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4
아세르 가의 저녁 식사 (2)
저녁 식사는 세 시간 내내 이어졌다.
수도 저택을 재개장 한 후 첫 정찬인데다, 기디온이 방문하기까지 했으니 그날 식탁의 화려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공사를 치기 전에 밥부터 든든히 먹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접시에 집중하던 클레이오는 합리적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캔튼 부인도 마법을 쓰나? 마법 안 쓰고서 반나절 만에 이런 게 준비가 돼?’
서빙에는 하인이 넷이 동원되었고, 한 사람당 커트러리는 열세 개, 잔은 다섯 개가 놓이는 8코스 세팅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치즈 보드가 놓일 즈음에 이르자 술이 들어간 바스코의 뺨과 귓가는 온통 붉었다.
“디오네에게 얘기는 많이 들었다! 네가 테르프시코레의 리라를 복원해냈다지!”
안 그래도 조그만 양반이 그러고 웃자 마흔 살이 넘었다는 게 안 믿길 지경이었다.
“그렇습니다. 저 역시 로드 그레이어의 위명을 익히 들어왔습니다.”
애써 영업용 미소를 지은 클레이오는, 하인을 대신해 바스코의 잔에 와인을 더 따랐다.
“요 녀석, 어린 것이 기분 띄우는 말도 다 할 줄 아는구나. 그치만 로드는 너무 낯간지러우니 바스코라 부르거라! 흐흐!”
“삼촌, 술이 되셨어요. 조금 자제하세요.”
디오네가 자그만 목소리로 바스코를 만류했다.
“하하, 그래 네 말을 들으마. 얘기를 더 제대로 하려면 술로 정신이 흐려선 안 되지.”
“바스코, 그 얘기 첸트룸에서도 백 번은 들었는데 한 번도 안 지켰잖습니까.”
“블라드 너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항상 비수를 찌른다니까!”
첸트룸 대륙에 동행한 동안 친해졌는지 바스코와 블라드는 허물이 없었다.
“제 장남이 예의에 느슨한 경향이 있습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양해라니요. 오히려 저야말로 항상 준남작님과 블라드에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저희 상회 규모로는 첸트룸 대륙 방문이 쉽지가 않잖습니까.”
첸트룸 대륙은 데르니에 대륙의 서쪽에 위치한 곳이다. 대륙이라기에는 작고 섬이라기에는 큰 땅이었다.
첸트룸을 오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양의 한복판에 자리하는데다 조류가 복잡하고 거세었으며 첸트룸 섬 부근에서는 위도와 경도 계측이 계속해서 어긋났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마법의 힘 때문이라고도 했고, 저주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런 탓에 한 때 첸트룸과 데르니에 대륙 사이의 바다는 ‘세상의 끝’이라 불렸다.
“숱한 상선이 첸트룸 대륙에 닿지도 못하고 바다에 수장되는 판인데, 아세르 상단과 동행할 수 있어 행운이었습니다.”
그럴 만도 했다.
첸트룸에 일단 닿기만 하면 노다지가 펼쳐진다는 이야긴 클레이오도 들었다.
데르니에 대륙에선 찾기 어려워진 고대의 유적, 희귀한 마광석과 마석이 첸트룸엔 아직도 풍부하게 남아 있었다.
이제는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한 아세르 상회였지만, 최초에는 첸트룸 상행을 대규모로 성공시켜 이름을 알렸다고 한다.
기디온의 비결은 의외로 간단했다. 인건비와 안전 비용을 아끼지 않는 거였다.
보아하니 바스코 역시 이번 상행에서 쏠쏠하게 자기 몫을 챙긴 모양이었다. 물론 그의 수색력과 복원능력에 아세르 상사 역시 큰 이득을 봤을 것이다.
“바스코, 당신과 같이 갈 수 있어서 우리가 더 행운이었죠. 유적이며 광맥을 훨씬 더 많이 발굴했고요. 다음 번 상행에도 동행해요.”
