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00
축복, 별리 (4)
그 다음에는 철 장화로 꽉 죈 무릎 사이에 일곱 장의 빗장을 차례로 끼워가며 누르다 정강이뼈를 부러뜨린다.
더 이상 앉아있을 수 없으면 어깨를 탈골시킨 뒤 갈고리에 꿰어 근육과 신경이 뜯기도록 달아 놓고, 상처를 달군 철 집게로 벌려 송진과 밀랍을 붓는다.
수도 없이 의식을 잃다, 두 번 심장이 멈추었던 마법사에게 치유 마법을 퍼붓는다. 헤스터는 아주 즐거이 고강한 치유 마법식을 펼쳐놓는다.
마법이 숨을 붙여놓아 절명하지 못한 마법사는 광장으로 끌려 나와, 사지 근육을 찢겨 큰 바퀴 위에 묶인다.
결코 입을 열지 않던 적의 마법사에게 내려진 선고는 차형.
그제야 다가오는 죽음은 오히려 축복이다.
가정형의 고문과 사형 집행의 대상은 클레이오 아세르였다.
「이격」이 감각을 차단했고 클레이오는 그 잔혹한 일을 그저 보았지 겪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속이 뒤틀리고 눈물이 치솟을 만한 광경이었다.
여기, 칼리오페의 손을 빠져나간 낱장의 그늘, 대륙이 발을 맞춘 진보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은 마지막 구석. 잉크 찌꺼기 가운데에서 클레이오는 「이격」을 최대한으로 펼쳐 벌벌 떨리는 몸을 잠잠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삼엄한 방비를 뚫고서, 결국 한 방울의 눈물이 침대에 걸터앉은 마법사의 맨 발등을 적신다.
아슬란은 그 광경에 일말의 연민도 느끼지 않는다.
클레이오는 잦아드는 숨소리를 내며 쿨럭 댔다.
반사적으로 발동시키려던 편집자 권한을 필사의 힘으로 막아내는 게 고작이었다.
클레이오가 본 일은 진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에겐 아직 알아야 할 것이 남았다.
지푸라기를 뭉쳐놓은 것 같은 마법사의 목을 7레벨 기사는 대수롭잖게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클레이오의 발이 땅에서 뜨고 제압구가 비틀어지며 숨통을 압박했다.
「이격」으로 제어되어 기이할 정도로 담담한 얼굴이건만, 오로지 말간 녹갈색 눈에서만 거두지 못한 눈물이 줄줄 떨어졌다.
아슬란은 클레이오의 반응을 낱낱이 관찰하며, 매정하게 물었다.
“무엇을 봤지?”
어설픈 둘러대기로 빠져나갈 수 없는 국면이었다.
이전엔 싫은 기색으로나마 붙여주던 ‘경’ 소리조차 집어 치운 아슬란은, 클레이오가 가졌다고 알려진 성흔을 시험해보려 하는 것이기에.
손등에 성흔의 빛이 돌지 않는 것은 제압구를 찬 탓이라 여기는지 캐묻지 않아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마법사는 체면을 지키려 노력하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멱살을 붙잡혀 공중에 떠오른 채로 하기엔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근대적이며 시대착오적인 잔혹 행위를 목격했습니다. 부디 평정의 자비를 유지하시기를.”
“역시 그랬군. 네 성흔은 멜키오르의 이능 같은 것인가?”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가능할지도 모르는 미래의 한순간을 읽는 것뿐입니다. 글로 쓰인 세계를 말입니다.”
“세계에 관해 쓴 낱장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건가? 너도 그걸 보았나?”
클레이오는 발끝까지 땅에서 떨어져 버둥대면서도 아슬란의 말에서 ‘너도’와 ‘낱장’이라는 단어를 포착해냈다.
그도, 세상이 글로 쓰인단 사실을 아는 것이다.
“컥, 흡, 쿨럭. …아니오, 그저 저의 예지는 글줄의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뿐이었습니다. 환몽을 꾸듯이 보였다 사라질 뿐…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털썩.
마침내 진실에 근접한 답을 들은 2왕자가 손아귀의 힘을 푼다.
