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64
지금 시간 (1)
클레이오의 목소리는 불안정하게 떨렸다. 아서는 물을 닦는 듯 마는 듯 어설프게 수건을 걸치고만 있는 클레이오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바짝 마른 소년의 긴장된 경련은 물에 젖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니라고 설명할 수도 없었다.
“오, 나랑 이름이 비슷하네. 그래서 술도 좋아하나? 주교의 탑 빼내느라 신나 갖고 이름도 안 물어보고, 히히. 야, 머리 말리고 쫌만 기다려 봐, 지금 떨리는 거 배고파서 그래. 내가 인심 쓴다. 룬데인 동역 앞에서만 파는 체리 타르트가 있거든. 뜨끈한 차랑 먹자!”
아서는 우선 보온병에 든 차를 한 잔 따라 클레이오에게 쥐여 주고는, 한편에 밀어두었던 종이 꾸러미를 풀었다.
씨를 빼내고 살구잼으로 윤을 낸 체리가 얹힌,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타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비지 부인의 타르트는 베헤못도 아주 좋아하는 디저트였다. 아몬드 크림에 그랑 마니에르와 오렌지 필을 넣어 향이 좋았다.
클레이오는 습관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항상 베헤못은 클레이오가 오고 난 뒤, 조금쯤 기다리다 보면 수도방위대의 숲 어딘가에서 어슬렁어슬렁 나타났다. 젖은 몸을 파다닥 털면서.
그러나 어머니 여신의 신수조차도 이전 세계가 끝나고 다시 반복되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마음이야 복잡하든 말든 손에 쥔 양철 잔은 따스하고, 타르트에서 풍기는 향은 허기를 자극했다. 클레이오는 반쯤 무심결에 말했다.
“새비지 부인의 체리 타르트구나. 맛있겠네.”
“어라? 얼마 전에 생긴 가게를 아네? 한 번도 기숙사 외출계에서 이름 본 적 없는데, 언제 또 먹어봤냐.”
“알지. 룬데인 동역의 명물인데.”
“수업은 안 들어도 수도의 풍물은 안다 이거구만.”
클레이오는 심장이 제멋대로 들떠 쿵쿵대는 와중에도 머리 한구석으로는 오래된 습관에 따라 이 새로운 세상의 조건을 맞추어보고 있었다.
반복된 세상에선 늘 많은 전제가 달라지곤 했다. 이번에도 역시 그들은 열일곱 살인데, 룬데인에 동역이 있었다. 아마 티플라움 광산 역시 개발이 완료된 상태이겠지.
“너도. 그렇게 지저분한 꼴로 또 뭘 먹으러 다니기까지 하는구나. 수염은 도대체 뭐고, 교복은 왜 안 입는데.”
“어어. 교복 그거 학교 오기 직전에 맞췄는데 벌써 너무 쪼여서 불편하단 말야. 글구 이거 수염 진짜 사흘 전에 민 건데….”
“어째 교복 한 벌 새로 할 여유가 없냐. 이복형제들이 암살자라도 보내서 모습을 숨기느라 그러는 줄 알았네.”
“파하하하. 뭐래, 이 자식. 상상력도 좋다, 야. 난 외동에 울 아버지도 독잔데 암살자 보내려면 좀 촌수가 있어야겠다. 글구 내 교복은 말야, 이것두 결국 세금인데 키 다 자라고 새로 맞출까 했지. 난 우리 어머니 닮았으니까 더 클 거야. 부럽지, 꼬맹아!”
아직 성장기가 오지 않아 조그마한 클레이오에 비해 키가 훌쩍 큰 아서는 어린애답게 으스대며, 허리춤에 찬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작은 단검에 에테르를 전도해 타르트를 먹기 좋게 조각으로 잘랐다. 클레이오를 떠보는 기색 전혀 없이, 그냥 디저트를 잘 자르려고 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근사한 에테르 낭비였고, 타르트 쉘에서 부스러기 하나 안 떨어질 정도로 멋진 솜씨였다.
