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85
기말고사 (5)
「지각」을 켜 시험장과 채점석을 살피던 클레이오는 침음을 흘렸다.
‘피어스랑 아서를 싸움 붙이다니 이거 곤란한데. 밑천 다 털리는 거 아니냐고.’
물론 아서는 어느 정도 힘을 숨기길 그만두었고, 그의 적뿐만이 아니라 그의 지지자가 될 수도 있는 이들이 참관석에 자리한 지금, 어느 정도의 능력을 보여주는 건 좋았다.
그러나 아슬란의 의도를 알 수 없는데 피어스와 맞붙게 되는 일은 위험이 컸다.
‘설마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데서 애를 잡으려는 건 아니겠지?’
가능성은 열려 있다.
출신이 한미한 막내왕자에게 부상을 입혔다 해서 ‘장미의 난’의 일등 공신인 수도방위대 기사단장을 책할 이는 없었다.
연습 대련 중 피치 못할 ‘사고’로 아서가 부상을 입게 된다면? 약해진 그에게 다시 암살자가 보내져 온다면?
클레이오는 긴장으로 입안이 바짝 말랐다.
‘지난 원고에서 피어스는 아서에게 지게 되지만… 그건 아서도 8레벨에 오른 뒤의 일이었잖아. 3레벨의 격차는 제아무리 천재라도 뛰어넘을 수 없어. 미치겠네.’
[발열] 마법식이 꺼졌다.피어스와 아서의 대결에 집중하기 위해 서클을 거둔 클레이오는 일어서 창가에 바짝 붙어 섰다. 창틀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 손등이 희게 질렸다.
‘일이 잘못될 것 같으면 곧바로 편집자 권한을 쓰는 거야.’
기말고사 치다가 세계멸망을 맞이할 순 없지 않은가.
이변을 눈치챈 디오네가 클레이오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뼈와 힘줄이 두드러진 클레이오의 손등을 가볍게 쓸어 경직을 풀어주려 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피어스 경과 아서가 대련을 하려는 모양입니다. 아슬란 왕자의 계획 같습니다.”
“이런, 큰일이잖아요. 그자가 아서 님께 곱게 가르침만 줄 턱이 없을 것 같은데.”
“일단 지켜보다가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개입하려고 합니다.”
“그 수밖엔 없겠네요. 말리기엔 이미 늦어버렸군요.”
디오네는 오페라글라스를 바짝 당겨 들며 얕은 한숨을 흘렸다.
어느새 피어스 클라겐이 시험장 가운데로 들어서고 있었다.
시험이 모두 끝나 물러나 있던 아서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시험장으로 되돌아왔다.
그의 검대에 차인 게 연습용 검이 아니라 베그의 검이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디오네 역시 아서의 검을 알아봤다.
“어라, 어느새 왕자님이 검을 바꿔 찼네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살피니 기숙사 방향에 선 이시엘이 숨을 들썩이는 게 보였다.
그녀 역시 연습용 검 대신, 그립이 붉은 멜라미드의 검으로 바꿔 차고 있었다. 곁의 첼이 남은 연습용 검을 거둬갔다.
“일이 돌아가는 걸 보고 이시엘이 손을 써준 것 같습니다.”
“키시온 영애가 정말로 영명하군요. 연습용 검으로 소드 마스터와 맞섰다간 몇 합 견디지도 못하고 무기가 부러져 버릴 테니.”
“그렇지요….”
보통은 대련 중 검이 부러지면 승부가 났다고 여겨 물러나게 되지만, 과연 피어스가 그런 규칙을 지켜줄지 의문이었다.
검을 걸머쥐고 시험장 가운데로 들어서는 기사단장은 초장부터 기세를 거세게 끌어올렸다.
고오오오―
막대한 에테르가 피어스의 주변에 어리기 시작했다. 그는 알비온 왕국에 4명밖에 없는 8레벨 소드 마스터 중 한 명이었다.
고작 어린 학생을 상대로 기사단장이란 자가 과한 힘을 과시하고 있으니, 참관객 사이에서 얕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물론 웅성거림에 그칠 뿐, 결코 비난이나 개입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수도방위대 기사단장과 정통성 있는 2왕자의 연합에, 누구도 드러내놓고 반감을 표시할 순 없었으므로.
