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3
아세르 가의 저녁 식사 (1)
거슬리는 소리의 정체가 드러났다.
검이 칼집 안에서 부러져 있었다. 연습용 검이 에테르의 부하를 버티지 못한 것이다.
검집과 손잡이, 예복의 소매와 옷깃에도 피가 말라붙은 채였다. 어째서 그걸 곧바로 알아채지 못했나 싶을 만큼 얼룩은 짙었다.
「지각」이 읽어내는 아서는 피곤하고 지쳐 있었다. 숨소리가 불규칙하고 의자에 기댄 등에는 힘이 없었다.
“야. 또 암살자가 습격했어?”
“하하, 귀신 같이 아네.”
“너야말로 어디 다쳤냐?”
“…아니. 괜찮아.”
클레이오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아서를 샅샅이 살폈다.
‘심하게 다쳤으면 세상이 먼저 요동쳤을 테니 그건 아니고. 전부 다른 놈들 피인가?그렇다기엔 또 피 냄새가 너무 생생한데.’
지난번에 성대하게 실패해놓고도 아슬란은 여전히 암살자를 보내오는 모양이었다.
아서는 이제 5레벨의 검사였다.
알비온 최강이라는 수도방위대 기사단에서도 그 수가 많지 않은 게 5레벨 검사이다. 암살자 나부랭이로는 아서를 상대할 수 없을 터였다.
“지난 여름에 달려든, 5레벨 검사에 준하는 힘을 내는 놈들도 결국 널 못 죽였는데. 시시한 암살자 한 무더기씩 보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아슬란도 알 때가 됐지 않아?”
클레이오의 여상한 물음에 아서는 폭탄 같은 대답을 돌려줬다.
“자기가 보낸 별 볼일 없는 자객들이 날 죽이지 못할 거, 아슬란도 이미 알더라고.”
“뭐? 그럼 왜 안 그만두는데.”
“나로 하여금, 나보다 약한 자들을 살해하도록 하려고. 끊임없이 의미 없는 피를 묻히는 고통을 겪길 바라서. 그건 명예도 뭣도 없는 싸움이지.”
클레이오는 경악했다.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아슬란 놈 지독하게 굴잖아. 지 동생을 죽이질 못하니까 멘탈이라도 부숴 놓겠다 이거야?’
차라리 아서의 목숨을 빼앗길 원해 벌이는 짓이었다면 나았다. 이건 그보다도 더 비틀린 악의였다.
아서가 자신의 ‘저주’에 대해 말하던 때, 클레이오가 어렴풋이 떠올렸던 의심은 이제 확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놈도 역시 이전의 원고를 기억하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미친 원한을 고작 열일곱 살짜리한테 품을 수는 없잖아.’
“그 정보는 어디에서 들었냐.”
“왕실 시녀장 힐레이다에게서.”
세이들 자작가의 차녀인 힐레이다는 지난 원고에도 등장한 인물이었다.
세 왕자 모두의 탄생을 보았고 그중 둘을 키워낸 인물로서, 리오그난 왕가의 비밀과 비극을 모두 아는 여인.
“그 사람 말 믿을 수 있어?”
“내가 알기로, 이제까지 힐레이다는 단 한 번도 거짓을 말해준 적 없어. 대답할 수 없는 일에는 차라리 침묵을 택했지.”
불편부당하게 처신하며 오로지 왕가에만 충성하는 시녀장인 줄만 알았더니, 의 아서에게는 유한 구석을 보이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오늘 습격은 궁성의 외성 바로 밖에서 있었어. 힐레이다가 그걸 보더니 결국 입을 열더라고. 이 상황에선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 같더군.”
이런 일이 있었다면 클레이오 자신에게라도 찾아올 수밖에 없었겠지 싶었다.
‘이렇게 질척하고 힘 빠지는 얘길 자길 믿고 따르는 아랫사람에게 할 순 없을 테니까.’
“내 레벨이 오른 걸 아슬란도 알아챘을 테니, 이제 암살자는 그만 보낼 줄 알았지. 헌데 오히려 야습이 더 잦아졌어. 어디서 그런 암살자들을 구하는 걸까? 적당히 저지하려 해도, 목숨을 버리려는 듯 방어도 없는 공격을 펼치는 놈들이 와. 다들 붉은 눈을 하고 있어서 종종 꿈에서도 보게 돼. 이런 일은 처음이야.”