“자. 오늘 내가 점심시간에 부리나케 튀어 나가서 사둔 거거든. 이걸 맛보다니, 넌 진짜 행운이다.”
파삭.
아서가 내민 타르트 조각을 받아든 클레이오는 입 안에서 뒤섞이는 오렌지 필 섞인 아몬드 크림의 풍미와 신선한 커스터드 크림, 새콤한 체리의 맛을 음미했다.
잔향을 남기며 부스러지는 단 것은 광막한 기억을 일깨운다. 한 조각 마들렌이 생생한 회상을 불러일으키듯, 클레이오는 압도적인 세월에 의해 흐려진 추억이 선명해짐을 느낀다.
우리가 다 함께 기차를 타고, 박람회가 열리는 쾨네부르크로 가던 길이었다.
음료 병을 따는 경쾌한 소음, 아서가 부르던 유행가의 구절, 이시엘에게 속살거리는 첼의 한껏 다정한 목소리, 친구들의 웃음소리, 프란이 넘겨다보던 문고본의 닳은 감촉.
과거가 지금 벌어지는 일처럼 되살아난다.
클레이오는 목이 메서 더 이상은 아무것도 삼킬 수가 없다.
울창한 숲으로 해거름 노을의 잔광이 산란한다. 노란 석양이 먹다 만 타르트를 쥔 클레이오의 손끝에 어른거린다.
고즈넉하게 우는 풀벌레들의 합창은 천 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그건 사라져가는 평화에 대한 송별의 노래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는 모든 세기가 안온할 것이기에.
클레이오는 이 이야기가 좋았다.
계속해서 보고 싶어서,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끔찍하도록 진심 어린 바람이다.
“왜 먹다 말아, 레이. 설마 너무 맛있어서 말을 잃은—.”
그러나 제대로 완성된 원고를 쓰기 위해서 이 초고는 반드시 끝이 나야만 한다.
그러니까, 너는 날 불러서는 안 됐어.
하지만 그건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일임을 클레이오도 안다. 자신이 베헤못과 재회했을 때와 같았다.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는데, 마침내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어떻게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아서. 너는 나를 기억하지.”
지난 천 년간 석양은 내내 노란 빛이었고, 클레이오는 그 점에 아무런 의문을 지니지 않았다. 석양은 본래 색유리에 걸러진 듯한 노란빛이 아니라 붉은색이어야 마땅한데도.
학교 시계탑의 정중앙에 박힌 호박의 마석이 세상의 경계를 짓고, 인식을 한계에 가두었다.
시간이 [보존]된 시계탑 아래에서 깨어난 클레이오는 그 이상(異常)을 몰랐다.
그럼에도 세월은 환상은 아니었다.
어디에서 반복되었건 시간은 시간이고, 살아낸 시간이 축적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천 년을 살았다는 건, 너도 천 년을 살았다는 뜻이겠구나.”
나를 홀로 두지 않기 위해.
클레이오는 타르트를 앞에 둔 채로 굳어진 아서에게로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다.
그러나 앙상한 손끝은 아서의 멜빵과 셔츠를, 뜨거운 열을 잃은 육체를 통과하여 허공을 가로지른다.
클레이오는 놀라지 않았다.
아서는 첫 생애 이후 망나니 같은 꼴을 한 적이 없었다. 이야기가 바뀌어 가는 내내.
이 그리운 얼굴, 지저분한 수염과 제멋대로 자란 머리에 뒤덮인 소년의 행색은 그저 클레이오의 기억에 기반한 모습이다.
시작점이 어그러진 것은 설계자의 의도가 아니었을 터이다. 아서는 더는 육신조차도 스스로가 정한 형태로 유지하지 못해서, 보는 이를 따르는 형상으로 돌아간 것이다.
“너는 잘 해냈어. 나는 이 이야기가 정말로 좋았어.”