바닥에 나동그라져 연신 기침을 해대면서도 클레이오의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면서도, 멜키오르의 성흔이 작용되지 않는 존재는 마침내 그에 걸맞은 깨달음에 도달했다.
최종고에서야.
아슬란은 이전에도 고문서를 악착같이 찾아내 던전의 정보를 미리 알고 준비했다.
클레이오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아슬란이 아서에게서 쟁취해냈을 전리품은 더 많았을 것이다.
혼란스럽고 흐릿한 형태라 하나, 아슬란 역시 과거에 대한 기억을 가진 알비온의 왕자.
‘이건 최종고의 명백한 오류고, 아슬란이 손에 넣은 고문서는 원고에서 빠진 낱장들이지.’
그리고 이전 교정지에서 빠져나가 버린 그 낱장들은 너무 오래돼서 세상에 대한 올바른 지침이 되지 못했다.
아슬란은 내도록 애써 모았던 고문서에 휘둘리고 배신당했을 것이다.
이미 폐기된 과거의 원고와 최종고의 차이에 의해서.
그리고 최종고를 편집하고 있는, 이 클리오의 화신에 의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머리의 왕자는 제 비극의 주동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물러난다.
오랜 반복 끝에 그는, 세상이 시작되는 곳에 선 막내 형제와 세상이 끝나는 곳에 선 맏이 외의 인간에겐 지속된 관심을 둘 능력을 잃은 것만 같았다.
클레이오는 ‘히드라의 독에 각성 기능이라도 있나? 피어스도 정신을 차리더니 아슬란까지 이렇게 무슨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굴고.’라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면 너는 틀릴 것이다. 쓰인 것은 항상 참이 아니다. 나는 네게 참형을 가하지 않을 것이고, 그리하여 한때 네게 예정되었던 미래를 실현되지 않도록 하지.”
다행이도, 일종의 청개구리 작전이 성공한 것인지 아슬란은 클레이오를 두고 물러났다.
멱살을 잡았던 손을 무의식적으로 터는 것이, 건틀렛을 끼고 있지 않았으면 당장 씻으러 갈 것 같은 몸짓이었다.
원론적으로 약자를 핍박하는 것은 기사에겐 모욕적인 행동이다.
역시 이번에도, 이 무력한 마법사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명예 없는’ 행동이 거슬린 것일까?
“네 주제와 분수를 알고 자중하도록.”
길어난 검은 머리와 은회색 망토를 바람같이 휘날리며 사라지는 왕자는, 뭐 붙잡을 여지도 없었다.
문은 다시 엄중히 잠겼다.
남겨진 클레이오는 널브러진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황당함에 눈만 휘둥그레 떴다.
‘안 죽이고 여기서 장기 요양시켜준다는 뜻인가? 감사해야 해?’
그런 식사 시종의 모습을 보고 창으로 뛰쳐 들어온 영묘만 열을 내며 펄펄 뛰었다.
“아이고 이놈아! 이게 뭔 꼴이냐. 일단 네 말을 듣긴 했다만, 감당할 수 있긴 뭘 있느냐! 아이고!”
“감당했지. 그냥 멱살만 좀 잡혔잖아. 응?”
“네놈이 보통 사람의 절반 꼴만 하고 있어도 걱정을 안 하지!”
걱정에 휩싸인 거대묘가 날뛰니 바닥이 쿵쿵 울렸다.
층간 소음 없는 석조 건축물이라 정말 다행이었다.
***
아슬란이 폭풍처럼 들이닥쳤다 떠난 다음날부터 클레이오의 대우는 완전히 달라졌다.
왕자나 그의 측근이 새 명령을 내린 건지 혹은 명령이 어디에서 잘못 전달이 된 건지, 클레이오에게 제공되는 식사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해졌다.
아세르 가의 마법사가 미식과 미주를 즐긴다는 거야 상류층 사이에선 알음알음 알려진 사항이니 생활부터 나아지게 해 포섭하려는 건지 어떤지.
좁은 테이블 위를 꽉 채운 접시들을 클레이오는 멀리서 아연하게 쳐다봤다.
짭짤한 페스트리에 화이트 소스를 뿌린 볼오방. 딜과 머스터드로 향을 낸 아티초크와 송아지 혀 냉채.
