의 정원 이후 첫 던전이었고, 쌍둥이들은 아예 난생처음인 모험이었다.
경계심을 가지되 얻어갈 건 또 얻어가야 했다.
비단을 씌운 의자에 앉아 양손을 모아 찻잔을 든 멜키오르를 애써 무시하며 클레이오는 브리핑을 계속했다.
“여기서 환대를 해준 건 고맙지만 우리는 할 일이 따로 있으니까. 일단 내 예측의 성흔으로는 이곳의 마스터 클락이 세관 건물의 시계탑이라고 해. 정말 옳을진 모르겠지만….”
클레이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머뭇거리며 공유했다. 확신이 없어서였다.
“보통 잘 맞는데, 레이는 자기 예측에 이상하게 확신이 없다니까.”
“긴지 아닌지는 그 시곌 부숴보면 알 수 있겠지.”
“근데 그 세관 건물이라는 거, 아까 강에서 저택으로 오며 본 그거 아냐?”
“네 말대로 기둥이 빽빽하게 세워져 있고 위에 높다란 시계탑 있었지.”
“레이, 그 예측에 시계가 15분마다 한 번씩 종 치는 것도 나와 있어?”
“어, 맞는데.”
“그럼 그거네.”
“이 도시의 명물이래.”
클레이오는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쉽게 마스터 클락을 찾다니.’
하지만 생각해보면 본래 ‘진주의 도시’는 대단한 마도구가 나오거나, 큰 역경이 있는 던전이 아니었다.
‘레벨업용 찬스.’
그거야말로 이 장소가 가진 진짜 역할 아니었던가.
쌍둥이들 역시 악명 높은 새벽 훈련의 터줏대감들이었다.
이미 수련은 한껏 했으니 던전에서 조금만 더 등을 밀어주면 어렵잖게 다음 레벨로 넘어갈지도 몰랐다.
‘그러면 당장 달려가서 시계를 깨는 것보다 남는 시간에 검을 좀 휘두르게 하는 게 낫겠는데.’
일본군의 포격이 시작되기 전까지 만이라도 시간을 활용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애들의 실력을 발전시킬 수 있겠다 싶으니 클레이오의 표정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는 혀에 기름이라도 친 듯 말이 유창해졌다.
“이곳의 거리는 붐비고 어디든 사람이 잔뜩인데 소란을 피워 마스터 클락을 부수기보단, 좀 기다렸다가 밤에 처리하면 어떨까 해.”
“뭐 레이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럼 그때까진 뭐해? 배도 다 채웠는데.”
“그래서 하는 말인데 검술 연습을 하는 건 어때?”
“뭐? 여기까지 와서?”
불신의 눈을 한 애들 앞에서 클레이오는 열심히 약을 팔았다.
쌍둥이들은 뛰어난 검사이고 그건 이미 여러 생애를 통해 멜키오르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던전의 경험치 상승 기능 역시 대략 알려져 있기에, 클레이오는 멜키오르 앞이라고 특별히 더 말조심을 하진 않았다.
멜키오르가 보든 말든 숙련도는 쌓인다. 그의 눈치를 볼 때가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은 어디 정신이 팔렸는지 검술 연습엔 관심도 안 두고 있네, 뭐.’
“여기서 연습하면 밖이랑 완전히 다를 거야. 뭐든지 금세, 훨씬 능숙해져. 검도 훨씬 더 강해질 거야.”
리피와 레티샤는 강해진다는 말에 곧바로 반응했다. 강아지들이었다면 귀가 쫑긋했을 것이다.
“그래?”
“진짜?”
스르릉.
철그럭.
“해 보면 알겠지!”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든 쌍둥이들은 한데 뭉쳐 혜성처럼 정원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
.
.
오후가 기우는 정원에서 쌍둥이들이 든 네 개의 검이 교차했다.
움직여 보니 클레이오의 말이 과히 허언은 아니라, 리피도 레티샤도 점점 말없이 대련에만 열중하게 되었다.
평생 호적수로 싸워온 자매는 서로의 모든 수를 꿰고 있었기에 검격의 흐름은 물과 같고 발놀림은 춤처럼 보였다.
그러나 검에 실린 살기는 연습용이 아니라서 조금만 방심해도 파르르 날리는 머리끝이 끊기고, 검을 든 소매깃이 잘려나갔다.
쌍둥이들이 벌이는 대결을 쳐다보던 첼이 클레이오에게로 고개를 돌려 속삭였다.