풀냄새 밴 초여름의 바람이 아서와 클레이오를 함께 휘감으며 불었다.
아서는, 마침내 일깨워진 클레이오의 자각이 되돌릴 수 없는 것임을 알았다. 그는 여전한 소년의 얼굴로 조금 울먹였다.
“…아니. 달라. 치하를 받아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지. 레이. 이야기는 나 홀로 써 내려간 독점적인 문장이 아니야. 이곳은 이제껏 살아온 인간의 영혼이 모두 이전해온 세계야. 산 자든 죽은 자든 물 밖에 있든 강 아래 있든 모두 재난을 떠나와서, 그들이 스스로 존재의 가능성을 개화시킨 세상이고. 나는 그저 사람들이 새로운 구절을 쓸 수 있도록 바탕을 펼쳐놓았을 뿐이지. 함께 살아갈 이야기는 함께 쓰는 거니까. 오로지 한 명의 신으로부터 발신되는 게 아니라.”
“너는 이 자유를 사람들에게 부여하기 위해 고통스런 제약들을 고치고, 또 고쳐서 정연한 문장이 쓰일 수 있는 서판을 마련했구나. 빈 서판에 글을 쓰고 고치던 인간은 미래라는 답을 찾아냈고…. 그래, 너는 인류의 가능성을 가능으로 만들었어. 더 나아질 수 있는 영혼들이 기회를 얻도록 해서.”
“맞아. 그 누구이든 다시 태어나서 다르게 살 수 있어. 이곳에서, 이 멸망을 극복한 완전한 세계에서.”
“응, 나도 믿어. 인간은 신이 떠나간 세계를 지속시킬 수 있다는 걸. 우리가 보았던 이상적인 훗날을 진실로 이룩할 수 있음을.”
23개 나라에서 모인 마법사들이 터트린 폭죽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라, 협동하며 상조하는 인간이 이뤄낸 성취였으니까.
천 년은 불필요한 소모가 아니었다.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지속이라는 결말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재난을 극복하고, 파국을 내포한 근대가 아닌 대안의 서사를 이어내기 위해.
이것은 저자성의 경연이자 대항의 서사. 아서가 만들어낸 너무나도 다정한 세계. 인간에게 기회를 주는 역사. 클리오의 전범을 극복하여 무궁하게 이어질 세상. 그 속에서 클레이오는 냉소의 태도를 버렸다. 그 역시 변화한 것이다.
하지만 변치 않는 것 역시 있다.
이 이야기는 정전으로 인정되지 못한 초고라는, 절대적인 조건이다.
“그렇다 한들 네가 세상을 쓰는 서판의 역할을 하며 고통받아야 한다면, 그게 어떻게 완전한 세계일 수 있겠어.”
“레이, 나는 괜찮아. 얼마든지—.”
울컥.
안타깝게 벌어진 아서의 입술 새로 검붉은 피가 샜다. 그건 사람의 몸으로 세계를 지탱하는 서판의 역할을 해낸 대가임을, 클레이오는 직관적으로 알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젖은 수건으로 아서의 입가를 닦아주려 하지만 그들의 발밑이 뒤흔들려 그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없었다.
구원 없이 멈추었던 시간이 풀려나 광폭하게 날뛰었다. 덮어두었던 배경막이 찢기고, 그들의 발아래가 모두 찬란한 태양의 황금빛으로 빛났다. 그 에테르는 알아보지 못할 수 없었다. 아서의 것이다.
너무도 광대하여 낮은 곳에서는 전모를 파악하기조차 어려운 에테르의 도형은 아서가 그려낸 [보존]의 마법식이었다.
클레이오는 아서가 외웠던 몇 없는 마법식을 기억했다. 저 애는 제가 배운 마법을 훌륭하게 썼다. 천 년간 지속된 마법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 아서의 결연한 의지가 자아낸, 고독하고도 희생적인 기적.