둥글게 구워낸 얇은 튀일에 생굴과 카망베르 치즈를 얹은 전채.
메이플 시럽으로 글레이즈한 새끼 돼지 뱃살 구이까지.
하나같이 카롤링거 식으로 손이 많이 가고 향과 맛이 강렬한 음식뿐이었다.
거기에 이젠스 와인과 카롤링거의 부디갈라 와인까지 곁들여졌다.
평소라면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일단 입에 집어넣고 봤을 클레이오였지만, 오늘은 창을 활짝 열고 가능한 한 테이블에서 멀어져야 했다.
「지각」이 안 꺼지는 곤란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다가왔다.
“나는 하나도 못 먹겠어. 못, 너라도 많이 먹어라.”
고작 하얀 빵 반 개와 맹물만 들고서 창가에 시무룩 앉은 클레이오는 평소보다 더 시들시들해 보였다.
“네가 그 꼴인데 나 혼자 포식을 하겠느냐?”
고양이 역시 슬슬 단골 낮잠 자리가 된 창틀에 올라앉은 채 꼬리를 느리게 탁 탁 부닥쳤다.
영역을 떠나서 그런지 점점 낮잠 시간이 길어지는 고양이의 몸에 닳아, 창틀 한곳만 좀 더 반들반들해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나한테 이렇게 차려주는 건, 내가 여기서 나간 후의 일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거잖아. 죽여서 파묻을 거면 잘해 줄 이유도 없지.”
“헤엥, 그렇게 겪고도 모르느냐? 인간을 그리 이성적인 존재로 생각해선 안 된다. 지금 넋 빼놓고 자빠져 있을 때인지. 츳.”
“그래서 영묘님의 빼어나신 후각으로 살폈을 때 여기 독이 든 음식이 있던가요?”
“…일단 먹어봐야 알겠다.”
별로 안 내키는 기색으로 스르르 흘러내려 온 고양이는 펄떡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거대한 몸을 요리조리 펴고 늘리며 접시 사이로 넘어다니는 고양이의 움직임이 절묘해, 털에 소스 한 방울 묻지 않았다.
베헤못은 차려진 음식을 모두 한 입씩 맛보더니 사르르 물러서 입가를 삭삭 핥고는 말았다.
“주방 돌아가는 꼬라지로 판단할 때 이 니네베 호수의 궁전에서 나올 음식이 궁성보다 못할 건 알았지만 아세르 저택보다도 한참을 뒤처지는구나. 나름 왕비의 궁이거늘. 에잉, 입맛만 버렸다.”
맛이 강한 음식은 한 입도 못 먹는 클레이오를 배려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영묘의 고귀하신 입맛에 이곳의 음식이 안 맞는 것인지, 베헤못은 몇 입 깔짝이던 그대로 조동이를 꼭 다물었다.
“그래도 요즈음 끼니로 먹던 간 안 한 닭고기나 돼지 간, 미트파이 속 같은 것보다는 낫지 않아?”
“그런 것은 소박하고 신선하기나 하지, 어설픈 솜씨로 괜히 카롤링거식 소스며 향신료를 쓰려 드니 영 균형이 맞지 않는다.
차라리 본래 브룬넨에서 하던 식으로 육류를 새콤한 양배추 채와 함께 찌거나 기름에 절여 콩피를 하는 편이 낫다 이거다.
화이트소스에 들어간 송아지 뼈 육수는, 뼈를 너무 많이 구워 군내가 돈다. 아티초크는 뻣뻣한 대가 섞였고 송아지 혀는 너무 푹 익혔다.
굴은 비리고 메이플 시럽은 너무 많이 넣어서 돼지고기가 아니라 돼지 사탕이 됐잖느냐!”
미식묘의 가차 없는 평은, 클레이오 자신이 요리사였다면 한동안 칼을 못 잡을 것 같은 수준이었다.
‘한참 쓴맛을 보게 했으니 단맛을 뿌려서 사람 심리를 뒤흔드는 건 꽤 고전적인 기법이지. 근데 시도가 좋으면 뭐 해. 그래 봐야 아슬란의 시도다, 이거네.’