“그래, 블라드. 아세르 준남작님께서 허락해준다면 나야 얼마든지 환영이지. 수도의 일은 여기 디오네에게 맡겨 두면 안심이니 말이야!”
“삼촌도 참.”
디오네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겸양을 떨었다.
“저야 자작님께서 상행에 동행해주신다면 늘 환영입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준남작님! 맞아 내 정신 좀 보게. 선물을 가져왔는데 꺼내지도 않고! 저녁식사가 너무도 훌륭했던 터라 깜빡하고 말았군요!”
바스코는 의자에 걸어두었던 아공간 가방에 손을 쑥 집어넣더니, 별안간 녹이 낀 금속막대 같은 걸 끄집어냈다. 막대는 1미터정도 길이였다.
“클레이오야! 마수를 잡은 것 역시 대단하지만 리라 얘길 듣고, 이건 딱 네게 줘야겠다고 생각했단다!”
디오네가 재빠르게 하인을 불러 바스코 앞의 잔과 접시를 모두 치우게 했다.
정찬실 안 모두의 눈이 바스코의 작은 손에 쥐인 물건으로 쏠렸다. 클레이오는 ‘약속’의 「이해」기능을 썼다. 금빛 문자열이 막대기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베그의 검―유산
*복원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클레이오가 놀라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조금 밀렸다.
‘이거! 안 그래도 아서가 맨날 부서지는 연습용 검만 쓰고 있는 게 신경 쓰였는데, 딱 맞춰서 왔어!’
아서에게는 그를 위한 왕가의 검이 준비되어 있지만, 그걸 얻으려면 우선 왕세자가 되어야 했다.
지난 원고에서 왕세자가 되기 전까지 쓰던 무기가 바로, 바스코에게서 난 ‘베그의 검’이었다.
‘유산급이면 엄청난 무기지. 아서의 무식한 힘도 잘 버텨 내고.’
에선 바스코가 영 안 등장한다 했더니 그래도 제 역할은 다할 모양이었다.
“내가 첸트룸 대륙에서 발견한 것인데, 복원만 하면 상당한 가치를 지닌 물건일 거란다! 혹시 네가 복원해 보겠니?”
“과분한 선물 감사합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준다니 사양 않고 손을 내민 클레이오였다. 하지만 바로 쥐어줄 것 같던 바스코는 동작을 정지한 채 물었다.
“이게 뭔 줄은 알고?”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바스코의 눈은 맑았다.
그는 분명 클레이오를 재보고 있는 것이었다.
‘먼저 얽혀오다니 오히려 환영할 일이지.’
클레이오는 바스코의 미끼를 덥석 물었다.
“압니다.”
“호오, 말해줄 수 있겠나?”
“양날을 모두 쓸 수 있고 검날이 비교적 넓은 초기 형태 롱소드입니다.”
“혹시, 이름을 아나?”
“모양과 연대를 고려할 때 ‘베그의 검’으로 추정됩니다. 베그는 이야기로 전해지는 옛 첸트룸의 군주, 이교도의 침략에 맞서 민족을 규합하고 신의 성소를 지켜낸 영웅입니다.”
클레이오는 원고의 내용을 그대로 좔좔 읊었다.
딱 봐도 저자가 옛 알바니아의 영웅으로부터 차용한 설정이었지만, 어쨌거나 에서는 첸트룸 대륙의 역사로 정해져 있는 내력이다.
“어떻게 그걸 보자마자 알았지?”
“책에서 읽었습니다.”
클레이오는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8교에서 읽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바스코가 고문서와 전승을 힘들게 뒤져 이 검의 배경을 알아냈었지. 딱 알맞은 진언으로 빚어내는 데도 한참 시간이 걸렸고.’
“도대체 무슨 책에서….”