그러나 세상의 시간을 [보존]하던 마석 호박은 결국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스러지기 시작했고, 그 여파로 ‘전경화’ 역시 미미하게 뒤흔들렸다.
아서의 손등으로부터 황금빛과 먹빛이 섞인 성흔의 기운이 비산하여, 세상의 진동을 가라앉히려 든다. 힘겨운 시도이다.
아서는 한시적으로 불멸하며, 인간 중 가장 강한 힘을 얻은 존재이나, 신은 아니었다.
클레이오는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만나지 못한 친구들의 얼굴을 어렴풋하게 떠올려본다. 첼과 안젤리움 쌍둥이들의 모습을.
“이 세상이 오로지 인간들만의 것이 된 건, 아직 죽지 않은 신들의 영혼을 붙들어 오지 못해서였던 거겠군. 균열의 이변 속에, 그들이 여신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게 되어서.”
간신히 안정된 바닥에 주저앉은 클레이오는 고개를 들어 창공을 응시한다. 호박의 빛과 암흑이 교차하는 하늘의 구석으로부터 홍예의 광휘가 번뜩인다. 하늘을 두드리는 소리. 눈뜨라 부르는 소리.
그들이 함께 살았던 첫 번째 세상, 칼리오페의 아홉 번째 원고는 다시 시작된 게 아니었다. 세상의 시간과 인류 전체의 영혼이 아서의 전경화 성흔 속에 옮겨져 있던 것일 뿐.
그들이 싸우고 울었던 본래의 세상, 므네모시네의 문이 자리한 장소로부터 유리되어 시간을 가두었기에 클레이오에겐 마법도 성흔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 에테르의 원천 또한 마법과 성흔으로 차단하여 이 세상의 에테르는 미약했던 터.
인식할 수 없는 것은 부재하는 것이니, 인식할 수 있다면 존재하게 된다.
클레이오는 손끝을 가벼이 휘저어, 오랜 세월 떨어져 있었기에 더욱 열렬히 호응해오는 에테르를 얼렀다.
인지로부터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던 성흔과 성물의 형상이 클레이오의 얌전한 두 팔 위로 서서히 떠오르려 한다.
공작의 부리와 청금빛의 사각 틀이.
사아아아앗―
시간의 요동을 막아낸 여파로 쓰러져있는 아서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경감]과 [치유]의 식이 바닥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아무런 악의적 의도 없는 순수한 치유의 빛이었다.
메이지 마스터의 백금빛 에테르를 반사하는 아서의 새파란 두 눈에 어떤 격렬함이 서린다.
천 년조차도 신에게는 찰나였던 것일까? 역사의 서기이며, 반드시 이행되어야만 할 계시를 가지고 온 천사는 결국에 제 천품을 어기지 않으려 드는 걸까?
손등으로 핏물을 닦아낸 아서가 힘겹게 말했다.
“나는 네가 행복할 수 있길 바랐어. 네가 네 삶을 살기를. 기이도, 기적도, 신의 역사를 지상에서 증명할 천사일 필요도 없이. 그저 네가 원하는 대로. 그런데도 레이, 넌 결국 모두가 행복한 세계가 아니라 참혹한 진실을 요구하는구나. 순명을 버리지 않고.”
클레이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인류가 써냈던 초고가 결국엔 실현될 거라고 믿으니까 돌아가려는 거다. 이 위대한 이야기가 헛되어 사라지지 않도록. 아서, 진실이야말로 유일하게 가능한 거야. 나는 이 이야기가 정말로 쓰이기를, 지상에서 이루어져 우리의 정전이 되기를 바라니까.
하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이뤄져야 할 대결을 회피하고선 미래는 오지 않아. 멸망조차 맞이하지 못하고 미진하게 남겨진 여덟 번째 세계가 여전히 이어져 있고, 호박의 보석은 시간을 영원히 가두지 못해.”
클레이오가 하려는 일, 천 년간 유예되었던 결단이 재개되었음을 아서는 안다.