운때 없는 2왕자는 모처럼 인질을 잡아와서도 일의 아다리가 안 맞는 것 같다.
“아래층 얘기 들어 보니까 여기 주방 사람들은 전부 브룬넨인이던데? 애초에 다들 이곳에서 근무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 일이 손에 안 익은 모양이야. 카롤링거식 알비온 음식엔 서투를 수밖에.”
“그거야 왕비의 인선이지. 일국의 왕비라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마인라트의 공녀라 여기는 여인다운 처사로구나.”
“그렇다기보단, 음… 그, 히드라의 독을 만드는 데 연관되었던 사용인들을 전부 갈아치우고 새 사람으로 채운 것 같아.”
혹시라도 히드라의 독에 관해 더 알아낼 순 없을까 쭉 대화를 엿들어 보았지만, 이곳에서 1년 이상 근무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본래 이곳의 집사장인 트로모스 노트피어를 잘 아는 이조차 없을 지경이니 원래 일하던 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무서운 추측을 할 수밖에.
‘설마 다 죽여서 파묻고 그런 건 아니겠지.’
빵을 우물우물 씹으며 클레이오는 다시 술렁이는 아래층으로 귀를 기울여 봤다.
성안의 온갖 소리에 시달리는 것도 꽤 익숙해져서 밥 먹으면서도 할 만했다.
‘이런 거 얻어들으려고 여기서 삐대고 있는 거니까.’
쥴레이카의 집사이자, 히드라의 독 실험의 책임자인 트로모스 노트피어는 지금도 이젠스 성에서 전략 물자를 모으는 중이다.
아슬란의 외조부 프리드리히는 이미 의식이 없어 운명이 오늘내일하고 있었다.
‘흑적의 마법사’라 불리는 헤스터는, 그 수가 수백에 불과하나 용력이 심상찮은 붉은 기사단을 키워냈다.
7레벨 마법사이자 붉은 에테르 병사들을 통솔하는 헤스터는 잡을 수 있다면 개전 전에 잡고 싶은 패였다.
‘따지고 보면 헤스터 역시 블라드 이상의 반전을 선사하는 인물이잖아. 미친다.’
그런 와중이니, 지금 부친의 임종을 지키러 클라이페다에 간 쥴레이카가 오로지 상복을 갈아입기 위해 거기에 있는 건 아닐 터이다.
클라이페다 주변에서는 소규모 공장의 직공이나 수공업자들이 소집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다만타움 가공이 목적이니, 곧 붉은 에테르의 기사들에게 아다만티움 무기를 들려주려는 계획이 짐작됐다.
‘게다가 아슬란이 동남수비군을 떠나 이곳저곳 자유로이 오가는 걸 보면 이미 크뤼엘 기사단 포섭은 끝났다고 봐야지.’
동남수비군은 아서가 손을 대거나 감화시켜 볼 수 없는 인력풀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2등은 1등을 제일 미워하는 법인데, 딱 성적 간당간당해 수도에서 밀려난 수도방위대 학교 출신 귀족들이 우글우글 한 데가 크뤼엘 영지의 동남수비군이니까.’
만년 2등인 귀족 엘리트주의자들과 인민의 왕자는 상극 중의 상극, 아슬란의 논리에 동조하며 힘만을 추구한 자들이 브룬넨으로 전향함으로써 알비온에는 제법 줏대 있는 기사들만 남겨지는 결과에 이른다.
대부분의 흐름은 지난 원고와 흡사하다.
‘그럼, 당장이라도 자기에게 충성하는 크뤼엘 공작의 영지를 마인라트에 병합하고 알비온과 전쟁을 벌여도 될 판이잖아. 히드라의 독도 완성된 지 오랜데, 아슬란은 뭘 기다리는 거지? 자기가 소드마스터 되는 거?’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며 깔끄러운 빵조각을 뭉개다 보니 문득, 본능적인 예감이 불쑥 치솟았다.
술도 차도 못 마시고 허기까지 지니 머리가 맑아져서인 덕일까.
‘아슬란은 역시, 어떻게든 멜키오르를 엿 먹여 보고 싶은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