“그것까지는 말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하, 이 녀석 아주 제대로구나! 그래, 마법사가 제 밑천을 남이랑 공유하는 일은 드물지. 앞으로 네 공부의 깊이를 알 기회가 있으면 아주 기쁘겠다. 나 역시 옛 문헌에서 단서를 얻기는 했다만, 너는 네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공부를 깊이 했구나.”
“과찬이십니다.”
“혹시, 복원을 지금 시도해 볼 수 있겠나?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어!”
“지금 당장 말입니까?”
“안 될 게 뭐가 있느냐?! 필요한 재료는 비서를 시켜 우리 상회에서 가져오도록 하마!”
클레이오는 아버지와 형, 가정교사를 쳐다봤지만 누구도 바스코를 말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디오네는 고개만 살래살래 저었고, 블라드는 저도 흥미가 드는지 신이 난 얼굴이었다.
‘윽… 너무 나댔나?’
후회해봐야 늦었다.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걸 알게 된 클레이오는 할 수 없이 바스코가 깔아둔 판에 올라섰다.
“바스코 님. 제 생각에는, 비서에게 수고를 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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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이 정찬실에서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는 동안, 클레이오는 침실로 올라가 아공간 주머니를 뒤졌다.
청동 외에도 가공한 마광석 주철 편이 고스란히 있었다.
‘이것까진 쓸 기회가 없었지. 엉뚱한 데 사용하게 되네.’
[아킬레우스의 창]다음으로 구상하고 있던 [제후 천사의 불]이란 마법의 매개체였다.그걸 위해서 디오네에게, 청동과 더불어 주철도 구해 달라 한 것이었다.
‘검을 복원하는 데는 주철만 갖춰지면 되긴 해.’
마광석 주철 조각을 주머니에 넣고 응접실로 내려가 보니, 모두들 식사 후의 포트 와인을 들며 담소 중이었다.
금속 막대는 테이블보를 깐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각자의 잔을 든 일행은 테이블 주변을 느슨히 둘러선 채였다.
“내려왔어? 내 동생의 숨은 재주를 다 보게 되겠군!”
“집안에 재료가 갖춰져 있다니 준비성이 좋구만~.”
“이렇게 될 것을 알고 마련해둔 것은 아닌데 우연히 쓸모가 생긴 겁니다.”
“흐응, ‘예측’의 성흔이 있다는 이야기는 헛소문인지, 진짜인지?”
“글쎄요, 바스코 님. 보신 대로 판단하십시오. 복원 역시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말만 겸손했지 클레이오의 태도는 꽤 대담하고 태연했다. 엄청 갑작스럽게 상황이 굴러갔지만, 이 경우에는 지름길이 있었다.
‘지난 원고에 바스코가 이 검을 복원하며 쓴 진언이 나오거든.’
아버지와 형, 디오네와 바스코의 시선이 클레이오에게 모였다.
주목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 클레이오에게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미 닥친 일 넘어져도 뭐라도 쥐고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이 기회에 바스코와 아버지 둘 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줘도 좋을 것이다.
테이블에 다가간 클레이오는 베그의 검을 찬찬히 살폈다. 날카로웠을 날도 지금은 불그죽죽한 녹 덩어리에 불과했다.
날의 표면을 쓸어보던 클레이오는 주머니에서 주철 한 뭉치를 꺼냈다.
일전의 리라처럼 복잡한 물건이면 모르되, 검날 하나만을 복원하는 것이라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검날만 복원해가지고 손잡이도 칼집도 보통의 기술로 만들면 되니까.’
“그럼… 해 보겠습니다.”
클레이오는 서클을 최소 규모로만 펼쳤다. 레벨이 올라간 터라, 좁게 펼칠수록 에테르가 응집되어 서클은 더욱 환해졌다.
익숙한 디오네는 얼른 살짝 물러났지만, 클레이오의 서클을 처음 보는 아세르 부자는 아연한 표정이 됐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아무리 소식을 전해 들었다지만, 그들의 사교성 없고 재주 나쁜 막내가 이토록 강렬한 빛을 발하는 서클을 눈앞에서 생성하는 데 충격 받은 것이다.