그는 다급하게, 하나도 정리되지 못한 말로 그저 친구를 붙잡으려 한다.
“안 돼. 아냐. 그건 아니야. 레이… 레이. 기다려, 멈춰. 정말로 이건 마지막이고, 충분히 여기에서도 이야기를 완전하게 써나갈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그리고 너는 세계를 지탱하기 위한 토대로 묶이겠지. 영원히.”
“레이….”
“정확히 몇 번째 반복이었는진 모르겠어. 처음은 아니고 나중에 가까운 회차인데. 그때도 결국 균열을 막지 못해 룬데인이 하얀 모래에 파묻히는 걸 나는 여기, 이 시계탑 위에서 바라보았지. 당시 프란이 쓰고 내가 결재해 올린 마지막 보고서는 전신으로 보냈으니 네게도 전달됐을 거라고 생각해.
못해도 스텔라 방벽은 12년 이상 빨리 상용화되어야 했고, 저레벨 감응자 교육도 8년 정도 이르게 보통 교육 과정에 포함됐어야 했지. 그렇게 해야만 대지를 지켜낼 수 있다고. 그다음에 깨어나 보니 테오필라 섭정은 그렇게 했어. 그건 유효한 방법이 맞았지?”
아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시도가 가능하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고작 반 페이지 남은 낱장이 아닌 깨끗한 백지와. 그러니까 아서, 이건 신의 행사 같은 게 아니라 현재가 감당할 의무가 없는 재난에 대한 경감이야. 신에게 결부시켜야만 뒷장으로 보내버릴 수 있는 요소라면, 그렇게 해결하자.”
아서가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세상의 왕이 아니라 그저 친구로서, 성년에 다다른 기사가 아니라 소년의 말투로.
“네 기억을 지울 수 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후회돼. 그 긴 세월도 네 기억을 흐려지게 하는 게 고작이었구나. 아니, 처음부터 네게 언약을 받아둘 걸 그랬어. 내가 왕이 되기를 거부했을 때 어쩌면 그 모든 걸 잊어줬을지도 모르는데.”
“맘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아서, 너는 절대로 그러지 않았지.”
세상의 창생을 흉내 낼 수 있는 아서조차도 천사의 기억을 지우지는 않았다. 아서가 폐지하기 전까지 언약의 기회는 제법 있었다. 클레이오는 왕과 접견하는 직위 높은 관료가 된 적도 여러 번이었으니까. 가능은 했지만, 실제로 행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서는 과거를 읽었고, 그러므로 클레이오가 스스로를 하나의 생명뿐만이 아닌, 역사 세계의 보존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네가 나를 구하고 싶어 하는 만큼, 나 역시 널 구하고 싶었어, 레이.”
“모르겠어? 너는 이미 그렇게 했어.”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왔으나, 결코 처음과 같지 않다.
아서가 지탱했던 그 아득한 세월은 클레이오를 변모시켰다.
지금 클레이오가 하려는 것은 무조건적인 희생이 아니라 목적이 있는 구원이고, 순응적인 체념이 아니라 주도적인 희망의 요청이다.
사람은 사람을 설득할 수 있다. 너는 나를 바꾸었다.
숙고가 허락되었던 긴 세월과 수없는 시도의 기회는 천 년 전 클레이오에겐 없던 지혜를 주었다.
메이지 마스터는 아홉 서클을 모두 채워 그가 처음에 행했으며, 되돌아와 이야기를 닫게 될 마법을 불러일으켰다. ‘약속’이 완전치 않아도 그 마법식 하나 정도는 떠올릴 수 있었다.
호박이 박힌 마스터 클락을 부수고, 세상을 본래의 자리로 휩쓸어갈 [바람]이었다.
“[거센 바람이 5월의 여린 꽃봉오리를 뒤흔들고
허락된 여름의 날은 너무 짧으니]1)”
1) 「Sonnets 18」, William Shakespe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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