“저 정도 능력과 지위가 있으면 사람이 체면과 명예를 추구할 법도 한데, 피어스 경은 한결같게도 현세의 영달만을 쫓는군요.”
“꼭 실력과 인성이 비례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건 사실이지만 어쩜 저렇게까지 후안무치한지, 놀랍기까지 하다고요. 미혼이라 권세를 물려줄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쯧.”
“그런 성격이니 자신이 [언약]한 왕을 베고, 전 기사단장을 찌를 수도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번 대엔 아슬란 왕자 편으로 완전히 돌아선 모양이네요. 꽤 승산이 있다 여기는가 보죠.”
피어스의 눈에 아서야 당연히 선택지조차 아닐 테고, 세자 책봉 과정이 불투명한 멜키오르 역시 권위를 중요시하는 그의 기준에선 정통성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칼빈 조교는 이 추운 날씨에도 땀에 젖은 이마를 훔치며 마도구를 들었다.
“로드 피어스, 수도방위대 기사단장님께서 기말고사 결승 우승자 아서 리오그난에게 시범 대련을 해 주실 예정입니다.”
아서와 마주한 피어스의 머리 위로 금빛 문자열이 쭉 떠올랐다. ‘약속’의 메시지를 읽던 클레이오는 깜짝 놀랐다.
[8레벨 검사칭호: □□□□ □□□ 기사
*언약의 금제로 인해 칭호가 망각되었습니다.]
처음 보는 메시지였다.
‘서사개입도가 부족해서 안 보이는 것도, 오류로 깨지는 것도 아니고, 아예 망각된 거라고?’
이것은 분명 [언약]의 문제였다.
‘피어스가 언약을 어기게 되어 망각한 건 자신의 칭호였구나.’
레벨과 마찬가지로 상급 기사나 마법사의 칭호는 소유자 본인에게만 게시된다고 들었다.
다만 칭호는 완전한 비밀도 아닌지라, 레벨 높은 마법사나 기사는 대량의 에테르를 움직이는 상대의 칭호를 알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클레이오가 정독한 수도방위대 기사단 인명록에도 피어스의 칭호는 실려 있지 않았다.
‘행적도 저렇고, 그냥 칭호가 변변찮아서 공표 안 한 건 줄만 알았는데….’
이 다급한 와중에도, 역시 [언약] 같은 건 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클레이오였다.
그때 「지각」이 시험장 위에서 오가는 대화를 실어다 주었다.
“그러면, 귀한 가르침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억지로 끌려왔어도 대련 상대에 대한 예를 차린 아서 앞에서 피어스는 피식 비웃음만 흘렸다.
“전하께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어조는 무례해도 존대의 모양새는 갖춰두어서 더 모욕적이었다.
선생으로서 아서를 대한다면 수도방위대 학교 규정에 따라 경칭을 생략해야 하지만, 피어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지금 참관석 앞줄에 꼿꼿한 자세로 자리한 2왕자의 우군임을 공표한 것이다.
아서는 모욕과 고난에 익숙했다. 그런 일은 그에게 아무런 동요도 일으키지 못했다.
소년의 고요한 시선은 피어스를 지나쳐 아슬란에게 향했다.
그 직시는 2왕자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파사삭
무의식적으로 에테르 [강화]를 일으킨 아슬란의 손아래에서 의자 팔걸이가 부서져 나갔다.
그는 6년 전 그날이 반복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왕의 숲.
학생 검술대회의 시험장.
처음으로 세상에 나선 세 번째 왕자.
저도 모르게 레오니드 1세의 이름을 읊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
가장 정통성 있는 왕자로서 그 자리에 참석했던 아슬란 대신 주목과 경탄을 가져갔던, 피와 고통을 모르고 이른 성취를 이룬 소년.
그 아이는 선명한 청록색 눈동자로 아슬란을 직시했다.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아슬란 리오그난의 인생에는 두 번의 박탈이 있었다.
첫 번째는 멜키오르에 의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아서에 의한 것이었다.
아슬란에게 형제들은 우애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의 운명에 내려진 형벌일 뿐.
리오그난의 성을 단 천것들은 그가 마땅히 가져야 했을 영광을 무단으로 탈취해가는 도적들이었으며, 사람의 형상을 입은 장애물이나 다름없었다.