흥분한 바스코는 오히려 클레이오의 서클 가까이로 와 손을 내밀어보며 그 밝기에 감탄했다.
“엄청난 에테르야. 정말로 엄청나!”
서클 주변을 왕관처럼 두른 에테르의 빛 가운데에서 클레이오는 [수복]의 마법식을 띄워 올렸다.
그 선명한 형태는 막 틀에 부은 금처럼 생생하여 손으로 만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과거에 클레이오의 리라 [수복]을 본 적 있던 디오네조차도 부채를 접으며 숨을 들이켰다.
고작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클레이오의 마법은 이전과 비견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이제 마법에만 집중한 클레이오는 원고에서 보았던 진언을 속으로 되새기며 타이밍을 쟀다.
군주가 신과 민족을 수호하기 위해 용맹히 휘둘렀던 무구가 바로 이 검. 진언 역시 그를 기리는 것.
마법식이 완전히 도드라지던 때, 클레이오는 진언을 외쳤다.
“[신과 민족을 수호하던 군주의 의지를 되살리라!]”
진언으로 촉발된 에테르의 빛은 녹은 금처럼 달아올라 응접실로 범람했다.
누구도 눈을 뜨지 못했다.
서클의 범위에 속해 있지 않았음에도, 몸이 휩쓸리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충격적인 빛의 소용돌이는 한참을 지나고서야 잦아들었다.
얌전히 선 클레이오는 천으로 감싼 검날을 받쳐 들고 있었다.
자신이 한 일에 놀라움도, 자랑스러움도 느끼지 않는 듯 담담한 표정의 소년은 복원된 검을 살피고 있을 따름이었다.
검날은 다마스크 철로 만들어져 독특한 물결무늬가 표면을 뒤덮었다.
클레이오의 움직임에 따라 섬세한 무늬 위로 응접실의 불빛이 어둡고 밝게 스몄다.
소년이 검을 테이블로 돌려놓는 서슬에 검은 저를 감싼 천을 소리도 없이 베어냈다.
매끄럽게 절단된 식탁보가 바닥으로 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단단하고도 날카로운 예기를 띤 귀물이었다.
“검날이 날카롭습니다. 이대로는 위험하니 손잡이와 칼집을 새로 만들어야 하겠군요.”
소년을 지켜보던 바스코의 얼굴에서 넉살 좋은 미소 따윈 모두 사라져 있었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다
바스코 그레이어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검과 소년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 일은 내게 맡겨주겠느냐?”
“맡아주신다면 오히려 감사하지요.”
“그 대신 앞으로도 내가 수도를 비웠을 때, 종종 마도구 수복을 도와주면 고맙겠구나. 나는 또 메리디에스 대륙으로 떠날 예정이라, 창고의 마도구들을 수복하라고 조카 아이가 여간 성화가 아냐.”
클레이오는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고 바라던 반응이었다.
“제 힘이 닿는 데 까지는 노력해 보겠습니다. 항상 성공할 수는 없겠지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수수료만 잘 챙겨주면 저야 얼마든지이죠. 마도구 수복 방법은 이전 원고의 당신이 가르쳐 줬으니까요.’
디오네가 흘끗 눈짓을 하며 배시시 웃었다. 실무자는 그녀이니 알아서 잘 해줄 것이다.
“항상이라니! 항상이라고 말했나! 어떤 이들은 평생을 연구해도 유산이나 성유물급 마도구를 한 번도 수복해낼 수 없어. 너는 참으로 대단한 아이이다.”
바스코는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기디온 아세르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세르 준남작님, 당신께서는 세상에 걱정될 게 없겠습니다. 첫째가 저리도 뛰어난 후계자인데 둘째는 마법의 천재라 불러도 될 아이이니.”