정식 서임을 받아 기사단에 속하기 전이라 해도, 아서는 타고난 천성이 기사였다.
괜히 이시엘이 이놈과 뜻을 함께하겠는가? 공명함과 정의로움은 그의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상대하기 벅찬 적들과 전력을 다해 싸우는 것이면 모르되, 본인보다 약한 상대를 참살해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같았다.
‘아슬란 그놈은 밥 먹고 지 동생 엿 먹일 궁리만 하나. 아주 기가 막힌 수를 냈네.’
주인공의 멘탈이 흔들리는 건 이 세상의 앞날에 전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클레이오는 침대를 벗어나 아서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목덜미에 닿도록 긴 머리는 다 삐치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잠옷 아랫단도 구깃구깃했지만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허리를 굽히자 어둠 속에서도 아서의 표정이 들여다보였다. 그의 얼굴엔 차가운 후회가 감돌고 있었다.
클레이오는 부러 말소리를 높였다.
“정신 차려. 놈의 의도가 뭐가 중요해? 잘못은 아슬란이 한 거야. 돈 받는다고 열 몇 살 먹은 놈 목숨 노리고 달려드는 암살자들은 뭐 떳떳한 인간들이겠어? 그 작자들보다 약했다면 네가 죽었겠지. 이상한 죄책감 갖지 마.”
“죄책감이라. 그보다는 나의 안이함에 대한 실망에 가까운 것 같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서는 정신 차리고 산 줄 알았는데 아직도 모자란 구석이 있었나 하고.”
“안이함 좋아하시네. 지금보다 더 날 세우고 살다간 명 짧아진다. 네가 택하지도 않은 일인데 그걸 왜 후회해?”
클레이오의 명쾌한 확언이 무언가를 건드린 것일까. 아서의 흐려져 있던 표정이 조금 맑아졌다.
기다리지 않고 클레이오는 서클을 최소 크기로 펼쳤다. 그것만으로도 방 안이 등을 켠 것처럼 밝아졌다.
“가만있어 봐.”
가까이 다가서니 더욱 확연해졌다. 피 냄새는 왼쪽 팔의 상완에서 가장 짙었다.
혹여 빠져나갈지도 몰라 클레이오는 아서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러자 왼쪽 어깨를 더 강하게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팔 쪽이 맞군.’
클레이오는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제베디의 진언을 약간만 고쳐 읊조렸다.
‘진언은 한 글자라도 다르면 먹힌댔지? 잘 되기만 하면 그만이지.’
“[생명의 누수를 중지시키라.]”
좁은 범위에 응축된 바람에, 불에 녹인 금처럼 휘황해진 에테르가 순식간에 아서의 왼팔을 휘감았다.
클레이오의 에테르를 두른 아서는 마치 불에 휩싸인 신처럼 보였다. 그가 받아 마땅한 권능을 손에 넣은 것처럼.
에테르를 제베디만큼 섬세하게 조율하지 못한 탓에 과한 꼴이 되었지만, 덕분에 효과는 직빵이었다.
「지각」이 알려왔다. 피의 철 비린내에서 생생함이 가셨다. 상처가 사라졌다.
마법에 익숙한 아서도 이번 것은 놀랐는지 저도 모르게 왼팔 위를 쓱 쓰다듬는 게 보였다.
클레이오는 제일 중요한 말을 덧붙였다.
“암살자가 열 명이 죽든 백 명이 죽든 무슨 상관이냐, 네가 살고 봐야지. 약한 자라고 악하지 않은 건 아니잖아.”
‘네놈이 혹시라도 괜한 죄책감 때문에 어설프게 굴었다간 세상이 멸망하게 된다고!’
사람이 오백억짜리 땅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이 절대 안 망하길 바라게 되는 법이다.
클레이오의 본심을 모르는 아서는 마음에 맺힌 게 좀 풀린 듯, 가뿐한 얼굴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알겠어. 고마워.”