파아아앗―
아슬란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챈 피어스는 기합성도 없이 어마어마한 위력의 검기를 내질렀다.
8레벨인 그에게 [진격의 원] 따윈 숨 쉬는 것처럼 운용하기 쉬운 기술이었다.
삼 연속으로 쏘아져 나온 회갈색 검기에 아서는 화급히 몸을 피하는 대응밖에 할 수 없었다.
콰쾅!
파스스스!
쿠와아앙!
귀를 먹먹하게 하는 폭발음 속에서 연병장 바닥이 푹푹 패였다.
8레벨의 소드 마스터라면 검기가 이르는 최대 범위가 1km에 달한다.
치졸하다 한들 피어스는 자신의 검기에 고유의 색을 지닌 8레벨의 기사. 엄밀하게 범위를 조정하여 내쏜 공격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으아아악!”
“꺄아아!”
조교들은 다급하게 참관석 앞으로 [방어] 마법식을 펼치고, 교직원들은 남아 있던 구경꾼들을 대피시켰다.
저도 모르게 창밖으로 몸을 내민 클레이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쪽 세계에 와서도 [진격의 원]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벼이 움직이는 피어스의 손에 들린 롱소드는 무게조차 없어 보였다.
폼멜에 검은 마석 오닉스가 박히고 칼끝으로 가면서 좁아지는 투 핸디드 소드 ‘림니의 검’은 필리프 왕의 하사품으로, 그 위용만큼 소드 마스터의 검기도 튼튼하게 버텨냈다.
흙먼지가 가라앉기도 전에 피어스는 보이지도 않는 아서를 향하여 [진격의 원] 삼 연참을 다시 쏘아냈다.
파아아앗!
쿠콰쾅!
늘 달리던 연병장 위로 강철처럼 살기 선명한 검기가, 검을 벗어나 번개처럼 내리꽂히는 장면은 초현실적이었다.
‘저게 뭐야,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해?!’
놀라고 있을 틈은 없었다.
클레이오는 「지각」을 예리하게 가다듬어 아서를 추적했다.
피어스의 공격이 일으킨 혼란 속에서도 아서는 반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결코 꺾이지 않는 주인공이었다.
‘아직 아무 일 없어. 아서는 무사해.’
아서가 포함되어 있는 구절을 편집하면 원고의 열화가 심화되기에, 함부로 개입할 수가 없었다.
올곧은 왕자를 당장 저 대결에서 끌어내릴 순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올곧게 버티다 부러진다면 자신은 한 번이고 두 번이고 그를 되살릴 것이다.
‘학교 오는 피어스의 마차 바퀴라도 빼내서 저 대결 자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바꿀 테다! 세상이 망하는 것보다야 뒤틀리는 편이 낫지, 젠장!’
잿빛으로 흐려진 하늘로부터 어느새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클레이오가 만들어냈던 눈과 다르게 차갑고도 매정한 진눈깨비였다.
피어스는 콧수염 아래 입가를 비열하게 끌어올렸다.
“포기하지 않으신다니, 훌륭한 자세군요.”
“위명이 자자한 피어스 경의 실력을 실견하게 되다니 그대 말대로, 참된 영광이지 않나.”
“아신다니 다행입니다.”
피어스가 선생이 아니기에, 아서 역시도 그를 선생으로 대접하지 않는 대답이었다.
흙먼지로 더러워진 아서는 베그의 검을 꽉 쥔 채로 강경하게 에테르를 끌어올렸다.
비록 8레벨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아서 역시도 검사였다. 그의 주변으로 금빛 에테르가 환하게 물결쳤다.
소년의 얼굴은 태연자약했다.
오히려 지켜보던 클레이오만 간이 다 졸아들었다.
‘저, 저 호승심. 아오….’
타타탓!
에테르 [강화]로 엄청난 힘이 실린 다리가 지면을 디뎠다. 바닥이 파이며 눈발을 밀어냈다.
오랜 훈련으로 다져진 몸은 불필요한 구석이 없이 날렵해, 에테르의 부하를 이겨냈다.
두 사람이 연병장 가운데에서 엇갈린 직후, 검이 얽히지 않도록 교묘하게 피해낸 아서는 무기를 돌려 쥐고 뒤편으로 최대의 검기를 뻗어냈다.