“과찬이십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기디온은 꽤 흐뭇한 기분인 모양이었다.
평소의 표정이 영하 20도의 느낌이라면, 지금의 얼굴은 영하 5도 정도 돼 보였다.
“과찬이라니요? 분명 이 아이는 우리 세대 최고의 마법사가 될 겁니다. 한 분야의 마법에만 통달하기도 어려운데, 공격과 수복 두 종류에 재능이 있다니. 제베디 퓌시스 교수조차도 이 정도는 아니었거늘. 마음 같아서는 뭐라도 더 쥐어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바스코의 격찬을 듣던 기디온은 클레이오를 가까이로 불렀다.
“그렇잖아도 상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클레이오, 뭔가 받고 싶은 것이 있나?”
“다소 과한 바람일수도 있는데…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봐라.”
클레이오가 기디온에게 바라는 거라면 한 가지 뿐이었다.
타이밍 좋겠다, 되든 안 되든 던져 보았다.
“이 저택을 제게 주십시오.”
상상도 못한 대답이었던 듯 아세르 준남작이 쥐고 있던 잔을 삐끗했다.
아세르 준남작이 수도에 가진 부동산이 저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로얄 서커스 부근에 위치한 아세르 상사의 수도지사 건물, 외곽의 직원 아파트,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는 홀이나 창고 등이 있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가치 있는 주거용 부동산은 바로 이 저택이다.
“너는 이제 막 성년이 되지 않았느냐? 네 어머니의 저택을 물려주기에는 너무 이르다. 게다가 물려받는다 하더라도 네게는 정원을 정비하고, 세금을 내고, 하인들에게 봉급을 줄 재원도 없지 않나.”
“그건….”
저택 내에서 가장 많은 급여를 받는 캔튼 부인도 연 4만 디나르를 받았다. 하인이나 하녀들 급여는 아무리 넉넉히 챙겨줘도 그 5분의 1도 안 됐다.
저택을 운영할 재원 따윈 충분했다.
하지만 기디온에게 부동산 이야기를 먼저 꺼낼 수는 없었다.
클레이오는 애꿎은 주먹만 꽉 쥐었다.
‘내 뜻대로 살려고 재산을 악착같이 불리고 있는 건데, 여기서 밑천을 다 드러낼 순 없잖아. 등기부 들이밀기 전까진 무조건 아니라고 해야지.’
물론 자신이 판단한 바가 맞다면 기디온은 그런 품위 없는 방식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망설이는 클레이오를 살피던 아세르 준남작의 냉막한 눈매가 의미심장하게 휘었다.
“훈장에 따라 오는 연금으로는 부족하고, 내가 네게 주는 용돈은 졸업하면 끊길 지원이다. 그레이어 자작님의 후의에만 기댈 셈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무슨 수단으로 이 저택을 건사할거냐. 방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미리 적절한 조언을 해 주마.”
아무리 봐도 저 태도는, 토지 매입에 대해서 다 알고 자진납세를 하라는 재촉이었다.
오레일스 지구의 토지 소유주를 카타리나가 알아냈는데, 귀신같은 조사부를 가졌다는 기디온이 모를 리 없었다.
재산에 대해 고하지 않는다면 기디온은 앞으로도 클레이오의 행보에 대해 눈감아 줄 테지만, 여기에서 순순히 고지한다면 클레이오의 일에 관여해 올 것이다.
저택을 가지고 싶은 마음과, 간섭은 받기 싫은 뜻 사이에서 흔들리게 만드는 시험이었다.
그때 뜻밖에 바스코가 부자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소? 준남작님의 차남은 고작 열일곱 살에 기사의 칭호를 받았으니, 언젠가는 더 높은 지위에 오를 겁니다. 먼 훗날 작위라도 얻게 된다면 축하 선물로 저택을 주는 게 딱 좋지 않겠습니까?”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고려해볼만 하군요. 블라드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기가 막힌 묘수였다. 키 작은 괴짜 마법사가 이야기의 방향을 바꿔 주었다.