아마도, 팔을 치료해준 데 대한 인사만은 아닐 테지만 클레이오는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럼 이제 가서 잠이나 자. 다신 이런 시간엔 찾아오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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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난리를 친 바람에 늦잠을 자도 피곤했다.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좀 더 자려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는 클레이오를 방해했다.
퀭한 눈을 한 클레이오는 캔튼 부인에게 전화선을 뽑아 달라고 부탁했다.
“2층까지 벨소리가 들릴 줄은 몰랐네요. 어제까지는 도련님께서 위중하시니 연락을 자제하던 분들도, 깨어났단 소식을 듣고는 애가 닳아서 조급하게 굽니다.”
“아니 제가 아는 사람이 어딨다고 연락이 옵니까?”
캔튼 부인은 난처한 얼굴로 설명해주었다.
알고 보니 온갖 언론인, 정치인, 귀족, 호사가들이 병문안을 하게 해 달라고 전화통에 불을 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현관 역시 메시지를 가지고 온 사환들로 북적이는 판이었다.
당연히 클레이오로서는 기함을 할 일이었다.
‘어제 하루 동안 일어난 일로 충분했다고! 우리 집이 무슨 만남의 광장이야? 뭘 오려고 해?’
내막을 알게 된 클레이오는 단호하게 명령했다.
“이제 병문안 사절입니다. 누가 방문해도 들이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도련님.”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사흘 뒤 오후, 그녀의 능력으로도 막을 수 없는 손님이 저택의 정문을 열어젖혔기 때문이다.
그녀의 고용주이자 클레이오의 부친인 기디온 아세르 준남작이었다.
***
기디온 아세르는 이례적으로 기별도 없이 도착했다.
저택으로 전화를 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하고, 전보를 보내놨다는데 전보보다 그가 더 빨리 당도해 버렸다.
누굴 탓할까.
오후까지 쿨쿨 자고 있던 클레이오는 난데없는 날벼락에 허둥지둥 옷을 챙겨 입고 응접실로 내려갔다.
타이가 제대로 매졌나만 신경 쓰던 클레이오는 갑작스레 저를 들어 올린 커다란 두 손을 피하지 못했다.
“클레이오! 내 동생! 정말 오랜만이구나!”
너무나 난데없어서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말랐다고는 해도 열일곱 살인 클레이오를 아이처럼 들어 올린 남자는, 키가 큰 청년이었다. 그는 기디온이나 클레이오보다 혈색이 좋고 체격도 건장했다.
“보자, 좀 컸나? 그래도 여전히 가벼워. 내가 무등 태워주며 산과 들을 누비던 때와 꼭 같구나!”
“…그랬습니까?”
클레이오가 차가운 표정을 풀지 않자 청년은 머쓱한 척을 하며 그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신을 동생이라 부르는 걸 보니 이 작자가 기디온의 장남인 블라드 아세르일 것이다.
“음. 안 넘어오는군. 물에 빠지면서 기억을 싹 잃었다기에 한 번 장난을 쳐 봤더니.”
‘댁이 11살 차이 나는 동생과 다정하게 놀아줄 타입으로 보이냐고요.’
“블라드, 실없는 짓은 그만두거라.”
막 전화를 끊은 기디온이 두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오늘도 역시 남성복 모델처럼 완벽하게 차려 입은 기디온 아세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님, 형님.”
“그래. 오랜만이다.”
“가족 간에 그리 딱딱하게들 굽니까. 클레이오 넌 답지 않게 완전히 늙은이 같은 말투를 쓰고. 어색하니까 그만 두고 얼른 앉자.”
블라드는 석연찮게 싹싹한 남자였다.
선명한 스트로베리 블론드에 밝은 회청색 눈동자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았다. 아세르 저택에 걸린 텔마의 초상화와 썩 닮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세 부자가 자리를 잡자 캔튼 부인이 간단한 칵테일을 내어 왔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기를 기다리며 가벼운 아페리티프를 즐길 시간이었다.
“이것도 오랜만이군! 부인의 시나르 칵테일은 최곱니다.”
“감사합니다. 큰 도련님.”
캔튼 부인에게서 크리스탈 피처를 받아든 블라드는 칵테일을 직접 따라 부친에게 먼저 내밀고, 클레이오의 의견도 물어왔다.