대련에 열중한 쌍둥이들과 멀리 떨어져 앉은 멜키오르는 듣지 못했을 작은 소리였다.
“보면 알겠지만, 저 애들이 정말로 아이인 건 아닌데. 클레이오 경은 모두를 너무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지.”
클레이오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놀리지 말라고 농담으로 응해야 하는데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쉬에 저택의 대문간에 선 두 명의 경비원과 마찬가지로 이 도시의 치안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총으로 무장하고 있을 뿐, 모두 에테르 감응력이 느껴지지 않는 보통 사람으로 보였다.
검기를 쓰는 검사가 그들을 제압하는 일은 어렵지 않겠지만, 경찰이나 군에 의해 포위된다면 사람들의 목숨을 하나도 빼앗지 않고 싸우긴 어려울 터였다.
아직 힘 조절이 미숙한 쌍둥이들과 다수의 대결은, 자칫하면 일방적인 학살이 될 공산이 컸다.
그런 종류의 무력행사는 연루된 이의 정신을 돌이킬 수 없이 변모시킨다.
결국 뛰어난 기사란 뛰어난 병기.
언젠가는 쌍둥이들도 사람을 대량으로 살해하게 될 테지만, 클레이오는 그 시작이 오늘만은 아니었으면 하고 바란다.
간파의 구조시도 없으면서 사람을 빤히 꿰뚫는 것 같은 첼의 은빛 시선은 천천히 누그러졌다.
그녀는 클레이오의 어깨를 가볍게 도닥였다.
“물론 소란피우지 말고 야음을 틈타 조용히 처리하자는 레이 네 의견엔 찬성이야. 저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화에는 끼지 않고 가만히 찻잔만 비우던 멜키오르는 부러 소리를 돋워 저를 대화에 끼워 넣는 첼에게, 어울리지 않게도 얌전히 답했다.
“그대들의 방안을 따르도록 하지.”
“아량을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별말을.”
외교적 미소를 지은 첼과 멜키오르가 아무런 정보값 없는 공치사를 교환하는 동안, 쌍둥이들의 싸움도 승패가 갈렸다.
리피의 숏소드가 레티샤의 에스톡 가드에 얽혀 바닥으로 내쳐졌다.
챙그랑!
레티샤는 검을 든 두 손을 번쩍 들며 환호했다. 덜 거두어진 금빛 에테르가 투기처럼 그녀의 주변을 감돌았다.
“와하하! 이번엔 내가 이겼다.”
“쳇! 첸트룸에서 특별 수련이라도 했음?”
“아니. 삽질만 엄청 했는데.”
한 달간 아서와 달라붙어 다니더니 묘하게 말투가 왕자를 닮아버린 레티샤였다.
리피는 분이 나 씩씩거리며 금잔디 조각이 묻은 검을 집어 들었다.
“아니다. 말로 이러지 말고 한 판 더 해.”
“얼마든지!”
스스슷―
콰앙!
이제는 사방을 뒤흔들 기세로 한 발 한 발 디뎌가며 서로를 노리는 쌍둥이들의 싸움은 여간 사나운 게 아니었다.
클레이오는 또 사용인들이 몰려나올까봐 걱정되어 얼른 마법식을 펼쳤다.
[방음][차폐]에다 [감소]를 더해 빛을 없앤 형태였다.「지각」 없이는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든 쌍검식이 복잡하게 교차되더니, 두 번째 대련에서 무릎을 팍 깨 먹으며 바닥에 엎어진 건 레티샤였다.
고작 몇십 분의 대련이었는데 숨을 헐떡이는 두 아이들은 뭔가를 깨달은 표정이었다.
“여기서 연습하면….”
“안 되던 게 되네?”
이제는 서로 으르렁거리는 다툼도 생략한 채 검을 고쳐 쥐는 쌍둥이들 사이로 첼이 난입했다.
애들의 과한 흥분을 한 김 식힐 겸, 자신도 몸이 근질근질하니 일석이조의 방안이었다.
“너희들끼리만 재미나게 놀기니?”
“첼, 너도 끼고 싶었으면 진작 말하지!”
“너희가 너무 즐거워 보여서 방해 안 한 거야. 하하.”
파아앗!
마침내 첼의 바스타드 소드도 검집에서 뽑혀 나와 밝은 금빛 검기를 흩뿌렸다.
어느새 둘이 같은 편으로 서 대형을 갖춘 쌍둥이들은 첼을 상대로 협공을 시작했다.