하지만 기디온이 마음을 바꿨대도, 이미 후계자로 낙점된 블라드가 끝끝내 반대한다면 클레이오가 부친의 재산을 증여해 달라 주장하긴 어려울 것이다.
알비온에 적자나 장자상속의 전통은 없었지만, 많은 가문에서 자질이 뛰어난 자녀에게 재산 대부분을 상속하는 관습을 따랐다. 이전에 토지를 매수할 적 읽었던 각종 판례를 떠올리며 클레이오는 블라드를 흘끔 살폈다.
‘콜포스에 있다는 성은 본인이 물려받게 될 텐데 이 정도는 동생 줘도 되잖아. 마음 좀 거국적으로 먹어 봐.’
간절한 기원이 통한 걸까?
몇 초간 클레이오를 무심히 마주보던 블라드는 마침내 씨익 웃어 보였다.
“하하, 다들 멀리도 내다보시는군요! 클레이오가 여길 편하게 여긴다면 얼마든지요.”
“그렇다면 문제없겠군. 저택의 명의에 관한 문제는 훗날 클레이오 너의 성취에 따라 다시 논의해 보겠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네가 하루 동안 내게 여러 번의 놀라움을 선사하는구나.”
“그래서 그 놀라움이 아버지의 심기를 거슬렀습니까?”
차남의 대담한 대답을 들은 기디온은, 딱 한 순간 표정의 차가움을 흩트렸다.
“…그런 놀람은 기껍다. 깔린 포석만을 밟으려 드는 자는 길이 놓인 곳까지 밖에 나아가지 못하는 법이나, 길이 아닌 곳을 헤쳐 가는 자는 더 멀리 걷는 법이니. 네가 많이 자랐구나.”
그리고는 곧 평소의 냉랭한 표정 속에 온기를 숨겼다.
클레이오는 한 순간 마음을 못 다스리고 욱한 대답을 한 걸 후회하고 말았다.
‘차라리 화를 내지… 이런 걸로 나한테 이상한 기대 같은 건 안 걸면 좋겠는데. 어쨌든, 이렇게 됐으니 아서에게 작위도 꼭 달라고 해야 할 판이군.’
이래저래 머리를 굴리느라 바쁜 클레이오의 등을 바스코가 팡 쳤다.
중년의 마법사는 키도 손도 몸집도 작은 주제에 힘은 무섭게 셌다. 그의 힘을 못 이겨 비틀거리는 클레이오를 붙잡아주며 바스코가 껄껄 웃어댔다.
“클레이오야, 너 당연히 작위를 받을 수 있을 것처럼 아주 시원한 대답을 하는구나! 비실비실하게 생긴 겉모습이랑 영 딴판인 성격이야.”
“삼촌, 제가 작은 도련님에 대해 여러 번 말씀드렸잖아요. 이제까지 안 믿으셨던 거예요?”
“아니, 믿었지. 믿었고말고. 그런데 들은 것보다 더 괜찮은 도련님이었다 이거지!”
***
클레이오의 병결이 끝날 즈음, 룬데인에는 이른 서리가 내렸다.
올해 겨울은 예년보다 추울 거라는 예보가 나왔다.
걱정이 많은 캔튼 부인은 병약한 도련님이 아프지 않도록 온갖 물품을 클레이오의 짐에 챙겨 넣었다.
커다란 탕파 두 개, 오리털을 채운 두터운 이불, 클레이오의 키만큼 긴 캐시미어 목도리, 따스하게 짠 울 스웨터 여러 장, 모직 셔츠, 새로 맞춘 교복.
더해서, 친구들과 나누어 먹으라며 안긴 간식 바구니가 두 개
.
클레이오 본인이 챙긴 짐 역시 적잖았다.
바스코가 멋진 가죽 칼집을 씌우고 자루를 달아 가져온 ‘베그의 검’이 우선 기다란 상자에 담겼다.