솨아아앗!
서걱!
피어스는 같은 검사들과의 싸움에 통달한 자였다.
아서의 검기는 그가 익히 아는 5레벨 검사의 수준을 월등히 상회하는 탓에, 물러나는 간격 계산이 미세하게 빗나갔다.
수도방위대 기사단장 제복의 소매 깃이 잘려나갔다. 한 박자 늦게 소매 아래로 가느다란 상처가 그어졌다.
고작 한 방울의 피가 맺혔을 따름이지만, 어린 학생에게 틈을 내보였다는 사실을 피어스는 용납할 수 없었다.
“하!”
여유롭기만 하던 피어스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부우우웅.
흉험한 기세로 회갈색빛 암울한 에테르가 피어스를 감싸기 시작했다.
등을 들썩이며 호흡을 고르던 아서는 바닥으로 한 움큼의 피를 뱉어냈다.
고작 소매 깃 하나를 베기 위해 소년은 속이 다 뒤틀리도록 에테르를 끌어올려야 했던 것이다.
그때였다.
피어스의 신형이 두 개로 갈라지며 아서의 앞과 뒤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약속’이 번뜩이며 빛났다.
[공용 스킬: ‘이형화(二形化)’―본신과 동일한 능력을 가진 분신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스으으읏―
소리조차 한발 늦게 피어스의 검을 따랐다. 완전히 다른 형태로 앞과 뒤에서 동시에 공격이 시작되었다.
채캉!
채채챙!
아서는 몸을 낮추고서 검을 크게 휘둘러 앞뒤의 공격을 한 번씩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분신은 두 개지만, 검은 여섯 개로 보이는 공격이 아서에게로 쇄도했다.
에테르로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등과 가슴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마치 칼날의 감옥에 갇힌 것처럼.
클레이오가 편집자권한을 발동시키려는 순간, 다시금 ‘약속’의 글자들이 눈앞에 산란했다.
[공용 스킬:‘해굽성의 참斬’―가장 어두운 고립 속에서도 빛을 향하는 검로를 발견합니다.]
키이이이이잇―
환영과 진검, 두 검이 엮이며 영혼을 얼릴 듯 쨍한 울음소리를 냈다.
피어스 클라겐이 구성한 치밀한 공격 가운데서도 소년은 한 발을 더 내디뎠다.
베그의 검이 눈부신 황금빛으로 빛나며, 심판처럼 밝아졌다.
연병장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의 시야가 하얗게 바랜 순간, 아서의 공용 스킬이 발동되었다.
피투성이로 찢기고 상처 입은 채 아서가 내지를 수 있었던 건 단 일격이었다.
스으으으읏!
소드 마스터의 분신 하나가 아서의 검 아래에서 소멸했다.
“어떻게…!”
해굽성의 참.
진정 두려움을 모르는 기사에게만 주어진다는 공용 스킬로, 이 시대에 그것을 쓸 수 있는 이는 죽어가는 트리스테인 공작이 유일했다.
피어스는 자제심을 잃고 세 개의 분신을 재차 만들어냈다.
자신의 검을 짚고 서 울컥울컥 피를 토해내던 소년은, 회색 에테르에 휘감긴 네 개의 검이 자신의 심장을 찔러들 때까지 눈조차 감지 않았다.
송별
클레이오가 [편집자 권한]을 발동하려던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굉음 가운데 선홍빛 에테르가 소년의 주변으로 회오리쳤다.
차가운 눈보라 속에서 로사의 흰머리가 사납게 흩날렸다.
한 명의 로사가 아서를 감싸고, 나머지 한 명의 로사는 피어스의 세 분신을 무찔렀다.
오금을 베어내고, 갈비뼈 사이로 칼날을 밀어 넣었으며, 목줄기를 찔렀다.
세 명의 피어스는 금세 회색 에테르로 흩어져 사라졌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는 신속이었다.
소드마스터와의 싸움에 끼어든다면 생명이 위험할 텐데도 아랑곳 않고, 주군을 지키기 위해 뛰어들려던 이시엘을 첼이 붙잡았다.
겨울을 압도하는 선홍색 에테르가 일렁이는 가운데 로사가 일갈했다.