“클레이오, 너도 한 잔 할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좋습니다. 넉넉하게 따라주십시오.”
“기억을 잃어서인가? 여러 모로 어른스러워졌구나. 이전엔 술엔 입도 안 대더니.”
“말씀대로 캔튼 부인의 조주 실력이 워낙 뛰어나서요.”
일단 술이 한 잔 들어가자 클레이오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맛있는 술에 살짝 입가가 풀어진 클레이오를 기디온이 불렀다.
“클레이오.”
“네, 아버지.”
“네가 그간 한 일들에 대해선 잘 들었다.”
“네.”
“헛된 소란을 피우는가 싶더니, 결국에는 너와 가문의 이름을 드높였구나.”
술에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아세르 준남작은 묘하게 복잡한 눈으로 클레이오를 주시했다.
등이 근질근질해지는 느낌이었다. 머쓱해진 클레이오는 칵테일만 연신 홀짝거렸다.
약간의 침묵 후 기디온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인정하겠다. 너는 네 말을, 충분 이상으로 잘 지켰다.”
곧바로 본론인데, 앞뒤를 다 잘라먹어 무슨 뜻인지 감이 안 잡혔다.
‘…내가 이 양반한테 무슨 말을 했더라?’
마지막으로 만난 게 이미 세 달 전이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가물가물 했다.
한동안 머릿속을 뒤지던 클레이오는 그제야 방학 전 학교에서의 대화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했지, 참! 그 말을 이렇게 돌려받은 건가? 칭찬 한번 박하게 하시네.’
“아세르 가문에서 기사 위에 준하는 훈장을 수여받게 된 이는 네가 최초이다.”
“그렇군요.”
기디온의 무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말투는 한참 누그러졌다. 훈장을 받은 차남이 꽤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하기야 애초에 차남을 정치를 시키겠다고 의욕이 만만한 자였다.
기사 작위를 받고 수도에서 명성이 높아지면 자신의 꿈이 손쉽게 이뤄지리라 생각하는 걸 테지.
뭐, 언젠가 아서가 왕이 된다면 이 사람의 큰 꿈도 간접적으로는 이루어 질 것이다. 그 과정을 썩 맘에 들어 하진 않을 것 같지만.
‘아무튼 지금은 분위기 괜찮잖아. 이대로 살살 구슬려서 저택을 달라고 해 볼까?’
클레이오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때, 선 채로 술을 비우고 있던 블라드가 대뜸 끼어들어 맥을 끊었다. 클레이오의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쓰다듬는 방식으로.
아주 짜증나는 어린애 취급이었다.
“수도방위장은 한 세기 만에 내려지는 건데다, 네가 최연소 수여자라고 하더라. 나도 네가 기특해!”
‘이 작자는 그동안 연락 한 번 없더니 왜 갑자기 친한 척이야.’
“적당히 해라 블라드. 네 동생의 복장이 흐트러지잖느냐.”
“하하. 아버지, 하도 오랜만이라 저도 모르게 자꾸 친근히 굴게 됩니다.”
“클레이오, 저녁 식사에는 그레이어 자작과 그의 질녀 디오네도 초대했으니, 복장을 가다듬고 오거라.”
“네, 알겠습니다, 아버지.”
응접실을 나서는 클레이오의 머릿속에 불이 반짝 켜졌다.
‘바스코 그레이어가 와?!’
디오네의 삼촌인 바스코 그레이어는 그레이어 상회의 대표이자 천재적인 마도구 복원가였다.
‘맞아, 일전에 디오네와 하던 마도구 수리 이야기도 땅 사느라 바빠서 쏙 들어갔지. 생각해보면 그레이어 상회 창고에 든 게 보통 보물들이 아닌데… 디오네가 가업을 완전히 물려받기 전이니, 일을 벌이려면 바스코도 허락을 해줘야겠지?’
오늘 저녁식사 자리에 그가 온다면 얼굴 도장 찍기 딱 좋은 기회였다.
잠을 깨울 때는 짜증이 났지만, 역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 주는 일은 나쁜 게 없다.
돌아선 클레이오의 입가가 씩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