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51
내밀한 기적 (5)
비탄의 정화에서 새나오던 옅은 보랏빛은 황금빛 에테르에 가렸다가 이내 스러졌다. 도구는 제 역할을 다했다. 마도구를 쓴 정화 쪽이, 복합 마법식보다 더 이르게 효력을 보였다.
곧 폐색감에 질린 자들의 비명이 잠수정 안의 좁은 공간을 울렸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고통에 승조원들이 날뛰기 시작한 거였다.
[차폐]된 채 물에 잠겨 있는 잠수정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른 이들은 몰라도, 마법을 시행하고 있는 클레이오 자신만은 잘 알 수 있었다.구조를 보건대, 저 잠수정들은 망가지기 전에도 승조원의 편안함을 고려해 설계된 물건은 아니었다.
애초에 에테르 감응력이 없는 보통 사람의 몸으로는 견딜 수 없는 환경으로서 탑승자의 안녕은 도외시한 채 오로지 공격 기능에만 집중한 어처구니없는 물건이었다.
잠수정에 탑승한 이들은 흑적의 기사단 안에서도 취급이 나쁘던 하급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대개 평민 출신으로 정화를 거치고 나면 에테르 레벨이 없어지는 사람들이었다.
클레이오가 건 [분해]와 [해체]마법으로 인해 잠수정은 시시각각 삭아가고 있었다.
그 안을 채운 건 뜨거운 열, 부서진 기계에서 새 나오는 연료와 마석 혼합물, 사나운 불길, 완전히 고장 난 공조 장치, 다가오는 질식의 공포.
보통 사람의 몸으로는 견딜 수 없는 환경에 처한 그들은 모두 죽는다. 더 고통스럽게 죽느냐 덜 고통스럽게 죽느냐를 클레이오가 정할 수 있을 뿐이었다.
흔들리는 한숨을 내쉰 마법사는 이제까지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던 방식으로 [경감]을 펼쳤다. 저들의 심장 안쪽으로.
“[너를 그려낸 쉼과 잠에서 큰 기쁨 얻는다면,
죽음 네게선 필히 더욱 큰 기쁨 넘치리니]1)”
클레이오가 펼쳐낸 [경감] 마법식의 부드러운 빛은, 손톱이 빠지도록 바닥과 벽을 긁고 있던 브룬넨 병사들의 얼굴에서 눈물이 멎도록 했다.
그 누구도 저항하지 않고 유일한 구명인 [경감]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마법은 연인의 포옹처럼 부드럽게, 그러나 신의를 모르는 상대처럼 비열하게, 저를 받아들인 이들의 심장을 차례차례 멈추어 갔다.
그 모든 죽음을 클레이오는 「지각」을 통해 감각했다.
몹시도 생생하게.
저들은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서 발버둥 치다 이러한 마지막에 이르렀다. 모두가 헤스터처럼 부러 신을 거역하기 위해 살지는 않았을 터.
역사의 옳은 방향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엔 신이 원하는 미래가 있다. 칼리오페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역사의 옳은 방향이라 지시된다.
그러나 그러한 방향성을 가지라고 타인에게 강요할 권리가 제게 있는가?
클레이오는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어느새 공작의 완드가 깃을 소란스럽도록 흔들고 있었다. 아니, 흔들리는 것은 공작의 깃이 아니라 자신의 손이다.
머리는 차갑고 몸은 뜨거웠다. 주르륵 흐른 코피가 옷깃을 마구 더럽혔다.
한 명 한 명 사망에 이르는 병사가 늘어갈수록, 그들의 육신에 엮여 들었던 에테르가 풀려나 펼쳐져 있는 [경감]의 식에 밝기를 더했다.
클레이오는 잘 멎지 않는 코피를 연신 손으로 훔쳐냈다. 이내 양손 모두가 붉게 물들었다.
제 손을 내려다보며 마법사는 생각한다.
이것은 참으로 예언적인 광경이다.
물론 그는 씻기지 않는 피의 환상을 매일 밤 헛되이 씻어내는 고전 속 인물처럼 굴 생각이 없었지만.
권리는 모르지만 의무라면 확실히 있다. 제약으로서의 의무이다.
지금과 같지는 않으나 흡사한 사건들은 8교의 아서에게도 일어났다.
그때에는 이 모든 일을 아서 스스로 해야 했다.
그 누구도 전쟁에서 패배하기를 원치 않지만, 또한 학살자를 왕으로 모시기도 기꺼워하지 않는 법이다.
수용의 한계를 넘어선 힘은 찬탄과 경외가 아니라 공포와 반감을 산다.
클레이오는 결코 아서를 그 선 너머로 발 딛게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테르게스티 돌입 계획을 수립할 때 아서의 전경화를 활용하는 안을 낸 건 클레이오 자신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테르게스티 시장 사저를 히드라의 독으로 오염시킬 수 없다는 명분이었으나, 실상은 아서 홀로 백여 명의 장교를 도륙하는 모습을 타국의 민간인에게 보여선 안 된다는 판단하에 낸 의견이었다.