“피어스, 너는 도대체 어디까지 저열해지려하는 거냐!”
로사가 피어스에게 평어를 쓴 것은 27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급한 상황에 원래의 어투가 튀어나왔다.
그녀에 의해 타의로 검끝을 내린 피어스는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은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 무슨 말을… 으윽.”
피어스는 검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화급히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전극에 감전된 듯한 두통이 그의 뇌리를 쑤셨다.
“그 옛날의 너는 고작 어린아이를 박해할 만큼 비열한 자가 아니었잖느냐. 어째서 이렇게…!”
피어스는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바로 이러한 순간이, 그녀가 무고하다 여기는 젊은이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에게 검을 들이댄 사건이 과거에도 있었던 것만 같았다.
끝에 남는 감정은 분노였다.
그는 로사 페히테, 저 늙고도 영락한 기사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나 로사는 피어스 자신과 그 어떤 사적인 친분도 없는 사이였다. 그녀는 그저 시류를 잘못 읽어 자리를 잃은 전대 기사단장일 뿐이었으므로.
피어스는 감정의 혼란을 무시했다. 전후가 뒤틀린 기억이 머릿속에서 불씨처럼 달궈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평정을 가장했다.
“로사 교수, 무례한 소리는 책하지 않겠소. 나 역시도 손속이 다소 거칠었으니 학생을 위하는 마음이었다고 해 두지.”
“…….”
“하지만 피륙의 상처 정도로 호들갑을 떨어서야 어찌 왕국의 기사가 될 수 있을지. 보호가 과하시구려.”
화아악―
에테르를 일으켜 아서의 피를 검에서 떨어낸 피어스는 검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소년의 상처는 피어스의 말처럼 얕지 않았다. 입술을 굳게 다문 로사는 하나만 남은 눈으로 피어스를 응시했다.
호흡 한 점 흔들리지 않았지만 로사가 분노를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의 팔에 감싸여 있는 아서는 알 수 있었다.
“교수님. 잠시만, 부탁드립니다.”
만신창이가 된 아서가 로사의 팔을 벗어나 끝끝내 자신의 두 발로 버티고 섰다.
두 소드마스터 사이에 선 소년은 찢긴 눈가를 문질러 닦고는 말했다.
“감사를 표하지, 피어스 경. 좋은 가르침이었어.”
그리고는 웃음에 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견 이상적인 마무리였다.
주제를 모르던 3왕자가 기사단장에게 한 수 가르침을 받은 모양새로 대련이 끝났다.
예견된 대로 소드 마스터인 피어스가 3왕자를 압도했지만 이날의 일은 그에게 일말의 기쁨조차 안기지 못했다.
피어스는 흘끗 참관석을 확인했다.
빈틈없던 자리는 드문드문 이가 빠졌고, 아슬란이 차지했던 앞줄 역시 어느새 비어 있었다.
더 이상 이런 시시한 일에 시간을 쓸 필요는 없었다.
피어스가 말했다.
“그럼, 또 뵙도록 하지요, 3왕자 전하. 수학에 힘쓰시기를.”
솨아아.
눈발이 거세졌다.
피어스는 망토를 들고 기다리던 수행원에게로 뒤돌아섰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꼿꼿이 자리를 지키던 아서는 실이 끊긴 인형처럼 풀썩 쓰러졌다.
이시엘이 가장 먼저 아서를 향해 몸을 날렸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제베디가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고, 클레이오 역시 숨이 다 닳도록 뛰어오고 있었다.
눈보라가 끊임없이 몰아치는 날이었다.
***
일주일 후, 2학기 종강과 함께 졸업식이 열렸다.
기말고사 최종시험 날 내리기 시작한 눈이 졸업식까지도 그치지 않았다.
이례적인 폭설로 알비온 중부의 교통이 마비된 탓에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몇몇 학생들은 기숙사에 남았다가, 시내의 펍으로 술을 마시러 나왔다.
학생들 중에는 아서와 첼, 클레이오와 프란도 있었다.
빛의 축제가 코앞인 룬데인은 강의 동쪽 서쪽 할 것 없이 흥청망청한 분위기였다. 취객들이 눈 쌓인 길에서 노래를 부르고 상점들은 늦게까지 환하게 불을 밝혔다.