아세르 상사와 그레이어 상회 양측에서 저렴하게 매입해 온 마광석들과 더불어, 겨울을 버틸 센 술을 잔뜩 담은 박스도 더해졌다.
그 결과 왕립 수도방위대 학교 기숙사 앞에 멈춰선 마차는 두 대가 되었다.
한 대에는 클레이오가 베헤못을 데리고 탔고, 나머지 한 대는 온전히 짐으로 채워졌다.
사환 둘과 함께 서두르는데도 마차 안의 짐을 밖으로 내리는 데에는 시간이 꽤 소요되었다.
짐을 내리는 클레이오를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주말 오후 검술 연습을 마치고 돌아오던 쌍둥이들이었다.
“앗! 레이!”
“레이! 이제 돌아온 거야?”
“그래. 너희도 잘 있었어?”
쌍둥이 둘은 우다다 달려와 클레이오에게 답삭 매달렸다.
“우리야 항상 튼튼하지.”
“레이도 이제 좀 얼굴이 나아!”
“다행이야!”
두 소녀의 힘을 못 이기고 휘청이는 그를 누군가 뒤에서 잡아주었다.
가늘지만 단단한 팔, 옅은 장미 향기. 이시엘이었다.
“괜찮나?”
“덕분에. 이시엘 너도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클레이오가 균형을 잡고 서자 쓱 팔을 뗀 이시엘은 앞으로 나와 클레이오와 마주 섰다.
정말로, 엄청나게 오랜만에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자랐네. 이젠 단발보다 길구나.’
처음 이곳에 온 후로 여러 달이 지났다. 이시엘의 길어난 머리를 보자 시간의 흐름이 실감났다.
클레이오가 감상에 빠져있든 말든 이시엘은 무뚝뚝하게 제 할 말만 했다.
“네가 지금 내 안부를 물을 때인가? 그리 큰일을 겪어 놓고는.”
말투는 거칠어도 걱정스러워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늘 감정 표현이 서툰 소녀였으니까.
“신문에서 너무 요란을 떨어서 그렇지 별 일도 아니….”
“마수를 잡은 게 별 일이 아니라면, 수도방위대 학교도 세워질 필요가 없었겠지. 됐다, 네 교묘한 말은 더 듣기 싫다.”
말을 끊은 이시엘은 잠자코 바닥의 상자 둘을 집어 들었다.
그런 그녀의 다리를 쓱 휘감으며 베헤못이 알은 체를 했다.
“웨우우우웅―.”
‘하여간 저 능글묘, 예쁜 애라면 사족을 못 쓰고.’
멈칫 굳었던 이시엘은 잠시 갈등하더니 양손에 짐을 든 채 허리만 조금 숙였다.
베헤못은 그 거대한 몸을 날렵하게 움직여 이시엘이 든 상자 위로 쏙 올라앉았다.
“에옹. 냣(난 간다. 수고).”
“앗, 우리도 도와줄게!”
“같이 옮기자!”
쌍둥이들도 재빨리 상자들을 척척 집어 들었다. 몸집은 조그매도 걷어 올린 반소매 아래 근육이 단단했다.
두 소녀의 합류에 기숙사 사환 둘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저 짐을 어느 세월에 다 옮기나 싶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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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좁지 않은 응접실인데도 쌍둥이들, 이시엘, 어느 샌가 소식을 듣고 나타난 첼과 아서, 막 집에서 돌아온 네보까지 합류하니 와글와글해졌다.
의자가 부족해 침실의 의자를 꺼내 와야 했다.
쌍둥이들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베헤못을 쪼물거리고 있었다.
직원들이 차를 가져다주고 나서, 간식바구니를 열었다.
커다란 라탄 바구니 두 개를 꽉 채운 각양각색의 단것에, 쌍둥이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클레이오네 집 티타임은 이제껏 가본 중 최고였어.”