그 판단은 옳았다. 아서는 그 처절한 사투를 홀로 온전히 치러냈다.
아서에겐 이미 기사로서의 엄청난 위명이 있었고 더 이상 누군가에게 그의 전투 능력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지금보다 더 전투 능력이 부각된다면 정치적 자산이 아니라 정치적 부담이 될 기로에 서 있는 수준이었다.
정식으로 이름을 밝히고 상대가 전투의 채비를 갖추길 기다려 시작된 교전이라 할지라도, 이리 일방적인 결과 앞에서는 다른 의견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전경화를 쓰면 전투가 벌어진 현장과 사망자가 모두 사라지니 해결책으로선 상책이었다.
또한 전경화 성흔을 하루에 한 번밖에 쓰지 못하기에 아서에게 두 번, 세 번 같은 일을 거듭하는 부담을 지울 염려도 없었다.
클레이오는 첸트룸 대륙에서 보았던 석판의 내용을, 이제는 지워진 천 년 전 역사의 이본(異本)들을 「기억」한다.
최초의 레오니드는 존경받는 성군이 아니라 공포의 왕이었다. 그가 자비와 관용을 흉내 내기까지 반복의 수백 년이 필요할 만큼.
기억은 참조할 만한 문헌의 낱장으로 클레이오를 인도한다. 파리사 시 아세르 상사 소매점 운영자인 사이러스 머천트의 편지였다.
갓 소드마스터가 된 태서턴이 한밤중에 키시온 성을 부수는 것을 지켜봤던 이는 글씨를 쓰던 펜 끝이 흔들리도록 생생한 공포를 느꼈다.
인간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은 개체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서린 글줄은, 언제든 아서를 향한 묘사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클레이오는 물가에 선 아서의 이형을 일별하며, 넓게 펼쳐진 「지각」이 전달하는 정보를 받아들인다.
해안 창고의 지하에 잔뜩 모여 떨고 있던 짐꾼 한 무리가 아서의 이형에 의해 구조되고 있었다.
불타는 도시의 모습을 목격했던 아서는 또다시 잠수정이 포격을 가할까봐 염려하는 듯 두터운 [강화]를 일으켜 사람들을 감쌌다.
아서의 주제는 헌신과 구명이다. 마지막까지 그 주제는 불변하는 채로 반복될 것이다.
‘그러자면, 쇼는 계속되어야겠지.’
스으으읏—
망가진 잠수정 안, 마지막 승조원이 숨을 거두고, 그들의 피에선 더 이상 독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클레이오는 마음속으로 브룬넨의 공국들을 꼽아 본다.
‘옐레니아와 이자르는 완패, 라에티카와 여기 이젠스의 흑적의 기사단도 병력이 줄었어. 이제 공국 소속의 병사들은 히드라의 독으로 만들어낸 하급 기사가 대부분일 거야. 그러니 아슬란 휘하에 남아 있는 흑적의 기사단 장교들이 브룬넨의 최정예군이겠지.’
흑적의 기사단 안에서도 상급 기사와 그 아래 사람들의 구분이 있다고 들었다. 아슬란 휘하의 상급 검사들은 아직 직접적으로 참전한 적 없어 그 규모 역시 파악이 어려웠다.
동남수비군의 전향자들이 고스란히 거기 속해 있을 테니 결코 무시할 만한 수는 아닐 테지만, 황태자이자 총사령관인 아슬란이 친히 나서야 한다는 건 상황이 이전처럼 브룬넨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계산을 마친 클레이오는 수면에 애매하게 걸쳐져 있던 스물다섯 대의 잠수정을 모두 공중으로 [체공]시켰다.
촤아아앗—
목격자들에게 똑똑하게 보는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서였다.
초반의 공포와 혼란이 가시고 나자 저기 위의 선박에선 ‘선명의 망원경’을 들어 아래를 살펴보는 이들이 있었다. 민간인 중에는 상인 말고도 기자나 상사 주재원의 아마추어 삽화가 가족도 있었다. 그들은 저 자신도 모르게 여신의 뜻을 전하는 나팔수가 될 것이다.
저들 앞에서 가장 압도적인 방식으로 가장 공포스럽게 대미를 장식해야 했다. 모든 사람의 주의를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휴전 협정을 시작하기 위해선 이것이 최선이었다.
클레이오는 여전히 펼쳐져 있던 [분해]와 [해체]의 식에 막대한 에테르를 밀어 넣었다.
파스스슷— 바스스—
수면에서 떠오른 잠수정들은 삽시간에 수백 년의 풍화를 겪은 듯 불그레한 먼지로 돌아갔다.
마치 시간을 공간으로부터 분리해 미리 흐르게 할 수 있는 것 같기도, 미래를 현재로 불러오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모습이었다.
에테르 감응자들이라면 생명의 기척을 파악할 줄 알았기에, 적아를 불문하고 모두 눈치챘다.
처음에는 브룬넨인 승조원들이 잠수정 안에 있었고, 이제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물위로 끌어낸 기계가 완전히 소멸되는 무시무시한 광경은 라에티카 포로들의 전의를 상실케 했다.