역시나 왁자지껄한 펍의 구석진 테이블에서, 첼이 척하니 팔짱을 끼곤 건들댔다.
“어이, 앉아서 그냥 갖다주는 술이나 마시라고. 호위하기 힘들게 빨빨거리지 말고.”
일어서려는 아서를, 긴 다리를 뻗어 막아선 모습이 주변의 왈패들과 다를 바 없는 꼴이었다.
“야! 호위는 무슨. 그냥 술 마시려고 따라 나온 거잖아.”
“이시엘이 당부에 당부를 했는데 어떻게 아서 널 혼자 내보내냐.”
룬데인에도 눈이 쌓였을 지경이니, 아니나 다를까 키시온 영지에는 눈사태가 발생했다.
이시엘은 부친을 돕기 위해 급하게 영지로 돌아갔다.
‘정식 후계자’란 소년이 있긴 했지만, 슐리만 키시온은 언제나 이시엘을 자신의 후계자로 취급했다.
이시엘이 어리던 시절부터 영지의 대소사를 의논했고, 재해와 재난이 있을 땐 영지민을 보살피도록 했다.
아서는 건강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학교 기숙사에 며칠 더 머물 예정이었다.
피어스가 입힌 외상은 소드 마스터의 검기에 의한 것이라, 제베디의 치유 마법으로도 단번에 낫질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에테르 고갈까지 겹쳐 속이 다 상했다.
아서는 그 후 사흘간 자리보전을 했다. 그나마도 원래 강골에 튼튼한 놈이라 이 정도로 그쳤다고, 학장은 혀를 찼다.
안젤리움 쌍둥이도 일찌감치 영지로 돌아갔으니, 수도가 근거지인 첼이 이시엘을 대신했다.
물론 아서는 과한 걱정이라며 큰소리를 쳤다.
“이제 암살자가 야식시간마다 문을 두드리는 것도 아닌데!”
“그쪽을 빼고도 널 한번 찔러보고 싶은 놈들은 많을 거라서. 오늘 졸업식에서 라스 아벨만 얼굴 봤잖아. 수석 졸업 증명서를 받고도 너한테 진 채로 졸업하는 게 분한지, 얼굴이 화로 벌겋더라.”
“뭐, 이제 영광스런 수도방위대 기사단의 수습 기사가 되었을 텐데 일개 학생을 찌르는 불명예스런 짓을 하겠어?”
“그 기사단에서 잘나가는 자들이 명예를 알아? 단장이란 개자식이 학생 상대로 이형화 스킬까지 쓰는 덴데.”
“너도 졸업하면 의무복무하게 될 텐데 말 너무 심했다, 야.”
첼은 아서의 말을 씹고서, 흑맥주 파인트 두 개를 들고 아슬아슬하게 다가온 클레이오의 손에서 잔만 낚아챘다.
“어이쿠, 넘친다. 레이 그거 이리 줘.”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러게. 이 시끄러운 데서 무슨 대화를 한단 거냐.”
클레이오를 뒤따라온 프란은 불퉁한 표정으로, 에일이 담긴 파인트 두 개를 테이블에 탕- 내려놓았다.
아서는 냉큼 그중 하나를 집었다.
“고마워, 프란!”
“나는 들기만 했다. 산 건 아세르다.”
“저 녀석 돈도 많은데 술 정돈 사라고 해.”
“아서 네 술값 대려고 내가 연금을 받는 건 아닌데.”
“좋은 게 좋은 거지. 아님 마법성적이 수석인 걸 축하하는 의미라고 해 두자.”
“별걸 다. 어차피 종합석차는 10등이야.”
아서야 검술 말고는 대부분 낙제점만 간신히 넘었으니 석차를 셀 것도 없었지만, 클레이오 역시 1학기 때보다 석차가 후퇴했다.
한층 난도가 높아진 검술 과목도 문제였고, 중간고사를 평균점으로 넘긴 것도 영향을 미쳤다.
물론 더 이상 성적에 돈이 걸려있지 않은 클레이오로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의무 복무 면제는 4학년 때 실습과목까지 모두 마친 후의 석차를 기준으로 하기에, 지금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오히려 지금 당장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이라면 무기한 휴학에 들어간 프란의 안위였다.