검기가 튀었다.
연못 주변에 식수된 오래된 목백일홍의 가지가 꺾이고, 백리향의 별 같은 꽃잎이 일제히 낙화하며 멀리까지 향을 퍼뜨렸다.
마법식에 한 차례 더 에테르를 밀어 넣던 클레이오는, 긴 소매 아래서 뻗어 나온 손이 백리향의 흰 꽃잎에 파묻힌 동백꽃 가지를 무심히 집어 드는 것을 본다.
그 순간 들이친 강렬한 자각이, 조금 들떠 있던 클레이오의 기분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본디 목백일홍은 여름꽃, 천리향은 봄의 향기를 내고, 동백은 추위를 견디며 피는 꽃이었다.
역사의 세계에서 태어났을 때 그는 남도 출신의 소년이었다.
해풍을 맞고 자라는 남쪽의 꽃들을 도서관의 도감에서 찾아보고는, 굴 공장에서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의 거친 손을 잡고서 그 이름을 하나하나 되뇌곤 했다.
어머니의 옅은 미소, 분홍빛 목백일홍 꽃과 같던 얼굴.
이곳과 그곳은 같지 않고, 모든 계절의 꽃이 함께 피는 공간은 혼란스런 기억이 남긴 틈새일 뿐이다.
극동의 도시에서 느끼던 옅은 친숙함은 우울한 깨달음 속에서 탈각되었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는, 이 시공간이 완전히 망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정원이 1937년의 8월에 진실로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신화는 그렇게 사실 관계를 누락하는 법이다.
우리는 결국 근동의 홍수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는지, 큰 배를 탔던 사람과 짐승이 어찌 살아남았는지 알지 못한다.
기억의 편집은 가차 없고 전승되는 것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의 일부분뿐이다.
소매를 늘어뜨려 손등의 상처를 가린 멜키오르는 손끝으로만 동백 가지를 어르더니, 사느랗게 말했다.
“이곳에선 여름에 겨울꽃이 피는군.”
“이 공간이 한없이 실제에 가깝지만 실제는 아니라는 표식이지요.”
“그리 말하면서도 여기에 머무르는 허깨비들을 살리려 들고. 이 마법사는 앞뒤가 맞지 않게 행동을 해.”
“아무리 잔영에 불과하다 해도 사람처럼 말하고 사람처럼 움직이는 사람의 형상을, 고작 편의를 위해 베어내는 건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젤리움 자작가의 아이들에게 검술 대련을 하라 꼬아댄 것인가?”
클레이오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우 뒤엔 범이라니. 친구고 적이고 내 주변은 왜 다 이런 인간들뿐인지.’
늘 종잡을 수 없고 멋대로인 작자이지만 유독 이 던전에선 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멜키오르는 힘없이 처진 마법사를 더 몰아붙이는 대신 동백의 향을 맡는다.
클레이오가 알던 남도의 꽃과 달리 대륙의 동백에는 향이 있다.
흰 장삼의 미인이 동백 가지를 쥐고 서 있으니 한 편의 그림과 다름없다.
그는 이솔트가 아니다. 그런데도 클레이오는 동백이 피었던 세리카의 항구에서, 창고지기의 어린 딸을 구하다 죽은 이솔트를 떠올리고야 만다.
‘세리카는 여러모로 중국과는 다르지만 또한 역사의 세계를 의식하여 만들어진 나라고… 그러니, 어쩌면 진주의 도시는 저 작자가 잊은 또 다른 과거를 환기시키는지도 모르지.’
멜키오르뿐 아니라 태서턴의 기억까지도 말이다.
그 무시무시한 소드마스터, 북부의 공작이 어린아이들과 베스나, 베스나의 수하들까지 지켜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마치 죽을 자리를 보러 가는 이를 말리려 들 듯.
그건 이 던전이 위험해서라기보다는, 세리카에서 이솔트가 죽었던 사건의 영향하에 있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진실은 알 수 없고, 클레이오의 목적은 내막의 탐구가 아니라 던전의 파훼에 있다.
홀로 남아 국왕 대리의 감투를 짊어진 아서도 걱정이 되었고 제 주군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아르모리크 공작이 폭주하는 것도 걱정되었다.
누가 뭐래도 그자는 아서의 이마에 상흔을 남긴 자.
‘할 수 있다면 오늘 안에 마스터 클락을 깨고 최대한 빨리 돌아가는 게 좋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