그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단어는 하나였다.
징벌.
잠수정을 만들 때는 브룬넨 내에서도 찬반이 갈렸다. 알비온 측이 수출 제한을 건 티플라움은 입수가 어려운 희귀 광물이었다. 잠수정의 엔진에 쓴 것이 브룬넨 국내 보유량의 거의 전부였다.
그 사납게 미친 흑적의 마법사가 마도공학자들의 생명을 위협해가며 만들어낸 가공할 만할 무기를, 저기 저 마법사는 공작 깃 몇 번 휘둘러 먼지로 만든 것이다.
절대적으로 철저한 실패였다.
적어도 이곳의 브룬넨군 포로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따금씩 발버둥을 치던 자들조차 부들부들 떨다가 저항을 멈추었다. 아마도 저들이 인식한 알비온 마법사의 호칭은, 은총의 마법사는 아닐 것이다.
결정되어 있던 일을 제대로 해냈다는 흐릿한 충족감이 클레이오의 마음을 채웠다. 그런데도 왜 가슴 한쪽이 헛헛하게 빈 듯 느껴지는지 몰랐다.
클레이오는 짧은 손톱 끝이 엄지 안쪽의 여린 살에 처박히도록 완드를 세게 쥐고 있었다. 이미 피로 더러워진 손에 상처가 새로이 새겨지는 것을 몰랐다.
다만 그는 한 가지만을 생각했다.
이 세상의 모든 유익은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는 신이 부여한 역할을 받아들인다는 것의 의미를 이제까지도 온전히 알지 못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느리게 깜빡이는 얇은 눈꺼풀 안쪽으로 떠오르는 것은 이솔트의 울음, 그리고 멜키오르의 미소이다.
그들의 손에는 막대한 양의 피가 묻었다. 그래야만 했기 때문에 한 일이고, 그것밖에 허락되지 않았기에 한 일이다.
이솔트가 그랬던 것 이상으로 멜키오르는 그의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죄책감을 모르고, 제 행동을 변명하지도 않음에도.
시전자가 어떤 감정을 느끼든 아랑곳 않고, 과시적일 만치 정교하고 광범위했던 마법식은 모든 잠수정을 소멸시킨 뒤 성기게 흩어졌다.
파스스스슷—
곧 녹물조차 가라앉고 파도는 잔잔하다.
바닷속에는 아무것도 없고, 브룬넨의 잠수정 함대와 그 함대의 창안자는 뼈와 이름 어느 쪽도 남기지 못한 채 완전히 소멸했다.
테르게스티 전투의 종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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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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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아서의 [강화]는 배들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그 믿음직한 에테르의 그물에 연료 부족으로 엔진이 꺼진 기체를 완전히 맡긴 첼은 마무리에 집중했다.
과한 주의력 소모로 끔찍한 두통이 끼쳐오고, 치밀어 오르는 구토 때문에 숨쉬기가 어려웠다. 장갑 안의 손을 쥐었다 폈다 해 가며 그녀는 제 스킬을 가까스로 조정했다.
이 장렬했던 전투의 대미를 끔찍한 추락으로 마무리해선 안 됐다.
첼은 공중의 배들을 찬찬히 아래로 내렸다. 승객들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신경 쓴 차분한 강하였다.
위험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승리의 함성과 안도의 탄식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개중에서 성정이 심약한 몇몇 사람은 넋이 나간 듯 클레이오의 이름을 되뇌었는데, 그들은 첼의 스킬로 이뤄낸 일 역시 클레이오의 마법이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굳이 수정의 반구를 통해 전신을 쳐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클레이오는 첼이 가진 가장 큰 무기의 정체를 기밀로 지켜줄 생각이었다.
그건 공적을 독식하려는 행동 따위가 아니었다. 만에 하나라도 테르게스티에서의 일이 문제가 된다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역할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 짓이었다.
첼은 기진맥진한 상태로도 배려심을 잃지 않아, 클레이오를 세심하게 움직여 항구의 접안 시설 앞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탈진해 기절했다.
깜짝 놀란 리피가 얼른 물에 뛰어들어 착수한 비행기 기체에서 첼을 끌어내 구명보트로 옮겨왔다.
하지만 첼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클레이오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지쳐 있던 마법사는 공작의 완드를 무심결에 왼팔로 들여보내 버리고선, 제 몸을 지지할 게 없으니 휘청휘청거리다 균형을 잃었다.
첨벙!
그가 물에 빠진 건 삽시간의 일이었다. 977기 동료들이 하필 먼 곳에 흩어져 있을 때였다.
어느새 슬금슬금 물가로 다가와 전투를 지켜보던 아군 병사들은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즉각적으로 달려와 물에 뛰어들지는 못했다. 어느덧 곰팡이처럼 돋아난 공포가 그들의 팔다리를 얽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히 저 마법사를 자신들이 구한답시고 나서도 되는 것일까? 그는 허공을 걷고 눈앞의 사물에 세기의 시간이 작용하도록 만드는 존재인데?
그 순간에도 클레이오는 수면의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1) 「Holy Sonnets」 X, John Donne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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