투닥대던 첼과 아서는 아서가 화장실을 간다고 나서자 첼이 끝끝내 따라붙어 자리를 비웠다.
‘화장실까지 따라올 거냐고!’
‘못 갈 것도 없지. 우리 망둥이 왕자님이 어디 장소를 가리고 날뛰던가.’
‘야!’
그 틈을 봐 클레이오는 하고 싶던 말을 꺼냈다.
“준비는 다 됐어?”
“그래, 덕분에.”
‘깃발’의 스콜라 지부장 자리를 내려놓은 프란은 더 이상 수도방위대 학교를 다닐 이유가 없었다.
클레이오는 히드라의 독을 만드는 재료인 에스라의 철필 자생지를 비롯하여, 국왕 서고의 1793년 일지에서 본 내용 전부를 필사해 오로지 프란에게만 건네주었다.
‘이 원고 내에서 그걸 절대 악용 안 할 한 명을 꼽자면 이 애니까.’
자료를 취합한 프란은 붉은 에테르와 인체실험의 배후를 파헤치기로 작정하고, 눈이 그치는 대로 페셀른 시를 향해 떠나기로 했다.
동쪽 국경에 접한 페셀른 시는, 죽은 오페라 가수 게하임 징거가 자신이 납치당했다고 말했던 장소였다.
프란은 거기에도 연락이 닿는 조합원들이 있다고 했다.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지체 없이 사서함으로 연락 넣어 줘. 그 일은 내게도 아주 중요하니까.”
“그래, 아세르 너는 돈을 좀 써도 된다.”
“응. 그러니까 자금 걱정 말아. 네 수고는 아끼고, 돈 써서 해결되는 일이면 돈을 써. 절대 위험한 일은 하지 마.”
“날 위하는 소린 건 알겠는데 네가 말하면 왜 이렇게 재수 없게 들리는 거지?”
“음, 네 식으로 말하자면 인민을 착취해 이룩한 자본일까 봐?”
“하, 내참.”
입이 짧을 것 같은 프란은 의외로 익숙하고 시원스럽게 파인트를 쭉 비워냈다.
클레이오 역시 프란을 따라 잔을 모두 비웠다.
도수 높은 흑맥주가 핏줄 속을 돌기 시작하니 훈기가 올랐다. 손발도 덜 차갑고, 혀도 좀 더 잘 돌아갔다.
“프란, 네 눈에 나는 자본가의 아들이고, 허상에 불과한 신수 왕권에 매달려 있는 보수주의자로 보이겠지만 말이야, 나라고 네 의견에 모두 반대하는 건 아냐.”
빈 잔을 쥔 프란은 눈을 가늘게 떴다.
클레이오의 입에서 나오리라곤 상상도 못 한 말이란 표정이었다.
‘이 애는 표정이 알기 쉬워서 좋네.’
“언젠가 공화주의가 세계의 주된 정체(政體)인 시대가 올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 알비온에서는 뿌리를 내리기 어려울 거야. 우리에겐 압살롬 1세와 양해왕 토마스가 있었고, 이제는 귀족원과 평민원이 있지.”
아무리 자그마해도 숨구멍을 터놓은 냄비는 폭발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 점은 프란이 클레이오보다 잘 알 것이다.
“삼원제가 결코 완전한 해결책이 아님은 나도 알아. 하지만 이 땅은 카롤링거 공화국도, 크라테르 제후국도 될 수 없어. 우리의 혁명은 붉지 않지만, 나는 그게 나쁘게 여겨지지 않는걸. 그들의 붉은 깃발은 피로 물들인 거야. 반드시 그 방향만이 진보일까? 느린 걸음은 걸음이 아닌가?”
“…너는 로베르와 같은 말을 하는군.”
카롤링거의 독재자 빅투아르 모로의 대숙청을 겪은 로베르라면, 당연히 급진주의로부터 거리를 두었을 것이다.
“사실 이 나라에서 카롤링거와 같은 유혈 혁명 가능성은 몹시 낮다고 봐. 그리고 난 그 점이 다행이라고 생각해. 당연한 듯 목숨을 요구하는 역사를 원치 않으니까.”
‘암만 봐도, 근대엔 혁명이 안 일어났던 나라를 모델로 저자 선생이 알비온 왕국을 만들었잖아. 앞으로도 프란, 네 길은 텄다는 거지… 노조 조직이나 열심히 해 줘.’
