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07
운명의 새벽과 아침 (1)
대화는 마차 앞좌석과 바깥의 마부석 사이에 뚫린 창을 통해 이뤄졌다.
청력이 뛰어난 에테르 감응자 비행사들은, 마차 바퀴가 거친 도로를 달리는 소음 속에서도 요령 좋게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으음. 뭐, 오르간 반주보단 확실히 재밌네요. 게다가 높으신 분들이랑 같이 있음 속 안 긁을 자신도 없구. 윌헬미나가 저보다 뭐시기 입에 발린 말은 더 잘하니깐.”
“왜 카스퍼는 무시하니. 멜빌 가문도 멜키오르에게 항명했어. 그쪽은 본래도 비튼 가문과 사업적 교류가 크니까 한동안은 비튼 의장의 신변을 맡길 만해.”
“하아긴, 멜빌 하사가 주제에 귀족이니 알아서 잘하겠죠.”
“아니, 주제에는 왜 들어가.”
“걔는 귀족다운 점이 하나도 없거든요. 밥도 오 분 만에 다 먹어요.”
“진짜 귀족식으로 깨작거리면 더 짜증났을걸?”
“그거는 첼 소위님 말씀이 맞네요.”
“내 말은 보통 다 맞지 않아?”
“그건 자만이고요.”
“우리 아이샤는 어쩜 이런 바른 소리밖에 못 할까.”
“알비온어를 다섯 살에 처음 배워서 아직 익숙지가 않네요.”
마부석 창으로 고개를 빼꼼 들이민 아이샤 데왈리는 룬데인의 카토 지구 토박이식 억양을 아주 태연한 얼굴로 쓰면서 그런 말을 했다.
첼은 폭소를 하며 허리를 접었다.
그 소리에 클레이오 역시 늪 같은 수마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오! 일어났어, 잠자는 왕자님? 니네베 호수의 성이랑 썩 잘 어울리는 마법사긴 해, 응?”
“첼.”
“또 이러네. 이름 닳겠다. 열이 아직 안 내렸나?”
마차 좌석 등받이에 양팔을 시원스레 얹고 다리를 꼰 채 편안히 앉아 있던 첼은 자세를 바꾸어 클레이오의 이마 위에 손을 얹었다.
첼이 움직이자 발치에 눕혀 둔 기다란 바스타드 소드가 잘그락 흔들렸다.
평소엔 따듯한 첼의 손이 차갑게 느껴지고 오한이 드는 걸 보니 또다시 열이 나는 거다.
클레이오는 자신의 체온을 가늠해 보는 다정한 친구의 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기댔다.
아주 찰나간 얼굴을 굳혔던 첼은 이내 가벼운 태도를 그 위에 덧씌웠다.
“왜 이래. 사내자식이 징그럽게.”
차마 먼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을 떼었다 붙였다 하는 클레이오를 두고 첼은 경쾌하게 웃으며 손을 쓱 빼냈다.
커다란 눈을 둥글게 뜬 아이샤가 재차 뒤를 돌아보며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그녀의 옅은 에메랄드색 머리와 거의 검게 보이는 진초록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눈길을 끌었다.
“소위님, 아픈 사람에게 참 야박하게도 구네요?”
“아이샤, 앞 봐, 앞. 길 험하잖아.”
“내참, 아깐 잘만 노닥거리더니. 네에네에, 제가 들어야 할 사항은 다 숙지했으니깐, 그럼 얘기들 나눠요. 두 분이서 우정의 해후 하세요.”
“어우! 아까부터 계속 징그러운 이야기만 들어서 소름 돋아. 데왈리 하사, 어떻게 말은 잘 모는데 말은 그렇게 못되게 해.”
“집안의 전통이에요. 우리 아빠가 입 험한 마부거든요. 근데 소위님, 업무 중에는 잡소리 금지라면서요.”
“지금 업무 중 아닌데.”
“그럼 작전 중이요.”
“아이샤는 한마디를 안 져요.”
“‘전투에 나서면 후퇴는 없다’입니다.”
얄밉지 않게 키득거리던 아이샤는 마부석과 좌석 사이의 창을 드르륵 소리 내어 닫았다.
농담 따먹기를 하는 비행단 상사와 부하는 퍽 사이가 좋아 보였다.
함께 지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는데도, 기질이 잘 맞는 두 사람은 서로의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믿음직한 동료가 된 모양이다.
두 비행단원이 어색함을 흩어주는 동안 클레이오는 꿈틀꿈틀 구겨진 다리를 펴고, 몸에 덮여 있던 모포도 잘 포개서 옆으로 옮겨놓았다.
그다음으로는 푹신한 쿠션 위에서 여전히 새근새근 자고 있는 고양이를 일별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 봐야 다 쉬어 긁히는 목소리는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날 어떻게 찾아냈어?”
“내 뛰어난 정보력으로 찾았다고 해주고 싶은데, 사실은 아세르 준남작님의 도움 덕이었지.
아세르 상사의 윌리엄 존스라는 사람을 보내서 네가 여기 있을 거라고 알려주더라고. 아세르 상사의 정보력은 내부의 배신자를 찾아내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던걸.”