“빅토리아 케이크도 있네!”
“토피넛 타르트도 맛있겠다!”
착착 손발을 맞춰 디저트를 테이블로 늘어놓는 쌍둥이의 동작이 재빨랐다.
“어어, 토피넛 타르트는 나도 한 조각 줘봐.”
네보는 타르트를 크게 덥석 베어 물고, 첼은 옅은 분홍빛 마카롱을 집었다.
귀여운 단것도 박력 있게 척척 맛을 본 첼은, 같은 걸 집어 조금 떨어져 앉은 이시엘에게도 건넸다.
“이시엘 넌 장미향 좋아하지? 이 마카롱의 장미 크림 정말 잘 만들었다. 클레이오 네 덕에 훌륭한 디저트를 다 먹어 보네.”
“드 네쥬 호텔 운영자의 자녀께서 칭찬했다 고 전하면, 캔튼 부인이 꽤 기뻐할 거야.”
첼과 클레이오가 한담을 나누는 새, 찬찬히 마카롱을 맛본 이시엘이 드물게 풀린 표정을 지었다.
“맛있다….”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간 소리에 놀랐는지 이시엘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던 첼은 호탕하게 웃었다.
“아하하. 이시엘 더 먹어, 여기 마카롱은 다 이시엘 주자.”
“그렇게 해!”
“이제까지 이시엘 단 거 안 좋아하는 줄 알았어!”
“근데 네보 너는 그만 먹으라구. 타르트 벌써 두 조각 밖에 안 남았잖아.”
“아, 야 먹다 보니까 너무 맛있어서….”
찻잔을 들고 센터 피스 앞에 선 아서까지도 올리브 쿠키를 두 개째 집어 들고 있었다.
워낙 다종다양한 디저트들이 갖춰져 있다 보니 모두 각자 좋아하는 걸 찾은 모양이었다.
실없는 수다와 찻잔이 달그락대는 소리, 고양이의 고르륵거림과 어린아이들 웃음소리에 둘러싸인 클레이오는 기묘한 안온함을 느꼈다.
‘언제 던전이 열릴 줄 모르고, 전쟁이 코앞까지 다가온 세계에서 말이야.’
이전의 세상에서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여기가 자신의 자리라는 실감, 그 평온.
자신의 육신과 이름을 모두 잃고서야 이런 안정감을 얻다니 어딘가 부조리하게 여겨졌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아 클레이오 역시 그저 함께 웃었다.
발코니 밖으로 넘어다 보이는 템푸스 강과, 물줄기 너머의 서편이 석양의 주홍빛으로 젖어들 때에야 티타임은 끝이 났다.
단 것을 잔뜩 먹고 기분이 좋아진 아이들은 행복해 보였다.
쌍둥이가 먼저 발딱 일어났다. 저녁을 먹어야 한다는 거다.
간식을 그렇게 먹고 저녁이 또 들어간다는 게 신기했지만, 두 소녀의 검술 연습량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잘 먹었어!”
“고마워 레이!”
“아니야. 너희들 덕분에 짐을 쉽게 옮겼지.”
“레이는 말라빠졌으니까, 힘도 약하지! 밥을 잘 먹어야 해!”
“그치만 다음에도 도와줄게.”
“말만 들어도 든든하다.”
모두들 각자의 방이나 식당으로 빠져나가고 아서와 이시엘이 마지막으로 응접실을 나서던 때였다.
그 둘만 남기를 기다렸던 클레이오가 아서를 붙잡았다.
“아서, 잠시만.”
“응, 왜?”
“방으로 좀 가자.”
“무슨 일인데.”
아서가 멈춰 서자 당연한 듯 이시엘도 걸음을 멈췄다.
“음… 너, 이시엘에겐 저간의 일을 다 전했지?”
눈치 빠른 두 주종은 클레이오의 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무언의 눈빛을 나눈 소년과 소녀는 클레이오를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