프란에게는 할 수 없는 소리였지만 공화주의, 그거 한다고 끝이 딱히 좋을 것도 없다는 게 클레이오의 본심이었다.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도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정당이었다고!’
학부 2학년 때 수강해, 「기억」을 통해 돌이켜봐도 가물가물한 유럽 현대사 과목 부교재 내용을 떠올리며 클레이오는 흐린 눈을 했다.
‘게다가 말이지, 세계의 진보 좋긴 한데 말이야… 가능한 한 내가 여기에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을 이해해 주라.’
이래서 사람이 땅을 사면 보수화된다고 하는 거다.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프란이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너도 생각이란 걸 하고 사는 놈이었군.”
“그걸 이제라도 알아주니 감격할 판이네.”
“네가 그저 순응주의자의 한 명이었다면 난 네 신세를 지지 않았을 거다.”
“알아, 그게 너지. 하지만 한 번 정돈 내가 택한 놈을 믿어 줘도 좋고.”
“…지켜보고 생각하지.”
“그럼 한 잔 더 할까?”
“나도 다음 잔은 흑맥주로 하겠다.”
“좋지.”
어느새 테이블로 되돌아온 아서가 촐싹대며 손을 들어올렸다.
“앗! 뭐야, 나도 다음 잔! 흑맥주!”
아서는 그 새 무슨 짓을 했는지 머리카락은 새집처럼 뒤집히고 옷은 눈과 진흙에 젖어 얼룩덜룩했다.
“넌 화장실을 만들어서 일을 보고 왔냐? 뭐 한다고 이렇게 늦었어. 꼴은 그게 뭐고.”
아서의 뒤를 따라 들어온 첼도 비슷하게 꼬질꼬질한 꼴을 하고서 불평을 해댔다.
“정의로운 왕자님께선 몸도 성치 않은 주제에, 취객들에게 곤란을 당한 점원 아가씨를 못 보아 넘기고 또 구해준답시고….”
“안 봐도 알겠군.”
“결국 일은 내가 하고 감사인사는 아서가 받았지 뭐야?”
“야! 그럼 그렇게 쩔쩔매는 사람을 놔두냐? 너도 기사면 그러면 안 된다.”
“놔두란 게 아니고, 내가 손을 볼 때까지 좀 가만히 있으란 거다. 피를 죽도록 토해낸 게 엊그제인 놈이!”
첼은 아서의 뒤통수를 콱 쥐어박았다. 정말 아픈 모양인지 아서는 얼굴이 뻘게져서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부상자를 이렇게 대하다니….”
“됐어. 술이나 더 마셔. 그래, 아예 마시다 뻗으면 내가 질질 끌고 기숙사에 갖다 처박아 줄게.”
“그건 좋은 생각이다. 그럼 다음 잔은 내가 사올게! 첼은 흑맥주일거고. 다음 잔, 레이랑 프란은 뭘로?”
“나도 같은 걸로.”
아서의 소탈한 태도를 낯설게 바라보던 프란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나도 흑맥주로 부탁하지.”
“그래, 흑맥주 네 잔! 난 한 번에 다 들고 올 수 있지! 보여 줄게!”
적성에도 안 맞는 아서의 호위를 하느라 진을 뺀 첼은 그를 따라 걸음을 돌이키며 허탈하게 반문했다.
“술집 점원으로 일할 것도 아닌데 그런 기술 뽐내서 뭘 하려고.”
“왜 혹시 모르잖아. 재주는 어딘가 다 소용이 있다고!”
프란의 시선은 바를 향하며 사람들 사이를 헤쳐 가는 아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클레이오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 얼굴을 본 프란이 안경 너머의 눈썹을 찌푸리며 픽 고개를 돌렸다.
‘네 말대로 해줄 것 같냐?’는 뜻 같았지만, 결국엔 이 애도 아서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그때였다.
클리오의 약속이 흐린 빛을 발했다.
[―사용자의 서사 개입도가 상승합니다.누적 비율: 30%
[귀속 아이템: 클리오의 약속] [―서사 개입도의 상승으로 귀속 아이템 기능이 30% 개방됩니다.*귀속 아이템의 가동률은 서사개입도와 비례합니다.]