윌리엄 존스라면 첸트룸 상행을 책임질 만큼 기디온의 신임을 받는 아세르 상사의 직원이다.
기디온이 블라드의 소행을 알아채고서 윌리엄을 통해 친구들에게 정보를 전한 모양으로, 클레이오 자신의 납치는 오른팔을 보내야 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 된 거다.
클레이오는 피로한 눈가를 문질렀다. 버석버석 마른 진흙이 손길에 따라 떨어졌다.
“집안일로 이런 꼴이 나다니 부끄럽다, 정말.”
“그렇게 치면 지금 나라가 뒤집힌 것도 리오그난 집안일 때문이긴 하지.”
두 사람은 안부를 나누기에 앞서 서로가 알고 있는 정보를 먼저 교환했다.
클레이오는 아슬란의 계획, 블라드가 아슬란 측에게 제공한 조력, 헤스터의 치명적인 마법적 성취에 대해 설명했다.
첼 역시 수도의 소식을 전달했다. 안젤리움 쌍둥이는 부친과 함께 영지로 돌아가 서남수비군의 술렁임을 잠재웠다.
키시온의 동북수비군은 비상시 대기라는 원칙을 고수하며 사태를 관망했다.
하지만 전국의 전신이 끊겨버려, 수도에 남은 이시엘은 부친인 키시온 자작과 연락이 불가했다.
그뿐 아니라 이시엘은 아서의 뒤를 따르며, 벤자민 비튼 의장을 연행하려던 피어스를 자신의 주군과 함께 상대해 모두가 도피할 시간을 벌다가 영창에 끌려갔다.
그 사이에 룬데인을 빠져나온 첼은 애타는 마음을 눌러놓고 의무를 먼저 수행했다.
비행단을 반으로 나눠 자신과 아이샤는 클레이오를 찾으러 오고, 나머지 인원은 벤자민 비튼 의장을 보호하게 했다.
첼이 아세르 상사의 정보부보다도 더 빨리 클레이오와 만난 건, 비행기를 몰고서 가을 폭풍을 정면으로 돌파해 온 덕이었다.
물론, 그러한 이유로 첼과 아이샤가 함께 타고 온 비행기는 결국 대파되었다.
비상 착륙을 한 뒤 거기서부턴 첼의 ‘교섭력’을 발휘해 말과 마차를 사고, 꼬박 반나절을 니네베 호수까지 달려왔다고 했다.
첼은 자신의 검을 보란 듯 절그럭댔다.
“그 와중에 내 바스타드 소드를 안 잃어버린 게 천운이지. 사연이 이렇게 돼서 우리 비행단원들은 전부 무단 탈영병이야. 돌아가면 징계 먹을걸? 아마 확실하게, 수도방위대 소속의 기사론 임관할 수 없겠지. 뭐, 잘 된 거라고도 볼 수 있고.”
첼의 발랄함이 믿을 구석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절망적인 상황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인지 가늠해 보려던 클레이오는 제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란 걸 깨닫고 그냥 생각한 바만 담백하게 말했다.
“그 부분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아슬란이 멜키오르의 불신임안에 힘을 실어주게 되면 기사예비생들을 징계할 주체가 모호해져서 의외로 큰일은 없을 가능성이 커.”
특히 아슬란의 서남 수비군 포섭 사실이 알려지면 알비온에 남은 기사 한 명 한 명의 가치가 더더욱 중요해진다. 환시로 인해 미래를 짐작하는 아서는, 그 점을 감안해 스스로 미끼가 되길 자청한 것이리라.
그 혼란 속에서 여러 이해관계가 멋대로 엮이고 풀려나가며 사태의 복잡성을 증가시키고 있었다.
클레이오는 이렇듯 제멋대로 구는 아서 일파에게 태서턴이 개입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멜키오르는 이 혼돈의 판국에서 아서와 그 친구들이란 요소를 제외시키지 않으려는 것이다.
관여된 요소가 많으면 혼란은 더 커질 테니까.
“꽤 긍정적인 예측이네? 하긴,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단 일이 잘 풀렸어. 너도 크게 다친 데 없이 그런 미친 마법을 쓰는 헤스터를 이겼고 말이지. 역시 우리 대마법사야.”
“우연히 레벨 상승과 겹친 덕을 본 거뿐이야. 아직 칭호도 없고.”
“스물한 살에 7레벨 마법사인데 칭호가 중요해? 역사상 최초잖아. 진짜로, 전설이 돼버리셨어, 클레이오 경?”
“놀리는 건 나중에 좀 상태 좋을 때 해줘.”
“어휴, 내참. 놀려먹지도 못하면 우리 작대기 마법사를 어디 써먹어. 전설도 지금은 따듯한 물에 씻고 뭐라도 요기를 해야겠다. 명색이 왕비 성인데 거기서 밥 안 줬어? 꼴이 왜 이래.”
클레이오는 제압구를 찼던 일과 호화로운 식사를 매 끼니 물렸던 사연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자신이 겪은 고난에 대해선 축소하는 경향이 있는 클레이오의 습성을 잘 아는 첼은 답답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신을 잃었을 때 요령껏 살펴보긴 했다. 자잘하게 베인 상처와 어깨에 시커먼 멍이 든 것 말고 더 심각한 부상은 없어서 굳이 언급하지 않았을 뿐, 클레이오의 행색은 엉망진창이었다.
온몸에 진흙이 말라붙었고 머리끈도 어디론가 사라져 머리카락은 봉두난발이다.
걸친 거라곤 셔츠와 바지뿐인 가벼운 실내복에,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셔츠 소매의 단추도 없어져, 옷깃 아래로 공작이 긴 모가지까지 드러내고 있으니 첼은 그냥 이유 없이 분통이 터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분노를 드러내 부닥칠 때가 아니었다.
두어 번 호흡을 고른 첼은 다시 쾌활한 어조를 되찾았다.
이런 상황에서 심각해지면 사기가 바닥을 찍는다. 웃어야 했다.
“이럴 줄 알고 이 몸이 또 준비를 했지. 디오네의 말이 맞아. 너는 정말 손이 많은 도련님이다, 인마.”
클레이오가 앉은 쪽 좌석으로 건너온 첼은 진흙이 뭉친 채 굳은 그의 머리카락을 살살 그러모아 새 머리끈으로 묶어주었다.
이전보다 조금 더 광택이 도는 그레이어 상회의 초록빛 리본이었다.
“이게 그레이어 상회 신상이라고 해. 마찰력이 이전보다 강해져서 밤까지 절대 안 풀리는 리본.”
“…고마워.”
“홍보해 달라고 디오네가 한 상자를 줬는데, 물류가 전부 멈춰버렸으니 무슨 소용이겠어. 내 관사에 남은 다섯 개는 아세르 저택에 전부 갖다 둬야겠네. 수도로 돌아가면 말이야. 하긴, 징계받으면 관사도 쫓겨나려나? 그럼 한 번 더 신세 질 테니, 미리 잘 부탁해.”
“그런 거야 얼마든지. 근데 지금은 어디쯤 온 거지?”
“아직 동남부의 포도숲을 다 못 빠져나갔어. 기차를 탈 수 없으니 길이 머네. 여기 근처에 베헤못 포도원도 있었지?”
클레이오는 뇌 속까지 진흙이 들어찬 듯 삐걱거리는 머리를 간신히 움직여 결론을 도출해냈다.
“기차를 대신해서 우편마차 도로를 탄 건가 보군.”
“정답. 긴말 필요 없어서 좋네.”
요 몇 년 새 선로가 작은 역들까지 연장된 이후, 우편마차 제도는 거의 폐지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동부 국경과 수도 사이의 노선이 지나가는 여기 동남부 지역은 일찍이 철도망이 부설되어 우편마차 도로를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 덕에 밤의 가도엔 통행량이 전혀 없었다.
말들은 능숙한 아이샤의 손길에 이끌려 깊은 밤을 가로질렀다. 안온한 어둠이었다.
가스등 하나 밝히지 않고 달빛뿐인 마차 안에서 첼이 나직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재와 강의 도시를 나온 뒤에 말이지, 쌍둥이들은 아직도 서로 자기가 본 엄마 모습이 진짜였다고 우겨. 그런데 말을 맞춰보면 하나는 검은 치마 차림이었고 하나는 푸른 직물로 짠 바지를 입었던 데다 머리 모양도 완전히 달라. 각자 다른 사람을 본 거지.”
이제와 찬찬히 묘사를 들어보니, 클레이오의 짐작으론 한복 치마저고리와 청바지이지 싶었다.
쌍둥이들은 각자 같은 곳에 떨어졌던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장소와 시대를 헤매다 을지로 부근에서 재회한 듯했다.
“그리고 나는 금속 동체를 가진 비행기가 도시에 포격을 퍼붓고, 철교가 폭파되어 끊기는 모습을 봤지. 우리가 물뱀을 잡았던 그 큰 강에서 말이야.”
클레이오는 침음을 삼켰다.
하필이면, 첼이 마주한 건 그 도시에서 가장 근래에 벌어진 전쟁의 참상이었다.
“하지만 아서는 그 도시의 비극에서 제외되어 있었어. 테오필라 신녀가 흰옷을 입고 나타나, 아직 궁궐도 도시도 없던 수려한 산세의 산중에서 신수들을 어르며 노닐었다잖아. 뭐 이래.
덕분에 놈이랑 같이 있었던 이시엘이 험한 꼴을 안 본 건 좋지만, 좋은 건 그것뿐이라고.”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리고 너는 뭘 봤는지 새파래져서 숨도 못 쉬고 말이지.”
“…갑작스레 마주치고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걸 봐 버려서 그랬어. 젊은 시절의 어머니를, 보리라 생각지도 않은 데에서 마주쳐서.”
첼은 물끄러미 클레이오를 바라봤다. 회색 눈은 쇠뇌와 같다. 꿰뚫는 시선이다.
“그 어머니란 건 텔마 아세르 여사가 아닌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